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2)/이한구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
청교도적 기업가정신으로 애국 실천한 큰 장사꾼
아홉 살에 美 유학해 서재필 등이 주도한 독립운동 참여, 제약사업 통해 일제에 맞서
‘우리 약은 우리가 만든다’는 신념 위해 유한양행 키워… 사후 가족승계 하지 않아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는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기업인을 언급할 때 첫손가락에 꼽힌다. 그 이유는 그의 행적을 통해 증명된다. / 사진:유한양행
2021년 기준 매출액 1조6000억원, 사원 수 1900여 명의 국내 1위 제약업체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柳一韓)은 구한말인 1895년 평양에서 기독교 신자인 유기연(1861~1934)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싱거(Singer)미싱 대리점을 운영했던 유기연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정의감이 투철한 애국자였다. 이승만, 정순만, 박용만 등 청년 애국지사들의 “젊은이들을 많이 외국에 보내서 신교육을 시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개화입국론(開化立國論)에 공감했다. 소년 유일한의 미국행 배경이다.
유일한은 아홉 살 때인 1904년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연의 멕시코 순방 때 그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의 침례교 신자 미국인 가정에서 기식하며 신문팔이 등으로 초등학교를 거쳐 20세인 1915년 네브래스카주에 있는 헤스팅스고교를 졸업했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교내에서 이름난 미식축구 선수로 장학금을 받았다. 1916년에는 명문인 미국 미시간대학 상학과에 진학했다.
미시간대학 졸업을 앞둔 25세 청년 유일한은 1919년 4월 14일부터 3일 동안 필라델피아의 미국 독립운동 요람지인 리틀극장에서 개최된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했다. 재미 한국인들이 각 주(州)에서 대표를 뽑아 개최한 미국판 3.1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 행사는 이승만, 서재필, 조병옥, 임병직 등이 주도했는데 서재필 박사가 대회 의장을 맡고 유일한은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하는 결의문’을 다른 대의원 2인과 함께 작성해서 대표로 낭독했다. 결의문 낭독을 마친 유일한은 단상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 모두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최선의 노력으로 결의문 내용들을 실행할 것을 선성한 말로 서약합시다”고 외쳐 청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독립운동의 결기, 기업가정신으로 승화
유일한은 미국에서 고교를 다니던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 사진:유한양행
그는 1919년에 대학 졸업과 함께 제너럴일렉트릭사의 회계사로 취업하고 중국 광둥 출신의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했다. 이 무렵 유일한은 귀국을 결심한다. 조국에서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퇴사를 결심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그가 사직과 함께 선택한 아이템은 중화요리를 선호하는 미국인 가정에 만두의 필수재료인 숙주나물을 배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주나물은 유통기간이 짧은 것이 문제였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와 실험을 통해 드디어 썩지 않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완성했다. 디트로이트에서 식품상을 운영하던 대학 동창인 미국인 윌러스 스미스를 동업자로 끌어들여 1922년에 라·초이식품회사를 설립하고 그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라·초이사는 설립 4년 만에 50만여 달러의 수익을 올려 유일한은 교민사회에서 콩나물 장사로 성공한 사업가로 소문났다.
유일한은 미국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1925년에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 에비슨(O. R. Avison) 교장으로부터 유일한은 상과 강의를, 부인 유호미리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을 맡아주기를 부탁하는 초청장을 받은 것이다. 유일한은 고민 끝에 약품사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12월 10일 서울 종로 2가 45번지의 3층 건물인 덕원빌딩에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사장을 맡았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최초의 양약(洋藥) 취급업체였다. 백상규(白象圭), 윤영선(尹永善), 예동식(芮東植) 등 창업 동지들과 상의 끝에 창업자 유일한을 상징하는 유한(柳韓)과 영업품종을 폭넓게 취급할 수 있는 양행(洋行)을 조합했다. 회사 마크는 버드나무로 정했다. 유일한이 귀국 인사차 서재필 박사를 방문했을 때 서 박사는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 한 그루를 조각한 목각화 한 점을 선물로 줬다. 서 박사 딸이 손수 만든 작품이었다.
그는 귀국할 때 멘소래담(피부병 치료제), 키니네(말라리아 치료제), 크레오소트(방부제), 헤노포디유 오일캅셀(구충제), 구아야콜 컴파운드(정장제) 등 다량의 의약품을 반입해 어렵게 총독부의 통관을 받아 판매를 개시했다. 화장지, 생리대, 락스(표백제), 비누, 치약 등 위생용품과 껌,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도 수입했다. 유일한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영어를 잘하는 전항섭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해 그와 함께 전국을 누비며 판매에 나섰다. 얼마 후부터는 농기구와 염료, 페인트 등도 수입했다.
