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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인물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

by 자한형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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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豊臣秀吉)

요약

일본의 무장 ·정치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던 중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일본통일을 이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원어명 とよとみ ひでよし

출생-사망 1536 ~ 1598.8.18

별칭 기노시타 도키치로, 하시바 히데요시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關白)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혼노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90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시대를 열었다. 1593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 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상인으로 유명했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였다.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 정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 수 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4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名護屋; 현 가라쓰(唐津)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승전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고 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전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명나라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화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인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고전을 거듭하였고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후시미[伏見] 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나무위키)

8.1. 히데요시 독살설?

ㅇ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매독, 결핵, 이질, 위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독살설의 주역이 명나라의 강화 사신으로 온 심유경과 조선인 소년 양부하라는 것. 이 이야기의 원전은 숙종조 문신 염헌 임상원의 개인문집 <염헌집>에 실려있다

9.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ㅇ 사후 교토 동산의 아미타봉에 묻혔고, 일본에서는 드물게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사에 신으로서 봉안되었다. 신명은 도요쿠니 다이묘진(豐國大明神). 보통 신사에서 신격화된 인간, 즉 히토가미(人神)을 받들 때는, 해당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할 때, 그 원혼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신토의 논리로 볼 때 무척 이상한 일이다.

ㅇ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사를 해체하였고 히데요시의 무덤은 아예 폭탄으로 박살내버렸다.[80]

[80] 메이지 유신 시대 히데요시를 조정을 중시한 천황숭배 사상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면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도쿠가와 이에야쓰>

1615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 두 번의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살했으며 손자 쿠니마츠는 숨어 있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쿠니마츠는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으나, 도요토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교토로 끌려와 살해당했고,[82]

[82] 히데요리에게 친손녀 센히메도 시집보낸 이에야스가 (센히메의 아들은 아니라 하나)어린 쿠니마츠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할 수 있는데, 하필 히데요시가 조카 히데츠구의 일가를 몰살한 것이 이보다 몇 배는 잔인한 처사여서 별로 욕먹지는 않았다.

결국 히데요시의 대는 완전히 끊겼다. 다만 히데요리의 서녀였던 나아히메는 센히메와 가이히메의 조명을 받아 목숨을 건졌고 그대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ㅇ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이후 제일 먼저 한 일들은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는 일들이었다.[83]

[83] 조선과의 교류 재개를 위하기도 했고, 자신의 가문을 확장시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그를 무시했던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일 수도 있다

히데요시에게 추증된 신호는 이에야스의 건의에 의해 고미즈노오 덴노에 의해 영구 박탈되었으며[84][85],

[84] 천황은 신토의 수장이므로 신호를 추증하고 박탈하는 권한은 쇼군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85] 히데요시에 대한 천황과 교토 귀족들의 시선의 속내는 좋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덴노에게 출정을 알렸을 때 고요제이 덴노가 그것을 극구 반대하며 무모함을 비난하는 글이 남아있으며, 물론 안 통했지만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미천했던 자가 하루아침에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마음대로 고셋케의 최고 가문 코노에 가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혈통과 고귀함의 자부심이 높던 귀족들이 그를 좋아했을 리 만무하다. 사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그에게 신호를 추증한 것도 고요제이 덴노이지만 히데요시가 죽었을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건재했기 때문에 그도 도요토미 가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의 아들 고미즈노오 덴노가 히데요시의 신호를 박탈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히데요시를 위해 세워진 토요쿠니 신사를 폐쇄하고 인근 사찰에 신사 건물을 시주했으며[86]

[86] 히데요시는 불교의 폐해와 부패가 심하다고 보아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신토를 중시했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를 싫어했다. 이에야스의 이 행동을 했던 것은 불교를 탄압했던 히데요시를 격하하고 불교계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히데요시의 묘를 파괴해 그 행방이 묘연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 에도 막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두되고 존황양이 사상이 커짐에 따라 막부에 의해 평가 절하된 히데요시도 누명을 벗고 신호가 재추증되었으며 토요쿠니 신사와 그의 묘도 재건되어 크게 꾸며졌다.

