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문학’의 개척자 농암 이현보 5/송의호
출세와 담쌓은 자유인이자 풍류객의 귀거래사
부모에 대한 효심과 노인을 공경하는 적선(積善) 전통의 산실… 어버이 모셔 색동옷 입고 술잔 올리는 행사는 오늘날까지 계승
낙동강 건너편 한속담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농암종택. 안동댐 수몰로 분천에서 현재의 가송리로 옮겨졌다.
오는 10월이면 안동댐이 준공 40년을 맞는다. 안동댐은 낙동강 상류에 들어서 전기를 생산하고 홍수를 조절하는 등 다목적 기능을 수행한 개발연대의 한 상징이다. 그동안 발전량만 2704억원 어치에 이른다.
하지만 뒤에는 희생이 있었다. 댐 건설은 수몰민을 낳았다. 1970년대만 해도 수몰 예정 주민들은 나랏일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주며 보상 등을 하라는 대로 따랐다. 그 과정에 간과된 가치가 있었다. 댐을 막으면서 물에 잠긴 인문 자산이다. 낙동강을 따라 안동 예안·도산에 들어선 종택·서원·정자 등이 댐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에 못잖은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제 물에 잠긴 마을에서 간신히 옮겨진 한 종택을 들여다본다.
7월 1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로 떠났다. 도산서원 진입로와 퇴계종택으로 가는 길을 지나 눈앞에 청량산 자락이 보일 때쯤 ‘농암종택’ 표지판이 나타난다. 거기서 도산구곡의 8곡인 고산정을 건너다보며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면 산 아래에 농암종택이 나온다. 농암(聾巖)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어부가’ 등 강호문학이란 장르를 개척한 이현보(李賢輔·1467∼1555) 선생을 가리킨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17대 종손 이성원 씨.
농암은 뱃놀이와 여름이 떠오르는 선비다. 자료를 보다가 89세, 먼저 선생의 장수에 주목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도 쉽게 이를 수 있는 ‘고지‘가 아니다. 더 놀라운 건 농암은 물론 윗대와 자손 등 집안 전체가 장수한 사실이다. 상상을 초월한다. 농암은 본인이 89세, 아버지 98세, 어머니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조모 77세, 증조부 76세, 고조부는 84세를 살았다. 외가는 조부 93세, 숙부 93세에 사촌이 85세. 또 농암의 두 동생은 91세, 86세를 살았으며 아들은 문량 84세, 계량 84세 등 평균 76.5세를 살았다. 조카들도 71세, 89세에 이른다. 놀랍다. 농암 집안은 7대 200여 년 간 평균 연령이 80세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조선 중기의 기록이다. 조선을 통틀어 이보다 더 장수한 집안이 있을까.
종택 사랑채에서 이성원(63) 종손을 만났다. 농암의 17대 손이다. 종손은 안동에서 고교 교사를 지낸 뒤 지금은 낙동강변 종택을 지키고 있다. 집안의 장수 내력이 여전한 지 우선 궁금했다. 종손의 아버지는 91세, 어머니는 89세를 살았다고 한다. 다만 조부는 동네에 장티푸스가 창궐해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수는 지금도 이 집의 내림이었다.
7대 200여 년간 평균 연령 80세 장수 집안
농암 집안이 장수한 비결은 무엇일까. 이 집안에 신통한 보약이나 건강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종가에 내려오는 특별한 음식이라도 있는 걸까. 기자의 우문에 종손은 현답을 했다. “산천이 보약입니다. 집 앞으로 강이 흐르고 뒤는 산이니 마음을 관대하게 만들지요. 절로 속이 편해집니다.”
2012년 5월 <중앙일보>가 농암종택의 아침 밥상을 취재한 적이 있다. 그날은 채소를 주 재료로 전을 부치고 장아찌를 절였다. 북어보푸라기와 다시마 튀김이 별미로 나오고 물김치와 쑥국이 올랐다. 흑미찹쌀을 섞은 쌀밥이 곁들여지고 거기다 제사상에 오른 북어와 방어를 구워 상이 차려졌다. 음식에는 콩가루가 많이 들어갔다. 제철 음식으로 차린 그저 담백하고 소박한 밥상이다. 진귀하거나 기름진 재료는 없었다는 것. 종부는 시집 와서 30년 동안 시어른을 이런 음식으로 모셨다고 한다. ‘장수 밥상’은 이처럼 소박한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음식 만이 어찌 장수를 결정지을까.
