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식
사령제의 의미
오랜 세월을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으며, 지금도 죽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나 읽는 사람도 죽을 것이다. 죽음은 이토록 우리들에겐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죽음'이나 '저승'을 아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오늘 이때까지는 저승에서 되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관념적인 것이다.
삶이 의식의 세계라고 한다면 죽음은 의식이 없는 세계, 곧 무의식의 세계라 하겠다. 사람은 의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의식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무의식의 세계라고 듣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죽음 일는 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종교인들은 죽음의 관념을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삶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첩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의 죽음의 이해라 지만, 한국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불교인은 불교적인 이해를 가질 것이며, 기독교인은 기독교적인 죽음의 이해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공통된 죽음의 이해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무의식의 세계는 하루 이틀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민족적인 집단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관념의 세계가 아니가 한다. 각종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해는 민중의 마음 바탕 한구석에 살아오고 있다. 한국인이란 바로 민중이다. 민중이 지닌 죽음의 이해에서 한국인의 죽음의 이해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민중의 죽음 이해를 의식화한 것이 죽은 이를 위한 제례인 것이다.
종교의 종류야 여하튼, 또 종교를 가지고 있든 안 가지고 있든 죽은 자를 앞에 놓고 의식을 가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국의 민간 신앙인 무속에 있어서도 사령제는 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방에 따라 사령제의 명칭들이 다르다. 대체로 중부 지역에서는 '진오기' 또는 '상문풀이'라 하고, 남부 지역에서는 '씻김굿' 또는 '오구굿'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명칭은 '오구' 또는 '오기' 라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캐보려고 '옥' 이니 하는 한자의 음을 빗대 보고 풀이해 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한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순수한 우리말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옛날에는 문화적인 접촉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통구스 족의 말 가운데도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이 하나의 좋은 암시가 된다, 그들의 말인 'orgi'는 해가 지는 서방 하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샤먼이 저승을 드나드는 굿을 'orgiski'라고 한다. '오구굿'이니 하는 것은 바로 이 퉁구스 어와 그 어원을 같이 하는 말인 듯하다. '진오기'란 아직 마르지 않은 '진' 오기굿, 곧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지내는 굿이라 뜻이다. 경남 지방에서는 시체 앞에서 하는 굿을 '진오굿'라 하고, 죽은 지 한두 해 지난 뒤의 굿을 '오구굿'이라고 한다. 요컨대 죽은 이가 가는 저승은 해 지는 서방에 있다고 생각하고 죽은 영을 저승으로 보내는 굿이란 뜻이다.
전남 지방에서는 흔히 '씻김굿'이라 하는데, 죽은 그 해 안에 하는 굿은 '진씻김굿' 이라 한다.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 온 더러운 '살' 또는 살문 을 씻어서 저승으로 보낸다는 뜻인 듯하다. 갓 죽은 망자일수록 살문이 강하다. 죽은 지 한 달을 넘지 않은 상문 이란 망령은 사람들에게 병고나 재액을 가져오기가 일쑤다. 그러기에 이를 막기 위해 '상문풀이'를 한다. 이런 뜻에서 '씻김'과 '풀이'는 같은 뜻이다. 요컨대 죽음이란 한스러운 것이요, 죽음을 가져 온 것은 부정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을 풀고 부정을 씻음으로써 망령을 고이 저승으로 보내자는 것이 사령제의 목적이다.
진오기굿에 나타난 죽음의 이해
서울 지방의 진오기굿 을 사령제의 전형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진오기는 푸닥거리와 같이 간략한 굿이 아니라, 흔히 열두 거리라고 하는 큰 굿이요, 그 중에도 가장 길고 웅장한 굿에 속한다.
진오기굿 의 중심 되는 재차 에는 죽은 영이 돌아와서 넋두리하는 영의 란 것과 망령을 잡아가는 사자놀음, 그리고 말미를 드린다 하여 '바리공주'의 본생을 풀이하는 긴 서사 무가를 읊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는 망령이 저승에 가도록 다리를 해놓는 시왕다리니 불사다리니 하여 다리 가르기의 제차가 있다. 그리하여 망령은 이별을 고하고 저승으로 가는데, 이것을 상징하여 넋전을 불사른다.