ㅇ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에 히데요시를 유일하게 패배시켜 어머니를 인질로 바쳐 겨우 항복을 받아내게 한 사람. 본거지를 내주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에도를 개간하여 차근차근 힘을 길러온 인내심의 대가. 평소 안하무인의 독재자인 히데요시의 출병요청도 거부할 만큼 정권내의 압도적인 2인자이며,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재통일한 걸물이다. 비록 히데요시는 이런 이에야스조차도 히데요시에 대한 반역을 꿈꾸지 못하게 했지만[123]

[123]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을 확보한 덕에 이에야스로서도 어찌 할 명분이 없었다. 원래 히데요시가 포섭한 오다 가의 삼남은 바보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반면 이에야스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124]

[124] 전쟁으로 이에야스를 누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 이후로는 이에야스에게 전봉 명령을 내리고 이에야스는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을 지는 몰라도 이 명령을 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더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이에야스보다 나은 사람은 아니다.

14. 후세의 평가

14.1. 일본

ㅇ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의 대표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조선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임진왜란의 원흉인 탓에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과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125]

[125] 물론 이것도 정확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이 흑화하기 전의 성격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걸로 모자라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하기까지 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코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것을 말년에 흑화했을 때조차 이전과 똑같이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미화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다.

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타이코(太閤)'.

에도 막부 시절에는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그가 쇼군을 자처하지 않고 (명분상이지만) 천황을 중시하여 관백 직위를 받은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상적인 공무합체(公武合體)[126]

[126] 공가, 즉 일본 황실과 무가, 즉 실권을 쥔 무사 가문이 조화를 이룸.

사례로 여겨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에는 상당히 고평가되었다.[127]

[127] 히데요시가 쇼군을 해먹지 않은 건, 본인이 천황가()의 후손이 아닐 뿐더러 본인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해봤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술한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출신이었던 탓에 후다이(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기반이 없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히려 본인이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크게 성공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뿐더러 애초에 본인의 직위였던 관백 자체가 쇼군보다도 훨씬 손에 넣기 어려운 직위였기에 굳이 쇼군이 되기 위해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대외 침략에 매진했던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선구자였던 점도 주효하였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경술국치 당시 "'코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이 대륙 침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그 나름의 국위선양을 이룬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128]

[128]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음침한 계략꾼으로 상당히 저평가되었는데, 이유는 물론 메이지 유신 체제에서는 타락한 구체제 역할을 맡은 것이 에도 막부인데다가 교토 근방이 거점이었던 히데요시에 비해 막부를 세우고 에도에 거점을 둔 이에야스는 일본 황실을 푸대접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 외에도 일본 역사상 천황을 갈아치웠던 무로마치 막부의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그 목상(木像)이 대역죄로 효수를 당했다. 저래도 황실 분가인 세이와 겐지 출신인데 안습.

일본의 패전 후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평가가 수직상승하며,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임진왜란 전의 업적은 인정한다. 이래저래 이데올로기에 따라 평가가 왔다갔다 하는 인물들이지만 말년에 시원하게 말아먹은 걸 제외하면 분명 저마다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사카 성을 쌓고 오사카를 크게 발전시켰던 인물이라 그런지,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129]

[129] 'はん'"~"를 뜻하는 'さん(~)'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아재' 정도.