1542년 호조참판 농암은 스스로 관복을 벗고 한강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를 탄다. 76세 때의 일이다. 병을 핑계로 거듭된 은퇴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퇴임식엔 임금이 배석했다. 중종은 금포와 금서대를 하사하고 동료들은 전별시를 지었다. 회재 이언적, 충재 권벌이 전송 대열에 서고 행차는 한강까지 이어졌다. 도성 사람들은 “이런 모습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고 놀라워했다. 귀거래의 꿈을 이룬 물러남이었다. 농암이 술에 취해 배 안에 누우니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산들바람이 불었다. 농암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따 ‘효빈가(效嚬歌)’를 짓는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낙향한 농암은 귀먹바위에 올라 다시 노래 한 수를 읊는다. ‘농암가’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사람을 대접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호조참판을 끝으로 농암이 76세에 조정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 중종이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관복 띠인 금서대.
농암은 그때부터 농부로 자임하며 담백한 생활을 실천한다. 그리고는 시를 읊었다.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을 벗삼았다. 동료·후배들과 어울린 감흥은 강호문학이 됐다. 명예욕은 없었다. 출세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자유인이자 풍류객이었다.
그렇다고 농암이 모든 걸 다 놓은 건 아니었다. 부모에 대한 효심과 노인을 공경하는 적선(積善) 만은 더 ‘집착’했다.
어버이에 대한 효도는 지방 수령을 할 때부터 실천했다. 대표적인 것이 애일당(愛日堂) 건립이다. 애일당은 1512년 농암이 46세 때 어버이를 위해 낙동강 분강 기슭의 농암 바위 위에 처음 지었다. <농암집>에는 농암이 애일당을 지은 까닭이 자세히 적혀 있다.
“애일당은 집 동쪽 1리 영지산 자락의 높은 바위 위에 있다. 1508년 가을 내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을 구걸하여 겨우 영천으로 부임했다. 영천은 고향에서 사흘 길이라 공무로 왕래하면서도 부모 뵙기를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거처가 협소하고 누추해 어버이가 즐길 곳이 없음을 한탄하다가 드디어 이 바위 가에 정자를 지었다. (…) 매번 좋은 날과 명절에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드리기를 꼭 이 집에서 했다.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감정이 없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이라 했다. (…) 애일이라 한 것은 부모 봉양에 ‘날(日)이 부족하다’는 뜻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늙은이 자손이 이 마루에 오를 때도 마땅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해 어버이가 늙으면 효도를 행했으면 한다. 또 이곳을 여가에 수양하는 장소로 삼는다면 애일당은 늙은이 가문에서 대대로 지키는 규범이 될 터이니 어찌 자손에게 누가 되겠는가.”
농암은 애일당을 오르면서 부모에게 효도할 날이 부족한 걸 깨닫고 싶어했다. 또 자손들도 대대로 그 뜻을 지키기를 기대했다. 그래서일까. 농암의 아들들도 더 큰 관직을 사양하고 가까운 곳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부모를 모시고 매달 1일과 15일 함께 모였으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행사는 지속됐다.
농암은 부모만을 섬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웃과 사회로 눈을 돌렸다.
1519년 안동부사로 있던 농암은 안동부의 80세 이상 노인을 한자리에 초청해 경로잔치를 연다. 화산양로연이다. 당시 행사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이 잔치엔 이례적으로 여자와 천민까지 불렀다. 그림에는 여자들이 상석인 집안에 앉아 있고 남자들은 천막을 친 야외에 앉아 대접을 받는다. 퇴계는 농암의 행장에 “자제와 노비를 편애하지 않았고 혼사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접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고 적었다. 농암의 박애정신은 신분사회의 장벽마저 넘어선 것이다. 농암의 이런 경로, 효행은 후일 선조 임금이 농암 가문에 ‘積善(적선)’이라는 글씨를 하사하는 계기가 된다.
1533년 농암은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을 모시고 다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다. 67세 농암이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도를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를 ‘애일당구로회’로 명명했다. 농암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선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린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구로회는 농암이 시작했지만 둘째 아들 이문량은 이를 확대시킨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1547년부터 매년 구로회를 연다. 농암 나이 81세 때다. 적선의 대물림이다. 뿌리 깊은 가풍은 흔들리지 않는다. 농암 집안은 1902년까지 400여 년간 구로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취재팀은 낙동강변으로 자리를 옮겨 종손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종손은 세상사를 언급하다가 <맹자>의 첫 구절인 ‘양혜왕장구 상’을 끄집어냈다.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니)
왕왈수(王曰叟, 왕이 말하기를)
불원천리이래(不遠千里而來,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셨으니)
역장유이리오국호(亦將有以利吾國乎,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맹자대왈(孟子對曰, 맹자가 대답한다)
왕하필왈리(王何必曰利, 왕은 하필 이를 말씀하십니까)
역유인의이의의(亦有仁義而已矣, 인의가 있는데 말입니다)”
노인들 배 태워 술잔 돌린 뒤 ‘어부가’ 불러
▎1. 농암의 아들 이숙량이 왕자 사부가 되자 선조가 “네 집안은 적선지가가 아니냐”며 즉석에서 써서 하사한 글씨. / 2. 농암이 어버이 효도를 위해 지은 애일당(오른쪽)과 만년에 짓고 ‘어부가’ 등을 정리한 강각.