옷은 그 사람의 영혼이 깃드는 곳으로 이해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엔 초혼이라 하여 그 사람의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름으로써 떠나가는 혼을 다시 불러들여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낭당엔 흔히 병자의 옷이나 옷자락이 걸려 있다. 병을 초래한 잡귀를 그리로 몰아내자는 뜻인 듯하다.
영의 라고 이름 붙인 재차 에서 무당은 죽은 이의 옷을 들고 춤을 춘다. 옷을 따라 망령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를 되돌아오게 한 것은 죽은 이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넋두리로 나타난다. 원한이 때로는 인간 관계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원한이다. 사람이란 삶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죽음이란 언제s나 한스러운 것이다. 희랍의 호머도 읊었듯이"비록 죽은 자들의 왕이 된다 할지라도,l 죽음일랑 찬양치 말라. 비록 한푼 없는 가난뱅이의 노예가 된다 해도 나는 그것이 좋겠기에" 죽음이란 곧 한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넋두리는 못다 산 억울함을 풀어 주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죽음은 삶의 미완성이다. 채 살지 못한 죽음은 곧 채 죽지 못한 삶이다. 그러기에 완전히 죽지 못한 넋은 저승에도 못 가고 중음계를 방황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넋을 불러들여 넋두리를 하게 하고 원한을 풀게 함으로써 못다 산 삶을 채우게 하며 죽음을 완성케 한다. 완전히 죽은 영만이 비로소 저승으로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오기굿 의 가장 특이한 재차는 말미를 드린다는 데 있다. 여기서는 바리 공주, 칠공주, 바리데기, 오기 풀이, 오구 물림 등으로 불리는 신화 한 편을 읊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은 거의 전국적으로 읊어지는 긴 서사 무가의 하나이다. 그리고 제각기 그 표현에 차이들이 있기는 하나, 그 내용 구성은 거의 일정하다. 이를 간추려 보면, 어느 왕실에서 태자 낳기를 바랐지만 딸만 일곱을 내리 낳는다. 홧김에 막내딸을 내다 버린 것이 화근이 되어 그 부모는 죽을병을 않게 된다. 점쟁이의 말을 따라 저승에 간 막내 바리데기 를 데려 오기는 했으나, 병이 낫기 위해서는 저승에 있는 약수를 마셔야만 했다. 그러나 이 약수를 길어 오려는 딸들이 하나도 없다. 드디어 바리 공주가 또다시 무상천 으로 가서 고생 끝에 약수를 얻어 돌아와 죽은 부모를 회생케 했다 . 그 공으로 바리 공주는 신직을 받아 '오구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죽은 영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무당이기도 하고 오구신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리데기 가운데는 간간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여, 슬프다, 선후망의 아모망제
칠 공주 뒤를 쫓으며는,
서방 정토 극락 세계 후세 발원,
남자되어 연화 대로 가시는 날이로성이다.
예로부터 신화를 읊는 것은 새로운 창조 작업이 있을 때였다.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했을 때엔 성주 받이 를 하는데 그때엔 으레 성주님의 본풀이 신화를 읊는다. 그러면 사령제 에서 바리 공주 신화를 읊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인의 기본적인 죽음의 이해가 그 밑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서 죽음의 이해가 그 밑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서 죽음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또 하나의 삶의 시작이다. 새로운 삶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첫 죽음은 삶의 미완성이요, 못다 죽은 사망일는지 모른다. 그로기에 바리 공주의 신화를 읊는 오구굿을 통해 참으로 죽게 하고 저승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죽음을 다시 죽는 것은 새로운 의미의 삶이요, 부정을 다시 부정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한 긍정이다. 오구굿을 통해 한국인은 차원을 달리한 새로운 삶의 시작을 믿어 왔던 것이다. 신화 바리 공주의 중요한 대목이 죽은 부모의 회생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요, 바리 공주가 저승을 두 번이나 왕래해야 했다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말미가 끝난 무당은 죽은 영이 깃든 넋전을 들고 앞뜰로 나와 저승으로 통과하는 극락문을 지나간다. 그리고는 긴 광목이나 삼베를 가름으로써 저승으로 가는 길열이(길안내)의 상징적인 행동을 한다. 시왕다리를 가른다고도 하고, 불사다리를 가른다고도 한다. 그리고 넋전을 불사름으로써 이승에서는 소멸되고 저승으로 옮겨간 사실을 확증한다.
