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는 죽지 않았다-유 시 민
88년 일본 국토청 장관 오쿠노의 발언이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중일 전쟁은 일본의 계획적인 침략이 아니라 ‘노구교 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일어난 전쟁이다.” “전쟁에서 우리 일본인도 많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나라가 조선이나 중국을 침략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침략의 역사를 정면 부인하는 오쿠노의 발언은 한국과 중국 정부의 항의와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오쿠노 자신은 “그 같은 비난의 이유를 알 수 없으며 나의 말에 잘못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사회당과 공명당 등 야당이 오쿠노의 해임을 요구하는 정치 공세를 벌이자 41명의 자민당 소장파 의원으로 구성된 소위 ‘국가 기본 문제 동지회’는 오쿠노의 발언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이유 없는 외국의 비난, 그리고 이에 영합하는 국내 일부 정당에 대해 맹성(猛省)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부당한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국가 주권을 수호하자”고 주장해 왔었다.
이 같은 광경이 낯선 것은 결코 아니다. 80년대 들어, 특히 1982년 겨울에 나까소네가 수상으로 취임한 이후 일본의 침략 역사를 부인하거나 정당화하는 갖가지 일들이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82년 일본 정부의 교과서 왜곡사건, 나까소네 ‘일본국 내각총리 대신’의 공식적 신사 참배, 후지오 문부성 장관의 잇단 역사 왜곡 망언, 평화 헌법의 개정 움직임을 돌이켜볼 때 88년 5월의 오쿠노 망언은 우연한 일도 놀라운 일도아닌 것이다.
일본 정부는 82년의 교과서 왜곡 당시에 조선에 대한 침략을 ‘진출’로, 3 · 1운동을 ‘폭동’으로, 조선어 사용 금지를 ‘조선어 · 일어 공용’으로, 창씨 개명 강요를 ‘권장’으로 기술하라고 필자들에게 입력을 넣었다. 이는 자라나는 세대가 과거의 침략사를 알지 못하도록 하기 의한 조치였다. 또한 나까소네가 참배한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유신이후 수십 회의 침략 전쟁에서 사망한 일본 제국의 군인들이 봉치된 곳으로 낡은 제국역사를 정당화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후지오 등 일본 정부의 각료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조선과 조선인에게 유익한 것이었다는 식의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행위들은 그때마다 세계평화 애호 국민들과 양식 있는 일본인들로부터 강력한 규탄을 받아 제동이 걸리곤 했지만 앞으로 더욱 빈발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단순한 ‘과거’ 의 왜곡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의미하며 인류의 미래가 또다시 불행의 구렁텅이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뿌리 깊은 침략적 속성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국주의적 침략적 속성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뉜 일본의 역사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각 지역에 할거한 봉건 영주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과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봉건 영주는 농민을 무력으로 지배하기 위해 무장한 가신 (家臣) 집단을 양성했는데, 이 가신들이 사무라이 [武師]이고, 이들이 지녔던 칼이 소위 ‘일본도’이며, 이 같은 봉건 지배 체제를 합리화시킨 이데올로기가 바로 무사도 (武士道)이다. 무사도는 12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후에 유교 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었다.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이 가장 즐겨 보는 고전 연극 [가부끼]은 주군 (主君)에 대한 사무라이의 충성, 복수, 희생 등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패배한 영주를 따라 집단적으로 할복 자살하거나 수십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하면서 원수를 갚는 ‘용맹한 사무라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무사도는 사무라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일본인의 정신으로까지 확산되었다. 2차 대전 때 총과 비행기와 대포를 가진 일본 장교들이 일본도를 절그럭거리고 다닌 일이나 전투에서 패배할 때 전원 옥쇄한 행동은 바로 무사도에 근거한 것이다.
