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 해운 황금기 이끈 범선 기타마에부네27(北前船)
‘신의 물고기’ 실어 나른 뱃길 일본 근대화 경제 동맥 열어
▎기타마에부네의 선원들은 신사나 절에 자신들의 배를 그린 에마(繪馬)를 봉납하고 항해의 무사를 기원했다. / 사진 : 최지현
겨울이 긴 홋카이도의 봄은 개화(開花)보다 해안선을 따라 먼저 온다. 청어가 알을 낳기 위해 떼로 몰려드는 것을 기쿠(群来)라고 한다. 산란(産卵)과 방정(放精)으로 바다 색깔이 우윳빛이 된다. 바다 색이 변하는 장관을 보기 위한 관광상품까지 있다. 갈매기가 울어대며 청어 떼가 몰려들면 청어잡이 어부들도 겨우내 정치망(定置網)을 가다듬고 출어를 준비한다. 설렘의 봄은 바다의 노래로 시작한다.
‘이시카리반카(石狩挽歌)’라는 노래 작사가인 나카니시 레이(なかにし礼)는 청어잡이 풍경을 잘 묘사했다.
“갈매기가 우니까 청어가 올 거라고/ 붉은 소매의 어부들이 떠들어 댄다/ 눈 속에 파묻힌 파수막 구석에서/ 나는 밤새도록 밥을 짓는다.”
청어는 한류성 어종으로 연안에 무리를 이뤄 서식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떼 지어 이동한다. 어부들은 파수막에서 청어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청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청어잡이 일꾼의 모습이 선명하다.
청어가 자주 나타나면 부자가 되겠지만, 청어는 신어(神魚)라 불릴 정도로 출몰에 변덕이 심했다. 청어의 움직임에 따라 부의 향배도 결정됐다. 네덜란드가 15세기 초반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한 계기도 청어잡이 어업 중심지가 발트해에서 북해로 이동하면서부터였다.
에도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몰려드는 청어를 잡느라 니혼카이 연안은 붐볐다. 청어잡이 산업은 당시 홋카이도의 중추적인 산업 중 하나였다. 매년 봄 어기(漁期)가 가까워지면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각지에서 안슈(ヤン衆)라 불리는 어부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홋카이도의 서해안 어장으로 속속 모여든다.
그들은 숙소를 겸한 선주 저택인 ‘청어 저택’에 집결해 어선 선장의 통제하에 청어 ‘무리’를 기다린다, 이윽고 청어 무리가 도착했다는 기별이 당도하면 일제히 배를 저어나가 그물을 펼치고 청어를 잡아 올린다.
수확한 청어의 일부는 바닷가에서 ‘말린 청어’로 가공한다. 나머지는 가마솥에 끓여 기름을 짜낸 뒤 찌꺼기를 생선 지게미로 가공한다. 지게미는 배편으로 서일본에 이송돼 현지에서 귤·쪽·면화 재배의 고급 비료로 사용됐다.
어기가 일단락되는 5월, 홋카이도 서해안에서는 청어 제품 판매가 호황이다. 귀향 전 환락가는 어부들로 북적거린다. “에사 시(市)의 5월은 에도에도 없다”고 할 정도로 항구는 활기가 넘쳤다. 이런 북적거림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타 마에부네(北前船)였다. 바다에 꿈을 건 바다 사나이들의 욕망을 실어 나르는 배였다.
섬나라의 특성상 일본은 해안선이 길다. 국토 면적은 세계 62위지만 해안선 길이만 놓고 보면 2만9751㎞로 세계에서 6위다. 일본은 중국이나 미국보다 더 긴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큼 이 해안을 따라 연안 수송이 발달해 왔다.
