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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3

67. 외등

by 자한형 2022.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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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등(外燈)- 전상국

 

한창 대낮의 그 불볕 더위도 산그늘이 마을을 서슴서슴 먹어들면서부터 서서히 열기를 죽이다가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면 제법 썰렁한 느낌까지 몰아왔다. 시골의 여름은 이처럼 낮과 밤의 온도가 완연하게 달랐다.

박종대 경사는 지서 건물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둔 사택에서 저녁을 끝내자 곧장 사무실로 나왔다. 그의 아내가 이웃에서 보내온 것이라며 썬 옥수수를 상위에 올려놓았지만 손도 대지 않은 채 일어섰던 것이다. 위장에 이렇다할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도 항상 배가 그득하고 거북스러워 먹는다는 일에 대해 시덥잖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불려가서도 그네들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대지 못하기 때문에 민망스러움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마을 사람들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항상 멀찍이 떨어져 베돌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화 불량증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상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술 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것은 물론 몇 숟갈 끄적이다가 뒤로 물러앉고 마는 박 경사에 대해 그닥 친더운 마음이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이 워낙 점잖아서 그런 게여.

아니지. 그게 아니고 우리가 호락호락 기어오를까 봐 그런 게여

좀 심한 경우에는,

한마디로 사람이 좀 내숭스럽다니까.

이처럼 현지 주민들은 박 경사와 한 걸음 사이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박 경사는 자신이 마을 사람들 속에 깊숙이 어울러 친절과 신뢰를 보이는 공복으로서의 의무를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그 사실이 괴로웠다. 그것은 한 관리로서의 자책이라기 보다 인간 세계에서 마땅히 가져야 할 유대와 신뢰를 얻어 내지 못한 데 대한 자각으로부터 얻어지는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박 경사는 자신이 주민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 동화되지 못하고 있음이 전적으로 자신의 회의적이고 우유부단한 성격적 결함 때문이라고 못박아 생각하기엔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옛날부터 관리를 대하던 백성들의 만남의 두려움에서 비롯한 뿌리 깊은 적대감을 의식할 때였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동료들을 -순사 나으리-라고 부르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되도록 지서 직원들과 맞닥뜨리는 걸 퍼하려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만나졌다고 해도 자신의 두려움을 위장하기 위해 농촌 사람 특유의 그 퉁퉁 내쏘는 허세를 보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허리를 필요 이상 굽히고 절절 매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박 경사는 늘 외로움을 느꼈다. 뭔가 이유를 끄집어내기 어려운 허망스러움이 가슴으로 허전허전 밀려들곤 했다. 또한 이러한 허망스러움 뒤에는 반드시 한 가닥 부끄럼이 살짝 얼굴을 내밀기 마련이었다.

"저녁 잡수셨어요?"

어둑해진 사무실 한가운데 정 진도 순경이 마치 어둠의 기둥처럼 서 있다가 몸을 움직여 보였다. 하암리 지서 다섯 명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둔 것을 그는 늘 안타까워하면서 지금도 법관이 되는 게 그의 꿈이라 했다. 틈틈이 책올 읽어 동료들에게서 시샘 비슷한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정 순경은 사무실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뭔가를 그러모으고 있었다. 갈색의 날개를 지녔으면서도 날지 못하는 벌레, 다른 곤충처럼 징그럽게 생기지 않았으면서도 몸이 재고 눈치가 빨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바퀴벌레가 그의 발 밑에 대여섯 마리 모아져 있었다. 밝은 데서는 얼씬도 않고 어둠 속에서만 그 활동을 맹렬히 벌이는 그 벌레에 대해서 남다른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정 순경이었다, 정말 소름이 끼쳐요. 어느 날 밤 숙직실에서 팔뚝의 연한 쪽 살 한 점을 뜯어 먹힌 정 순경은 바퀴벌레만 보면 몸서릴 쳤다. 마을 사람들은 이 벌레를 강구라고 불렀다. 어떻든 바퀴벌레의 번식은 그에 적당한 온도만 주어지면 무서운 속도로 불어갔다,

-소장님이 읍에서 가지고 오신 선물입니다.

정 순경이 처음 그렇게 말했다. 박 경사가 부임해 오기 전까진 이런 백해무익한 벌레가 지서 사무실에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은 어쩌다 숙직실 방바닥에 한두 마리 나타나긴 했지만 그닥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박 경사가 부임해 온지 만 1년이 넘는 지금은 날이 어둡기가 무섭게 숙직실이고 사무실 벽이고 심지어는 사무실 책상 속까지 버글거렸다. 지서와 인접한 가정집에도 그처럼 많이 번졌다는 것이다. 읍에서 빈대 약 같은 걸 사다가 써봤지만 말짱 헛일이었다.

-어떤 근본적인 대책이 있어야 하겠구먼.

박 경사가 정 순경의 공격에 대답하는 말은 고작 그런 것이었다. 정말 정 순경 말대로 자신이 읍에서 들어올 때 그 이삿짐 속에 묻어 왔을 확률이 크다는 생각이었다.

정 순경은 다른 직원과는 달리 그 벌레만 보면 다른 일 제쳐놓고 쫓아가 손바닥이나 구둣발로 밟아 죽였다, 한 마리가 한번에 40여 개의 알을 낳아 기하 급수적으로 번식해 가는 데 몇 마리 손바닥으로 쳐죽여 봤자 헛일인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그렇게 바퀴벌레를 잡았다.

"또 소탕전을 벌였군."

지금도 그는 대여섯 마리의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우정 사무실은 물론 현관의 외등까지 켜지 않은 채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 경사는 현관 외등에 불을 켜며 다시 말했다.

"또 잊은 모양이군. 자네의 적은 한 놈이 한번에 사오십 개씩의 알을 깐다는 걸 말이야. 중과부적이지. 결국 자넨 지고 말 걸세."

정 순경이 벽에 걸린 정복 웃도리를 벗겨 입으며,

"소장님, 그렇다면 저는 지금 오륙 삼십, 무려 삼백 마리를 섬멸했군요."

그러면서 현관으로 다가갔다.

"저 저녁 먹고 나오겠습니다."

박 경사와 정 순경은 오늘 저녁 당번이었던 것이었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박 경사는 야간 순번에 자신을 꼭 포함시키도록 했다. 그렇게 하는 게 마음에 편했던 것이다.

", 아무 연락도 없었나? 본서에서 말이야,,,,,,"

현관을 나서는 정 순경을 향해 박 경사가 물었다.

"없었는데요,,,,,, 그런데 아까,"

현관을 나서던 정 순경이 다시 몸을 돌려 사무실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까 김 차석님과 함께 있는데 상암리 유 판석이하고 최 진혁이 왔다 갔습니다."

"그래 와서 뭐라던가?"

"또 그 소리지요 뭐."

"상부에서 아직 아무 연락이 없다고 하면 될 거 아냐."

"그랬어요. 김 차석님이 정 그렇게 의심이 나거든 읍에 나가 알아보면 될 게 아니냐고 막 딱딱거려 줬지요."

그랬더니?"

"그렇지만 어디 그 사람들이 보통내기들인가요. 자기들이 정식으로 신고를 한 게 언젠데 입대까지 왜 아무런 조치도 없느냐고 되려 덤벼들더라니까요."

박 경사는 저녁 어둠이 내리 깔리는 바깥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한숨을 몰래 내 뱉었다.

"김 차석하고 또 한바탕 했겠군."

"괜찮았어요. 사실은 김 차석님이 딴 데 신경을 쓰고 계셨거든요."

"뭔데?"

"여기 보세요. 표 경철 선생이 가석방됐거든요."

정 순경이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을 집어다가 펴 보였다. 815일자 신문이었다. 발행 일자보다 2, 3일 늦게 받아 보게 돼 있는 시골이라 신문은 언제나 구문이기 마련이었다. 그것도 요즘은 산판에 드나드는 차편에 부쳐와 빠른 편인데도 그랬다.

정 순경이 가리켜 보이는 사회면 맨 위에 8,15 경축 수감자 특별 석방자 명단이 있었고 거기 맨 끝 부분에 표 경철이란 이름이 보였다.

표 경철 선생이 이번 8, 15를 기해 석방되리라는 소문은 벌써부터 마을에 떠도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이제 사실로 신문에 난 것뿐이었다. 상암리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이가 그처럼 당돌하게 나오는 것도 표 경철 선생이 석방될 것이라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 분명하다고 박 경사는 생각했다.

박 경사는 정 순경이 나가 버린 빈 사무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현관 외등에 어지럽게 날아들기 시작하는 날벌레들을 멍청히 내다보고 있었다, 외등이 밝힌 저 어둠의 무한한 공간 중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의 빛을 찾아 날아든 보잘 것 없는 날벌레들의 난무. 무엇을 위해서,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기 위해 저런 어지러운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저 외등이 밝히지 못한 저 무한대의 어둠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의 허망스러운 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외등을 찾아 모여든 날벌레들의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는 그런 따분한 난무의 질서가 갑자기 흐트러졌다. 그것은 날개 짓이 요란한 커다란 나방 한 마리가 끼어 들어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난폭한 난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몸통에 비해 날개가 작기 때문에 나비의 그 유연한 비상(飛翔)에 비교될 수 없는, 서글퍼 보이는 나방은 외등에 덤벼들어 죽을 둥 살 둥 몸통을 부딪쳐대며 날았다. 날개에서 떨어지는 미세한 분말이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그러나 한 마리 나방은 자신의 아름다움 같은 건 아랑곳없다는 듯 외등에 맹렬하게 부딪쳐 드는 그 허망한 작업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 한 마리 날벌레는 자신이 찾아낸 이 불빛 앞에 이제까지 어둠 속에서 몸에 묻힌 그 지겨운 고독을 다 떨어버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실상 박 경사는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보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눈에 와 닿았기 때문에 눈에 보인 것 자체가 뇌신경을 자극해서 스스로 불러일으킨 연상 작용에 불과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멍청한 상태에서도 분명 한 가지 느낌만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것으로 잡혀 들었다. 아무래도 집에 연락을 해 소화제를 내다 먹어야 하겠다는 그런 것이었다. 그는 견디기 어려웠다. 가슴 한가운데가 답답해 들면서 숨쉬기가 거북한 증세야말로 그의 소화 불량증에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는 빈 사무실에 앉아 자신의 소화 불량 상태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어떤 생각에 매달리고 있었다. 사실은 이미 그가 그 생각에 빠져든 지가 오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세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고 있었다. 표 경철 선생과 방금 전에 다녀갔다는 유 판석, 최 진혁 그 사람들이었다.

박 경사는 표 경철 선생들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남들이 표 선생 얘기를 꺼내면 그와 수없이 얼굴을 맞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왜갈봉 노송에 목 매달아 죽은 표 선생의 젊은 부인의 환영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이 시골 지서에 부임해 와 부딪친 가장 크고 난처한 사건이 바로 표 선생 부인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저 여자가 표 선생 부인이에요.

박 경사가 부임해 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직원들이 한 여자를 가리켜 보였다. 지서 앞 비석거리에 일제 말에 세운 듯싶은 모로 넘어져 있는 장방형의 커다란 비석 위에 한 여자가 해바라기를 하고 앉아 있었다. 용모도 비교적 단정한 데다가 그 앉아 있는 앉음새가 어찌나 단아해 보였던지 박 경사는 사람들의 얘기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누가 저 여자를 미쳤다고 하겠는가. 너무나 멀쩡한 얼굴이었다. 그네는 비석 위에 단정하게 앉아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있었다. 안 노인네들이 지나가다가 안됐다는 듯 쯧쯧 혀를 차도 별 표정 없이 그 맑은 눈으로 오히려 그 안 노인네들을 동정하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실성한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그런 초점 흐린 눈이 아니었다. 한 떼의 아이들이 몰려와 그 여자한테 흙을 뿌렸다. 그러자 이제까지 그림처럼 단아하게 앉아 있던 그네가 그 비석에서 풀색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향해 담청 색 몸빼를 훌렁 벗어 내렸다. 엉겁결에 박 경사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까운 일이구나 하는 느낌이 가슴으로 세차게 몰아쳤다.

-완전히 미친 건 아니지요. 저렇게 해까닥했다가도 제 정신이 들면 똑 소리가 날 정도로 똑똑한 여자로 돌아간다더군요. 바느질도 하고, 학교에서 내준 밭에 야채도 가꾸고 한대요.

정 순경이 여러 가지로 덧붙여 설명해 주곤 했다. 남편 표 선생이 그 우발적인 살인 사건으로 잡혀가자 재판을 받아 형이 확정되기까지 읍이나 시내 나가 남편 소식을 알려고 법원 주위를 배회한 지어미의 눈물겨운 미담이 펼쳐지곤 했다. 그네는 국민학교 선생의 아내답게 소박하고 정숙한 여자로 마을에 평판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형이 확정되고 그네는 다시 마을에 돌아와 두 살 짜리 딸 하나를 등에 매달고 마을의 삯일을 다닐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살 난 딸을 남한테 맡겨 두고 남편 일로 읍까지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온 즉시 며칠 몸져 눕더니 그처럼 실성기를 보이기 시작하더란 것이다.

-도대체 왜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겁니까?

박 경사가 물었을 때 김 차석이 대답했다.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 여잔 미쳤어요. 미친 여자가 뭔 짓은 못합니까. 이처럼 김 차석이 한마디로 자르자 정 순경이 맞서곤 했다.

-그렇지 않아요. 미친 여자는 절대 목을 매어 죽진 않아요. 그 여자가 목을 맸다면 반드시 정신이 말짱할 때 그랬을 겁니다.

정 순경의 논리에 의하면 목을 매어 죽는 일 같은 무서운 일은 아무나 가볍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이다. 자살이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생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무서운 의지의 표출인데 어떻게 미친 여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느냔 얘기였다. 상부에서 내려왔던 사람들도 어떻게 미친 여자가 그 높은 나무에 올라가 목을 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떻든 그 여자는 죽었다. 미친 상태로 죽었든 말짱한 정신으로 그랬든 그 여자는 왜갈봉 노송에 매달려 혀를 빼물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있을 수도 있었다. 즉 상암리 유 판석이들 말대로 그네 스스로가 목을 맨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가능성 말이다.