유한양행은 창업 이후 최초로 동아일보 1928년 3월 5일 자에 광고를 실었는데 약품이 아닌 염료 광고였다. 유한은 농기구와 염료도 염가로 판매했다. 창립 직후에는 주 취급품인 구충제 헤노톨과 결핵 치료제 네오톤토닉, 피부병 치료제인 멘소래담 연고와 학질 치료제 금계납(金鷄納, 키니네) 등을 판매해 초창기 자본 형성의 기초를 다졌다.
손해가 나더라도 인명을 구한다
1919년 유일한은 미시간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그는 조국 독립을 돕기 위해 창업의 길로 들어선다. / 사진:유한양행
1929년에 사무실을 덕원빌딩 건너편에 있는 종로 YMCA로 옮겼다. 이 무렵 국내 약품시장은 일본인 제약업자와 매약업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이들은 총독부의 일방적인 비호하에 전국의 도립병원과 일본인 병원에 약품과 의료품을 독점 공급했다. 전항섭은 전국을 누비며 한국인 의약품 도매상과 약국에서 매출을 늘려나갔다. 유일한 사장은 기독교 관련 외국인 계통의 병·의원을 집중 공략해서 서울 세브란스, 평양 기을병원, 전주 예수병원, 순천 미동병원 등 전국의 선교사병원을 거래선으로 확보했다. 일본인 업자들이 독점한 도립병원 못지않은 큰 시장을 획득한 것이다.
유한양행은 1920년대 후반부터 지방특산물인 돗자리, 화문석, 도자기, 죽세공품과 어간유(魚肝油), 연어 등의 수출사업도 개시했다. 또한 일본우선(日本郵船), 캐나다정부철도, 동양해상화재보험, 미국 생명보험사 홈인슈어런스, 선박회사 다다라인 등의 대리점도 운영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해지자 서대문구 신문로 2가 6번지 언덕배기의 대지 160평을 매입해서 건평 160평의 2층 양옥을 지은 뒤 1932년 본사를 이곳으로 이전했다. 1933년에는 미국 제약업체 애벗의 협조를 얻어 중국 대련에 창고를 마련하고 중국 사업을 개시했다. 창고에 3~6개월 치의 약품을 쌓아두고 주문 즉시 납품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수입선을 유럽으로 확대했다. 유일한 사장은 세계여행 중인 1935년에 프랑스의 파스톨, 영국의 이반손스와 알렌험브리, 독일의 E 멜크와 Dr. THILO 등 유수한 제약업체들과 거래를 터서 혈청, 수은제, 백신, 마취제 등의 국내 판매를 개시했다. 용도가 한정된 치료제는 수요가 적어 취급할수록 손해였지만 인명을 구한다는 사명감으로 사업을 계속했다.
1935년부터 유한양행은 제약업체로의 전환에 착수했다. 유일한 사장의 ‘우리 약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을 실현한 것이다. 본사 내에 소규모 생산시설을 갖추고 영업부 내에 학술과를 만들어 조희순(趙羲淳), 강한인(姜漢仁)과 만주인 막, 일본인 스가하라와 시마다, 러시아인 헤프틀러 등이 보건제 네오톤토닉, 피부병약 안도린과 안티푸라민, 구충제 헤노톨 등을 출하했다. 유한양행의 대표 약품인 안티푸라민은 1933년부터 생산했다.
회사는 창립 10주년인 1936년 6월 20일 자본금 50만원의 ㈜유한양행으로 거듭났다. 제약업체로서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25의 대지 2만여 평을 매입해서 1936년 8월부터 제약실험연구소와 생산공장 건설에 착수, 1939년까지 확장공사를 지속했다. 한국에서 많이 발생하는 이질, 기생충, 영양실조, 기관지염 등의 치료제와 수은제, 종합비타민, 결핵치료제, 방부소독제 등은 중국, 대만까지 팔려나갔다.