소득 높아져 다시마, 말린 청어 등 수요 급증
▎오타루에 있는 ‘청어 저택’. / 사진 : 최지현
에도 시대(1603~1868)에는 니혼카이와 홋카이도 항구에서 에도나 오사카로 쌀과 물고기 등을 운반했다. 배는 세토내해를 거쳐 오사카·에도로 향하는 서회전 항로나 스가루해협을 거쳐 에도로 향하는 동회전 항로를 이용했다. 서회전 항로를 달리는 배를 기타마에선이라고 불렀다. 왜 기타마에부네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기타마와리(北廻り船)라는 발음이 변했다는 설과 기타마에(北前)는 니혼카이의 뜻이라는 설 등 몇 가지가 있다.
에도 시대는 해운의 시대였다. 16~17세기 사카이와 하카타 상인들이 남만 무역과 주인선(朱印船) 무역으로 동남아시아 일대를 주름잡았다. 1639년 쇄국이 확정되기까지 350척, 10만 명 이상이 바다를 건너갔다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 베트남의 호이안, 필리핀의 마닐라에 일본인촌(村)이 형성되기도 한다.
사카이·교토·나가사키·하카다는 상업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다. 오미(近江) 상인들은 기타마에 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에 홋카이도와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쇄국으로 국제 교역의 폭이 좁아졌지만, 자급자족 소비경제시대의 배경에는 에도·오사카·교토 3대 거대도시가 있었다.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인, 무사가 반을 차지하는 에도, 고급 공예 도시 교토, 경제 수도이며 전국 유통의 핵심인 오사카가 일본 각지의 산물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기타마에부네는 오사카와 홋카이도를 연결한 경제 동맥이다. 에도 시대 중기(18세기 중반)에서 메이지 30년대(20세기 초반)에 걸쳐 니혼카이 연안 항구를 돌아다니며 상품을 매매함으로써 오사카와 홋카이도를 연결했던 상선군(群)을기타 마에부네라고 불렀다.
16세기 후반 등장해 오사카 상인, 이세 상인과 더불어 일본의 3대 상인으로 성장한 오미 상인은 ‘산포요시(三方良し)’라는 독특한 경영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산포요시’란 판매자와 구매자는 물론 그들이 속한 사회까지 모두 만족하는 거래를 뜻한다.
오미 상인들은 홋카이도 해산물을 와카사(오하마)와 에치젠(쓰루가)을 거쳐 교토로 가지고 갔으며, 술·간장·쇠그릇·헌옷·도자기 등 일용품을 사서 돌아갔다. 상품을 운반하기 위해 세(貰)를 낸 배는 니혼카이 항로를 숙지(熟知)하고 있던 가가·에치젠·노토 등지의 배였다. ‘니도코부네’라 불리던 화물 운송을 하던 배가 오미 상인들로부터 독립해 교역 운송을 하는 ‘기타마에부네’로 바뀌었다. 고용된 선장에서 배를 소유한 상인으로 바뀐 것이다.
막부는 간분 12년(1672) 에도의 상인 가와무라즈이켄(河村瑞現, 1618~1699)에 15만 석 가량의 천령(天領, 막부의 영지) 쌀을 모가미 강의 하구 사카타(酒田)에서 에도까지 운반할 수 있도록 항로 정비를 명했다. 사카타에서 에도까지는 스가루 해협을 통과해 태평양을 항행하는 동회전 항로편이 가까웠지만, 매우 위험한 해역이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즈이켄은 사도(佐渡)의 오기(小木)·시모노세키(下關)·오사카 등 10개 소를 정식 기항지로 정하고 그 외의 항구에 입항할 때도 무관세로 통과하도록 연안의 각 번에 통지하고, 초장거리의 서회전 항로를 정비했다. 이 항로의 안정성을 알게 된 스가루·아키타 등 니혼카이 측의 여러 번도 오사카까지 직항으로 연공미(조세)를 수송하기에 이르렀다.
오미 상인의 스루가~홋카이도 항로와 즈이켄의 서쪽 항로 사이 사카타~오사카 항로가 연결된 것이 ‘기타마에부네 항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곧바로 기타마에부네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스루가에서 양륙(揚陸)하는 쌀은 줄었지만 오미 상인이 운반하는 홋카이도의 산물은 거꾸로 계속해서 증가했다. 에도 시대 들어 전국적으로 개전(開田)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워졌고, 다시마나 칼질해서 다듬어 말린 청어 등의 수요가 급속하게 늘었기 때문이다.