그러나 박 경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상부에서 내려왔던 사람들의 판단에서 볼 때나 박 경사 자신의 판간에서 보거나 그네의 죽음은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 분명했던 것이다. 다만 문제는 왜 그네가 그런 죽음을 택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남편 표 선생이 비록 죄를 지어 복역중이라 해도 극악무도한 살인범이나 파렴치범도 아닌 어디까지나 교육적인 면에서 옳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그런 입장이 재판에 충분히 반영되어 2년 언도란 비교적 가벼운 형량에, 잘하면 더 빨리 풀려날 수도 있다는 그런 계제에 일을 저지르다니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일이었다.

아무튼 표 경철 선생 부인의 죽음으로 해서 박 경사는 적지 않은 곤혹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가 막 끝나 그 후유증으로 해서 어질어질한 판인데 떠억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 박 경사는 왜갈봉 중턱 노송에 매달린 그 여자의 주검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끌어내렸다. 비석거리 모로 쓰러진 비석 위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때의 그렇게 곱게 빗어 넘긴 머리에, 역시 그때의 담청 색 몸빼 위에 붉은 스웨터가 잘 어울리게 차려 입은 채 죽어 있었다. 그네는 노송 밑에 흰 고무신을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그네의 스웨터 주머니에서 쌀 두어 말 살 정도의 돈이 나왔다. 아이들이 쓰다 찢어 버린 듯싶은 공책 장에 싸여 있었다. 혹시나 해서 그 공책 장을 살펴보았지만 별것이 아니었다. 산수 공책이었던 양 조잡스런 필체의 수자가 가득 씌어 있었을 뿐이었다. 박 경사는 그 공책 장에 싸였던 돈을 김 차석에게 넘겨주고 나서 무심코 공책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이 일의 빌미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네의 친정에서 온 사람들과 시체 인계 문제를 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상암리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이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소장님, 표 경철이 부인을 죽인 범인이 누굽니까?

그들은 다짜고짜 이런 식으로 나왔다. 상부에는 이미 단순한 자살 사건으로 보고를 올린 뒤였다. 뒷일을 우려해서 우촌면 공의를 데려다가 시체 검안까지 시켜 자살이라는 진단을 받아 놓기를 잘한 일이었다. 박 경사는 그런 여러 가지 확증을 내세워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가 실성을 했는데 어떻게 그처럼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자살을 할 수 있겠느냔 것이었다. 또 그 여자가 자살을 할 만한 이유를 대라고 억지를 쓰기도 했다, 박 경사가 여러 가지 방증을 내세워 타살일 수가 없다는 얘기를 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박 경사는 직원들을 모아놓고 유 판석이들의 추궁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숙의했다.

-내 참, 기가 막혀서 ,,,,,,

김 차석은 유 판석이들이 얼마 전에 끝난 국회의원 선거의 뒤끝이 안 좋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거기다가 이 사건까지 곁다리로 덧붙일 속셈이 분명하다고 했다. 다른 직원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네들의 항의를 묵살해 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 판석이들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표 선생 부인의 친정 사람들까지 충동질해서 합세했다. 시체가 부패한다고 하암리 사람들이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니까 상암리 사람들 수십 명이 몰려 내려와 매장을 못 하게 막아섰다. 두 마을이 송장 하나를 놓고 대판 싸움이 벌어질 기세였다.

결국 유 판석이들이 원하는 대로 재 수사를 하기도 했다. 본서에서 나와 상암리 사람들이 미심쩍어하는 여러 가지를 조사해 보기도 했다. 그네가 목을 매었던 밧줄도 표 선생이 방을 얻어 살던 그 집 외양간에서 풀어낸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나타나는 등 먼저 결론을 냈던 것이 틀림없다는 걸 확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유 판석이를 중심한 상암리 사람들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엉뚱한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소장님, 그날 표 경철이 부인 몸에서 나온 유서 좀 보여주셔야 하겠어유.

그때 그네의 스웨터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쌌던 헌 공책 장을 두고 하는 얘기 같았다. 박 경사는 그때 그 공책 장을 무심코 주머니에 넣었던 생각을 떠올렸고 그때서야 허둥허둥 찾아보았지만 헛일이었다. 돈은 김 차석한테 넘긴 게 분명했고 자신은 그 종이쪽을 지서에 돌아와 다시 한번 살펴보리라던 생각을 깜박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무 데서도 그 공책 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 날 소장님이 주머니에 넣으시는 걸 우리가 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유.

거기 공책 장에는 아이들이 공부 시간에 쓴 산수 문제만 잔뜩 씌어져 있더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들은 좀체 믿으려 하지 않았다. 며칠간이나 그 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본서까지 불려가 힐난을 당했다. 어떻든 며칠 동안 그들과 벌인 승강이로 해서 박 경사는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공연히 두 마을의 숙명적인 싸움에 말러든 자신을 발견하고 씁쓰레 웃을 수밖에 업었다. 그러나 막상 가슴에 남은 자국은 큰 것이었다.

-소장님이 너무 유하게 대해 주니까 그 새끼들이 기어오르는 거예요.

김 차석이 노골적으로 박 경사의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을 나무라쳤다. 시골 사람들한테 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 다니는 꼬락서니가 됐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느냐고 힐난했다.

-이제 두고 보십시오. 그 새끼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질 테니.

하암리 김씨 집안 사람인 김 차석은 하암리 사람들이 다 그렇듯 상암리 사람들에 대한 뿌리 깊은 적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김 차석의 말이 맞았다.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표 선생 부인의 자살 사건이 좀 잔잔해졌는가 싶은 어느 날 유 판석이와 최진혁이가 또 지서에 나타났던 것이다.

-정식으로 신고를 할 게 있어 왔구먼유.

지서에 들어설 때의 그 굳은 얼굴 표정이 대단한 작심을 하고 왔구나 하는 걸 짐작케 했다. 그들 눈에 오기가 런친 그런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야비한 빛이 번쩍거렸다.

-소장님두 수작골 산판에 가 보셨지유?

그들 얘기의 골자는 수작골 산판 사람들이 도벌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냔 거였다. 말하는 품으로 보아 그들은 이미 산판의 내막을 알 만큼은 다 알고 온 게 분명했다. 수작골 임야가 국유림이라는 것, 그 국유림의 얼마만큼은 채벌 허가가 난 것이며 허가 낸 면적에서 채벌해 낼 벌목의 한정량까지 떠르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정량을 넘은 도벌이 얼마에 이르렀다는 통계 수자까지 척척이었다.

-증말 너무하데유. 아주 몽땅 깎아 낸다니까유. 그렇게 훤하게 밀어내다니 도대체 말이나 됩니까유.

박 경사는 그들의 이주걱거리는 신고에 앞서 정 순경한테서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소장님, 수작골 산판 한번 가 보시는 게 좋으실 겝니다. 은장봉 산판도 마찬가지지요.

얘기만 들어도 다 알 만한 일이었다. 직접 두 산판을 돌아보고 났을 때는 차라리 안 보고 넘길 걸 잘못했구나 하는 후회를 했다. 울울한 적송 숲에서 솎아내야 갈 벌목이 솎기는커녕 아예 이발하듯 곁의 유년목까지 곁들여 밀어냈다. 산이 그처럼 홍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다 알 만한 일이었다. 난리가 끝나면서 폐허가 된 도시에 집을 짓자니 건축 자재가 불티나듯 딸리기 마련이고 거기에 걸맞춰 산판 붐이 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절한 수요 공급의 미봉책으로 업자가 신청만 하면 채벌 허가가 나와 깊은 산 깊은 골짜기는 어느-곳이고 산판이 생겨났다. 트럭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이 골짜기마다 닦여 원목을 산더미처럼 실은 트럭들이 곡예하듯 아슬아슬 산비탈을 누볐다. 산판에 드나드는 트럭을 1년간 몰면 도회지에선 눈 감고도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정도로 산판 길은 험난했다. 비라도 좀 내리면 급조된 진흙 구렁길에 차 바퀴가 빠져 실었던 나무들을 다 부린 다음에야 겨우 빠져 나가곤 했다. 그러자면 뒷차들이 덩달아 눌어붙고 하릴없는 운전수들이 산비탈 외진 곳에 위치한 인가를 찾아 노름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어떻든 난리 직후에는 남아도는 군용 트럭이 후생 사업이란 명목으로 산판에 투입되어 그야말로 산골짜기가 때아닌 성시를 이룬 적도 있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산의 나무가 무계획하게 베어져 나가다 보니 그 울창하던 임야가 꼭 헌데 앓은 아이들 머리통처럼 보기에 흥해졌다.

당국에서도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뒤늦은 방책을 세워 보는 모양이었지만 워낙 나쁘게 길들여진 산판 생리에 그 솜씨들이라 당국의 단속이 제대로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채벌 허가가 그럭저럭 수월찮으니까 자연 돈줄 힘줄을 이용하려 들었고 그렇게 요령껏 허가를 맡아 낸 다음에는 힘이 든 만큼의 밑천까지 곁들여 뽑아내려 혈안이 됐던 것이다. 쥐 잡아 먹던 고양이 반찬 없는 맨밥에 성이 찰 턱이 없어 흥청망청하던 산판 생리는 여전하기만 했다. 허가를 내주는 당국이나 허가를 받아 채벌을 하는 목상이나 모두 허가장에 기재된 수자의 몇 배쯤은 해먹어도 무방한 걸로 아예 처음부터 공공연히 묵인하는 게 50년대 말의 산판 생리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백 입방에서 삼천 사이를 벌목할 수 있다는 허가를 내서는 보통 그 몇십 배에 이르는 십만 사이 정도로 베어내야만 그런 저런 매부 좋고 누이 좋다는 식의 타산이었다. 도의적인 인간 양식이나 법 질서에 대한 경외감에 앞서, 이제까지 굶주려 왔으니 이 좋은 세상에 치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지배하는 시대라 모두 눈이 뒤집혀 천방지축 날뛰기 마련이었다. 국회의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선돼야 했고 당선이 된 뒤에는 거기 투자된 밑천을 뽑아내기 위해 이권이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손을 뻗쳤다,

김 광모 의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사업에 자신의 권세를 유감없이 이용했고 우선 상암리 소재 여러 산판들이 모두 그의 입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다고, 산을 둘러보면서 혀를 찼던 박 경사였다. 하긴 그 여세로 하암리에 그 어려운 전기까지 끌어들인 공도 없지 않지만.

-우린 다 알아본 겁니다. 알아본 결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어 이렇게 신고를 하는 거구먼유.

-다 우리 지방 발전을 위해서쥬.

-애국자가 따루 있나유.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이는 이런 식으로 이주걱거렸다. 군대 밥을 먹고 도회지에서 한두 해 굴러먹다 들어온 사람들답게 말투가 만만찮았다. 거기다가 시골 사담 특유의 그 유들유들하고 고집스러운 면도 드러냈다.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일인 줄 잘 알지만서두 우리가 이렇게 신고를 하는 건 말이지유, 새로 오신 소장님이 으턴 분인가 하는 걸 알아봐야 하겠다. 그런 생각에서죠. 알아 봐 가지고 설라무니 우리도 한번 대가리가 터지게 ,,,,,,

그때 김차석이 울컥 내질렀다.

-도대체 당신들 그 산판하고 원 원수를 졌길래 그래, ?

김 차석 입장에서 보면 그들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이는 싸움의 상대였던 것이다. 한 공직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암리 김씨 문중의 한 사람으로서 맞섬의 감정이 앞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김 차석의 실수였다. 유 판석들이 노린 게 바로 그런 것이었다.

-김 차석님, 뭔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유.

-차석님, 그렇게 꼭 감정적으루다 나오셔야 되겠습니까유?

그들은 미간에 심줄을 세우면서 덤벼들었다. 그렇다고 김 차석이 순순히 물러설 위인이 아니었다.

-당신들 도대체 왜 이래? 사사건건 물구 늘어지구. 이봐, 우리 경찰이 그렇게 만만해 뵈? , , 신고를 하려면 정식으로 해, 서류를 갖춰서 말이야.

이번에는 유 판석이들 차례였다. 오히려 그들은 더 유들유들했다.

-차석님, 말씀 한번 참 자알 하셨습네다. 우린 민주 경찰을 믿고 이렇게 찾아왔지 않습니까. 네에, 물론 정식으로 신고는 해얍지요. 우리 상암리 사람들 전부의 이름을 쓰고 도장을 받고 해서 거어창하게 한번 올리겠습니다유. 그렇게 하자면 직접 도경이나 서울로 올라가는 게 빠르겠습죠?

박 경사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더 긴 얘기 하지 맙시다. 두 분이 오늘 말씀하신 내용 정식으로 접수해서 상부에 보고하지요. 물론 산판 관계는 원래 우리가 맡아할 소관이 아닙니다만,,,,,,

이처럼 박 경사가 이쪽 입장을 내세우려니까 대뜸 최 진혁이가 말했다.

-산판과 영림서 사람들이 다 한통속이 돼 돌아가는 판국에 그럼 어디다가 얘길 해야 합니까유? 더구나 소장님께선 잘 아시겠지만 불법으로 베어진 나무가 바로 이 앞길로 버젓이 실려 나가는 것을 상, 하암리 사람들이 죄다 알고 있다 그겁니다. 그런데 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암리 사는 우리들은 그렇게 불법으로 베어져 나가는 걸 그냥 볼 수가 없어 이렇게 신고를 하는데 하암리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방해하려 들다니 원!

김 차석이 멍청히 당할 리가 없었다.

-이봐. 이 상암리 쌍,,,,,,, 신골 했으면 주둥아리 고만 까고 썩 꺼져버려!

두 마을의 싸움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작된 일이라 하루 이틀에 끝날 그런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두 마을의 뿌리 깊은 적의는 아주 근원적이고 숙명적인 양상을 떤 것이었다. 박 경사는 1년 전 이 마을에 부임해 와 가장 먼저 피부에 느껴지도록 선명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두 마을의 전근대적인 앙숙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가깝게는 표 경철 선생의 그 사건이며 그의 아내가 목매달아 죽은 것 등이 모두 그런 두 마을의 싸움 속에서 빚어진 현실이었던 것이다.

하암리와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쪽에 위치한 상암리 마을이 형성된 데 대해서 대체로 두 가지 설이 떠돌고 있었다.

그 하나의 얘기는, 동학 난리 때 남쪽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동학

군이 강원도 이 두메까지 발길을 한 데 기인한다. 수백 명에 달하는 장정들이 하암리까지 들이닥쳤다. 그 많은 수효에 비해 그들의 기세는 듣던 바와는 전혀 달랐다, 물론 마을의 가축이 씨가 질 정도로 잡아 먹히고 김씨 문중의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이 바닥이 나긴 했지만 그들은 이미 뿔 빠찐 소처럼 맥살이 없어 보였다.

