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 -박일천
겨울의 끝머리에 산사를 찾았다. 나뭇잎이 떨어진 숲은 멀리까지 훤히 보인다. 군더더기 없는 나무는 내밀한 곳까지 드러낸 순정한 모습이다. 응달진 산꼴짜기는 아직 잔설이 하얗다. 산모통이를 돌아 암자로 가는 오르막길은 천천히 걸어도 숨이 가쁘다, 비탈길 나무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얼음을 깬 듯 청담 빛 하늘이 조각조각 내려온다.
어디선가 '쓰쓰 빼이' 새소리가 들려와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슴이 발그스름한 것이 곤줄박이다. 좀 더 가까이 보려고 발걸음을 떼자 후드득 날아가버린다. 새가 날아간 참나무 가지에 언뜻 연두빛 뭉치가 보인다. 회백색 나무줄기에 새집처럼 초록잎을 드리운 겨우살이다. 군데군데 보이는 겨우살이는 삭막한 숲에 생기를 뿜어낸다.
겨우살이는 오리나무나 참나무에 거저 사는 더부살이다. 땅속에서 수분을 끌어올리는 뿌리의 수고로움도 없이 자란다. 참나무가 생명수를 자신에게 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다. 스스로 둥치를 키운 듯 겨울 산에 저 홀로 푸르다, 저만치 눈앞에 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뽑혀 바닥에 옆드려 있다. 눕혀진 나뭇가지에 달린 겨우살이도 초록이 갈잎 되어 서걱거린다, 참나무가 쓰러지면 자신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을까. 나무에 기생하여 사는 겨우살이는 어쩌면 어머니에게 기대어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
어머니는 젊은 날, 홀로 된 막막함을 실타래에 풀어 한복을 꿰매었다. 삵바느질하는 당신 곁에서 나는 반짇고리를 뒤져 자투리 양단 조각으로 엄마 흉내를 내며 인형 치마를 만들어 자랑했다, 어머니는 어이없이 웃다가 삐뚤빼둘한 곳을 바로잡아 곱게 꿰매 주셨다. 지금도 진보라 바탕에 하얀 물방울무늬의 앙증맞은 인형 옷이 눈에 선하다. 잠결에 뒤척이다 보면 희미한 등불 아래 어머니는 한복을 짓고 계셨다. 문풍지 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은 당신 등에 시린 고드름으로 매달렸으련만….
바느질삯으로 쌀독을 채우고, 무서리가 내리면 어머니는 짬짬이 야산에서 솔가리를 긁고 삭정이를 꺽어다가 겨우살이 준비를 하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저녁을 지으며, 온종일 밖에서 놀아 얼굴이 발그래한 나를 잉걸불 앞에 끌어당겨 언 몸을 녹여 주셨다. 참나무에 얹혀사는 겨우살이처럼 어머니 등에 기대어 나는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재봉틀이 나오면서 어머니의 손바느질은 밀려났다. 허리끈 질끈 동여매고 당신은 동네 잔칫집이나 빨래품, 모내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굿은일 마다치 않은 어머니의 바지런함으로 나날이 초록 잎을 펼치며 나는 둥치를 키워갔다.
어릴 적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천식은 여고시절에도 감기에 걸릴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숨이 차서 쌕쌕거리며 눕지도 못해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어머니도 머리맡에서 꼬박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아 지친 몸을 끌고 학교로 갈 때, 당신은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한참을 걸어 교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며칠 동안 어둠을 긁으며 기침하느라 얼굴이 파리해지면, 어머니는 늙은 호박으로 단방약을 만들었다. 호박 속에 닭과 지네, 갱엿, 콩나물을 넣고 한지로 봉한 다음, 황토를 덧바르고 왕겨를 쌓은 뒤 불을 당겼다.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저녁에 잿더미 속에서 호박을 꺼내 푹 고아진 갈색물을 따라서 여러 날 동안 나에게 먹였다.
단방약을 만들 때 어머니는 수행하는 스님 같았다. 밤잠을 설치며 사그라져 가는 불에 왕겨를 붓고 풀무질하여 불씨를 살려냈다. 병원에 갈 형편이 안 되니 단방약이라도 먹여 병을 낮게 하고픈 어머니의 애틋한 몸짓이었다. 당신의 곡진한 정성이 기침을 밀어냈을까. 천식이 지금은 씻은 듯 사라졌다.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져 자신은 헐벗어도 겨우살이에 초록빛을 안겨 주는 참나무처럼, 자신은 시달려도 푸른 등지를 만들어 주려는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의 눈바람을 막아주는 울타리였다.
어느 날 홀연히 어머니는 먼 길을 떠났다. 심장마비로 쓰러져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졌다.
저녁밥 먹고 잘 주무시고 아침에 쓰러져 생의 저편으로 건너갔다. 마지막까지 참나무에 기대어 사는 겨우살이처럼, 자식을 편하게 하려고 하루도 병간호 받지 않고 어머니는 훠이휘이 떠났을까. 단 며칠이라도 어머니 병상을 지켜, 당신이 나의 천식을 낮게 하려고 밤을 새우던 그 고단한 수발을 잠시라도 받고 가셨어야 했는데….
골짜기를 훌고 가는 바람 소리에 헐벗은 참나무를 올려다본다. 바람에 휘청거리며 겨우살이를 안고 있는 참나무의 다솜에 가슴이 먹먹하다.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 백련암에 들어섰다. 선방 툇마루에 햇빛이 그득하다. 댓돌 위에 하얀 고무신 한 개가 가지런하다. 어머니가 신던 신발인 듯 정겹다. 따사로운 볕에 끌려 마루에 앉았다. 햇발이 그물망을 던진 마루는 어머니 품처럼 따스하다.
암자를 한 바퀴 돌아 비탈진 골짜기를 내려갔다. 헐벗은 숲에 겨우살이가 여기저기 봄인 듯 푸르다. 초록빛 겨우살이는 무채색 산기슭에 싱그러움을 풀어낸다.
수상자. 박일천님, 전라북도전주교육지원청 퇴직
수상소감_아침에 창문을 여니 어머니가 머리에 꽂으시던 옥비녀인 듯 옥잠화가 소나무 아래 하영게 피었다. 병약한 딸을 위해 당신의 몸을 삭여 세상과 이어주는 생의 고리를 엮어주고 가신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 핀 오늘, 기쁜 일이 있을 때 손뼉 치며 웃으시던 어머니의 웃음처럼 기쁜 수상 소식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영광을 안겨 주신 심사위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_참나무에서는 곡진한 어머니의 삶과 자식을 향한 위대한 모성을, 겨우살이에서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둥치를 키워낸 자신을 돌아본다. 작가만의 시각으로 관찰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을 잘 연결하고 있다. 적합한 비유에 따른 의미화와 주제화, 따뜻하고 시적인 감성과 표현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