마지막 봉건 왕조인 덕천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적 국가가 출현하면서 무사들은 칼 휴대를 금지당했고 봉건 영주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무사도는 천황제 근대 국가의 군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제는 자급 자족적 봉건 경제 대신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물질적 조건 위에 무사도가 접목된 것이다. 일본의 봉건 지배 계급은 서구 열강의 위협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시민 혁명을 통해 봉건 지배 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확립한 유럽과는 달리, 봉건 지배층이 산업 발전을 주도한 일본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싹틀 수 없었다. 시민 정부 대신에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천황제가 유지되었으며, 의회는 매우 제한적인 권한밖에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천황제 근대 국가의 군대는 신식 무기와 함께 봉건적 무사도로 무장하고, 봉건 영주들의 내전 대신에 ‘대일본 제국과 천황 폐 하’를 위한 대외 침략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는 동시에 제국주의적 대외 침략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은 독일 제국의 경우와 동일한 것이다. 경제적 권력은 천황제 국가의 비호를 받는 소수 재벌에게 집중되었으며 정치적 권력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부 지배층과 관료들에게 독점되었다. 일본의 민중은 대부분 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인식하지 못하였으며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패배의 충격과 화려한 부활
2차 대전에서의 패배는 일순간에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도오조 히데끼 [東조 英機]를 비롯한 군부 관료 집단은 전쟁 범죄자로 체포되었고 천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이 똑같은 인간임을 시인해야 했다. 백전 백승하는 대일본 제국의 영광을 물거품처럼 꺼져 버렸고 군대와 재벌은 해체되었다. 어제의 지배자들은 민중의 저주를 받았고 산업 시설은 파괴되어 남은 것은 원자 폭탄의 악몽과 전쟁의 폐허뿐이었다. 연합국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군대를 보위하지 못한다는 평화헌법을 받아드리게 했다. 이제 낡은 ‘대일본 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전후의 동서 냉전이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이른바 ‘전후 역코스’가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 군대가 패주를 거듭하고 동유럽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공산당과 사회당 등 좌익이 주도하는 총파업과 혁명 운동이 불붙어 오르자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반공 기지’ ,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키울 결심을 굳혔다. 맥아더 원수의 미 점령군 사령부는 1948년말 전범 재판에서 도오조를 비롯한 7명을 교수형에, 16명을 종신형에 처하는 것으로 전범자 처벌을 마감했다. 천황제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미국의 후원을 받은 요시다 시게루가 수상에 취임했으며 좌익은 다시 탄압에 직면했다. 게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과거 전쟁 범죄자들이 모두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1만여 명 이상의 주모자급 전범들이 모두 공직으로 돌아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의 각 분야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해체되었던 재벌 기업들도 재편성되어 살아났다. 경찰 예비대가 창설되었고 1954년에는 자위대가 발족함으로써 일본은 실질적인 재무장 을 갖추었다. 미국은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 국수주의자, 파시스트, 천황제의 광신 자들을 동맹자로 선택하여 그들에게 일본의 정치 권력을 넘겨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 제국 주의자들은 부활의 음모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의 이러한 사태 진전은 독일의 경우와 비교할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미 · 소에 의해 분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의 조사, 원인 규명과 제거 작업이 철저히 이루어져,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보듯 거의 모든 전쟁 범죄자들이 철저하게 단죄되었으며, 특히 동독에서는 협력자까지 완전히 숙청당하였다. 서독의 경우에는 협력자만은 살아남았지만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그야말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 오늘날에는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군국주의 사상의 부활이 현실로 드러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만년 여당인 집권 자민당 정권은 60년대에 메이지 유신 1백 주년 기념제를 성대하게 거행하고, 침략 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대규모의 예산을 배당하였으며, 국민 세뇌를 위한 천황의 ‘교육 칙어’를 부활시키려 애쓰고, 냉전사상을 국민들 사이에 퍼뜨리는 데 열을 올렸다. 군사 대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자기네의 욕망을 국민적 욕구로 조작해 내기 위해 힘쓴 것이다.