-동학군이 당했대유. 여기 온 자들은 모두 갈 데가 없이 쫓겨 들어온 사람들이래여.

마을 사람들이 숭숭거렸다. 아닌게아니라 며칠 못 가 관군이 사면 팔방에서 들이닥쳤다. 동학군들은 관군을 보자 전의를 잃고 뿔뿔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대부분 관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 시체가 여기저기 나무토막처럼 뒹굴어 핏물이 고랑을 이뤄 흘렀다. 남쪽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파란만장한 거사는 이곳에 와 그 끝장을 보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수작골과 수리봉 쪽으로 숨어들었던 동학군의 한 패들이 왜 오랜 날들이 지난 뒤에 서슴서슴 모여들어 상암리에 화전을 일구고 약초를 캐고 참숯을 구워 내며 터잡아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짝을 맞추어 모인 마을이라 하암리 사람들과는 처음부터 운니지차(雲泥之差)로 걸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상암리를 이룬 사람들의 전부가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겠지만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음직한 얘기였다.

또 다른 얘기 자나는,

일제 시대 일본 사람이 공작산 자락에 금광을 뚫자 그 금광 광부로 하나 둘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금광이 폐광되면서 그대로 그 자리에 눌러앉아 이룬 마을이 바로 상암리라 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뒷얘기가 훨씬 그럴 듯하게 들렸다. 어쨌든 한 곳에 발붙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살던 사람들이라 뜨내기 인생들에게 걸맞는 그런 성깔들은 남아 있어 송곳 모로 꽂을 땅뙈기 하나 없는 처지에서도 그 기세들은 사뭇 대단했던 것이다.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둔 하암리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상암리 사람들의 안하무인(眼下無人)한 꼬락서닐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 산이라고 가릴 것 없이 산자락에 마구잡이로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는가 하면 하암리 김씨 문중의 성역이라 할 수 있는 은장봉 선산을 파헤쳐 암장을 하는 등 두 마을은 사시장철 으르렁거렸던 것이다. 어떻든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상암리도 제법 사람이 살 만한 그런 부락으로 모습을 바꾸어 갔다. 그러나 은장봉 상봉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상암리를 슬쩍 비켜 언덕 아래 하암리 남단을 휘감고 도는 은백내 안쪽으로 질펀하게 드러누운 옥답을 가진 하암리에 비하면 상암 부락은 아직 마을이랄 것도 못되었다. 더구나 뜨내기 인생들이 모여 이룩된 상암리와는 대조적으로 수백 년 내려오면서 한 할아버지 한 조상에서 뿌리를 내린 하암리 김씨 문중의 막강한 족벌주의의 그 권위는 막강했던 것이다. 이렇다 할 큰 인물은 내지 못했지만 그런 대로 끊이지 않고 벼슬을 맡아 한양에 사는 문중이 만년에는 반드시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는 걸 자랑처럼 여겨 온 하암리 선조들이었다. 근래 가장 큰 인물이 났다고 하는 김 광모 의원만해도 바로 하암리 김씨 문중으로 이곳을 기반으로 하여 정계에 발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암리 김씨 문중 사람들은 수백 년 대대로 지자 온 자기들의 땅과 산야에 대한 애착 그리고 그 긍지는 실로 대단했다. 그네들은 자기네 가문과 마을의 향풍이 외지 사람들에 의해 침해당하는 걸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물론 하암리에는 하암리 사람들의 논밭을 소작 내어 살거나 장거리에 터잡아 앉아사는 타성바지들이 상당수 섞여 살았다. 그러나 하암리에 사는 타성바지들은 결코 그 김씨 문중의 그 전통 깊은 풍습과 가문의 권위를 눈꼽만큼이라도 부정하거나 어떤 도전적인 행동거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마을의 풍습과 권위에 동화되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는 그런 무모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김씨 문중의 위력을 보호색처럼 두르고 자신들의 살 길을 조심조심 디뎌왔기 때문에 김씨 문중과의 충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언덕 하나 너머의 상암리 사람들은 사뭇 심사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하암리 전통 깊은 부촌에 대한 선망이 크면 클수록 그네들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도전하는 자세를 보이곤 했다. 두 마을은 아주 작은 일을 놓고도 곧잘 크게 싸웠다. 어느 쪽이 낫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그네들은 무모한 싸움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 왔던 것이다.

일제 시대 말기에 두 마을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우촌면 주재소 순사가 하암리에 상주할 정도였다. 그러나 불씨는 정작 그 일본 순사의 하암리 주재였다. 그는 하암리 대가집 사랑채에 우촌면 주재소 분소를 차려놓고 앉아 저희 일본 사람들 잇속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도내에서 공출 성적이 가장 우수한 마을이 바로 상, 하암리었을 정도로 악착같이 뜯어냈다.

하암리 김씨 문중을 지켜준다는 명목을 내세워 하암리 문중 사람들의 기를 꽁꽁 얽어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미년 만세 사건 때 하암리에서 당긴 불길로 인근 마을의 수천 명이 봉기했던 일이다, 결국 하암리 사람 여덟이 죽은 8열사의 고장이란 게 그들 일본 사람들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8열사의 넋이 무색할 정도로 하암리 사람들을 친일 쪽으로 변모시키기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어쨌든 하암리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상암리에서만 십여 명의 장정을 징병해 갔다.

하암리에 배당된 몫까지 상암리에서 차출한 것이다. 일본 순사를 앞세운 거간꾼까지 나타나 상암리의 가난한 집 처녀들을 공장으로 빼내 갔다. 나중에 들리는 소식으론 그 처녀들이 공장에는 가 보지도 못하고 만주 땅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는 것이다. 상암리 사람들이 당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산에 화전을 일구거나 나무를 함부로 베던 상암리 사람이 산림 간수한테 걸려 옥살이를 치른 것도 여러 번이었다. 순사보다 더 무서운 게 산림 간수라고도 했다. 상암리 사람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이 모든 수난이 일본 순사를 낀 하암리 사람들의 농간이라고 이를 갈았다. 해방이 되던 그 해에 상, 하암리가 대판 싸움이 붙어 사람이 여럿 상한 것도 그런 저런 쌓인 원한 때문이었다. 그 싸움으로 해서 하암리 김씨 문중의 집들이 여럿 불타 버렸고 자연 상암리 사람들은 경찰서에 잡혀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그 일로 해서 두 마을은 내놓고 원수지간이 되어 서로 얼굴만 맞대면 으르렁거렸다. 결국 그 숙명적인 원한이 무섭게 터지는 날이 왔다. 6.25사변이었다. 바꿔 세상의 칼자루를 잡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상암리 사람들이었다. 물을 얻은 고기가 헤엄쳐 나가듯 상암리 사람들은 활갯짓을 요란하게 쳤다. 하암리가 쑥밭이 됐다. 옛날 동학군이 들어왔을 때의 유가 아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김씨 문중의 한다하는 사람 여럿이 죽었다.

-그때, 표 경철 선생 애비두 빨갱이였지유.

그 여름 난리를 회상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표 선생 부친 얘기가 빠지지 않았다.

-빨갱이긴 했어두 다른 빨갱이들하곤 좀 달랐지유.

붉은 완장을 차긴 했어도 속은 달랐다는 얘기였다. 다른 빨갱이들과는 달리 하암리 사람들 편을 드는 그런 입장을 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장 죽을 사람을 발벗고 나서서 구해 주는 등 자기 깐에는 하암리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라고 했다. 실상 난리 뒤에 사람들은 표 선생 부친으로부터 조금씩은 다 도움을 받은 걸 은연중 시인했다.

그러나 인심이란 묘했다. 막상 세상이 또 뒤집히고 나니까 그게 아니었다. 빨갱이에 사과고 도마도가 어디 있느냔 얘기였다. 완장을 찼으면 다 자기들에게 고통을 준 원수였다, 죄가 더 있고 없고를 따질 경황이 아니었다.

표 선생 부친이 북쪽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았다가 죽임을 당한 것도 그런 인심 속에서였다. 하룻밤 사이에 다 도망쳐 버린 상암리 빨갱이들에 대한 앙심까지 얹어 표 선생 부친을 눈 딱 감고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표 선생 부친이 죽고 나니까 하암리 사람들은 마음속에 꺼림칙한 그림자를 나누어 갖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말 한마디만 거들어 주었어도 죽임까지 당했겠느냐 하는 표 선생 부친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죄의식이 문제였다. 그네들은 가슴속에 죄의식이 살아 오를수록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그 망할 놈이 글쎄 봐주는 척 해 가지고 제 욕심은 다 채웠다니까.

이처럼 표 선생 부친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심지어는 표 선생 부친이 생전에 했던 몇 가지 비행을 과장해서 떠들어대는 일이 많아졌던 것이다. 오히려 표 선생 부친은 살아서보다 죽은 다음에 더 많은 죄를 짓는 꼴이 돼 버렸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난리를 직접 겪지 않은 마을 아이들에게 상암리의 표 태흠이란 이름은 그대로 빨갱이의 대명사가 됐다. 하암리 어른들은 그 이름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묘한 것은 상암리 사람들도 표 선생 부친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일이다.

-망할 놈 잘 죽었지.

이렇게 한마디로 잘랐다. 그것은 표 선생 부친을 시체말로 기회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때문일 것이다.

표 선생의 가족이 상암리를 떠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 표 선생은 그때 상암 리 사람의 아들로서는 처음으로 읍내 중학교에 다니다가 난리를 만났고 그 난리에 부친을 잃었던 것이다. 표 선생이 그 어머니와 함께 상암리를 떠나던 날 하암리 사람들은 얼굴 마주치기를 꺼려 아예 집밖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일은 그날 표 선생 식구들이 상암리 사람들은 얼씬도 못하는 그 금단의 길인 김씨 문중 사당 앞을 당당히 지나갔던 일이다. 어린 표 선생이 그렇게 우겼는지 아니면 남편 잃은 표 선생의 어머니가 그렇게 한 것인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든 그들은 그 사당 앞 향나무가 도열해 선 길을 걸어나갔다. 그러나 하암리 사람 누구 하나 그 일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후 표 경철 선생이 다시 하암리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김씨 문중 사람들은 어지간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뭔가 심상찮은 생각이 퍼뜩 스쳐갔던 것이다. 그것은 표 경철 선생이 하암 국민학교의 교사로 부임해 왔다는 그 사실도 그랬지만 표 선생 부인이 바로 하암리 김씨 문중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암리에 살다가 난리 전인가 읍내로 이사를 가 소식을 모르게 된 귀밑터 댁의 외딸이었다. 귀밑터 댁은 청상과부로 지내다가 상암리 남자와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집안 사람들한테 내쫓김을 당했던 것이다. 그때 데리고 나간 외딸이 표 경철 선생의 처가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게 두 마을에서 모두 내쫓김을 당한 집의 자식들끼리 부부가 되어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하암리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즉 이 두 사람의 출현은 이태까지 그들이 지켜 온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의연한 김ㅆ 문중의 권위에 대한 정식 도전이라고 보여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표 경철 선생 가족은 몇 년 전 마을을 떠날 때 상암리 사람들 누구도 지날 수 업는 사당 앞길을 당당히 걸어간 오만불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떻든 표 경철 선생은상, 하암리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치 않고 제 일에만 매달렸다. 모범 교사로 알려졌다. 그들 부부는 하암 국민학교 근처에 방 하나를 얻고 살았다. 상암리 청년들이 표 선생과 어울려 하암 장터에서 술을 퍼마시는 게 가름 눈에 띄었다.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이가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표 선생은 하암리 청년들과도 어울리고 싶어했다. 4H 클럽에도 자진해 나가 일을 돕고 싶어했다. 그러나 하암리 청년들은 어른들 눈치를 보며 스을슬 뒤로 피했다. 사실 하암리 사람들도 세상이 많이 변해 자기들의 고집스런 이런 태도가 썩 옳지 않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네들은 하암리 김씨 문중이 이제까지 당당하게 이룩하여 전승해 온 하암리적인 권위가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위구심에 전전긍긍했다. 그네들은 더욱 몸을 도사리고 이 거북스러운 틈입자의 거동에 온통 신정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구나 나이 많이 든 사람들은 자기들 가슴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 채 죽임을 당한 표 태흥이의 아들에게 자신들의 귀한 자식을 맡겨야 하는 기막힌 운명 앞에 껄끄러운 한숨을 몰래 내뱉어야 했다. 그들은 또 한번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어떻든 표 경철 선생이 나타남으로 해서 상. 하암리는 다시 팽팽한 적대감으로 맞서기 시작했다고 봐야 마땅했다.

그 싸움이 눈에 보이게 노골적으로 나타난 것은 4년마다 한 번씩 있는 국회의원 선거 때였다. 초대부터 김씨 문중을 등에 업은 김 광모 의원이 출마하면서 그의 정적들이 하암리 김씨 문중과 사이가 나쁜 상암리 사람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 광모 의원의 정적들이 항상 배후에서 상암리 사람들을 충동질한다고 하암리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번 봄 선거의 후유증이 예상외로 큰 파문을 몰고 왔던 것도 결국은 상암리 사람들을 앞세운 정적의 농간으로 김 광모 의원의 측근들은 알고 있었다.

표경 철.

박 경사는 15일자 신문 사회면에서 눈을 떼며 끄윽 트림을 했다. 트림이 나오고 나면 잠시 동안은 뱃속이 거뿐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곧 더 거북한 상태로 뱃속에 가스가 차 숨쉬기조차 거북해진다. 표 경철 선생 - 박 경사의 눈에는 아직 한번도 얼굴을 못 본 표 선생의 얼굴이 선연히 잡혀 들었다.

어쩌면 오늘쯤 이 마을에 나타날 것이 분명한 그의 얼굴이 그처럼 선연한 모습으로 잡혀 드는 것은 웬일일까. 얼굴이 깡마르고 눈이 빛나는 한 사내의 꽉 다문 입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가 내 아내를 죽였소?

내 아내 몸에서 나왔다는 그 종이쪽지를 찾아내시오.

