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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by 자한형 202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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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서/고 규 홍

거리의 가로수가 잔인하게 잘려나간다.그 거리에 즐비한 상가 주인들이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집단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다.거리를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심은 나무들이다.나무는 사람들이 지어내는 매연과 먼지처럼 온갖 더러운 것을 수굿이 빨아들이는 치욕의 삶을 살았지만,사람과 더불어 살아 좋았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의 줄기를 몽땅 몽땅 잘라낸다.거대 짐승,공룡까지 멸종한 빙하기에서도 살아남은 나무들이건만 사람의 욕심만큼은 이겨내지 못한다.나무의 몸뚱이를 파고드는 전기톱의 굉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주시의 간선도로 가운데 곰솔길이 있다. ‘곰솔이라는 나무 이름이 붙은 건 이 길가에 전주시를 상징할 만한 훌륭한 곰솔 한 그루가 서 있어서이다.전주의 곰솔은 오래전에 이곳에 사람들이 심어 키운 나무다.우리나라의 곰솔 종류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크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나무였다.줄기 곁으로 넓게 펼친 가지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는 모습을 했다 해서학송(鶴松)’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그러나 그가 아름답다는 건 하릴없이 과거형이다.지금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아름답기는커녕 참혹하다.

전주의 곰솔은 대개의 가지가 찢기고 부러진 채 겨우 목숨만 남았다.이토록 참혹한 운명을 맞이한 것은 이 지역의 개발 과정에서였다.곰솔이 있던 자리는 시 외곽의 한적한 산야였다.워낙 아름다워서1988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그러나 이 지역에 개발 계획이 발표되자 마을은 창졸간에 상전벽해가 되었다.나무를 빼고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나무 곁으로8차선 대로가 뚫렸고,양편으로 고층 아파트가 차곡차곡 올라갔다.

그리고 얼마 후,나무는 푸른 솔잎을 후드득 내려놓았다.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결정적으로는 누군가가 나무 밑동에8개의 구멍을 뚫고 독극물을 투입한 때문이었다.택지 개발과정에서의 이익을 노린 누군가가 저지른 만행이었다.다행히 나무의 이상 징후를 일찌감치 알아챈 전주 시민들은 나무를 되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마침내 대개의 줄기와 가지를 잘라내야 했지만,살아남은 서너 개의 가지는 오히려 더 왕성하게 초록의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참혹한 몰골로 살아남은 나무 앞에 서면 언제나 가슴이 미어진다.때로는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나무의 슬픈 운명이 얄궂어서이기도 하지만,그보다는 나무를 죽여서라도 이익을 챙기고자 한 누군가의 잔인무도한 탐욕이 불쌍해서다.덧붙여,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 같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모습이 나무의 참담한 몰골에 비치는 듯해서이다.

담헌(湛軒)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그래서 백 번 천 번 옳다.언제나 유쾌한 그의 글 가운데의산문답이 있다. ‘지구 자전설을 흥미롭게 풀어쓴 그 책의 뒷부분에서 홍대용은무릇 지구는 우주 가운데 살아있는 것이다.흙은 그 피부와 살이고,물은 그 정액과 피며,비와 이슬은 그 눈물과 땀이고,바람과 불은 그 혼백과 혈기다.그래서 물과 흙이 안에서 빚고 태양 빛이 바깥에서 구우며,원기가 모여서 여러 생물이 무성하게 자라게 되는 것이다.초목은 지구의 머리카락이고 사람과 짐승은 지구의 벼룩과 이다.”라고 했다.

물론 그가 나무를 베어내는 사람을 콕 짚어서벼룩이나 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맥락은 분명 다르지만,전주 곰솔 앞에 서면 꼭 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우리 사는 이 땅을 더 아름답게 하려고 나무는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데,대관절 사람은 벼룩만도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홍대용이 활동하던 수백 년 전에 비하면 지식과 산업이 놀랄 정도로 발달했다고는 하지만,사람이 벼룩이나 이만도 못한 짓을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하기야 더 많은 사람의 각성으로 나무를 온전히 지키는 예가 없는 건 아니다.하지만 돌아보면 우리 사는 이 땅을 더 온전히 지키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나무가 하는 일의 천분의 일,만분의 일도 채 안 되는 건 다름없다.이 땅 위에서 벼룩이나 이가 아니라,그야말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다시 홍대용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남녘에선 이미 봄꽃잔치가 한창인 모양이지만,이곳에서는 봄꽃들이 아직 꽃잎을 열지 않고,꼬무락거리는 중이다.채 열지 않은 꽃잎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피어날지 기다리는 마음으로 설레는 밤이다.하릴없이 옛사람의 시 한 수를 떠올린다.

차가운 촛불 연기 없고 파란 밀랍 말라붙어冷燭無烟綠蠟乾

여린 속잎 아직 말려 있음은 꽃샘추위 두려워서겠지芳心猶卷怯春寒

꽁꽁 봉한 편지 한 잎,그 속엔 무슨 사연 담겼을까一緘書札藏何事

그대로 두었다가 봄바람이 몰래몰래 펼쳐 보시겠지會被東風暗拆看

당나라 오흥(吳興,지금의 절강성)에서 태어나 활동한 시인전후(錢珝)’가 봄을 예찬한피지 않은 파초[未展芭蕉]라는 시이다.피지 않은 여린 속잎 하나에 편지가 담겨있다는 시인의 마음이 더없이 좋다.시인은 편지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하는 데에까지 생각을 이어간다.하지만 사연은 봄바람이 몰래 펼쳐 보시겠단다.아름다운 마음이다.이 땅에서,이나 벼룩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져야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세월 하 많이 흘러도 옛사람들의 지혜,그들의 정서를 이어가지 못한다면,봄이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도 마음은 언제나 차디찰 수밖에 없으리라.날이 선 도끼를 들고 도시의 가로수를 뭉텅뭉텅 베어내며도시를 정화한다.’는 투의무지몽매한 용기로 어찌 이 땅에서 벼룩이나 이가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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