저승의 구조
진오기굿 을 통해 본 세계의 구성은 분명히 셋으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 곧, 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승과 완전히 죽은 사람들이 거처하는 저승이 있고, 그 중간에 갓 죽은 망령이 거처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곧장 저승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억울하게 죽은 영산 원령 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이승에 있으면서 산사람들의 주변을 돌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재액을 가져온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진오기굿 을 해서 망령을 저승으로 보내지 않으면 아니 된다. 초혼굿 '새남'에서 부른다는 '죽음의 말' 속엔 이런 구절이 있다.
문 밖을 내다보니 밥 세 그릇 신 세 켤레,
돈 석 냥을 젯상에 바쳐놓고
초성 좋은 구랑이 초혼 불러 외는 소리,
나 죽을시 분명하다.
망재씨 하릴없이 세상을 이별하고
탄식하고 돌아서며
혼백 혼신이 방안을 살펴보니
신체 육신 방 안에 뉘어 두고
자손들이 늘어 낮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하며
양천 탄식 슬피 운다.
지부왕이 보낸 사자상을 차려 놓고 초혼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곧장 저승으로 간 것이 아니다. 자기 시체를 방안에 뉘어 놓고 집안 식구들이 모여 앉아 탄식하고 슬퍼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갓 죽은 상문이나 영산은 이승을 방황하며 사람들의 거동을 보고 있다. 말하자면 죽기는 죽었어도 완전히 죽어서 저승으로 간 것이 아니다. 채 못 죽은 채 방황하며 완전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저승은 완전히 죽은 영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망령들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 오구굿이나 씻김굿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세계의 구조는 불교의 관념과 동일하다. 불교에서 생유라 해서 이 승이 있고, 흔히 시왕이 지배한다는 명부, 곧 중음계가 있다. 염라 대왕을 포함한 일곱 와 앞에서 매 칠 일마다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 백 일과 일 년과 삼 년 되던 때에 다시 세 지부왕 에게 심판을 받게 되는 세계가 불교의 중유의 세계이다. 그리고는 이 시왕의 심판에 따라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해서, 육도 윤회의 세계에서 살기 마련이다. 이것이 제 3의 세계이다. 이러한 운명에 떨어지기 전에 중음계에 있는 동안칠칠재를 비롯한 각종 재를 올려 심판자들의 자비를 빌기도 하고, 목련경에서 보듯이 이미 지옥에 떨어진 망령을 천상으로까지 이끌어 올리기도 한다. 불교와 무속은 저승을 비슷하게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영을 위한 오구굿과 재를 올리는 일도 같은 듯 보인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무속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 외형상의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는 극히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왕이니 불사니 하는 용어마저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면 거기엔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와 관념들이 지배하고 있다.
첫째, 심판 사상의 문제이다. 불교는 철두철미 인과 응보 사상에 지배되어 있다. 살아 있을 때에 삼보를 믿지 아니하고 적악을 일삼던 나복의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져야만 했다. 중생들이 방아 속에서 몸뚱이가 천 토막으로 끊겨 고생하는 방아 지옥을 본 목련이 그 이유를 옥주 에게 물었더니, "이들은 생전에 모두 중생들을 잘라 죽이고 남녀들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이 좋다고 떠들던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굿의 경우에는 이러한 인과 응보 사상이 없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선한 사람은 천당에 가고 악한 사람은 죽어서 지옥 간다고는 하지만, 실제 오구굿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볼 수가 없다. 죽은 영은 생전에 지은 죄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심판하는 시왕이 있을 필요가 없다. 다만, 한을 풀어 주고 살문을 씻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황천을 건너 하나의 저승이 있을 뿐이다. 거기엔 선인이 가는 극락이 있고, 악인이 가는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원한 없이 저승에 편안히 가서 새로운 형태의 삶은 산다는 것이 그 전부이다.
둘째로, 윤회 사상 문제이다. 불교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연기요 윤회이다. 어떡하면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로 해탈할 것이냐가 근본 사상이다. 이것이 민중의 저승 관념과 칠칠재나 여수재의 의식을 자아냈다. 그러나 굿의 세계에는 이러한 윤회 사상이 없다. 민간에서 때로는 죽은 사람을 위해 키에다 밀가루 뿌려 놓고 거기에 생기는 동물의 발자국으로 점친다고 하지마는 이것은 완전히 불교적인 관념의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저승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일 뿐이다.