어쩌면 그것은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의 얼굴이 합쳐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 경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 깡마르고 입을 앙 다문 얼굴은 유 판석이나 최 진혁의 얼굴과는 너무나 닳은 데가 없었다. 박 경사는 거듭거듭 트림을 했다. 나오지 않는 트림을 억지로 해서라도 속을 덜 거북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굴까, 어째서 그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그처럼 선연하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일까,

박 경사는 문득 표 경철 선생이 십여 년 만에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있을 수 없는 고향 산천을 찾아오던 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역시 마을에서 추방당한 여자의 딸과 부부가 되어 찾아든 그 끈질긴 집념의 줄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둔 것일까, 자기 육친의 고향, 그 치욕적인 죽음의 현장에 돌아와 그가 해 보일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죽음을 통해 그가 잃고 얻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버지, 박 경사는 작은 소리로 아버지란 세 음절을 입에 올려 보았다. 그는 어렸을 적 아버지란 낱말을 단 한번도 소리내어 본 기억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득한 것이었다.

그가 아버지를 마지막 본 것은 열 살쯤 됐을 때였다. 오줌이 마려워 문득 잠이 깼다. 그는 등잔불 불빛에 시커먼 그림자를 벽에 얼룽거리며 앉아있는 남자를 보았다. 더럭 무서움이 앞섰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지만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열 살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는 아무 때나 이렇게 남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그런 쫓기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혼자 있을 때 그는 곧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 보길 좋아했다. 그것은 크고 옳은 것을 위해 숨어 다니며 간 곳마다 신화를 남기는 항일 투사로서의 그런 강하고 의연한 얼굴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 날 밤 등잔 불빛에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은 한낱 밤을 타 한 여자를 만나러 온 일개 범부의 평범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소년의 어머니가 불을 껐다. 아직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 앉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만히 몰아 쉬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오줌도 누었겠다 이제는 잠이 들어야 할 텐데 점점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는 몹시 갑갑증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몸을 뒤척거렸다.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들었다.

-불을 켜게. 이놈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네.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부시럭 거리더니 불을 찾아 등잔에 불을 당겼다. 그러나 그는 잠이 든 척 눈을 지레 감고 돌아누웠다. 문득 이마 위에 크고 따뜻한 것이 와 닿는 걸 느꼈다. 아버지의 손이었다. 그 따뜻한 아버지의 손을 더듬어 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는 참았다. 그러다가 잠이 든 것이다. 그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버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집안 어디에고 아버지가 다녀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이후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그 뒤에도 몇 번 집에 다녀가긴 했다. 그러나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그의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그의 형들마저 아버지가 집에 나타나는 걸 몹시 겁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순사의 끄나불이 집에 나타날 때마다 그의 형들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어디에선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가 도시의 중학교에 나가 공부하던 열 다섯 살인가 되던 해에 또 한번 아버지가 집에 다녀갔다는 얘길 형들한테서 전해 들었다. 해방되기 두 해 전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소식은 영영 끊겨 버렸다, 그러나 해방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시상에, 시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박 경사의 어머니가 땅을 쳤다. 발을 뚝 끊고 피해 다니는 이웃 사람들을 향해 그의 형들이 이를 갈았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박 경사의 부친은 이미 항일 투사가 아니었다. 항일 투사로서의 박 우재 씨가 아니라 일본 관헌의 밀정으로 전락해 버린 반역자였을 뿐이다.

박 우재 씨와 함께 행동했다가 해방 바로 한 해 전에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였나. 박 우재 씨와 함께 행동했었다는 그 사람들의 이름이 세상에 파다하게 알려지고 있었다. 박 우재 씨가 배반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해방과 함께 일약 독립 투사의 예우를 받게 된 그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박 우재씨와 함께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어떤 비밀 결사의 단원으로서 그들은 만주로 수송되는 조선 징용병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국경 근처에서 열차 전복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거사 직전 박 우재씨의 배반으로 성사되지 못한 채 검거되었다는 것이다.

박 경사는 아버지가 배신자의 낙인이 찍힘으로써 그들 가족이 당해야 하는 수모를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남편이 나라를 위한 크고 옳은 일에 매달려 비록 가정은 버렸을망정 언제고 남편의 이름은 만세에 남으리란 기대 하나로 젊은 시절을 욕되게 보내야 했던 어머니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그는 보았다. 이제나 그제나 묵묵히 아버지 대신 농사일만 해온 형들마저 아버지가 던져준 배신의 덫 앞에 넋을 잃고 가슴을 떠는 모습에서 그는 절망의 그 깊은 늪을 보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의 어머니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어미 가슴에 박힌 지아비의 환상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느덜 아버진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여.

그네는 분연히 부르짖었다. 아버지가 배신자일 수가 없다는 어머니의 확고한 부르짖음에서 박 경사는 자신의 가슴 속에도 뭔가 하나의 확신이 싹트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항일 운동을 해온 아버지가 끝판에 가서 그렇게 쉽게 동지를 배반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었다.

박 경사가 경찰에 투신한 것도 자신의 가슴속에 나누어 가진 작은 확신을 좀더 완전한 것으로 해 두고 싶은 강렬한 욕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 경사는 경찰에 들어가 두 사람을 알게 되었다. 오 도민씨와 김 광모 의원이었다.

-내가 자네를 거기 보낸 건 자네 부친을 생각해서였네.

박 경사의 후견인으로 자처하고 있는 오 도민 씨가 공치사를 했다. 오 도민씨는 박 경사와 동향인이었다. 박 우재 씨와 불알 친구라고 했다. 그는 박 경사의 집안 내력에 대해서도 떠르르 알고 있었다. 박 경사 역시 오 도민씨의 집안이 그의 고향에서 잘 알려진 집안이란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그의 말대로 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연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오 도민 씨는 박 우재 씨가 나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가정과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이십여 년 숨어 산 인생인 반면 그의 집안이 일본 사람들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떵떵거리며 호의 호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후에도 계속 경찰에 남아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어떤 명예롭지 못한 일로 수년 전 물러난 뒤 김 광모 의원의 선거구에 눌러 앉아 그대로 선거 참모의 일을 해오는, ()에서는 다 빨아주는 실력자였다. 산판업에다, 버스회사 중역에다, 재력도 읍내에서 굴지였다.

-글쎄 내 말대로 거기 들어가 한 일 년 열심히 뛰어보게. 다 그만한 보람이 있을 거니 말이여.

박 경사가 읍내 경찰서에 있을 때 오 도민 씨가 하암 지서로 갈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자기의 힘이 아니면 그 좋다는 자리를 어떻게 꿈이나 꿀 수 있겠느냐고 공치사를 하면서였다. 물론 오 도민 씨를 먼저 찾아간 것은 박 경사 자신이었다. 어렸을 적 자신의 아버지와 죽마고우였다는 그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실체를 만지고 싶었고 어머니가 말하는 것처럼

"느 아버진 절대루 그런 분이 아니여."

란 화신을 좀더 구체적인 것으로 해 두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그것은 애초 진실 되고 신뢰 있는 백성의 한 공복이 되어 보다 크고 을은 것을 위해 보탬이 되는 삶을 가지려는 자신의 뜻에 하나의 꿋꿋한 심지를 꽂고 싶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마음 한구석에 그을음처럼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에 관한 그 께름한 과거를 씻어내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자네 부친께서 그런 비열한 짓을 했으리라곤 믿지 않네. 문제는 자네 부친의 생사일세.

-돌아가셨을 겁니다.

박 경사는 쉽게 결론지었다. 해방이 되고도 단 한번 소식이 없는 아버지의 생사 문제 같은 건 실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글쎄나 자네 부친께서 살아 계신다면야 가타부타 훤해질 거구먼서두---

오도민 씨는 박 경사가 혹시나 해서 집요하게 캐들자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무릎을 탁 쳤다.

-마침 잘됐네. 나 역시 자네 부친 문제에 대해서 알아볼 일이 있던 참이거든. 어쩌면 자네의 힘이 필요할는지도 몰라.

-뭡니까, 오 사장님?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아버지의 실체를 만질 수 있다면 그는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닐세. 그렇게 서두를 건 없구, 여하튼 자네 부친의 명예 회복을 위한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네.

그는 의미심장하게 말미를 사렸다. 월가 손에 잡힐 듯한 기대로 박 경사는 가슴이 설렌다.

-당신, 빽 한번 좋았어.

박 경사가 하암 지서를 책임 맡고 나가게 됐을 때 그의 동료들은 질시에 찬말로 그를 빈정거렸다.

-박 경사, 이번 선거만 끝나면 대번 서울로 전출이 될 거구먼.

-그거야 뻔할 뻔자 아닌가 말이야. 하암린 김 광모 의원 문중 동네거든.

-그것뿐인가. 오 도민 씨와 김 광모 의원이 합자로 하는 산판이 거기 수두룩하단 말씀이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 봉투가 서랍에 그득하게 쌓이는 데지.

그러나 박 경사에게 있어 동료들의 그런 야유와 선망이 뒤섞인 말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그는 자신의 직권이 부당한 일에 잘못 쓰여지는 일 같은 건 결코 없으리란 확고한 신념을 항상 마음에 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실체를 만져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오랜 방황과 깊은 실의의 강이라 하더라도 그는 가슴에 그것을 담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화 같은 건 쉽게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박 경사가 하암 지서에 부임해서 제일 먼저 부닥친 일은 그를 당혹하게 만드는 데 충분했다.

그것은 선거였다. 그는 선거에 관계되는 긴급 전통과 극비로 통하는 문서상의 공문을 매일 여러 건 접수했고 또 그 지시대로 시행해야만 했다. 더 힘이 든 것은 지시 사항에 대한 결과 보고였다. 믿을 수 없는 통계와 사태 파악의 허위 보고. 그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물론 그러한 일들은 한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상급 기관의 일방적 지시와 그것을 이행해야 하는 말단 관리로서의 극허 사무적인 일들이긴 했어도 그의 괴로움은 매한가지였다. 자신의 가슴에 몰래몰래 키워 오는 아버지에 대한 그 확신의 빛이 점점 바래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상급 기관에서의 긴급 전화 외에도 그는 이삼 일에 한 번씩 오 도민 씨로부터 극비의 연락을 받아야 했다. , 하암리는 물론 우촌면 일대의 동향과 어떤 예견되는 사태에 대한 숨김없는 정보 제공이었다.

-자네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겠는가?

이처럼 박 경사 스스로가 선거에 관여해 주길 강요하기도 했다. 더 뭣한 것은 오 도민 씨의 산판 근황까지 체크해 올려야 할 경우였다. 심지어는 영림서 직원이 아무 날 아무 때 나갈 것이니 가능하면 적당한 구실로 따돌려 보내라는 지시도 했다. 그런 때마다 박 경사는, 그건 제 소관이 아닙니다 - 말로 일축해 버리곤 했지만 동료들이 자기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그는 동료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자기의 내부에 쌓아온 모든 것이 산산이 분해되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민중의 지팡이가 되어 마음의 충일을 얻으려 했던 자신의 마음속 중심이 흔들리면서 그는 어깨에 맥살이 풀렸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의 그러한 부끄러움을 남들은 소심증이니 성취 동기가 낮아서 그러니 무능해서 그렇다느니 일방적으로 결론지어 말하곤 했다.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거야.

박 경사는 자신의 무능을 가끔 남들 앞에 보란듯이 내보여 그것을 짐짓 자랑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또 다른 기만이었고 자기를 기만한 그 몇 배의 부끄러움이 그를 괴롭혔다. 자신이 바라고 있는 참다운 삶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무능에다가 책임을 돌리는 방법에 익숙해 갔던 것이다.

 

-그 돈을 꼭 받아야 하는 거요?

부임해 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실로 난처한 경우에 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 차석이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소장님이 맡아서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뭡니까, 이거?

박 경사는 문득 김 차석이 새로 부임한 자기를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떳떳하지 못한 돈이 굴러 들어오는 경로를 확인해 주려고 하는 것과 아울러 지서장이 맡아 처리해도 떳떳한 것이라는 걸 일깨워 누기 위한 계획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박 경사가 거푸 다그쳤다.

-산판 차가 하루에 이십여 대 이 앞을 통과하거든요.

김 차석이 그냥 흘려 넘기는 투로 대답했다. 정 순경이 덧붙였다.

-목상(木商)들이 놓고 가는 거지요.

퍽 자조적인 어투였다.

-부정 반출을 한다는 얘기군.

-결국은 그거지요.

정 순경이 선뜻 대답하며 김 차석 쪽을 돌아다보았다. 김 차석이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정 순경을 바라보며 한마디 쏘았다.

-아봐, 정 순경. 자네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차석님, 제가 뭐 잘못 말했습니까? 그럼 그 사람들이 정당하게 나무를 실어 내면서 우리한테 봉투를 놓고 가는 겁니까?

-정 순경, 그건 꼭 그래서 놓고 가는 건 아니야. 그건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아닌가 말이야.

-정당한 건 아니지요.

-우리 하나만 그걸 안 받는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모르겠어요. 나 역시 그 돈 여태껏 받아먹었으니까 할 소리가 없긴 하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해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럼 정 순경은 마음이 찜찜해 견딜 수 없고 우린 그렇지 못하다 그런 얘긴가?

-고만두세요. 남들이 들으면 무슨 큰 내란이나 일어난 줄 알겠습니다.

박 경사도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문제에 대해 이곳에 부임하기 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산판 목상들이 과벌목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반출해 내기 위한 부정 반출의 경로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벌목 허가를 받은 몇 배의 나무를 베어놓고 그 원목에다시 가짜 철검인을 만들어 찍는가 하면 반출 허가량이 훨씬 넘는 그 나무를 빼내기 위한 반출증 사용에서의 그 -눈감아 주기- 50년대 말 산판의 생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척 들어오는 얘기였다. 박 경사는 그러한 일이 바로 자신의 당면한 현실이라는 사실 앞에 우선 당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돈을 꼭 받아야 하는 거요?

그렇게 질문해 놓고 박 경사는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된 질문이라는 걸 곧 깨달았다. 그 돈을 받지 않으면 반출증 체크를 철저히 해 부정 반출을 일체 용납할 수 없다는 본때를 보여주든가 아니면 그냥 얼렁뚱땅 모르는 척 통과시키는 방법밖에 더 묘한 수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돈을 받고 안 받고 그런 것은 나중 일이었다.

-우리 원칙대로 해 봅시다. 뒷책임은 내가 다 지겠소.

박 경사는 결단을 내렸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것뿐이기도 했다

-결국 산판 차를 통과시키지 말란 말이군요.

김차석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말했다.

