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토끼, 집토끼 / 박순태
토끼란 놈은 참으로 묘한 동물이다. 산과 집으로 갈라선 두 집단이 만물의 영장을 서로 자기네 영역으로 끌어들여 조롱까지 한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어느 지역을 위기로 몰아넣었을 때였다. 특정 종교집단이 바이러스 전파의 빌미로 손가락질을 받고, 그곳 단체장이 저울대 위에 오르는 민감한 시점이었다. 카카오톡 단체 방에 올린 글 몇 자가 나를 산토끼 신세로 만들었다. 위기 속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단체장을 두고 다른 지역 지도자와 비교하는 무지렁이 짓을 했던 게다. 자칭 집토끼 한 마리가 사약이라도 받은 듯 붉은 눈을 치켜뜨고 요란을 떨었다. 나도 우리 집에서는 집토끼이련만.
산토끼와 집토끼는 외형상 비슷해 보이지만 속성은 전혀 다르다. 산토끼는 특별한 거처 없이 생활하는지라 메토끼라 불렀다. 녀석들은 개별로 생활하며 태어나는 즉시 자연스레 일어서서 주위를 경계하며 걷는다. 집토끼는 굴을 파서 군집으로 생활하기에 굴토끼로 통했다. 산토끼와는 달리 태어난 즉시 움직이지 못하고 털도 없다. 이러한 두 개체는 태생이 다를뿐더러 유전자 수가 상이하여 서로 교배되지도 않는다. 멧돼지와 집돼지는 물론, 이름이 다른 사자와 호랑이도 같은 과라서 교미를 하면 새끼를 낳는다. 두드러지게 산토끼와 집토끼는 유전자 수가 달라서 배태되지 않는다. 둘은 자기네들 집단끼리만 교접이 될 뿐이다. 조물주의 속심이 흥미롭다.
글도 산토끼와 집토끼처럼 담장을 칠 때가 있다. 사상적이거나 철학적 논거로 접근할 때면 더욱 그렇다. 성향에 따라 이편에서 보면 집토끼로, 저편에서 보면 산토끼로 보인다. 세상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 밥상 위의 혼합 밥 같아야 시시비비를 면하련만, 정치적 사안을 표현하려면 쌀밥 아니면 보리밥을 올릴 수밖에 없는 게 문제이다.
지난 총선 후 토끼가 남긴 흔적이 어떤가 싶어 지도를 펼쳐보았다. 총선에서 당선된 선량들의 소속정당 고유색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졌다. 동쪽 어느 지역은 붉은색으로, 서쪽 어느 지역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양쪽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서로 저기는 산토끼 구덩이구나 하면서 멋쩍은 표정을 지을만하다.
시선이 머문 곳이 있다. 이제껏 저울추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았던 지역이 이번에는 푸른색으로 덧칠되었다. 집토끼에 마음을 묻어둔 정당 후보에게 산토끼가 기질을 발휘하여 매운맛을 보여줬던가 보다. 이래저래 참다못한 산토끼의 외침이 지축을 흔들었다.
인간이 산토끼, 산토끼 하면서 세 치 혀로 환심을 얻으려 들면 녀석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입을 아물거린다. 그들을 울안으로 몰아들여야 소원 성취할 수 있다며 정치권 인사들이 공을 들인다. 집토끼와 애정을 나누며 새살림을 차리도록 방법을 동원하지만 별무효과다. 산토끼와 집토끼가 교배하여 새 품종이 태어난다면 만사 해결될 일이지만, 녀석들은 타의에 흔들리지 않고 필연을 지켜나갈 뿐이다.
집토끼가 울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바깥세상에 마음이 기울어지면서 입맛까지 변하기 시작한다. 끼니마다 진저리나는 가공식품을 먹어야만 했으니 그럴 듯도 하다. 먹이 주는 시간을 늦추거나 아예 굶기기도 하는 업신여김에 턱을 괸다. 참다못해 눈을 부라리며 바득바득 이빨을 간다. 담장 밖을 모르는 천성이면서도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면서 먹성 따라 풀잎을 뜯으려 한다.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인간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꼴이 될 것이다.
산토끼는 더 밉상이다. 옮겨 심은 어린나무를 갉아먹거나 들판에 내려와 곡식을 탐하면서 인간의 심기를 건드린다. 달래고 어르며 정을 줘도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무리 지어 밀어붙인다. 이 현상을 두고 혀를 차며 하소연한다면 지도자의 자격 미달을 드러내는 어리석음이다. 산토끼는 정상을 바라보며 뜀박질하는 기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집토끼와 산토끼가 인간 세상에 한목소리를 내면서 반기를 들었다. 귀를 쫑긋 세워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마음에 담아두었던 그들이다. 정치인들의 허황한 망상을 감지했고, 철통같이 믿었던 약속이 무너져 내림을 보았고, 부조리가 풍기는 구린내에 코를 막았다. 이젠,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않고 모두를 위해 틀을 바꿔보자고 실력행사로 나온다. 조삼모사에 눈 감고 입 닫았던 그들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몽매한 인사들을 눈물 흘리게 만든다.
토끼들이 정치공해에 질식하겠다고 호소한다. 닫힌 세상이 불러오는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반란을 끊임없이 꿈꾼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주의까지 넘본다. 조화롭고 충만한 환경을 바란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허비할 수 없고, 오늘을 위해 내일의 몫까지 태울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친다.
애달프고 나약기만 했던 그들이 앞날의 운명을 점치며 목소리를 낸다. 정치 관료집단을 향해 지혜롭게 논쟁하여 이치에 맞게 실행하라고 요구한다. 묵은 관습을 쇄신하고 선진적인 시스템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공정公定이 아닌 공정公正으로, 정의政義가 아닌 정의正義로 이행하라고 외친다. 눈 가리고 아옹하다간 녀석들로부터 몰매를 맞는 시대가 되었다.
토끼에겐 놀라운 무기가 있다. 속임수 부릴 만큼 교활하지 않고, 상대를 할퀼 발톱이며 물어뜯을 이빨도 갖지 못했다. 목숨을 내려놓으라 해도 대꾸 한마디 없이 뒤돌아 헐떡이며 도망가기 바쁘다. 그런 이들이지만 특이한 신체 구조하나를 지녔다. 이중 자궁이다. 태아 착상 기관이 특수하여 정해진 배란일 없이 암수 합방이면 바로 수태가 된다. 토끼가 없던 호주에 20여 마리를 방사했더니, 50년 후에는 무한대로 불어나 여우와 담비 등의 천적을 들여올 정도였다. 먹이사슬의 하단에 있으면서도 종족 보존만은 걱정 없다. 유별난 특이성이 뜻하는 바가 크다. 양순한 서민들도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토끼무리가 되어 실력행사를 하는가 보다.
삶이 그렇듯 슬프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식한 녀석들, 앞날의 운명도 스스로 점치는 단계에 도달했다.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무의식에 저장된 욕구불만,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활짝 피워올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그들의 꿈의 세계이다.
사회가 진척되려면 각기 다른 사고와 비전 제시가 많은 게 바람직하리라. 정치판이 아니라도 두 마리 토끼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인간사회 운영의 공학이자 숙제이다.
두 집단의 토끼는 본성을 시시때때로 드러낸다. 한 무리는 ‘메메’하고, 또 한 무리는 ‘굴굴’하면서 머리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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