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당구를 발견하다/기자명 권해솜 객원기자
친목과 건강을 다지는 우정의 게임
당구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신명훈 강남구 당구연맹 회장. 사진 구혜정 기자.
당구장이라면 각인돼 있는 이미지가 몇 가지 있다. 어두운 조명에 담배 연기 자욱하고 험상궂은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당구공을 주시한다. 한 무리가 당구장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면 패싸움으로 번지는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학교 선배나 동기가 눈앞에 없다면 무조건 첫 번째로 들르던 곳이 또 당구장이었다. 1990년대 중반, 롤 게임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당구는 하락기에 접어들었고 곧 침체기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베이비부머 은퇴를 기점으로 다시 당구의 인기가 끓어올랐다. '위드 코로나' 바람을 타고 12월부터 ‘2021 시니어 당구 교실’을 개설한다는 서울 강남구 당구연맹 신명훈(56) 회장을 만나 당구가 시니어에게 좋은 점 등을 들어보았다.
강남구 당구연맹 '2021 시니어당구교실' 열어
전철 분당선 강남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한 당구장에서 신명훈 씨를 만났다. 당구장 안 벽 곳곳에 당구 모임을 알리는 펼침막들이 내걸려 있다. 고등학교 동문 모임만도 15개 정도는 된다. 낮이었지만 당구에 열중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이곳에서 12월부터 내년 2월까지 시범적으로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당구 교실이 열린다. 초보자는 물론 당구를 배우고 싶은 60세 이상 남녀 누구든 신청할 수 있다. 신 씨는 “운영 성과를 평가한 후 강남구 내의 다른 당구장으로도 시니어 당구 교실을 확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구 교실을 생각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2년 가까이 고립된 생활을 해온 시니어들에게 강남구 당구연맹 차원에서 사람과 만나 함께 당구를 배우고 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고 신 씨는 말했다.
“당구 자체 커리큘럼도 중요하지만, 어르신들에게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데 더 의미가 있습니다. 공동체 관리를 잘못하면 갈등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런 부분들이 조심스럽습니다. 치밀하고 세심하게 운영해 나갈 겁니다. 당구는 초보자가 아닌 이상 특별히 가르칠 건 없지만, 입문자를 위한 용어, 자세, 에티켓, 간단한 규칙 등 모든 것을 알려드립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가면 어르신끼리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베이비부어의 은퇴와 함께 당구의 인기도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사진 강남구 당구연맹 제공.
당구, 집중력과 인내력이 중요한 운동
당구가 시니어에게 좋은 이유는 뭘까.
“당구는 실내스포츠입니다. 일단 재미있어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몇 시간 즐겁게 게임에 집중할 수 있어요. 앉았다, 일어났다, 허리를 굽혔다가. 자세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팔, 다리 근육 등 전신 근육을 이용하니 운동 효과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집중력도 필요해요. 당구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집중력도 필요하고 반복연습도 해야죠. 공격과 수비를 하려면 창의적인 작전 능력이 있어야죠. 그다음 결과를 예측해야 하고, 결과가 나한테 유리하게 하려면 머리를 계속 써야 합니다.”
당구는 경기당 1~2시간 걸린다. 격렬하지는 않지만, 경기를 하는 동안 2~3km 정도를 집중적으로 걷게 된다. 젊은 사람에게는 적은 운동량이겠지만 시니어에게는 적절할 수 있다고 신 씨는 설명했다.
“무엇보다 시니어들에게는 지속해서 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걷는 것도 있지만 공을 잘 다루려면 큐대로 밀어내는 강도, 회전 등 여러 가지 미세한 변화를 느껴야 해요. 그래서 집중력과 인내력이 중요해요. 이런 점이 시니어들에게 아주 좋은 거죠. 당구의 재미를 알게 되고 친구들과 함께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당구장 수 줄었지만 대형화 고급화추세
베이비부머가 은퇴하면서 서울 종로나 동대문 일대를 중심으로 당구장이 다시 생겨내기 시작했다. 노인복지관 혹은 시니어타운에는 당구대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시설이다. 그러나 당구대는 있지만 안정된 커리큘럼으로 프로그램을 제대로 운영하는 곳은 드물다는 게 신 씨의 말이다.
“복지관에는 따로 당구를 정식으로 가르치는 분이 있다기보다 시설만 있는 거죠. 자치구에도 여러 군데 당구대가 있지만, 책임감 있게 관리가 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수준별, 종목별로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짜야 합니다. 여러 다양한 수준의 시니어가 모이게 되겠죠. 우선 초보자를 위한 레슨이나 강의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가면 기술 수준을 높여가면서 시니어들끼리 즐기실 수 있습니다.”