-정당하게 반출하는 거야 어떻게 통과를 안 시키겠소. 내 얘긴 철저하게 단속을 해 보자는 것뿐이오.

-알겠습니다. 소장님 말씀대로 철저하게 재볼 수 밖에요.

김 차석이 코방귀를 날리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짐짓 딴전을 부렸다.

정 순경이 말했다.

-소장님,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으니까 문제지요.

-원칙대로 하는 거야.

정 순경이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이 헤아려졌지만 박 경사는 우정 그의 입을 막기라도 하듯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정 순경은 계속했다.

-사실 그 동안 우리도 수차에 걸쳐 부정 반출을 적발해서 차를 묶어 놨거든요. 그러나 어림도 없지 뭡니까. 읍에서, 시에서 당장 내보내라고 호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니까요. 소장님, 먼저 소장님이 옷을 벗지 않으면 안된 게 뭣 때문인지 아세요?

박 경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기의 전임자인 그 사람이 뇌물수수죄로 입건되어 애를 먹더니 결국은 옷을 벗고 만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재수 없게 걸린 거지 뭐. 동료들이 그 사람을 동정해서 말했다. 아니야, 열을 받았으면 일곱쯤은 위로 올려야 했어. 그걸 혼자 꿀떡한 거지 뭐. 상납의 원리를 터득하지 못한 죄지. 열을 받아 일곱을 올리면 그 일곱을 받은 사람은 다섯을 위로 올리고 다섯을 받은 사람은 셋을 올리고 - 이렇게 하는 피라밋식 상납 원리 아래서는 결코 문제가 터지지 않는다 했다. 밑바닥의 돌 하나를 빼내려면 연쇄적으로 윗부분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참 우스운 일이지요, 글쎄---

정 순경이 계속했다.

-글쎄 그 소장님은 원리 원칙대로 한다고 차를 묶어 놨던 것인데 우습게도 파면 당한 이유가 부정 반출을 눈감아 주고 돈을 받았다는 거지요.

목상들이 모함을 한 거지요. 그 통에 우리도 혼났다구요. 그 소장님이 우리 몫까지 다 뒤집어썼기 때문에 무사하긴 했지만요.

-정 순경, 그 소장님을 옹호하는 건 좋지만 사실을 그런 식으로 은폐하는 건 옳지 않아.

딴전을 피우고 있던 김 차석이 더 못 참겠다는 듯 껴들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먼저 소장님 태도가 옳지 않았다 그겁니다. 그 사람들이 봉투를 놓고 갈 때는 모른 척했다가 엉뚱하게 단속을 한다고 설칠 때는 우습지도 않았지요. 그걸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인 줄 아세요? 그 목상들은 돈을 더 내놓으라는 협박으로 생각했던 거예요. 우리가 곁에서 봐도 그랬으니까 그 구렝이 같은 목상들이 그냥 내버려두겠어요.

-, 그만들 둡지다.

박 경사가 말을 자르고 나섰다. 지나간 얘기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김 차석이 손톱에 날을 세워 자신을 할퀴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 차석도 정 순경도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벽이긴 매한가지였다. 자신이 누구를 깊이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그는 남들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 경사는 까마아득 쳐다보이는 벽 앞에 선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보았다. 난 무능해. 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냐. 나같이 무능한 사람은 그런 어마어마한 일에 도전할 자격이 없다구. 내가 하지 않아도 이 세상에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능히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아. 그때 문득 작은 지혜 하나가 그의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다.

-어떻든 그 일은 입때껏 김 차석이 맡아서 잘 해온 모양이니까 이후로도 김 차석이 알아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소장님은 아직 이곳 실정을 잘 모르시니까.

좀 연장인 순경이 곁에서 거들어 주었다. 박 경사는 자기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김 차석에게 넘겨주었다.

-좀 잘 봐 주시오.

박 경사가 항복의 뜻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김 차석이 좀 멋쩍어 하면서 사무실을 휘 둘러보았다.

다행스러운 일튼 산판에서 원목을 실어 나르는 목상들이 모든 걸 눈치껏 해줌으로써 자신에게 직접적인 마음의 부담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차석이 또한 유능했다. 박 경사는 그 봉투의 돈이 삼분의 이쯤 관례에 따라 상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모든 것이 닦여진 길을 따라 비공식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는 그 일로 해서 뜻 아니한 치사도 많이 들었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근자에 와서는 이러한 박 경사의 무너짐을 눈치챈 목상들이 그가 있는 데서도 공공연히 봉투를 던지고 갔다. 그럴 때마다 박경사는 끄륵끄륵 트림을 하면서 딴전을 보았다.

박 경사는 자신이 유혹의 늪에 빠져 그 견딜 만한 늪 속의 유영(遊泳)을 야금야금 즐기기 시작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암 지서에 부임해 와 한 달도 채 못되어 서울 김 광모 의원의 부름을 받고 상경했을 매부터 그 유영은 시작되었다고 봄이 옳았다. 그때 그는 김 광모 의원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김 의원은 시설이 좋은 호텔 방을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양담배를 내밀며 김 의원이 말했다.

-자네 부친께서 항일 운동을 하신 훌륭한 분이란 걸 내 다 알고 있네.

느닷없이 던져오는 말에 박 경사는 당혹했다. 그러나 곧 그는 모든 걸 분명히 해 둘 필요를 느꼈다.

-항일 운동을 하신 건 사실입니다만 결과는 달라졌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동지들을 배신했다는 낙인이 찍혀 버렸습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자넬 부른 걸세.

박 경사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네,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나? 자네 부친의 누명을 벗겨야 하겠다는 생각 말일세.

박 경사가 어리둥절해 있자 김 광모 의원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얘기는 간단하네. 자네 부친께서 동지들을 배신했다고 하는 그 모함을 한번 밝혀 보지 않겠느냐 그거지.

모함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자넨 불효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자네 부친이 배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섯이나 살아 있는데 그 당사자인 자네 부친은 생사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그러나 ,,,,,,

김 광모 의원은 박 경사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러나 자넨 이 시간부터 생각을 고쳐 먹어야 하네, 자네 부친은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았어. 배신자는 오히려 그놈들일세. 자네 부친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자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한 일을 화대 과장하기 위해 자네 부친을 판 거야.

박 경사의 가슴은 더욱 거세게 뛰었다,

-말씀해주십시오. 지금 하신 말씀은 사실입니까. 그냥 추정해서 ,,,,,,

-더 말할 거 없네. 중요한 것은 내가 자네의 편이 되어 자네를 돕고 싶다는 그것뿐일세.

박 경사는 어깨에 힘이 빠져 내렸다. ,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이 내 편이 된다는 말인가, 정치가는 한 개인을 위해서도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는 것인가.

한참 뒤에 김 광모 의원이 입을 열었다.

-자네 이 종철이란 사람 만나 본 적 있나?

-이종철 씨라면 김 의원님 선거구에 이번에 함께 출마를 한 분 아닙니까. 독립 투사 ,,,,,,

-예끼, 이 사람, 그놈이 뭐가 독립 투사란 말인가. 자네 정말 그놈 이 종철이 정체를 모른단 말이지 ?

-모르겠습니다.

-경찰이 임무를 게을리 하고 있군.

-?

-아닐세. 농담이야.

-그 이 종철 씨하고 저희 아버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래, 관계가 있지. 그 이 종철이가 바로 자네 부친을 밀고자로 만들어 낸 그 작자일세. 놈의 권모술수를 따를 사람이 없네. 그 정도면 자네 부친을 팔아 제 잇속을 차리고도 남을 놈이지.

박 경사는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함께 이마를 맞대고 민족을 위해 항일 운동을 벌였을 그가 바로 지금 선거구를 돌며 유세장에서 선동적인 언변으로 김 광모 의원의 아성을 허물어 내리고 있는 이 종철이라니, 어쩌면 예상을 뒤엎고 그가 당선될는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쉬쉬 나돌 지경이었다.

이 종철 후보의 언동에 위법 사항이 나타나는 즉시 보고하도록. 위에서 내려오는 공문 중에 그런 구절도 끼어 있었지만 박 경사는 그에 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박 경사는 헐떡거렸다. 그러나 김 광모 의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파이프에 잎담배를 담아 누르며 그가 말했다.

-자네 마음먹기에 달렸네. 그놈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 다음 자네 부친이 뒤집어쓴 누명을 벗기는 걸세.

-어떻게, 무슨 증거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다 방법이 있네. 우선 모든 일은 자네 부친과 죽마고우였던 오 도민씨가 다 알아서 도와 줄 걸세. 이 종철이 그놈이 자네 부친을 모함했듯 우리도 그놈의 허상을 깨뜨리고 그 실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야. 그 일의 증인이 바로 자네가 되어야 하네. 자네 부친을 위해서 자네가 나설 때가 온 거야.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몰라도 좋아. 오히려 모르는 게 좋을 걸세. 오 도민 씨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내 말뜻 알아듣겠나?

박 경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김 광모 의원과 자신의 후견인으로 행세하는 오 도민 씨의 속셈이 한번에 석연하게 잡혀 들자 가슴이 떨렸다. 천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쳐지는 낭패감이 엄습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허망감이었다.

그러나 문득 박 경사는 마음 한편에서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유혹의 손을 보았다. 아버지를 위해서, 어머니가 확신하고 있는 아버지의 실상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식이 힘을 보태지 않으면 그것을 또 다른 누가 할 것인가.

그는 마음 밑바닥에 어떤 기꺼움 같은 게 벌렁벌렁 숨쉬기 시작한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김 광모 의원의 말대로 배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배신을 당한 그런 억울한 입장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 억울함을 자식이 나서서 큰 소리로 외적 아버지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렇게 해야 마땅할 일이다. 그것은 또 가능했다. 김 광모 의원과 오 도민 씨와--- 그 순간 박 경사는 한 사람의 웃는 얼굴이 머리에 떠올랐다. 자기 자신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 얼굴 같기도 했다. 열 살 때 밤눈을 떴을 때 등잔불 곁에 앉아 있던 아버지의 얼굴에다가 방금 전 머리에 그려진 웃는 얼굴을 겹쳐 보았다. 그러나 박 경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보여진다는 것은 하나의 치욕이었다. 크고 옳은 것을 위해 일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런 웃음을 웃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못 박아 생각했다.

-저는 지금 아버지의 실상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만들어진 아버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를 찾고 싶습니다.

-내 제의에 대한 거절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일은 저 혼자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경사는 김 의원의 얼굴에 불쾌한 그늘이 지는 걸 역력히 알 수 있었다. 그늘은 곧 낭패스러운 얼굴로 바뀌어 갔다.

박 경사의 가슴에 한 가닥 두려움 같은 게 끼어들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몇 배의 큰 희열이 어금니에 지그시 씹히고 있음을 그는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네. 자넨 역시 오 도민 씨 말대로 똑똑한 사람이군, 나는 자네가 자네 스스로의 힘으로 부친의 명예를 되찾게 되리라고 믿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나 찾아오게나.

김 광모 의원은 역시 정치가였다. 쉽게 포기할 줄 아는 게 더 큰 것을 얻을 기회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박 경사는 불현듯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자식으로서 떳떳한 아버지를 가지고 싶은 게 뭐가 피란 말인가. 일생을 치욕 속에 사는 어머니와 형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박 경사는 몸을 일으켰다. 김 의원의 비서가 봉투 하나를 가지고 들어 왔다.

-이거 여빌세. 딴 생각 없이 받아 주면 고맙겠네.

박 경사는 그가 내미는 봉투를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김 의원이 말했다.

-하암린 내 출생지일세, 특히 거기는 우리 문중과 늘 사이가 좋지 않게 지내는 상암리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명심하게. 늘 말썽이 생기는 데야. 법을 어기면서까지 빼 일을 봐달라는 얘긴 아닐세. 다만 말썽이 크게 번지지 않게만 자네가 힘써 주었으면 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손을 내밀었다. 박 경사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자기의 몸이 형편없이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등이라도 뚜덕거려 주었으면 아마 박 경사는 눈물이라도 보였을는지 몰랐다.

하향하는 차 속에서 그 봉투를 열어 보고 박 경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한 달봉급의 약 세 배쯤 되는 액수였다. 그는 문득 자신이 경찰에 투신하여 이때까지 보아온 수많은 하급 관리들의 고 박봉 속에서의 꿋꿋한 절조를 생각했다. 그가 모시고 있던 한 상급자는 어김없이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그 어떠한 일도 용납하지 않았다. 박 경사는 그에게서 청렴 결백한 관리상을 보았다, 생활고에 시달려 가족과 함께 삶을 포기한 동료도 있었다. 박 경사가 달려갔을 때 그 집의 차가운 방바닥에 다섯 식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저녁을 먹은 듯 밀뜨데기 국이 한 그릇를 남겨져 방 한구석 상위에 놓여 있었다. 고 동료는, 살기가 힘들다 - 는 짤막한 글을 남기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신병으로 오래 앓아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어떻든 박 경사는 분노를 느꼈다. 부정한 일에 눈을 번들거리는 동료에 대한 분노였다. 자기 삶 하나를 주체하지 못하고 죽어간 동료에 대한 분노였다.

박 경사는 차 속에서 소화제를 사 먹었다. 끄윽끄윽 트림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김 광모 의원한테서 받은 그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네 김 의원께서 제안한 걸 거절했다며? 방금 서울서 전화가 왔네.

-거절이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얘긴가, 자네 부친의 누명을 벗기는 데 자네가 협조할 수 없다는건?

박 경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자네 출세하기 싫다는 거군.

-저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지금 이대로는 누구 덕택인데 그런 소릴 하나?

박경사는 안주머니에서 그 봉투를 꺼내 놓았다.

-김 의원께서 여비나 하라고 주셨는데 아무래도 봉투가 바꿔 것 같습니다.

-이 사람, 이거 덜 떨어졌군.

오 도민 씨는 박 경사가 내놓은 봉투의 내용을 살펴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 사람아, 이런 건 남한테 내보이는 게 아냐. 사네 부인한테나 가지고 가 자랑을 할 것이지.

-오 사장님께서 맡았다가 돌려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부담 가질 일이 아니니까 안심하고 넣어 두게. 누구를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보다 바로 자네 자신을 위해서 힘이 닿는 데까지 일하면 되는 거야. 기회란 그렇게 흔한 게 아닐세, 자넨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네.