셋째로, 명복과 명조의 관념이다. 이 두 관념의 관계를 분명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불교가 죽은 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명복을 비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데 비해 굿의 세계에서는 살아남은 후손들의 제재 초복에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굿을 통해 죽은 영의 명조를 비는 데 치중하고 있다.
사생관
죽음의 이해 속에 삶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진오기굿에 반영된 한국인의 죽음의 이해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승에서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현실주의적인 인생관이다.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삶은 철두 철미 이 세상에서의 장수요, 풍성한 삶이다. 망령의 넋두리에서 보았듯이 죽음이란 언제나 억울한 것이요 한스러운 것이다. 우리들에게 복 중의 복은 수복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래 길이길이 살아야 한다. 재복은 수복을 위한 것이다. 재수굿을 한다지만 다시 풀이하면 풍성한 삶을 누리자는 데 있다. 무든 굿의 핵심에는 장수 연명을 비는 칠성거리와 제석거리가 자리잡고 있다. '무쇠 목숨에 돌끈 달아 천 년 만 년 살도록' 해 달라는 것이 최대의 기원이다. 이것은 한국의 불교 신앙에도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사찰 치고 칠성님을 모시지 않은 곳이 없다. 신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연명을 주관하는 칠성님이 계신 칠성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영은 억울한 것이며, 그 한을 풀어 주자는 것이 진오기굿이다. 그리고 진오기굿 마저도 죽은 영의 명복을 위해서이기 보다는 그를 저승으로 보냄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이 오도록 하자는 데 근본 관심이 있다. 한국을 휩쓸어 오던 풍수 지리에 대한 신앙 역시 같은 관념의 소산이다. 죽은 조상을 좋은 곳에 묻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들에게 행운이 온다는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종종 한국인의 신앙 형태가 타계주의적이라고 비난한다. 곧 죽어서 천당 가기 위해 예수 믿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새로이 검토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과연 우리는 이승에서의 풍부한 생활보다 저승에서의 명복에 더 큰 관심을 가진 민족일까?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의 관심은 철저히 이승적인 것에 있다. 타계주의와 같이 나타나는 신앙은 결국 현실에서의 행복을 위한 도피 사상에 불과하다. 이는 항상 악정 밑에 살아 온 민중의 한 지혜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심판 사상이 없다는 뜻에서 낙관주의의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굿에서는 윤리적인 선과 악이 문제되는 일이 없다. 저승에 못 가는 것은 악업 때문이 아니다. 다만 죽음을 가져오는 살기, 더러운 마력 때문이요, 원한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저승에 극락과 지옥이란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것은 모드 불교나 도교의 영향에서 후대의 관념에 불과하다.
한국적 가치 기준은 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개념이다. 다다 익선이야말로 한국적 가치 개념이다. 오래 사는 것이 복이고 많이 소유하는 것이 복이다. 제 명에 죽지 못하는 횡사나 제대로 못 먹는 가난이야말로 죄에 해당한다. 옥황 상제가 벼락을 친 대상은 도둑질해서 배불리 먹던 놈이 아니라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던 선비였다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오래 살고 많이 갖는 것이 축복이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 한국적 부정 부패의 근본 철학이 있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윤리적 건망증의 한국적 기질이 있다.
셋째는, 윤회가 아닌 내세 재생관이다. 변증법적인 인생관이라 해도 좋다. 죽고 다시 죽음으로써 저승에서 살게 된다는 관념이다. 죽은 영을 불러 넋두리를 하게 한 다음 다시 지부와의 사자들이 와서 넋을 데려가게 한다. 말하자면 두 번 죽음으로써 저승으로 가게 된다는 관념이다. 이것은 바리 공주의 설화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곧, 바리 공주는 두 번 저승을 왕래함으로써 죽은 부모를 다시 살리게 할 약수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우리들의 신화 속에서도 이중 탄생의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난생 설화가 그러하다. 대체로 우리의 시조들은 알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이 그러했고 혁거세가 그러했다. 알이란 일단 모체에서 탄생한 것인데 그 알에서 또다시 태어난 것이 옛 시조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탄생을 통해 질적인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이중의 사망을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의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여기에 한국적인 종교 의식의 바탕이 있다. 그리고 모든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 하고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는 한국적인 저력의 근거가 있다.
유동식/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보스턴 대학교 신학부, 일본 동경 대학 및 국학원 대학 대학원 등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연세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종교와 기독교』,『민속 종교와 한국 문화』등이 있다.
'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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