종손은 이(利) 대신 인의(仁義)를 강조했다. “나라든 기업이든 지도층은 이익 아닌 사랑과 정의를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인의는 농암이 실천한 애일·적선과 다를 게 없다. 종손의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애일당은 농암종택의 서쪽에 배치돼 있다. 문을 열고 애일당 경내로 들어섰다. 애일당 앞뜰에 동그랗게 홀씨를 품은 민들레가 만발해 있다. 야트막한 애일당에 올라 문을 여니 퇴계 등이 남긴 시판이 벽에 걸려 있다. 애일당의 서쪽에는 강 절벽에 깎아지르듯 강각(江閣)이 세워져 있다. 금방이라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싶은 곳이다. 농암이 78세에 지었다. 여기서 강물 소리는 졸음을 번쩍 깨우듯 ‘우당탕탕!’ 요란스럽다. 경사가 급해서다. 물소리 때문인지 여름 벌레들도 한껏 소리를 높였다. 강각의 기둥에 ‘어부가’ 가사가 걸려 있다. ‘어부단가 5장’이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 작은 조각배를 끝없는 물결에 띄워 두고/ 인간세상을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 알리오.
굽어보면 천 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열 길 띠끌 세상에 얼마나 가려 있었던가/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강가에 올라 발 아래 낙동강을 굽어보고 푸른 청량산을 바라보니 신선이 따로 없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농암은 강호에 묻혀 ‘유선(儒仙)’이 된 것일까.
구로회도 세월이 흐르면서 경로 행사를 뛰어넘는 풍류로 자리 잡는다. 참석자들은 시문을 남겼다. 행사에 참석했던 퇴계 10대 종손인 이휘영의 글에는 당시의 풍경이 묘사돼 있다.
“모임은 이어져 대개 70세 이상 노인 열두세 명이 항상 모였다. 안동의 풍습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는다. 노인 수십 명이 애일당을 나와 작은 배를 타고 흘러 내려가다가 귀먹바위 아래 배를 묶어 둔 뒤 술을 한 잔씩 돌리고 ‘어부가’ 3장을 노래했다. 갓과 백발의 그림자가 비치고 음식은 마른고기, 젓갈, 국수, 밥으로 불과 다섯 그릇도 안 되니 그야말로 진솔하다….”
가풍은 이어진다. 종택 사랑채에는 농암 종손과 퇴계 종손, 학봉 김성일 종손, 서애 류성룡 종손 등 10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는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옆에는 농암 종손이 색동옷을 입고 춤추는 사진도 있다. 농암종택이 2012년 애일당 건립 500주년을 맞아 안동지역 노인 300명을 초청해 구로회를 재연한 것이다. 사진 맞은편에는 선조 어필 ‘적선’이 걸려 있다.
이제 장수의 비밀을 알 것도 같다. 적선과 애일. 거기다 자연을 벗하며 소박한 음식에 욕심까지 비웠으니. 이것이야말로 500년을 이은 농암 집안의 장수법일 것이다.
선조 어필 옆에는 지금은 물에 잠긴 농암의 고향이 ‘분천마을도’라는 그림으로 복원돼 있다. 2014년 분천리(汾川里)를 학술조사한 상명대팀이 그렸다. 종손은 그림 속 건물을 하나씩 가리키며 “여기가 애일당!”, “이곳은 분강서원!”이라며 추억에 빠져들었다.
취재팀은 가송리를 나와 종손의 길 설명을 떠올리며 물에 잠긴 분천마을을 찾아나섰다. 긴 가뭄으로 농암바위가 드러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서다. 분천리를 지나 길은 만수위 때 물이 드는 낙동강변 진흙길로 이어졌다. 그때 갑자기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폭우가 쏟아졌다. 종손이 말하던 꿈 같은 분천마을은 수풀 우거진 하천부지로 변해 있었다. 좀 더 내려가다 차량은 빗길에 빠졌다. 1시간을 기다리며 견인차가 끌어낼 때까지 물속 도원경(桃源境)인 분천마을에 머물렀다. 농암이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표현한 곳이다.