전신(電信)보급되자 가격 정보 독점 어려워져
▎에도 시대 청어는 교역을 통해 일본 열도에서 쌀을 가져오는 귀한 상품이었다.
다시마는 에도 시대 들어 우치우라만(內浦灣)의 참다시마 생산량이 급증함에 따라 교토·오사카·에도에 대량으로 공급됐다. 그리고 면화·등심초·소금 등 환금(換金) 작물의 재배가 세토내해 일대에서 확산하면서 비료의 수요가 높아졌다. 구주구리하마(九十九里浜, 지바 현) 등 어비(魚肥)가 되는 정어리의 대량 공급지도 수전(水田) 개발 이후로는 지역의 자체 수요 때문에 서일본으로까지는 운송되지 못했다.
정어리의 대체 어비가 된 것이 청어였다. 18세기에 들어서 청어를 쪄서 어유를 짜고 남은 찌꺼기를 비료로 하는 기술이 개발돼 어비의 대량 공급이 가능하게 됐다.
오미 상인에 고용됐던 호쿠리쿠의 선장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 더 크게 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때문에 자기 명의로 선박을 소유하고 오미 상인 외의 에사시나 하코다테의 상인과 거래하는 한편 오사카의 도매상과도 직접 거래한다. 이러한 노력 끝에 호쿠리쿠 선장들은 오미 상인으로부터 독립했다.
18세기 말 어지간한 강풍에도 부서지지 않는 튼튼한 돛이 발명돼 오사카~홋카이도의 연 2회 왕복까지 가능하게 됐다. 호쿠리쿠뿐만이 아니고 각지에 ‘기타마에부네’를 운영하는 선주가 등장해 근거리를 자주 운행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세기가 돼 막부가 에조치를 직할지로 함에 따라 그 산물을 에도에 운반하는 상인도 생겨났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타마에부네는 다양해졌다.
기타마에부네의 최전성기는 메이지 시대다. 에도 시대는 마쓰마에 번, 에사시, 하코다테만 입항이 허락됐지만 메이지 3년부터는 어느 항구라도 교역이 가능하게 됐다. 서양식 범선처럼 복수의 돛을 장착하는 등 선박의 개량도 진행한 덕분이다.
메이지 20년대가 되면서 조금씩 기타마에부네의 이익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통신수단이 편지밖에 없던 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고르지 않은 상품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은 실제로 각지를 방문한 기타마에부네의 선장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차액’을 이용해서 큰 이익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전신(電信)이라고 하는 문명개화의 통신수단이 차례로 보급되자 기타마에부네의 가격 정보 독점이 어려워졌다.
메이지 24년(1891년) 도쿄와 아오모리 간의 도후쿠 본선이 개통됐다. 스가루 해협만 넘어가면 홋카이도와 도쿄가 육로로 직결됐다.
기타마에부네의 정의에 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공통 항목에 이르면 첫째, 오사카에서 홋카이도와 니혼카이를 돌아 왕복했다. 둘째, 기항지에서 적화품(積貨品)을 팔고 새로운 매입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화물의 운송에 그치지 않고 매매하면서 운항하는 범선이라는 점이다.
에도 시대 화물을 싣고 바다를 달리는 배를 가이센(廻船)이라고 했다. 전국에는 다양한 항로가 있었고 특정 화물을 전문적으로 운반하는 가이센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빈번하게 항해했던 건 오사카에서 에도로 향하는 히가키가이센(菱垣廻船)과 다루가이센(樽廻船)이다.
화물을 가리지 않고 운송하는 히가키가이센이 먼저 등장하고 나중에 술동이를 운반하는 것으로 시작한 다루가이센이 나타났다. 겨울에 거친 바다가 되는 니혼카이에 비해 태평양을 달리는 히가키가이센과 다루가이센은 연중 수 차례 왕복이 가능했다.
