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갓집 벌초 / 김길영
먼동이 트자마자 출발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쉬긴 했지만 세 시간 반을 달려갔다. 먼발치에서 보이는 억새들이 천여 평의 산소를 뒤덮은 채 하늘거렸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억새는 하늘거리며 반기는 모습이 역역했다.
제수씨가 추석에 산소를 다녀와서 다짜고짜 나에게 항의를 해대었다. 금년에는 왜 벌초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당황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내용을 알아보니 산소 관리인이 지난봄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치료 중이라 했다. 추석 전에 묘 관리인에게 전화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리 산소는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핑계 같지만 산소를 자주 찾아 뵐 기회를 갖지 못한다. 벌초는 예전부터 산소 관리인에게 맡겼기 때문에 걱정을 덜고 있다. 다만 묘사도 생략한 채 추석에 차례음식을 준비해서 7대조 할아버지부터 인사를 드리는 곤 해왔다.
금년추석에는 여차여차한 핑계로 산소에 가는 일을 생략했다. 아들은 시간을 쉽게 할애할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했다. 내가 벌초를 못할 바는 아니지만 나에겐 움직일 수 있는 차량이나 예초기가 없었다. 궁리 끝에 성주로 귀촌한 사위에게 부탁했다. 사위는 나의 부탁에 쾌히 응해 주었다. 내 부탁을 순순히 응해준 사위가 고맙기도 했지만 왠지 뒷머리에 땀이 흘러 내렸다.
사위는 예초기를 나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가 예초기를 밀고 가면 나는 잘린 풀 더미를 갈퀴로 긁어모아 버리는 일을 맡았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사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내가 미안해할까 봐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곱 기基 산소를 언제 끝낼지 걱정이 앞섰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사위가 안쓰러웠다. 사위에게 처갓집 벌초까지 하게 한 나는 팔이 뻐근하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힘들다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아침밥도 거르고 하는 일이었다. 준비해간 음식을 풀어놓고 요기를 했다. 밥맛이 있을 리 없다. 나는 대충 몇 숟갈 뜨고 막걸리 몇 잔으로 식사를 때웠다. 사위는 배가 고팠던 식사를 맛있게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볼 수 없는 순종의 미를 발견하곤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묘墓의 봉을 빼놓고는 거의 억새풀이었다. 억세어진 억새는 예초기 칼날을 칭칭 휘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네다섯 시간을 기진맥진한 상태로 벌초를 마쳤다. 나는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에 할아버지 묘 등에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벌초가 문제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산소관리를 한다 해도 다음 세대는 어떻게 감당할지가 문제다.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관리인이 언제까지 맡아준다는 보장도 없다. 만약 이대로 우리 산소 관리인이 몸져 누워버리면 다음 관리인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묘답이 넉넉해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상이다. 요즘의 시골사람들도 남의 산소를 돌보려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농촌에는 칠팔십 고령인구뿐이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진 자식들은 자기 부모가 남의 묘 관리하는 것을 싫어한다. 충분한 묘답을 제공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포기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나에겐 위로 딸 둘, 아들이 막내다. 딸들은 하나같이 각박한 세상에 단 둘이 오순도순 살겠다며 아이를 갖지 않았다. 예전의 생각으로 출가외인 딸들이야 우리 산소완 무관한 일이지만, 귀여운 손녀 둘만 안겨주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아들의 각오 때문에 부계사회의 끈이 끊어진 셈이다.
우리 산소는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묵 묘를 면키 어렵다. 내 수명이 길어봐야 일이십 년 아니겠는가. 혹시라도 내가 죽기 전에 모계사회로 돌아간다면 내 두 손녀가 할아버지 뒤를 이어 산소관리를 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아무런 대안이 없다.
속담 중에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란 말이 있다.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완벽하게 마무리를 짓지 않고 대충대충 시늉만 내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 속담과는 달리 우리 사위는 정성을 다해 처갓집 벌초를 해 주었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위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안쓰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