선비들의 풍류 남은 도원경 분강촌은 사라졌지만…
▎낙동강변 강각 옆에 나란히 세워진 농암각자. ‘귀먹바위’란 뜻의 농암은 분천에 있던 바위의 이름이자 호가 됐다.
분천을 떠나면서 종손의 탄식이 귓전에 맴돌았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도산서원 인근 낙동강변 전통마을 여섯 곳이 물에 잠겼다. 오천·부포·부내·의인·하계·원촌이다. 바로 도산구곡의 무대다. 이곳과 청량산을 찬양한 선비들의 글만 5000편이 넘는다. 한국 문화의 1번지나 다름없다. 댐을 막으면서 하회 같은 민속마을 여섯 개가 졸지에 사라진 것이다. 농암종택은 용케 도산 4곡에서 8곡의 상류로 옮겨졌다. 나머지 한옥은 대부분 사라졌다. 댐 수위를 1m만 낮췄어도 선비들의 풍류가 깃든 정신문화 1번지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데….
-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박스기사] 안동부 예안현의 이현보와 이황 - 농암은 퇴계를 아끼고, 퇴계는 농암을 존경
“…(공은)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하는 데는 서툴렀다”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둘 다 안동부 예안현의 사족(士族) 출신이다. 본관은 다르다. 농암은 영천 이씨지만 퇴계는 진성 이씨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인척관계를 따지면 남은 아니었다. 퇴계의 할머니 김씨가 연결고리다. 노송정 이계양의 부인이다. 노송정 종택에는 퇴계가 태어났다는 ‘퇴계태실’이 보존돼 있다. 이 김씨 할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농암의 증조부였다. 관계가 다소 복잡하지만 퇴계는 농암의 7촌 족질이다. 그래서 농암이 증조부 묘에 비석을 세우자 풍기군수 퇴계는 비문을 지었다.
두 사람이 머무르고 지낸 곳은 지척이었다. 농암이 76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고향 예안 분강촌과 퇴계가 제자를 가르치던 도산서당은 1㎞쯤 떨어진 거리다. 나이는 농암이 퇴계보다 34세 위다. 농암은 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와 함께, 퇴계는 농암의 넷째 아들 이중량과 함께 과거에 급제했다. 농암의 둘째 아들 이문량은 퇴계의 편지 150편을 받았을 만큼 ‘절친’이었다. 또 농암의 일곱째 아들 이숙량, 종손자 이덕홍, 손서 황준량, 사위 김부인은 퇴계의 문도가 된다. 이런 인맥 속에서 농암과 퇴계는 아주 밀접한 사이가 된다. 조정에서도 10여 년을 같이 보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찰은 퇴계가 “대나무 순같이 많았다”고 표현했을 만큼 <농암집>과 <퇴계집>에 남아 있다. 농암은 퇴계를 아꼈고, 퇴계는 농암을 동향의 선배로 존경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농암이 호조참판의 자리를 스스로 물러나 은퇴식을 할 때 퇴계는 “지금 사람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른다”며 높이 평가했다. 퇴계는 당시 전별시도 지었다.
두 사람은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는 처사적 삶에서 뜻이 맞았다. 농암은 분강에 배를 띄우고 ‘어부가’를 노래한다. 그때 퇴계가 온다. 둘은 함께 배를 타고 분강 가운데 자라바위로 나아갔다. 넓은 바위 좌우로 물이 흐른다. 농암이 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뗏목에 띄우면 퇴계가 받아 마셨다. 유상곡수(流觴曲水) 풍류다. 퇴계는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농암은 퇴계의 ‘도산십이곡’ 등 국문시가에 영향을 준다.
퇴계는 또 농암의 최후 순간에 같이했다. 농암이 숨을 거두자 퇴계는 슬픔을 거두지 못해 다시는 분천을 향하지 않으리라고 술회했다. 퇴계는 그 뒤 농암의 행장을 짓는다. 일생 동안 행장 여섯 편만 남긴 퇴계로선 그 자체가 각별함의 표현이었다. 행장에 “… (공은) 남을 위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자기를 위하는 데는 서툴렀다”고 적었다.
농암의 여섯째 아들 이윤량은 내의원판사를 지낸 어의였다. 퇴계가 돌아가실 때는 이번엔 그가 마지막 진맥을 한다. 선비들의 아름다운 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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