그 외에도 세토내해의 소금을 에도로 운반하는 시오가이센(鹽廻船)과 나가사키에서 수입한 견사(絹絲)를 오사카로 운반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마나 말린 전복 등 중국 수출품을 운반하는 이토카가이센(絲荷廻船)도 있다. 특히 소금은 에도의 근처인 도쿄만 연안에서는 생산량이 미미했기 때문에 에도에서 관동 지방 각지로 운반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는 10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있던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지만, 의류를 포함한 생활필수품을 충분히 생산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사이에서 대량의 물자를 운반했다. 그러나 왕복 편에 화물을 실은 배는 없었다. 기항지도 적어서 히가키가이센과 다루가이센도 에도까지 편도 운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비해 기타마에부네는 기항지에서 싸다고 생각되는 물품이 있으면 매입하고, 화물로 비싸게 팔리는 물건이 있으면 파는 등 ‘상업적 행위‘를 하면서 홋카이도를 왕복한 배다. 이를 가이즈미부네(買積船)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다른 항로의 가이센과는 가장 다른 큰 특징이다.
기타마에부네는 천석선(千石船)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래도 이것은 ‘쌀을 1000석 싣는 것이 가능한 크기’라는 의미다. 중량으로 환산하면 150t의 쌀이다. 실제로는 500석 적재 정도의 중형선도 많았다. 기타마에부네 역사상 최대의 선박은 2400석 적재도 가능했다. 배의 형태로 분류하면 벤자이센(辨才船)이다. 희고 거대한 돛 1매로 돛단배 항해를 하는 일본배(和船)를 상상하면 된다.
한번 갔다 오면 현재 가치 6000만~1억 엔 이익
▎일본 동북부 종족 원주민 아이누족. 주로 연어 등 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원래 벤자이센은 세토내해에서 발달한 선형이다. 당시는 300석 전후의 중형선이었다. 당초에는 노와 돛으로 항해가 가능한 겸용선이었다. 그 후에 돛으로만 항해하는 범주전용선(帆走專用船)이 됐고 승조원의 수도 적어졌다. 개량을 거듭해 사용에 편리한 배가 된다.
유통경제의 발달과 함께 1000석 또는 1500석 적재가 가능해지는 등 점차 대형화된다. 천석선은 대형의 벤자이선을 말한다. 기타마에부네가 벤자이선뿐인 것은 선체가 견고한데다가 현재의 배와 마찬가지로 예리한 선수(船首)에 파도를 헤치는 서양의 요트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풍에도 진행할 수 있는 훌륭한 돛단배 성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석선으로 홋카이도와 오사카를 왕복하면 기타마에부네는 1000량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0만 엔에서 1억 엔에 상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14~16세에 견습 선원으로 시작해 항해술을 배우기 시작한 뒤 선장이 되면 큰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무사를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도가 있던 당시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그런 기회를 붙잡는 것이 가능한 기타마에부네는 서민들에게 꿈같은 이야기였다. 실제 기타마에부네에는 수많은 조난 기록이 있다. 그래도 ‘기타마에부네의 꿈’을 꾸는 승선은 끊이지 않았다.
기타마에부네가 실어온 것은 생활필수품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의 민요, 예능·문화, 풍습, 음식문화도 있었다. 마쓰마에의 벚꽃은 혼슈에서 묘목을 기타마에부네로 실어왔다. 민요 ‘에사시오이와케’는 ‘시나노오이와케’로부터 전해졌다. 기타마에부네의 선원이 기억했다가 이곳 저곳에 정착한 결과다.
다시마로 즙을 내는 음식문화는 간사이에서 탄생한다. 다시마는 추운 북쪽의 바다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해서 간사이에서 다시마즙으로 태어났을까. 홋카이도에서 얻은 다시마는 기타마에부네가 운반해서 간사이에서 판다. 그 다시마가 오사카와 교토에서 다시마 물과 다시마 말이로 태어났다.
취사부터 시작해 선장 되기까지 30년 걸려
▎후쿠이 현에 있는 기타마에부네 선주의 저택.
