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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꿈

by 자한형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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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삶을 위한 꿈 -명 현
인간은 모두 죽는다

무엇을 좀 알 것 같다가도 다시 혼돈에 빠지고 마는 게 우리가 흔히 겪는 일상적 의식의 경험입니다. 도대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삼라 만상을 움직이는 근본 법칙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또 왜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 회는 왜 이 모양으로 굴러가고 있으며, 이 사회는 5천여 년의 역사가 흘러 나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역사는 어찌하여 이런 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떤 모양으로 움직여가서 어떤 모양을 갖춘 것이 될는지, 이 모두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는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혼자 고립되어 문 닫아 놓고 살 수도 없는 형편인데, 그런 나와 나의 나라가 얽혀 있는 큰 덩어리인 지구촌은 어떤 모 양으로 되어갈 것인지, 인류가 과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모든 장벽을 치워버리고 형제, 자매로서 오손도손 살 수 있는 인간적인 삶의 공간을 과연 형성할 것인지, 아니 면 서로 장벽을 더 굳건히 딱딱하게 쌓아 놓고 반목과 질투와 투쟁으로 일관하다가 끝 에 가서는 모두의 파멸을 가져오고 말 것인지, 정말 알 수 없는 물음들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을 그냥 모르는 것으로만 치부해 버리고 느긋하게 단잠만을 잘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의 머리 속에 밀려옵니다.

이런 끊임없는 물음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모양으로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운 물음들을 던지며 번민하다가도, 언젠가는 나도 다른 모든 이 세상에 이미 살다간 선배들처럼, 기어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말게 되 리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모든 불확실성에 가득찬 것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은 나도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어이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 게도 확실한 것을 그렇게 애매하게 얼버무려 놓은 채, 불확실한 것들을 마치 확실한 것 처럼, 영원한 것처럼 붙들고 늘어지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사물의 이치를 뒤집어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사리를 뒤 집어 놓고 보면서 오히려 스스로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하리라고 믿는 그 모든 소중한 것들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죽그릇까지도 빼앗아 온갖 금은 보화를 사기에 바쁜 우리의 탐욕스러운 마음은 정녕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금은 보화, 내 궤짝 속에 쌓아 놓은 그 모든 나의 재산이라는 것들이 어찌 참으로 영원한 것이겠습니까? 설사 그 모든 것들을 나의 무덤에까지 가져다 쌓아 놓게 한들 어찌 영원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저 허망한 바람에 불과합니다. 기껏해야 먼 훗날에 가서 골동품 장사꾼들의 노리개감밖에 안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조만간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것은 지금 살았다고 장담하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이 확실한 것을 덮어두지 않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현명함이요, 지혜입니다. 사 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인간의 지혜요, 현명함입니다. 그런 것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눈감아 버리거나 덮어두는 것은 영리한 것 같아 보이는 일시적 잔꾀에 지나지 않습니 다. 잔꾀 가지고 뭘 할 수 있습니까? '일시적으로 빠져나가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시간은 그 모든 잔꾀를 결국 패배하게 하고야 맙니다. 시간의 위력을 인간은 어쩌지 못합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진실대로 드러내고야 맙니다. 죽을 존재를 죽게 만들고 맙니다. 항우 장사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도 그리고 세상의 보약, 불사약이라는 것을 다 주워다가 몸 보신한 사람들도 결국은 다 죽습니다. 천재도, 영웅도, 장군도, 재벌도, 물론 다 죽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도, 거지도, 고아도 과부도 모두 죽을 것입니다. 병신만 죽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차분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이런 죽음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일시적인 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흥분하던 우리의 마음이 제 곬을 찾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물거품 같은 우리의 착각이 가라앉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의 한계 상황 앞에서 절망을 어쩌지 못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영원을 갈망하는 우리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사 람이 모두 영원히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이 지구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모두 낳지 않고 산다면 몰라도 말이에요. 그러나 이것은 불가 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는 활동이 없었던들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헛된 꿈이지요. 태어나는 사건이 있으면 죽는 사건도 있기 마련입니다. 태어나는 기쁨이 있으면 죽는 슬픔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삶의 질서입니다. 이런 삶 의 질서는 사람 마음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에 그것은 철칙입니다. 하늘의 법입니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바뀌는 것은 땅 위에 있는 사람의 법입니다.

억지란 하늘의 법을 어기려는 몸짓입니다. 억지는 어리석음의 몸짓입니다. 참으로 지혜 있는 몸짓은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법 앞에서 절망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몸짓이 아닙니다. 불가능을 불가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의 가능성을 화평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인생의 참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 고 그 죽음의 존재에 적합한 일들로 삶을 채우는 데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허황한 몸 짓은 죽을 존재가 마치 죽지 않는 것처럼 착각할 뿐 아니라 꺼져 버릴 영원하지 않은 것 을 영원한 것처럼 눈이 벌게 가지고 추구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정말 허황된 짓이지요. 세계의 진상과 어긋나는 짓을 하니 허황된 것이지요.