군사 대국으로의 성장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곧바로 나타났다. 1970년 10월, 청년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천황 중심제 국가의 부활’과 ‘일본 정신의 회복’을 절규하면서 매스컴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도로 ‘일본식의 할복 자살’을 한 사건이 그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엄연한 근대국가요 동양에서 으뜸가는 선진 경제 대국에서 일어난 이 끔찍한 사건을 두고, 일본의 매스컴은 한편으로는 경악과 비판의 화살을 겨누면서도, 뒤로는 마치 순국의 영웅을 떠 받들 듯 흥분과 찬사를 퍼부었다. 일본의 지배층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대일본 제국’사무라이 군대 정신에의 향수와 군사 대국에의 유혹을 부추기는 대대적인 선동을 진행시켰다. 연극, 영화, 소설 등 예술 분야에서도 사무라이와 전쟁을 미화한 작품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군국주의자, 복고주의자, 우익 세력의 영웅이 되었으나 전 세계 평화 애호 국민들에게는 소름끼치는 전율과 경계심을 가져다 주었다.
일본 정부는 1957년부터 81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5개년 군사력 증강 계획을 실시하였는데 매번 방위비의 액수를 두 배씩 증강시켜 77 ~ 81년의 5차 계획 동안에 무려 11조 엔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84년에는 GNP대비 1%의 상한선을 무너뜨리고 자위대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GNP의 1%라 해도, 그 약수는 60만의 현대적 군대를 보유한 한국 군사 예산에 비해 네 배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 이다. 게다가 언제든지무기 생산 시설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각종 중화학 공업 분야의 생산력을 감안할 때, 일본의 군사력은 남북한의 군대를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은 이미 미 · 소 · 중에 이어 세계 제 4위의 군사 대국으로 성장해 있다.자위대는 명칭과 작전 범위만 바꾸면 그대로 침략 군대가 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핵무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더욱이 미국은 자국의 부담을 덜기 위해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더한층 부추기고 있다. 일본 자위대는 미군과 수시로 합동 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며, 유사시 대한 해협을 봉쇄하거나 한반도에서 작전을 펼칠 모든 계획을 이미 갖추어 놓고 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한 · 미 · 일 삼각군사동맹을 체결하여 대소 봉쇄를 강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일본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 민중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하고 있다.
우선 패전 직후 몇 년간 미군정이 실시한 제국 일본 해체 작업의 와중에서 군국주의와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해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낀 다수의 일본 국민이 재무장에 반대하고 있다. 비록 소수 야당이긴 하지만 공산당과 사회당이 이들의 의사를 대변하여 자민당의 군국주의 부활 음모를 강력히 견제한다. 노동 조합과 각계 각층의 이익 단체들,반핵 반전 반공해 운동 단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자민당 정권의 음모를 가장큰 곤경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전후 세대의 개인주의 의식이다. 전후 경제 부흥과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라난 젊은 세대는 대부분 ‘마이홈 (my home) 주의’의 신봉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쟁과 재무장에 반대하는 것은 어떤 고귀한 이상이나 평화 애호 정신때문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과 가족의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이 파괴당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재무장에 반대한다. 60년대까지 전일본을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뜨렸던 좌익 학생운동은 ‘전공투’와 ‘적군파’의 테러 활동을 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오늘날의 일본 젊은이들은 어떤 정치적 이념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무관심하다. 오로지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인 것이다. 여러 가지 여론조사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본의 전쟁 세대는 2차 대전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전후 세대는 정치적 무관심과 ‘마이홈주의’때문에 재무장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최소한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바로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일본 제국’과 사무라이 일본 정신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자라나는 세대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서 제국주의 침략 정쟁을 미화하는 내용을 주입하며, 소련과 중국을 가상적인 적으로 하는 냉전 이데올로기와 적대 의식을 고취시키는 선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일본 젊은이들은, 조선과 중국에서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죽이고 불태운 ‘대일본 제국 황군’의 잔학 행위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음모 역시 크게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일본의 나이 먹은 고급 관리들은 대개 2차 대전의 전범들이다. 예를 들어 1958년 제 1차 5개년 군비 확장 계획을 추진한 기시 노부스케 수상은 조선과 만주, 중국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당시 일본 제국의 재무 담당 책임자로서 전범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자였고, 88년 5월의 망언으로 장관직에서 내쫓긴 오쿠노는 일제시대의 그 악명 높은 사상 탄압 경찰인 특고 (특별 고등 경찰) 출신인 것이다. 82년의 망언으로 유명한 후지오나 88년 망언을 한 오쿠노는 자시 생전에 군국주의의 부활을 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초조감에서 그 같은 망언을 내뱉은 것이겠지만, 일본 군국주의 집단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군국주의 사상이 얼마만큼 영향력을 확대했는가를 알아보는 일종의 여론 테스트이다.