당구의 종류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우리가 쉽게 '3구' 혹은 '4구' 당구라 부르는 종목은 ‘캐롬’이다. 당구대에 포켓을 만들어 공을 쳐서 집어넣는 포켓볼이 있고, 포켓볼 중에는 스누커라는 종목도 있다. 당구를 하는 테이블도 ‘중대’, ‘대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중대는 비교적 체구가 작은 아시아인 보급형이고, 대대는 국제 규격에 맞는 정식 테이블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는 캐롬 당구 최강국입니다. 당구 채널인 빌리어즈TV 가 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PBA 프로리그가 바로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벨기에 스페인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다 PBA 프로리그에서 뛰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PBA 프로당구협회가 2017년 공식 출범했으니 베이비부머가 속속 은퇴하기 시작한 시간과 맞물린다. 당구장 안을 가득 채운 펼침막의 주인공 대부분이 시니어 동호회이다. 과거에 취재를 통해 만났던 ‘아름다운 60대’ 모임에서도 당구 동호회의 몸집은 상당히 컸다.
당구장의 분위기 또한 베이비부머의 영향으로 과거와는 아주 다르다. 담배를 피우는 분위기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밝고 건전한 분위기에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소형 당구장은 점차 사라지고 대형화했다는 게 신 씨의 설명이다.
“당구장 숫자는 줄었지만, 대형화되어 가고 있어요. 2010년도 정부통계자료를 보면 당구장이 2만5000 개 정도였는데 2018년도에는 2만 개까지 줄었습니다. 당구장 수는 줄어들지만, 소규모 당구장이 없어지는 대신 대형화 고급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베이비부머가 그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당구 종목은 캐롬이다. 사진 구혜정 기자.
시니어에게 당구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종의 타임머신 같은 존재다. 1980년대 초반이 당구가 생활체육으로 최고 인기였던 시절이라고 신 씨는 말했다. 시니어들이 지금 당구의 명성을 되찾아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은퇴한 시니어 남성이라면 모두가 당구에 대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취재를 하는 동안 만났던 시니어들과 대화를 해보니 하나같이 자신을 당구 고수라고 말했다.
당구만 알던 세대의 이유있는 복귀
“제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대학교 때까지 당구를 열심히 쳤습니다. 그러다 직장에 들어가면 소홀해집니다. 은퇴를 하고 보니 친구들과 만나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매번 산에 갈 수 없고 말이죠. 친구와 함께하고 싶은데 그 매개가 되는 것이 당구인 거죠. 동호회도 각각 성격이 다른데 특히 고등학교 동기동창 모임이 가장 활발합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아니면 격주로 만나는 분들도 있고요.”
한 고교 명문 동호회 회원의 경우 주말 점심 전부터 모여 당구를 치다가 저녁을 먹고 다시 와서 당구를 치는 열정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훌륭한 분들이 모여 계시는데 당구에 정말 진심인 분들입니다. 주말과 공휴일은 어김없이 당구장 한편을 차지하고 당구에만 집중하세요.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치실 때도 있었어요. 정말 열정이 대단하세요. 저도 그렇게는 못 합니다. 언젠가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봤는데 재미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당구가 다시금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인기를 회복한 이유가 또 있다면 다양한 취미가 없던 시절 유일한 재밋거리가 당구여서이다.
“당구는 침체기를 겪다가 베이비부머의 은퇴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앞으로 20년 동안 당구밖에 할 줄 모르는 시니어들이 은퇴를 하고 계신 거죠. 적당한 운동을 지속해서 하고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지낼 수만 있다면 그거보다 더 좋은 건강관리법은 없을 것 같아요. 당구는 승부가 있어서 적당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지면 약도 오르죠(웃음).”
당구장 벽의 펼침막은 대부분 고교 동문 동호회가 붙인 것이다.
최근 추세를 봐도 60세 이상 다양한 동호회를 즐기는 이들의 마지막 코스는 당구장이다.. 어떤 장소에서 만나도 당구장이 하나 정도 어디 있는지는 대부분 알고 있는 게 요즘 시니어들이다. 신명훈 씨는 데일리임팩트에 은퇴 이후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건강'과 '돈', 그리고 '친구'라고 말했다.
“당구는 어떤 스포츠나 레저보다 저렴하지만, 은퇴 이후에 3만~4만 원 쓰는 게 적은 돈은 아닐 겁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쓰려면 적당한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죠. 건강해야 되고요.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건강, 돈, 친구 세 가지가 시니어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는 분들은 정말 행복한 분들입니다.”
이제 당구장엔 다시 활기가 차오르고 있다. 그동안 가족과 자신의 건강이 걱정돼 대중시설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시니어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다. 코로나가 서서히 물러나고 세상이 예전처럼 돌아가면, 우정과 건강미 넘치는 당구장 풍경을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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