오 도민 씨는 자기를 위해서 일해 달라는 얘기만은 하지 않았다. 죽마고우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그의 얼굴은 결코 밝지 못했다. 박 경사가 끝내 그 봉투를 놓고 일어섰던 것이다. 그가 앉은 채 방을 나서는 박 경사한테 한 마디 던졌다.

-자넨 역시 대단한 사람이군. 이까짓 걸 먹고 먹었다는 소린 듣기 싫다 그 얘긴가?

 

외등 주위에 몰려든 날벌레들의 어지러운 난무는 여전했다, 더 많은 날벌레들이 모여들어 서로 엉겨 돌았다. 좀 전까지 그 큰 몸체를 사정없이 부딪쳐 가며 날뛰던 나방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지쳐 떨어졌겠지. 그 나방처럼 사는 게 굵고 짧게 사는 걸까. 박 경사는 혼자 웃었다. 그 나방처럼 격렬한 삶을 정말 잠시라도 누리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치민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누린 그 일생은 저 나방과 같이 짧고 격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경사는 일어나 실내등을 껐다. 거기도 하루살이 비슷한 날벌레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좀 있으면 그 날벌레들이 모두 현관 외등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기다리지 않고 외등 스위치마저 내려 버렸다,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쏴아 정적이 밀려와 그를 형체도 없이 녹여 버리는 것 같았다. 비로소 그는 시커먼 어둠 저쪽 산자락을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지서와 가까운 논에서 개구리가 듣그럽게 울어댔다.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전연 귀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한데 뒤섞여 들렸다. 마을 장터 비석거리 목에서 유선 방송을 통해 연속 방송극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그 연속극이 끝나면 마을 노인들이 비석거리 느티나무 아래로 바람을 쏘이러 나을 것이다. 그들은 모여 앉으면 지난 이야기들을 나눴다. 마을에 들어와 소를 잡아먹던 동학군 얘기, 자기들이 기대앉은 비석을 더듬으며 8열사가 만세를 부르던 기미년 얘기, 더 가깝게는 일제 말기 상암리 사람들과 아옹다옹 다투다가 해방되던 해 두 마을이 맞붙었던 마을의 역사가 서리서리 풀려 나왔다. 할아버지를 따라 나온 애들은 반딧불을 잡으며 할아버지들이 말하는 상암리 사람들에 대한 적대 감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야금야금 키우고 있을 것이다. 실상 학교에서도 두 마을 아이들은 자주 충돌이 있는 모양이었다.

-국민학교 선생들도 아주 골치래요. 하암리 학부형을 만나면 상암리 사람들 욕을 하고 상암리 사람들은 하암리 사람들을 헐뜯고--- 보통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여튼 큰 문제라구요.

언젠가 정 순경이 두 마을이 공동으로 놓아야 하는 은백내 다리 공사장에서 벌어진 싸움을 말리러 갔다가 돌아와 하는 얘기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중간을 지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는 화해의 실마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살이 졌다고 하던가, 왜 처음부터 모든 게 안 맞는 부부가 있잖아요. 꼭 고런 꼴이야요. 우리 나라도 그 꼴이지 뭡니까. -우리 나라?

-남과 북이 그렇지 않아요?

-그거완 경우가 다르지.

-다를 게 없어요. 결국 마찬가지예요.

박 경사는 문득 어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다른 사람들은 다 참고 사는데 늬 아버진 참 이상두 했다. 그렇게 일본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한번 집에 들를 때도 일본 사람들 욕을 하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구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밉수? 내가 그렇게 늬 아버지한테 물었잖겠니. 그랬더니 의 아버지가 내 뺨을 후려치더구나. 눈에 불이 번쩍하더라. 그놈들 하곤 피가 다른 게여. 피 다른 놈들한테 우리 민족이 얽매 지내는데 왜 밉지 않단 말이야. 의 아버진 그런 사람이여. 피가 다른 일본 놈 밑에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구 하시더니만,,,,,, 박 경사는 왜 커서까지 어머니의 그 말속에 깃든 아버지에 대한 연연한 그리움과 함께 훌륭한 남편을 가진 지어미의 그 자랑스러움을 깨닫지 못했다.

-상암리와 하암리처럼 남북은 기름과 물입니다.

-기름과 물?

-그래요. 개들과 우린 근본적으로 달라요.

-그럴까?

-우선 사고 방식부터 틀려요.

-사고 방식부터가 아니라 사고 방식만 다른 게 아닐까 ?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피를 따지는 건 구세기적 생각이에요. 피보다 강한 게 이념인 시대에 우린 살고 있어요.

-그건 정 순경 자네 생각인가?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럼 간단하잖아, 그 이념과 사고방식만 뜯어고치면 되니까 말이야.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쉽진 않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잖는가?

-맞아요. 계 생각이 바로 그겁니다. 완전한 평행이 아닌 이상 두 선.

은 언제고 만날 지점을 가지고 있지요.

박 경사는 문득 젊은 정 순경의 생각을 더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렇다면 말이야. 어떻게 하는 게 남과 북이 빨리 화해를 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일까?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뭔데?

-당분간 양쪽에서 서로의 존재를 망각하는 겁니다, 서로 의식하지 않는다 그거지요. 아무 것도 보지 말고 또한 아무 것도 듣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

-가능하면 어른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게 좋습니다. 배가 부르면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욕심을 부리고 하거든요. 문제는 어린아이들부터 싹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뭘 말인가?

-가르치는 거지요, 키가 큰 사람은 나쁘고 작은 사람은 좋다. 이런 극과 극의 대비라든가 양자 선택을 강요하는 교육이 아닌 안과 겉을 동시에 보여 주는 상대적 사물 평가의 올바른 안목을 길러 주는 겁니다. 또한 키가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주종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 만나 그 힘이 합쳐졌을 때의 그 창조력 같은 걸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가르침에서 가장 멀리 해야 할 것은 독선과 한 개인의 우상화입니다. 절대 권한, 절대 추종이 우리의 미래를 얼마나 어둡게 하는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

정 순경이 열을 올렸다. 그는 더 많은 걸 얘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박 경사는 중간에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다면 정 순경 자신은 교육받은 세댄가 아니면 가르쳐야 하는 세댄가?

-그야 물론 나 같은 건 희생 세대가 되어야 마땅하죠. 남북이 하나가 된다면 -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더 못한 형편이 될 것인가 그런 거나 염려하고 있거든요. 남북이 하나가 되어 자기의 안일이 허물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옳고 큰 것을 위해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어요.

 

박 경사는 어둠 속에 팔짱을 긴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옳고 큰 것을 위해 자신과 가정까지 다 버렸던 자신의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보여지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어둠과 산자락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가까운 논에서 나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왜 불을 전부 끄고 계시는 거예요?"

정 순경이 현관 저쪽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 보내왔다. 박 경사는 외등에 불을 넣었다. 정 순경이 정복 차림으로 신작로에 서 있었다.

"집에 애가 경기가 났어요. 저 납골 한약방에 가 약 좀 사 가지고 올거니 조금 더 봐 주십시오, 소장님."

정 순경은 비석거리 쪽으로 총총히 사라져갔다. 그에겐 이제 백일이 지난 애기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박 경사는 실내 전등을 켰다. 어느새 현관 외등에는 또 숱한 날벌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불쑥 지서 안으로 들어섰다. 김 차석이 남방 셔츠 차림으로 이마에 땀이 번들거렸다. 몹시 급한 걸음으로 달려온 양 숨까지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 사람 여기 안 왔었어요?"

"그 사람이라니?"

"표 경철이 말입니다."

"표 경철 선생?"

"맞아요. 그 사람이 지금 장터 변씨네 가게서 술을 먹고 있다니까요."

박 경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머리를 곱게 빗은 채 혀를 빼물고 왜갈봉 중턱 노송에 매달려 있던 표 선생 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일로 해서 자신이 겪은 곤욕스러웠던 일이 새삼 신음처럼 씹혔다.

뭔가 굉장히 낭패스러운 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그런 예감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여기 신문에 났더군. 8.15특사로 풀려났다고. 석방됐으니 고향에 돌아왔을 거 아니오."

"하지만 그 법이 돼먹지가 않았다니까요. 사람을 죽인 놈을 겨우 2년 징역을 시키고 풀어주다니 말이나 됩니까?"

김 차석은 지금 하암리 대변자 같은 소릴 하는군, 박 경사는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건 정당 방위였고, 과실 치사야. 더구나 그 사람은 그때 교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어."

"마치 표 선생 변호인이라도 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소장님은 그때 여기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김 차석이 볼멘 소릴 했다.

"보지 않았어도 번한 일이 아닌가. 그 사람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야,"

"사람을 죽인 일이 당연하다는 얘깁니까?"

"아니지. 그 사건이 있기 전에 그가 했던 일 말일세."

"그게 어째서 당연하다는 겁니까? 거길 지나가면 말썽이 생길 걸 뻔히 알면서도 고의로 그런 짓을 한 겁니다. 일부러 싸움을 걸어온 겁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네. 지금 세상에 어느 곳을 성역화해 놓고 여길 범하면 안 된다 - 하는 이런 전시대적인 사고는 비판받아야 마땅해."

"소장님, 지금 소장님 위치에서 그런 식으로 우리 하암리 김씨 문중을 비난해야 옳습니까 ?"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 아니오."

박 경사는 어조를 누그러뜨리며 웃어 보였다. 김 차석의 얼굴이 온통 벌겋게 달아 있었다. , 하암리 사람들은 다 이랬다.

"소장넘, 좀 안된 얘기지만 앞으로 표 선생의 입장을 옹호하는 그런 태도 표명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협박인가. , 김 광모 의원의 출생지고 그의 성역이기 때문인가. 그렇게 윽박질러 주고 싶은 걸 박 경사는 눌러 참았다. 동료로서가 아닌, 김씨 문중을 대변해서 나오는 그와 더 맞서 보았자 감정만 격해질 뿐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 번 양보해도 박 경사는 표 경철 선생이 그때 한 일이 결코 틀렸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표 경철 선생은 그날 상암리 사람들이 지나갈 수 없는 하암리 김씨 문중의 사당 앞을 지나갔던 것이다. 그것도 70여 명에 이르는 상암리 아이들을 인솔해서 당당하게 그 금단의 지역을 통과했던 것이다. 잘 가꾼 향나무가 길 옆으로 그림처럼 도열한 사당 앞을 지나갈 때 70여 상암리 아이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란 군가까지 요란하게 불러 댔던 것이다. 고냥 그렇게 지나가기만 했어도 언젠가 표 선생이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날 때 그 사당 앞을 지나갔듯 아무런 일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문제는 그날 그 앞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사당까지 올라가 사당 벽에 불경스런 낙서를 했는가 하면 어떤 놈은 기둥에다 오줌까지 갈겼던 것이다.

6.25때 세상이 바.뀌러었을 때도 상암리 사람들 스스로가 그곳을 지나기 꺼려했을 만큼 오랜 세월 속에서 금단의 지역으로 못 박혀 버린 곳이었다. 그런 금단의 지역을 무단히 침입하여 그런 불경스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둔 표 선생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하암리 사람들은 기가 넘을 정도로 흥분해서 날뛰었다. 표 경철 선생이 하암리에 들어온 뒤 눈에 가시처럼 거북해 하던 사람들이라 막상 일이 터지자 걷잡을 수 없게 감정들을 폭발시켰다. 물론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가 많은 문중의 어른들이 더하기 마련이었다.

-그놈이 일부러 어깃장으로 그런 거여 !

-맞아. 그놈이 우릴 우습게 알고 그랬다니까,

-제 애비 복수를 할려고 기어든 놈 아닌가, 내 그럴 줄 알았지!

하암리 노인들은 표 경철 선생이 상암리에서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몇 다혈질의 장년들은 몽둥이까지 들고 나왔다.

표 선생은 날이 어둑해져서야 상암리에서 터벅터벅 돌아왔다. 나이 많은 노인 한 사람이 표 선생의 멱살을 잡고 뺨을 쳤다. 몇 사람이 더 달려들어 턱을 걷어올리듯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댔다. 표 선생이 멱살을 잡혀 매를 맞으면서 몇 마디 변명을 하긴 했다, 그 전날 비가 많이 내려 상암리 입구의 개울물이 많이 불어 하급 학급 아이들은 아예 학교도 나오지 못한 날이었다. 아침 나절에 다시 비가 내렸고 하학 시간에는 그 개울을 건너기 어렵다는 전갈이 왔다. 물론 산비탈을 끼고 돌아서 가는 길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날 아이들 하학 지도를 맡은 표 선생 생각에는 그 산비탈 길이 우중에 미끄러워 더 위험하다고 판단됐던 것이다. 개울을 건너지 않고도 상암리로 들어갈 수 있는 사당 앞길을 이용하기로 한 표 선생이었다. 불가피한 상황인데 어떠랴 싶었는지 아니면 이 기회에 터부처럼 되어 온 그 좋지 못한 생각을 깨뜨려 볼 요량이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몰랐다. 어떻든 표 선생은 70여 명 상암리 아이들을 모아 그 사당 앞을 지났던 것이다. 어떤 각오가 돼 있었던 모양 표 선생은 그날 저녁 멱살을 잡혀 뺨을 맞으면서도 별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 인솔 부주의로 아이들이 사당 벽에 낙서를 한 일 등 김씨 문중에 욕이 된 일이 있었음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그런 표 선생의 사과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하암리 노인들이었다. 노인 하나가 담뱃대로 표 선생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 순간 표 선생은 자기의 멱살을 쥔 노인네를 냅다 뿌리쳐 던졌다. 그 노인네가 땅 바닥에 넘어지면서 뇌진탕을 일으켰던 것이다. 표 선생이 꼼짝없이 살인범이 돼 버린 내역이었다. 하암리 사람들이 하나같이 불리한 증언만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사람, 몇 신데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김 차석이 사무실 안을 서성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야근인 정 순경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박 경사는 애기가 경기증을 일으켜 한약방에 약을 사러 간다고 탑골로 가던 정 순경 얘기를 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김 차석에게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갈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표 경철 선생으로 꽉 차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 별일도 없는데 천천히 나와도 좋다고 내가 아까 말했소."

박 경사는 짐짓 심술스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나다를까,

"소장님, 별일이 없다니요? 지금 표 경철이가 장거리에 와 있다는 걸 우습게 보심 안됩니다."

", 그때 사건 조사 때 위증이라도 챘나?"

"소장님, 농담하지 마십시오. 표 경철일 잘 몰라서 그러시지만, 까딱하다간 크게 당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무슨 난동이라도 부릴 것 같아 그러오?"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박 경사는 짐짓 가볍게 물었던 것이다.