니혼카이 연안 각지에 남은 사사오리(裂織)는 기타마에부네가 가져다준 귀중한 목면 재활용 기술이다. 사사오리는 손상되거나 불필요해진 천을 가늘게 찢은 것을 씨실로 해 삼실(麻絲) 등을 날실로 짠 직물이나, 그것을 이용해 만든 의류다. 이로부터 생겨난 사시코(刺子)는 지금도 열도 각지에서 전승되고 있다.
음력 2월, 현재의 절기로 3월은 기타마에부네가 출항하는 계절이다. 수많은 선박이 오사카를 떠나지만 선주에 따라서는 아키타·사카타·나가타 등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상행 항로를 이용해 일단 오사카로 향한 뒤 다시 홋카이도를 향하는 배도 있었다.
기타마에부네가 홋카이도에 도착하는 것은 4월 말에서 5월쯤이다. 홋카이도의 산물을 싣고 다시 오사카를 목표로 출항하는 것은 8월쯤이다. 많은 기타마에부네 선주가 있던 호쿠리쿠를 보면 태풍 시즌 전에 시모노세키부터 세토내해에 들어가 오사카의 요도가와의 지류에 선박을 계류하고 선장 외의 선원 등은 도보로 귀향했다. 귀향한 선원들은 매일 선주의 집에서 청소·제설·떡 치는 일 등 무엇이든 했다. 10일 정도의 휴가를 받아 온천에서 휴양하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였다.
오사카에 남은 선장은 남은 화물이 있으며 팔아 치웠다. 선장에게는 이듬해 봄에 선적할 상품 구매라는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정월 전후쯤이었다. 쌀을 1000석 싣는 기타마에부네에는 통상 11~13명의 선원으로 이뤄졌다.
기타마에부네의 최고 책임자는 선장이다. 배의 운항부터 상품의 매매, 승조원의 통솔까지 모두 선장이 총괄했다. 선장 밑에는 삼역(三役)이라 불리는 중요한 직책이 있었다. 우선 현재의 항해사에 해당하는 오모테지(表司)다. 출항하면 주야를 불문하고 진로를 확인해서 목적지까지 항로를 지시했다. 이어서 돛과 타를 조작하고 그 외 모든 갑판상의 작업을 지휘하는 수부장이 가코(親仁)다.
선원의 출발은 취사다. 항해를 거듭하며 노잡이(楫子)·닻잡이(碇捌)·가타오모테(片表, 부항해사) 등으로 성장해 마침내 삼역(三役), 선장이 되지만, 삼역이나 선장이 되는 나이는 40~50대다. 취사부터 시작해서 30년쯤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선장은 고용된 오키센도(冲船頭)와 자신이 선주인 지키노리센도(直乘船頭)로 나뉘었다. 기타마에부네의 선장은 거래 교섭의 책임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 이상의 읽고 쓰고 계산하는 능력이 요구됐다.
그래서 선장을 보좌해서 적하와 양하를 하며 선내 회계를 담당하던 치쿠(知工)라는 직책이 선장으로 승격되기도 했다. 항해에서는 오모테지와 가코가 큰 역할을 했다. 그중에는 30대 중반에 선장이 되는 사람도 더러 있는 반면에 50세를 넘어도 수주(水主)에 머문 사람도 있었다. 출세는 실력 본위였다.
1000석을 적재하는 변재선을 1척 건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00량이었다. 중고선도 500량쯤 됐다. 그러나 오키센도로부터 독립해 선주가 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돈을 모을 만큼 기타마에부네의 선장의 급료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오사카~에도를 왕복하는 히가키가이센이나 다루가이센의 선장은 연 30~40량의 급료를 받았다. 당시의 인기 직업이었던 목수인 도편수는 연 수입이 25량 정도였으니 수입 면에서 선장은 최고의 직업이었다.
기타마에부네의 선장은 한 항해의 급료가 단지 2~3량이었다. 그러나 선장에게는 선주의 적하품 중 1할 정도 자신의 상품을 적재하는 것이 허용됐다. 쌀 1000석 적재가 가능한 경우 이익이 1000량에 이르렀기 때문에 단순히 계산하면 선장은 한 항해에 100량을 버는 것도 가능했다. 이 매매를 용돈 벌이라고 불렀다. 다른 항로에서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기타마에부네 항로에서는 일찍이 인정됐다.