그들의 음모를 저지하고 있는 또하나의 힘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악몽을 잊지 않은 세계 평화 애호 국민들, 특히 중국과 남북한 민중의 감시와 비판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군대와 전쟁권의 포기를 명시한 평화 헌법, 핵무기 생산과 반입과 보유를 금지한 비핵 3원칙 등을 폐기함으로써 재군비를 합법화하고 핵무기를 생산 보유하며 무기를 수출하고 자위대를 해외에 파병하여 경제 대국 일본을 군사 대국화하려는 꿈을 오매 불 망 그리고 있다. 아울러 군부의 힘을 강화하는 각종의 입법 조치를 준비하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 만일 이러한 음모가 실현될 경우 가장 먼저 피해를 당할 나라가 인접한 남북한과 중국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애호 국민들은 일본의 동태를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음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2차 대전 당시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여 황색 인종이 단결함으로써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선전으로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환태평양 연대’ 구상을 내세워 아시아에 있어서의 패권을 추 진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일본의 침략을 경험한 아시아 각국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역사 교과서 왜곡과 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들이 그때마다 중국과 남북한의 맹렬한 비판과 항의에 의해 좌절당한 최근의 사태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와 협력자들을 철두 철미하게 응징한 북한과 중국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으며, 심지어 친일 매국노들이 정권을 장악한 한국에서까지도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경계하는 여론은 실로 강력한 것이다.
민족의 생존과 자주권을 지키는 길
광복 40년 만에 독립 기념관이 만들어지고, 국민 소득 3천 달러가 넘었다고 해서 기뻐할 일이 아니다. 매년 1천 5백억 달러의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로 허덕이는 미국은 방위비 절감을 위하여 동아시아에서 일본 자위대의 힘과 작전 범위를 확대하려 하고있다. 미군의 철 수는 빠르든 늦든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경우 미군이 빠져나간 힘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것은 일본 자위대뿐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면서 일본군이 부산항에 상륙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황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청나라와 일본 군대를 끌여들여 동학군을 학살하게 한 이씨 왕조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을 수호하기’ 위해 한국 내의 사대주의자와 군국주의자들이 자위대를 불러들이는 것이 결코 허황된 가정은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 부활의 성패 여부는 일차적으로 일본 국민의 각성 정도와 의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인접한 나라들, 물론 우리 나라를 포함한 평화 애호 국민들의 태도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물론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음모는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역사는 역행할 때도 있는 법이다. 만일 그들이 승리를 거둘 때 제일 먼저 역행하는 시대의 수레바퀴에 깔려 피흘릴 사람들은 한국인이다.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국민 위에 군림하는 총칼의 정치, 인권 유린과 고문, 사대주의, 각종 왜색 문화와 경제적 대일 의존 ----를 일소하고, 철저히 민주적이고 자주 적인 나라를 건설할 때에만, 우리는 비록 일본 제국주의가 완벽하게 부활한다 할지라도 민족의 생존과 자주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88년의 오쿠노 망언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값비싼 교훈이다. 오쿠노의 사임에 대해 우리 나라 외무부는 “늦었지만 환영할 만할 일이며, 이로써 문제는 일단락되었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상 문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또 한 번의 ‘경술 국치’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시민/ '거꾸로 읽은 세계사',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등이 있다.
'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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