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화분 -작가 김단영
[에어컨 설치가 업인 작가의 남편과 함께
에어컨 설치를 하면서 겪은 일화를 쓴 글.]
"에어컨 설치하러 왔습니다."
설치 장소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면 대체로 반기는 얼굴이다. 가끔 불평을 쏟아내는 고객을 만나기도 하는데, 주로 왜 이렇게 추울 때 왔느냐는 불만이었다. 한여름 에어컨의 성수기가 끝나고 비수기에 접어드는 계절이다. 겨울이라 하기엔 좀 이르고, 가을이라 하기에는 조금 추운 날씨였다. 에어컨 설치 기사인 남편은 S전자 물류 센터에서 오더를 받아 일하고 있다. '2인 1조 작업'이라는 규정에 따라 나는 보조 기사로 남편을 돕고 있다. 올해는 물류 센터에서 벽걸이 에어컨 500대 설치 건을 받았다고 했다.
울산광역시의 '에너지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저소득 가구 및 복지 취약 계층에 무상 지원해주는 사업이었다. 대략 한 달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감이 줄어드는 시기라 반가운 오더이긴 하나 벽걸이형 설치는 크게 돈이 되지 않는 오더였다. 고객은 에어컨을 무상으로 지원받고 우리는 최소한의 설치 비용을 받는다. 설치 팀도 대폭 줄어든 상황이라 어찌 보면 성가신 일거리일 수도 있었다. 이왕 하는 일이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자고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일부러 자원봉사 하러 다니기도 하는데 우리도 좋은 일 하는 셈 치자고 말이다.
설치 기사의 재량에 따라 보통은 서너 대씩, 많게는 예닐곱 대씩 상차하고 출발했다. 화물칸에 에어컨을 싣고 달리면서 나는 차창 밖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길게 따라오는 굴곡진 산등성이가 마치 짐승이 엎드린 모양처럼 보였다. 웅크린 산짐승의 등허리가 길기도 길다. 능선에는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이 바늘처럼 촘촘히 꽂혀있다. 고도가 낮아진 태양이 바늘 틈새를 비집고 햇살을 날카롭게 쏘아댔다. 같은 시각이라도 여름에는 꽤 높이 떠있지만 해가 많이 기운 까닭이다.
태양은 언제나 세상을 똑같이 비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땅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햇볕을 더 받는 사람과, 덜 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국가나 사회가 만든 그늘이 있다면 양지쪽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보살펴주어야 할 터이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들이니 햇볕은 골고우 쪼여야 마땅한 일이다.
곧잘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만 지원사업을 하러 다니면서 마주친 현장은 여름철에 방문하는 일반 고객의 집들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었다. 문을 열어보면 한결같은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발 디딜 틈 없이 비좁고 정리되지 않은 주거환경이었다. 시내는 시내라서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집이고 변두리는 변두리라 황량하고 허술한 집이었다. 에어컨을 설치하는 시간보다 짐 치우는 시간이 더 걸리는 집도 있었다. 남편은 일 중심으로 움직였고, 보조 기사로 따라다니는 나는 사람 사는 요지경 속에 휘둘려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여러 곳을 방문하여 작업하다 보니 기억에 남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하나가 배추 화분이 있는 집이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다가구 주택이었다. 공구와 장비를 양손에 잔뜩 든 채 꺾어지는 좁은 계단을 끙끙거리며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줄지어 선 화분 세 개가 내 눈에 들어왔다. 지름이 겨우 한 뼘 정도 될까 싶은 플라스틱 화분에 한 포기의 배추가 심겨있었다. 그런 화분에는 보통 꽃이나 나무를 심는다고 생각했던 나는 적잖이 놀랐다.
'베란다 텃밭'이란 소리는 들어봤지만, 자그마한 화분에 배추를 심다니... 나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싶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혼자 거주하는 노인은 건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단칸방에는 정리되지 않은 살림살이가 이부자리랑 약봉지와 함께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노인에게는 식비와 병원비가 생활의 전부일 듯 보였다. 구석에 놓인 선풍기는 여름내 한 번도 틀지 않았다고 했다. 솔직히 거동조차 불편해 보이는 노인에게 에어컨은 사치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의 업무는 에어컨을 달아주는 일인 것을. 남편은 부지런히 벽 한쪽을 치우고 에어컨 설치를 시작했다.
또 다른 곳을 방문했을 때는 입식 부엌 구석에 변기가 떡하니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놀란 표정을 마스크 안으로 겨우 감추었다. 여기도 오래된 다세대 주택이었다. 출입문을 열면 단칸방과 분리된 부엌이 전부인데 그 부엌에 가림막도 하나 없이 화장실 변기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최소한의 인권조차 실종된 수인(囚人)의 공간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일하다 보면 가끔 화장실을 빌려 쓰는 경우도 발생하는지라 남편과는 달리 여자인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싱크대 옆에 무심하게 앉아있는 변기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에어컨 말고 다른 걸로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내년 여름의 더위보다 당장 닥쳐오는 겨울철이 더 걱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더러는 쌀이나 라면 같은 일용할 양식이 절실해 보이는 세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에어컨을 설치하려고 방문한 팀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방바닥이 싸늘했다. 난방이 시급한 곳에 구멍을 뚫고 에어컨을 설치했다. 제한된 공간 안에 갇혀 사는 어르신을 보니 또다시 배추 화분이 떠올랐다.
화분을 예쁘게 가꾸는 것도 어는 정도는 먹고 사는 걱정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배추 화분'은 키우는 재미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겨울 양식으로 여겨졌다. 세상이 좋아져서 비만을 염려하고 체중 조절을 위해 굶는 사람은 있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살았다. 먼 나라의 전설처럼 여겼던 노인 빈곤층! 방문했던 독거노인 대부분의 삶은 배추 화분을 꼭 닮아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에 한 대씩 설치하고 이동해야 했다. 작업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도 도움을 요청하면 흔쾌히 들어주었다. 벽에 못을 박아 달라는 요청이 가장 많았다. 고장 난 방문 손잡이도 고쳐주고, 부러진 밥상 다리도 고정해주었다. 무거운 항아리도 옮겨주고, 보일러 작동법도 가르쳐주는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도와주려 애썼다.
하루는 시각장애인 할머니가 짜장면 사 먹으라고 2만 원을 주시기에 얼떨결에 받아 쥐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밥상 위에 슬그머니 얹어두고 나왔다. 할머니 마음이 서운했겠지 싶다. 커피 타준다는 것도 거절했는데, 좋은 일 한다며 건네는 마음마저 거절한 게 잘한 일인가 모르겠다. 봄에 정부 지원을 신청해 놓았는데 비수기에 우리가 설치하러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있는 모양이다. 연락 두절이나 주거 이동으로 취소되는 사례도 몇 건 있었다.
이번 무상지원 설치 건은 소외된 이웃을 집중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고마운 분도 있었고 좀 얄미운 사람도 있었다. 다양한 고객을 상대했지만 지원 사업이 끝나도록 배추 화분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화려하고 멋진 꽃 화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뼘짜리 플라스틱 화분에 심긴 배추의 팍팍한 삶도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남편을 따라 에어컨 설치 작업을 하러 나선다. 배추 화분을 떠올리며 겸허한 마음으로 좀 더 자세를 낮추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