죽음 앞에 놓인 존재,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깨달음은 삶의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절망하지 않음은 또 하나의 삶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기만 위에 서 있지 않은 진실한 삶의 토대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모셔라

"호각에 너무 많은 것을 지불하지 말라." 이것은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에게 호각은 참으로 멋진 물건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 진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그것을 얻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호각의 존재 가 치를 아는 어른에게 그런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리석음의 표현으로 인식됩니다.

의미 있는 삶은 호각에 너무 많은 것을 지불하지 않는 삶입니다. 모든 사물은 다 제 값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물에 그것이 지닌 제값 이상을 지불하지 않는 현명함, 그것이 바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의미 있는 삶은 돈을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자 리에 오른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삶의 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 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은 의미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 자리, 지식이 지니고 있는 제값이 있는데, 그들은 그 가치를 제값 이상으로 매겨 놓고, 높은 값을 지불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모시고 거기에 알맞는 생각과 몸짓을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삶의 알맹이의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모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나 재산이 어찌하여 없어졌다고 합시다. 이때 툭툭 털고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존귀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 으로 이때 가슴을 치며 번민한 끝에 자기의 마음과 육체를 갉아먹는 것은 자기를 존귀하게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렇게 자기 학대를 극심하게 한 끝에 큰 병이나 앓든가 그 병으로 인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은 더욱 자기를 존귀하게 모시는 행위가 아닙니다. 귀한 것은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돈이나 물건은 자기의 활동에 의해 획득된 사물입니다. 돈이나 물건보다 귀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입니다. 그런 잃어버린 물건은 새로운 자기의 활동에 의해 다시 획득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입니다. 자기 마음과 몸만 왕성하다면 물론 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 적으로 그렇게 소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획득되는 것이 우연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적으로 나에게서 떠나는 것도 세상의 순리에 속합니다. 우연적으로 온 것은 우연적으로 가기 마련인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나에게 속한 재산은 나라는 암탉이 낳은 달걀입니다. 내가 낳은 달걀은 어쩌다가 깨 질 수도 있습니다. 깨진 달걀은 분명히 애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애석함이 지나쳐 암탉이 병들게 되거나 그래서 다시는 달걀을 더이상 못 낳게 되는 데까지 발전하게 된다면, 이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입니다. 달걀은 깨졌더라도 암탉을 못 쓰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달걀이 깨져서 손해 본 것만 해도 애석 한데, 거기다가 암탉마저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근본적인 손해'를 보는 일이 기 때문입니다. 암탉의 소중함을 깨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암탉입니다.

더불어 삶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나만이' 그런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기 쉬운 것이 또한 우리들의 어리석음입니다. 내가 존귀한 존재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너도 그리고 저 사람도 그리고 내가 직접 만나보지 못한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도 모두 존귀한 존 재들입니다. 그들도 내가 그러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생각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맙니다. 그래서 그 존귀한 존재들 을 아무렇게나 대할 뿐 아니라, 나의 어리석은 자아의 망상을 위한 희생물로 삼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악의 늪입니다. 이 늪에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 세계는 이런 존귀한 존재들이 모여 사는 모듬살이의 공간입니다. 한쪽에서 냄새를 피우면 곧장 내 이웃의 코에 고약한 냄새가 전달되는 그런 '하나의 공간'이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그러기에 함께 있음의 터전이며, 더불어 삶의 둥지입니 다. 이 둥지는 나 혼자 마음대로 이렇게 혹은 저렇게 아무렇게나 해도 좋은 그런 나만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와 피를 섞은 피붙이끼리만 웅크리고 살, 독립된 공간도 아닙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더불어 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사는 공 간입니다. 나의 온몸에 흐르는 핏속을 통과해서 나온 나의 입김이, 다시 그 수많은 이 름 모를 존귀한 존재의 핏줄 속으로 타고 들어가는 하나의 호흡권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참으로 있음의 감동을 우리가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함께 있음의 공 감을 우리가 느꼈을 때입니다.

의미 있는 삶은 우리의 몸짓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삶의 조건에 알맞게 될 때 성취됩니다. 함께 있음, 더불어 삶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삶의 조건입니다. 진리란 바로 그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습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러기에 의미 있는 삶은 진리에 따라 사는 삶과 얽혀 있습니다.

진리란 '나만의 이익', '나만의 떡'을 얻고자 하는 탐욕의 동굴로부터 나와, 그 탐욕을 넘어선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볼 때 획득되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요, 깨달음입니다.

나 혼자 먹는 떡이 참된 기쁨을 가져다 줄 것 같으나, 그것은 위장된 웃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음은 나 혼자 먹는 떡을 향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 진리의 빛 아래서 세계를 인식하여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 석가와 예 수의 가르침의 알맹이가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꾸고 싶은 꿈은 바로 그런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