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130]

[130] 정작 관백을 그만두고 태합으로 물러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끝낸 그 영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타락한 뒤였다. 굳이 임진왜란이 아니어도 도요토미 히데츠구 및 그 일가를 잔혹하게 숙청하여 일본 기준으로도 도저히 좋게 평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일본 제국이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얼마나 심하게 미화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ㅇ 그런데 인터넷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가는 일본 내부에서도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놓였다. 실제로 NHK 대하드라마 군사 간베에에서는 일본 사극으로서는 최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고의 역린인 임진왜란을 슬금슬금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측 제장들이 쓸데없이 춥기만 한 썩어빠진 조선을 굳이 점령해야 하냐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주 장난이 아니게 난장판인 상황으로 묘사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대극으로 정면 비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영웅이라고 불리우고 있다...[131]

[131] 사실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하게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을 가진 전쟁범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들까지 찬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에서 현재까지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긍정적인 업적도 있지만, 일본 강경 우파 세력의 오랜 통치에 따른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통일 이후의 각종 실책으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진시황이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는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중화권에서의 전반적인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과도 비슷하다.

사실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에 대한 인식이 처음부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132]

[132] 지금도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것이, 일부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평가할 때 그가 '군국주의의 시초였다', '서민들을 착취했다', '천황을 존중하는 듯 하면서 천황을 조종했다'는 등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는 경우도 많다.

히데요시가 죽자 마자 일본군이 철수를 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왜군의 대다수는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동원되었을 뿐, 전쟁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3]

[133]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호랑이 사냥 일화와 귀무덤의 유래만 보더라도, 일본 장수들은 조선을 정벌하는 것보다는 히데요시의 개인 취향과 비위 맞추기에 바쁜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 와중에 그나마 진짜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자신의 할 일을 다했던 장수들은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정도다.

또 임진왜란에 동원된 물자와 병력들은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일본의 백성들을 고스란히 쥐어짜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134]

[134] 일본이 2차대전 당시 전시동원 체제에 들어가면서 조선, 대만 등의 식민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자국의 국민들까지 동원해서 전쟁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히데요시가 서민적인 이미지[135]

[135] 출세 이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확실히 서민적인 인물이었지만 통일된 일본을 통치하던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민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차라리 국가지도자가 된 졸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본인부터가 서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서민들을 명분없는 전쟁을 위해 마구 착취했으니 말이다

이니 출세의 상징[136]

[13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세 과정 자체는 객관적으로 봐도 매우 대단하지만, 그렇게 출세한 후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으로 대표되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도요토미 정권을 단명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엄밀히 말하자면 출세의 상징인 창업군주로서 그다지 적합하다고 보기 힘든 인물이다. 출세의 상징인 창업군주로서는 차라리 자신이 세운 왕조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길게 유지된 유방과 주원장이 더 적합한 인물이다

이니 하는 것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히데요시에 대한 존숭이 이루어지게 되면서[137]

[137]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정당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진다.

생겨난 인식으로 생각된다. 히데요시가 당시 일본의 귀족, 영주, 무사들, 심지어 천황보다도 더한 권세를 누렸고 임진왜란을 위해 자국의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였는데 당시 오늘날과 같이 서민들에게 사랑받았을 리 만무하며, 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정계 진출에 대한 공평한 기회를 창출했다는 일본 정부의 공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을 수 있다. 심지어 이에야스가 파괴했다던 히데요시의 묘도, 사실은 이에야스가 아니라 히데요시의 가혹한 수탈과 폭정에 치를 떨던 농민들이 부수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현대의 일본 서민들이야 당시 임진왜란을 경험했던 세대도 아니니 히데요시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을 구실은 적을 것이므로, 히데요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과거보다 현재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혐한 일본인들에게는 신으로 숭배받다시피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이유는 알다시피 이걸로 한국을 때렸다는 이유에서이다.

14.2. 한국

ㅇ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역사의 인물 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인물 수위를 다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도도 다카토라, 후쿠시마 마사노리,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등 임진왜란 때 참여했던 무장들도 상당수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임진왜란을 주도했던 우두머리인 히데요시보다는 덜 유명하다. 대개는 부정적인 쪽으로, 특히 임진왜란에 관해서는 살인광전범 같은 인식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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