"지금 표 경철이가 누구하고 술을 마시고 있는지나 아세요?"

"하암 학교 선생님들이겠지."

"그게 아닙니다. 아까 여기 왔던 사람들이에요."

"여기 왔던 사람들이라니?"

박 경사가 시치미를 멨다.

"정 순경이 얘기 찬 했군요. 유 판석이하고 최 진혁이 말입니다."

"그 사람들하고 표 선생은 어릴 때부터 친구라면서?"

"그냥 친구로 만난 게 아니라구요. 유 판석이 그놈들 성질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박경사는 끄윽끄윽 시원치 않은 트림을 억지로 만들어 냈다. 역시 소화제를 가지고 나오는 건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트림이 나오는 단계가 지나서 이제는 배가 뿌듯하고 숨이 답답한 증세가 심해진 때문이다. 이제부터 매사 의욕이 나지 않고 손에 힘살이 풀리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김 차석, 그 표 선생, 학교에 복직은 어렵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엉뚱한 걸 묻고 있는 박 경사였다.

"소장님, 그 사람 취직시켜 주시려구 그러십니까?"

"김 차석, 그 사람들이 그렇게 두렵소?"

박 경사는 자신의 말이 김 차석에게 불쾌감을 줄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묻고 있는 자신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속이 몹시 불편해서 그러는 거야. 소화제를 먹어야 하는 건데.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변명하고 있었다.

"소장님, 참 이상하십니다. 뭔 말씀을 자꾸 그렇게 하십니까. 내가 왜 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얘깁니까?"

김 차석이 몹시 불쾌한 얼굴로 다그치고 있었다.

"김 차석, 도대체 왜 표 경철 선생 부인이 자살한 것 같소?"

김 차석이 어이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뻔히 치어다보다가 되물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물으시는 겁니까?"

"그 죽은 여자의 남편이 왔잖은가. 표 선생이 찾아와 자기 부인이 왜 죽었느냐고 캐묻는다면 어떻게 하겠소?"

"경찰이 한 여자가 왜 자살을 했는지 그 이유까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까? 더구나 그 여자는 미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거요. 우리는 왜 그 여자가 미쳤는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그걸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단 말씀인가요?"

"알아야 했소. 더구나 그 여자는 죽었지 않소. 한 가정의 파탄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있는 게 우리 경찰이 해야 할 임무가 아니겠소."

"저는 지금 공자님 말씀을 듣는 기분이군요."

김 차석 이 빈정거렸다.

전화 벨이 찌륵찌륵륵 울렸다. 군대에서 쓰던 야전용 전화기가 김 차석 책상 위에 있었던 것이다. 수화기를 든 김 차석이 악을 쓰듯 그렇게 높은 목소리로 받고 있었다. 감이 먼 것으로 미루어 읍에서 면사무소 교환대를 경유해서 이어지는 장거리 전화가 분명했다.

"소장님 받으십시오, 읍에서 온 겁니다."

수화기률 넘겨주는 김 차석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고물고몰 떠돌고 있음을 박 경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뒤통수에 화끈한 열기를 느끼면서 전화를 받았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오 도민 씨였다.

", 자넨가? 별일 없었지? 딴 얘기가 아니구 말이야, 자네 부친 일에 대해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 내일 모레쯤 한번 나오게. , 뭐라구? 무슨 얘기냐구? 이 사람아, 그런 얘길 어떻게 전화로 한단 말인가. 자네 말이야, 공치사 같지만 내가 자네 부친 일로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독립 투사 하나 만들어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다간 큰일나네. 더구나 요즘 이 종철 후보가 낙선 분풀이로 아주 까놓고 자네 아버지 이름을 팔고 다닌다 이거야."

오 도민 씨는 감이 먼 전화 속에서 더 길게 너스레를 떤 다음,

"그건 그렇고 말일세, 오늘 거기 우리 산판 차 일곱 대 들어갔지? , 그래그래, 안 나왔을 거야. 이따가 말이야, 우리 차 거기 나오거든 말이야, 그 차주 중에 심씨라고 있어. 그래, 내가 쓰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 심씨한테 읍에 나오거든 나를 꼭 보고 가라고 하란 말이야. 다른 게 아니고 말이야, 경기 도경에서 선거가 끝난 뒤에 단속이 강화됐다는 거야. 오늘 밤에 비상이 걸렸다 그거야. 그러니까 그냥 올라가지 말고 나한테 먼저 들려야 한다고 하란 말이야. 이봐, 자네 뭔 얘긴지 알겠나? 꼭 전해야 하네. 내 청평 지서에두 연락해 놓겠지만 말이야."

박 경사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젠 만들어 하는 트림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현관의 외등에 모여든 날벌레를 바라보면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외등이 밝힌 아주 작은 공간을 찾아 저처럼 무의미한 난무를 벌이는 그들 하루살이의 생리가 싫었다. 외등 저쪽 무한한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날벌레들의 보이지 않는 그 외로운 비상을 생각할 때 그는 가슴이 눌린 듯 암울하고 처연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벌레가 갖는 외로움을 느꼈다.

아버지, 그는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아버지를 살려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지고 싶었다. 그것이 실상이든 가상이든 그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만지고 싶었다. 아버지 그분만은 이 암울한 늪에 빠져 허덕이는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가슴에 싹터 올랐던 것이다.

"표 경철 선생이 여기에 올 것 같소?"

그는 무심결에 그렇게 묻고 있었다. 장거리 변씨네 가게까지 달려가 그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만은 차마 입밖에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소장님, 그 사람이 무서워서 그러세요?"

김 차석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까 당한 데 대한 화풀이가 된 양 그는 헤벌쭉 웃고 있었다. 박 경사는 대답 대신 심호흡을 하며 바른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아플 정도로 꾹꾹 눌렀다. 그런 지압 방법이 소화 기능을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는 오랜 겅험을 통해서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체 트림은 나와 주지 않았다. 큰 트림 한번만 해도 가슴이 확 뚫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트림은 나을 기색이 아니었다.

정 순경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역시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때, 애기는 좀."

뭔가 대단한 얘기를 떠벌리려는 양 서두는 정 순경을 향해 박 경사가 먼저 물었다.

"괜찮아요. 경기엔 영사가 좋다고 해서 사다 먹였더니 아주 깨끗이 나았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그는 허둥거리며 사무실 한구석 음료수대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며 계속했다.

"표 경철 선생이 온 거 모르시지요?"

김 차석이 정 순경을 향해 내뱄았다.

"알고 있어 ! 이 사람아,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그래 인제 나온단 말이야?"

"약 사러 탑골에 갔었다니까요. 글쎄 말입니다, 표 선생이 장거리서 술을 먹고 있다잖아요. 그래 내가 밖에서 들여다봤거든요. 유 판석이들하고 술을 마시면서 표 선생이 엉엉 울더라니까요. 사람들이 쑤군거리데요. 뭔 일이 꼭 생길 것 같다는 거지요. 글쎄 최 진혁이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술상에다가 칼을 꽝꽝 꽂더래요. 내가 봤을 땐 그런 칼 같은 건 없었지만 분위기 하난 으시시하데요. 하암리 사람들은 표 선생 패들이 난동을 부리면 당장 집어넣는다구 기세들이 또 대단하더구먼요. 정말 그러다가 뭔 일이 안 터질 지 모르겠네요."

박 경사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쳐보았지만 헛일이었다.

"또 소화가 안되시는 모양이죠?"

정 순경이 물었다.

"정순경, 아까 낮에 산판에 차 몇 대 들어갔지?"

"거기 일지에 체크했잖아요. 모두 일곱 대 들어갔어요. 전부 수작골 산 판으로 간다데요."

"됐어. 혹시 나 없을 때 그 차 나오거든 붙잡아 둬. 나 집에 들어가 약좀 먹고 나을 거니까 말이야."

?"

정 순경과 김 차석이 동시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절대 통과시키지 마라. "

그는 현관을 나와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멀리 장거리 쪽 불빛이 어둠의 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자 그런대로 밤바람이 얼굴에 괜찮게 스쳤다. 장거리 어둠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시골의 여름밤을 흔들고 있었다.

"어디 아파 그러세요? "

집에 들어서자 그의 아내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박 경사의 얼굴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편장이가 그렇듯 집안 여기저 기를 서둘러 뒤지기 시작했다. 읍에 나갈 때마다 약방에서 소화제를 사다가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화계는 어느 곳에고 보이지 않았다,

"여기 뒀던 약 어디다 치웠어?"

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제 보니까 빈 통만 있던데요. 그래서 버렸는걸요. 또 소화가 안 되는가 보죠? 아까 저녁에 밀국수 잡순 게 좋지 않았나 봐요. 아이 속상해 죽겠네, 요즘 좀 웬만하시더니......"

그의 아내가 징징 우는 소리로 말하며 탑골 한약방에 가 약을 사오겠다고 일어섰다. 그는 아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아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의 아내가 익숙한 솜씨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눌러 주무르는 지압을 시작했다. 기분이겠지만 그렇게 하면 가슴에 좀 시원한 느낌이 왔다.

박 경사는 아내의 생활에 쪼들린 그 얼굴을 쳐다봤다. 남처럼 많은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하거나 남이 가진 것을 시샘할 줄 모르는 소박한 여자였다. 월급 외의 돈을 들여가면 그것을 받아들고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떨었다, 몇 달이 지나도 그 돈에 손을 대지 못한 채 그것으로 해 아예 괴로워하는 여자였다. 지서 소장 부인이라고 이웃들이 따돌림할 것이 두려워 항상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남의 집 허드렛일까지 거들어 주고 싶어하는 아내 - 박 경사는 손을 주무르는 그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새삼 고마움을 느낄 때 갖는 그런 감동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되었다. 그는 그것이 뭔지 몰라도 아내를 붙잡고 한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카톨릭 신자가 고해를 하기 위해 신부를 찾는 심정이 이해될 것 같았다. 뭔가 자기의 삶에 끼어 들어 삐거덕거리는 것을 엄마가 아이들 이를 뽑듯 그렇게 매몰차게 제거해 줄 신비와 사랑을 가진 손을 그는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디가 굵고 거친 아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아주 거침없는 트림이 크게 터져 나왔다. 그처럼 가슴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제 됐소."

그는 이제까지 한번도 그렇게 해보지 못한 일을 했다. 그것은 아내의 그 거친 손을 다잡아 쥔 것이다. 손을 빼내며 얼굴을 마치 소녀처럼 발갛게 물들이는 아내를 향해 그가 말했다.

"당신은 농사꾼의 아내가 돼도 끄덕 없겠는걸,"

그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면서도 여자의 특유한 그 민감성으로 해 눈에 일순 불안을 보였다. 그는 어차피 절망을 한번쯤 안아야 할 일이라면 아예 일찍부터 길들여지는 것도 괜찮으리란 비장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의 가슴이 그 한번의 .트림으로 해서 바람 없는 날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게 가라앉고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었다.

"애들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해."

그는 서둘러 일어섰다. 먼 데서 들러오는 차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상암리 쪽에서 산판 차들이 나올 때마다 그 헤드라이트 불빛이 지서 앞 왜갈봉에 번뜩번뜩 와 닿곤 했는데 그가 방문을 열고 나서자 지금 불빛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지서로 들어섰다. 정 순경은 정복을 입은 채 문턱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고 김 차석은 책상에서 뭔가 쓰고 있었다.

산판 차가 장거리쯤 이르러 있을 것이다. 박 경사는 벽에 걸린 경찰 전투모를 벗겨 썼다.

그러나 지서 앞에 나타난 것은 고작 한대뿐이었다.

"어이구, 수고들 하십니다요."

얼굴이 낯익은 두꺼비란 별명의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섰다. 몸이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 운전수는 대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차를 몰고 나왔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차들이 다 빠져 나간 다음에야 는정는정 나오기 마련이었다. 한번은 그 차가 맨 뒤에 나와 마지막 체크를 하고 있는데 장거리 쪽에서 사람이 헐레벌떡 쫓아왔다. 산판 차 운전수가 돼지새끼를 홈쳐갔다는 신고였다. 차를 뒤지니까 운전석 밑에 꿈틀거리는 게 있었다. 자루 속에 새끼 돼지 두 마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장난으로 그랬다고 뒤통수를 긁었다. 입건해야 마땅한 일이었지만 새끼 돼지를 찾은 사람이 사정하는 바람에 각서만 쓰고 훈방을 했던 사람이다. 정 순경이 유독 그 운전수를 싫어했다. 사람이 칙칙하게 생겨먹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차 바퀴를 발로 두어 번씩 차 점검해 보곤 성큼성큼 지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꼭 제 집에서처럼 스스럼없이 한쪽 구석에 놓인 물주전자를 찾아 그냥 꼭지를 입에 댄 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른 차들은 왜 안 나오는 거요?"

박 경사는 자신의 목소리가 무척 퉁명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곧 오겠지요. 꼰지리 내길 해서 내 차에 제일 먼저 실었거든요."

그는 남방을 벗어 어깨에 걸치며 다시 말했다.

"소장님, 나 저 숙직실에서 눈 좀 잠깐 붙여두 될까유?"

그 운전수는 이쪽의 대답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은 물음이라는 듯 벌써 숙직실 문지방에 두 발을 덜렁 걸친 채 요란한 하품과 기지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벌렁 몸을 눕힌다. 정 순경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짓곤 밖으로 침을 탁 내뱉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외등에 모여든 날벌레 수효는 많아졌다.

다른 산판 차들이 하나 둘 나타나 지서 앞에서부터 비석거리 있는 데까지 늘어선 것은 꽤 오랜 뒤였다. 그 두 번째 차에 심씨가 타고 왔다. 키가 작고 퍽 교활해 뵈는 인상의 중년이었다.

"와따나, 덥구만요. , 이 사람 되게 설쳐쌓더니 겨우 여기 와서 팔자 좋게 잘려고 그랬구먼."

심씨는 그 운전수가 문지방에 발을 걸친 채 코까지 골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는 내일쯤 비가 올 것 같다는 얘기에서부터 지난 선거 때의 에피소드를 주워섬기는가 하면 금세 읍내의 갈보집 여자 궁둥이 크다는 얘기까지 떠벌렸다. 차 점검을 끝낸 운전수들이 하나 둘 지서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박 경사는 더 기다렸다. 심씨가 반출증을 스스로 내놓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는 생각이었다. 서두를 일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수백 마리 잡는군. "

박 경사는 내심의 초조를 감추기 위해 짐짓 정 순경을 향해 농을 걸었다.