삼역 이하의 선원에도 기리다시(切出)라고 하는 보너스가 있었다. 선주가 매상고 중에서 5~10%를 선원에게 분배했다. 이렇게 하면 선원들은 선주의 화물을 소중하게 취급하고 선장이 자신의 화물만을 우선하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도 했다.
선장은 자기 짐을 실었기 때문에 난파되지 않도록 안전하게 배를 운항했다. 해난사고로 꾸며 화물을 빼돌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장은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비싸게 팔 수 있는 시장이 있는 항구에 들렀기 때문에 화주에게도 큰 이익이 돌아왔다.
‘바다의 쌀’ 신어(神魚)의 비밀
▎겨울이 되면 홋카이도는 설국(雪國)으로 변한다.
이렇게 선장이 될 때까지도 자금 축적이 가능한 구조가 있었기 때문에 조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타마에부네에 승선하려는 사람은 끊이지 않았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에도 시대 기타마에부네는 용기와 장사의 기질만 있으면 서민이 대 부호가 될 수 있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홋카이도에 도착하기까지 기항지 각지에서 팔릴 만한 물건은 무엇이라도 사서 돌아오며 청어·다시마 등을 만재(滿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은 홋카이도 유일의 다이묘령(大名領) 마쓰마에 번의 특수 사정 때문이기도 했다.
벼농사가 불가능했던 에도 시대의 홋카이도에는 주식인 쌀은 물론 모를 심을 수도 없어서 새끼·짚신을 비롯해 거의 모든 생활 물자를 혼슈에서 수입했다. 마쓰마에 번 사람들은 그 자금으로 아이누족이 잡은 연어 등의 해산물을 물물교환을 통해 손에 넣은 뒤 마쓰마에의 오미상인에 팔았다.
당시 최대의 상품은 청어였다. “청어는 생선이지만 생선이 아니다.” 청어는 교역을 통해 일본 열도에서 쌀을 가져오는 상품이기 때문에 쌀과 비슷할 정도로 귀중한 상품이었다. 오우미 상인들이 홋카이도 교역에 공을 들여 기타마에부네를 불러 모았던 것도 오직 ‘바다의 쌀’이라고 할 수 있는 청어 때문이었다. 홋카이도의 청어는 쪄서 물고기 기름을 짜서 남은 청어 찌꺼기를 발효시켜 비료로 만들었다. 이것이 매입 가격의 5배 때로는 10배로도 팔렸다. 기타마에부네의 커다란 비밀은 청어였다.
다와라모노(俵物)는 나가사키의 중국 주력 수출품 중 건(乾)해삼·건(乾)전복 및 상어 지느러미의 세 가지 중요 품목을 말한다. 상행 항로에서는 건전복·해삼·말린 상어 지느러미도 대량 선적됐다. 이 상품은 가마니에 담겨 운반된 것으로 다와라모노라 불렸다. 중국에는 다시마도 대량으로 수출됐다. 병에 잘 듣는 약초로서 갑상선 호르몬의 이상이 원인인 병에 약효가 있는 약이었다.
우라니혼(裏日本)이라는 표현이 있다. 기타마에부네가 다니던 혼슈 섬의 니혼카이 연안 지역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라니혼이라는 표현에는 다소 비하하는 듯한 뉴앙스가 있다 해 요즘은 자제한다. 혼슈 섬의 니혼카이 연안 지역은 지금은 쇠락했으나 한때 번화한 항구도시가 있었다. 명산을 우러르며 흘러내린 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에는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는 듯 웅장한 기타마에부네 선주 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기타마에부네는 에도 시대의 산업을 크게 발전시켜 많은 문화를 만들어내고 ‘일본은 하나의 나라’라는 의식 형성을 촉진시켰다. 기타마에부네는 메이지 시대 근대국가의 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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