정 순경이 또 그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책상 밑을 노려보는 일을 시작한 때문이었다.

차 정비를 끝낸 몇몇 운전수들이 지서 앞에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박 경사는 그들을 모두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칠팔 명의 장정이 들어서자 사무실 안은 꽉 찬 느낌이었다.

"들어오긴, 이제 곧 출발해야지. 서둘러야 낼 새벽 4시 전에 망우리에 닿겠는걸."

심씨가 운전수들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 숙직실에서 코를 골던 운전수도 크게 몸 기지개를 바며 일어나고 있었다.

박 경사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말했다.

"심씨, 반출증 좀 보여주시오. "

밖으로 나가려던 심씨가 멈칫 돌아서며 무슨 얘기냐는 듯 박 경사를 쳐다보았다.

"김 차석, 이 양반들 반출증 철저히 체크하도록 하시오."

김 차석과 정 순경이 동시에 박 경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경찰 전투모를 쓴 박 경사를 처음 발견한 양 자신들의 모자가 걸려 있는 벽 쪽을 무의식중에 바라보았다.

"상부 지시요. 요즘 부정 반출을 하는 목상들이 있다는 거야. 김 차석, 아까 읍에서 온 경비 전화 들었지요?"

김 차석이 무슨 얘기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박 경사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심씨, 어서 반출증을 보여요. 반출증 없인 나무 한 토막이라도 실어낼 수 없다는 걸 당신들도 잘 알지 않소?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당신들 차에 실은 원목에 찍힌 검인을 확인해 보겠소. 그 검인까지 가짜 철인을 만들어 찍는다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오."

심씨가 싱글싱글 웃으며 박 경사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사무실을 가득 채우고 선 운전수들도 흥미로워하는 그런 웃음을 만들고 있었다. 가소롭다는 그런 뜻의 웃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장님, 뭔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마 생판 모르는 데서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내 간 다 떨어졌겠시다."

그러면서 심씨는 뒷주머니를 훔척훔척 무엇인가 꺼내고 있었다. 그는 지폐 몇 장을 김 차석 책상 위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

"날씨두 더운데 내일 천렵들이나 한번 하셔."

그는 박 경사를 향해 손을 한번 번쩍 쳐들어보인 다음 운전수들한테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잠깐!"

박 경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우루루 밖으로 나가던 운전수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려 박 경사는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심씨, 나 지금 당신들하고 농담하고 있는 거 아닙니다. 김 차석, 그 돈 잘 보관해 두시오. 심씨가 뇌물로 빼놓은 거니까, 증인도 여럿 있고......"

운전수들이 킥킥 웃었다.

"와아 참, 농담 한번 잘 하시네. 소장님, 이거 중말 왜 이러십니까."

"반출증만 내놓으면 될 거 아니오."

"아이구 소장님, 제발 좀,,,,,,"

심씨가 박 경사를 향해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을 비벼 댔다, 그러나 그 교활한 눈과 입은 웃고 있었다.

"내놓으시오. 내가 당신하고 언제 농담했소?"

"하아 참, 다 다시면서, 읍에 두고 왔어요, 읍에."

"심씨, 내가 어린애로 보입니까?"

박 경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집에서 났던 그 시원한 트림이 또 한번 나자 속은 더없이 편해졌다,

이쪽 기세가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심씨가 이번에는 되려 정색을 하고 나왔다.

"소장님, 이 나무가 어떤 분 산판에서 나오는 건지 몰라서 그러십니까?"

얼굴에 야비한 웃음이 떠도는 심씨를 향해 박 경사가 말했다.

"잔말하지 말고 반출증 내놓으시오."

", 읍에 전화 한 통 쓰겠시다."

심씨가 서슴없이 경비 전화로 달려갔다.

"이봐, 당신 그 전화 놓지 못해 ?"

박 경사가 크게 소리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심씨가 기세 있게 들었던 전화기를 도로 내려놓으며 금방 곤혹스런 표정으로 바꿔,

"제발 좀 살려줍쇼.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즈이들이 뭘 잘못한 게 있다는 얘긴지. 김 차석님, 차석님은 아실 거 아녜요?"

그러면서 그가 운전수들에게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나가지들 마시오. 당신들한테두 볼 일이 있으니까."

박경사가 운전수들을 향해 말했다.

심씨가 김 차석 앞으로 다가가 은근스럽게 허리를 굽혀 귀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러나 김 차석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담배만 피워 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심씨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정 순경은 퍽 흥미 있어하는 표정으로 일의 사태를 흘금거리며 여전히 바퀴벌레를 밟아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반출증이 없다니까, 이제 당신 차들은 나갈 수 없소. 이제 그 문제는 끝난 거요."

박 경사는 그렇게 말해 놓고 심씨 곁을 지나 운전수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에 앞서 감 차석과 정 순경을 가까이 불러 귓속말을 했다.

"협조해 주시오. 미리 상의 못한 건 내 나중에 사과하리다."

그렇게 일러놓은 뒤 그는 일곱 명의 운전수들을 훑어보았다. 맨 뒤에 선 두꺼비란 별명의, 아까 숙직실에서 잠을 자던 운전수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 일 년 전부터 여기 드나드는 분만 오셨구먼. 아주 잘 됐소. 실은 상부 지시로 조사할 게 있어 기다리던 중이오."

그는 조사서 철이 꽂힌 서류함 쪽으로 걸어가 두툼한 서류철 하나를 뽑아들었다.

"여러분 중에 약 일 년 전 우촌면에서 이 마을로 오는 젊은 여자 하나를 태워다 준 사람이 있을 거요."

박 경사는 일곱 사람의 얼굴 중에서 두꺼비란 별명의 운전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예감이 적중했을 때의 기분은 실로 묘한 것이다.

그는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아 - 하고 감탄사를 터뜨릴 뻔하였다. 그것은 좀 전 장거리에 표 경철 선생이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른 한 사내의 얼굴이 다시 살아난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그는 그 의문의 얼굴 모습의 임자를 찾아낸 것이다. 아버지, 몸이 깡마른 데다 눈빛이 유난히 번쩍이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일이 잘 기억나지 않을는지도 모르오. 일 년 전이니까. 그리고 설사 기억났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랬다고 쉽게 말하지 않겠지."

박 경사는 말에 좀 뜸을 들키기 위해 짐짓 서류를 뒤적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든 여러분 중에 누군가 그 여자를 차에 태워 주었고, 그 밤에 있었던 일로 해서 그 여자는 미쳐 버렸던 거요. 그리고 그 여자는 결국 목 매달아 죽었소. 결국 당신들 중에는 누군가 그 여자를 죽게 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박 경사는 다시 자기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음에 놀라고 있었다.

"소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유, 우린 도무지 무슨 얘긴지---"

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든 온전수 하나가 억울하지 않느냔 뜻의 동의를 곁에 선 온전수들한테 구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다 알게 뒬 것이오. 그때 현장을 목격해서 그 운전수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요즘 나타났단 말이오. 필요할 때 본서에서 만나게 뒬 거요. 아니지, 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온 걸 보게 될 테지."

그는 서류철을 천천히 넘기며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남긴 유서도 있소. 국민학교 아이들이 쓰는 공책 장에 그 여자가 일의 경위를 모두 적어놓고 죽었던 거요. 그 유서가 며칠 전 발견되었소. 그것도 귀중한 자료로 제공될 것이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실을 그 여자의 남편이 알고 있다는 거요. 알 거요, 모두. 표 경철 선생이라고 하암교 교사, 그 표 선생이 2년 징역을 치르고 오늘 밤 이 마을에 나타났단 말이오. 문제는 그 사람이 당신들 중의 한 사람을 죽이고 말 거란 얘기요. 내 백 번 장담하지만 표 선생은 반드시 자기 부인이 죽은 원수를 갚고 말 겁니다. 우린 경찰로서 그런 불상사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의 협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이, 정순경, 아직두 그 사람들 장거리에서 술을 먹고 있겠지?"

정 순경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대답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아마 지금쯤은 말고개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릅니다. 상암리 유 판석이와 최 진혁이도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거든요. 모두 칼을 가졌더래요."

이번에는 박 경사가 심씨를 돌아보며 말했다.

", 심씨, 산판에서 도벌을 하고 부정 반출을 한다는 신고를 두 번씩이

나 한 사람들이 바로 그 상암리 사람들이오. 여기 그 사람들이 정식으로 제출한 신고서가 있소. , 보시오."

박 경사는 서류철을 심씨 앞으로 돌려놓았다. 심씨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른 채 한쪽 구석에 서서 식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역력해 보였다,

"내일 아침 정식으로 상부에 보고하겠소. 부정 반출을 현장에서 잡았다는 걸 말이오. 물론 우리 지서에서 그 동안 고의로 묵인해 온 죄상도 함께 올려 법적 조치를 받을 것이오. 심씨, 상부에 보고할 보고설 오늘 저녁 작성할 것이니 협조해 주시오."

박 경사는 다시 운전수들 쪽을 향해 말했다.

"추행 사건은 지금쯤 본서에서 영장이 떨어졌을 거요. 그 사람을 체포하라는 지시 전통이 관할 지역에 내일쯤이면 나가게 될 것이오. 물론 표 경철 선생을 만나게 되면 일이 더 크게 될 테지만 말이오. 어떻든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지만 구속 영장 없이 체포하진 않겠소. 더구나 그것은 오래 전 일이고 우발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수만 하면 죄가 한결 가벼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지금 그걸 알려 주는 거란 말이오. 어이, 김 차석, 우리 아까 계획대로 도벌과 부정 반출 사건 조서를 꾸미기로 합시다. 이미 각오한 거 빨리 끝냅시다."

박 경사는 자신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비록 다른 동료들이 반대를 한다고 해도 그것만은 관철하고 말 것이란 생각이었다, 모든 책임은 지서장이 지기로 한다는 각오를 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소영웅주의나 어떤 얄팍한 의미의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는 말로 해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뭔가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절박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일은 이처럼 위장의 기능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가 있는 바로 지금 그러한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뿐이다.

박 경사가 어리둥절해 있는 김 차석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을 때 둘러서 있던 운전수들 중에서 한 사람이 움직이고 있음이 보였다. 앞으로 나선 그 운전수가 박 경사 곁에 다가와 기어들어가는 입엣소리로 중얼거렸다,

"소장님한테 조용히 말씀드릴 게,,,,,,"

박 경사는 두꺼비란 별명의 그 허위대 좋은 운전수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음을 보았다. 박 경사는 그 두꺼비에게 의자를 내주고 앉도록 했다.

 

다음날 저녁 도벌 및 부정 반출에 관한 보고서가 심씨와 함께 본서로 넘겨진 시간이었다. 물론 그 두꺼비란 운전수도 본서로 넘겨졌다. 실내는 물론 외등마저 켜지 않은 어둑한 사무실에 박 경사와 그의 동료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침통한 분위기를 정 순경이 깼다.

"소장님, 왜 사전에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

"어제도 말했지만 그 문제는 사과한다는 그 말밖에 할 수 없군. 정말 모두에게 미안하게 되었소."

"그 두 가지 사건이 다 상부 지시를 받고 하신 겁니까?"

정 순경이 다시 물었다.

"내 직책이 미치는 범위에서 내 양심에 따라 했을 뿐이야."

"소장님, 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정말 그 유서를 가지고 계시는 겁니까. 표 선생 부인이 쓴---"

", 내가 거짓말을 했을 것 같아?"

그러면서 박 경사는 책상 서랍에서 흐지흐지 낡은 종이 하나를 꺼내놓았다. 김 차석만 빼놓고 모두 박 경사 악상으로 몰려갔다. 그때 왜갈봉 중턱 그 노송이 있는 현장, 죽은 사람의 스웨터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국민학교 아이가 샜을 게 틀림없는 조잡한 필체의 수자만이 어지럽게 적혀 있었을 뿐이다.

"아니 이건? 유서가 아니잖아요!"

"온통 숫자만 적혀 있다 그건가? 그래, 숫자란 참 고한 거야. 정 순경 자네가 바퀴벌레 여섯 마리를 잡고 오륙 삼십, 삼 백 마리를 잡았다고 계산하는 그런 식이 바로 숫자의 세계야. 거기 한 곳을 잘 살펴보게. 100라는 숫자가 있을 거야. 산판 사람들이 몇 사이라는 말과 함께 많이 쓰는 단위지. 난 거기서 힌트를 얻은 거야. 얼마 전 집에 걸어 둔 여름 작업복 주머니에서 그 종이를 찾아낸 뒤부터 줄곧 표 경철 선생 부인의 자살 사건을 생각해 왔네, 즉 그 여자의 죽음을 산판 사람들하고 연관시켜 본 거야. 한 여자가 미치지 않으면 안될, 그리고 결국은 자살까지 하게 된 한 여자의 정신적 파탄이 어떤 것일까, 이 세상의 한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네. 그것은 괴로운 일이었어."

모두들 숙연한 얼굴을 해 가지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김 차석 혼자만 멍청한 자세로 어두워지는 바깥에 눈길을 보내고 앉아 있었다.

"김 차석. "

박 경사가 나지막하게 불렀다.

"김 차석, 우리 서로 괴로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나 그렇게 쉽게 사표는 안 쓸 거요.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떳떳한 일인가를 내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오."

그때 김 차석이 밖에 내려 덮이기 시작하는 어둠의 깊이만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소장님, 표 경철 선생과 상암리 사람들이 이번 일을 통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자기네들이 무서워서 우리가---"

김 차석의 말을 박 경사가 중간에서 잘랐다.

"맞아. 우린 그들을 좀더 진작부터 무서워했어야 옳았던 거야. 그들 곁에 가까이 나아가 그들이 어둠 속에서 겪는 절망과 그 분노가 어떠한 것인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했던들 오늘 우리가 맞은 밤이 저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을는지 몰라=

박 경사는 꽤 어둑해진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밖이 어둡구나. 외등을 켜라.

그는 누군가 자기 귓가에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얼굴이 깡마르고 눈빛이 빛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머리 속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 자신의 머리를 짚어 주던 그 어린 시절의 어느 밤이 보여졌다. 그래 아버지가 일어나 어두워진 방에 불을 밝혔듯 박 종대 경사는 현관 외등에 불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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