2차 대전과 6·25전쟁이라는 시련
1936년 유한양행은 주식회사로 발전했다. / 사진:유한양행
유한양행은 1930년대부터 신문, 잡지, 포스터, 전단 등 모든 매체를 동원해 한국어,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영어 등으로 광고를 했다. 당시 제품 광고에 큰 비중을 차지한 품목은 안티푸라민, 네오톤, GU사이드 등이었다. 특히 GU사이드는 당시 ‘망국병’이라 치부되던 임질 치료제이자 포도상구균, 폐렴구균, 골수막염균, 이질균, 대장균, 파상풍균, 나병균 등에도 효과가 탁월했다. 1934년 유일한 사장이 세계일주여행에서 유럽의 유수한 제약회사들과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확보한 정보망 덕분에 확보할 수 있었다.
유한의 사업 실적은 꾸준하게 증가했다. 새로 개척한 중국에서의 매출 신장에다 본궤도에 오른 구미 지역 수출로 거둔 성과였다. 수출용 화문석, 슬리퍼, 죽세공품을 생산하는 오류동 공장과 나전칠기를 생산하는 공장(신문로 2가)을 건설했다.
하지만 1940년 들어 미·일 관계가 점차 악화된 데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전쟁이 확대되면서 물자 결핍이 가중됐다. 제약업계도 원자재 확보난에 봉착했으나 유한양행은 막대한 양의 원료를 비축한 탓에 수지에 별 영향이 없었다. 당시 소사공장의 원료 비축량만 해도 2년간 계속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정도였다. 성장기 5년 동안 유한은 매해 비약적으로 성장해 임직원 수도 1936년의 77명에서 1940년에는 155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1941~1945년)의 부정적 여파는 유한양행에도 미쳤다. 일본이 한국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적국의 색깔 제거에 나선 것이다. 일용품의 영어 표기 금지, 학교의 영어교육 금지, 교회 예배 금지 등이었다. 유일한 사장은 1919년 미국 교민들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요시찰 인사로 당시 미국 체류 중이었다. 서슬 퍼런 총독부의 위세에 눌린 유한양행은 태평양전쟁 발발 13일 만에 긴급취체역회의를 개최하고 유일한 사장 경질, 외국계 주주 정리 및 직원 휴직도 단행했다.
총독부는 이듬해 2월 세금 문제로 압박했다. 서대문 신문로에 본사를 둔 유한양행의 관할세무서는 종로세무서였는데 관할세무서를 서대문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한양행은 1942년 4월 본사를 소사공장으로 이전했지만 탄압은 여전했다. 7월 21일 20여 명의 세무서 관리들이 일시에 들이닥쳐 회계관련 서류 일체를 압수했는데 세금 탄압은 1945년 8·15 해방 때까지 계속됐다. 1943년 8월에는 총독부가 유한양행의 ‘양행’이 적성적 표현이라 트집 잡아 부득이 상호를 ‘유한제약주식회사’로 변경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커다란 변혁이 있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신종 의약품들을 대량으로 민간에 제공했다. 만병통치약으로 회자되던 페니실린을 비롯해 다이아진, 구아니딘, 비타민, 소독약 DDT, 쥐약 모노후라톨, 비듬약 셀신 등이 그것이다. 미군은 점령지 의료구호계획의 일환으로 이 약품들을 민간에 배급했는데 말라리아 치료제인 아타부린, 감기약 APC, 결핵치료제 파스도 이때 처음 국내에 소개됐다.
무상의 최신 의약품 대량 배급은 2000만 국민에겐 단비였지만 제약업계에는 타격이었다. 1946년 국내에는 제약업체 283개소 2456품목이 있었으나 통계 숫자일 뿐 공장다운 공장은 30여 업체에 불과했다. 8·15 해방 당시 자본금 10만원(圓) 이상은 유한양행, 금강제약, 삼성제약, 천일제약, 신흥제약, 후생약품 등 20여 곳이었다.
유한양행은 해방으로 만주와 중국, 대만, 38선 이북에 구축한 자산을 잃었지만 풍부한 재고원료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은 날벼락이었다. 전쟁 중 유한양행은 부산 동구 범일동에 소규모 공장을 차리는 한편 삼광제약 공장을 임차해 APC와 포도당 주사약을 생산했다. 당시 국내생산 의약품들은 대부분 품질이 나빴으나 유한의 APC와 포도당 주사제는 양질의 규격품으로 만들어졌다. 동상연고, 비타민제, 네오톤 등을 공군과 육군에 납품했는데 네오톤은 당시 효자상품이었다.
1953년 1월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 회장은 은행 대출과 정부대여금으로 망가진 본사와 소사공장의 수리 및 시설 확충을 서둘렀다. 1954년 10월에는 유한양행이 국내 제약업체 최초로 ICA 자금 45만 달러 배정을 신청했다. ICA 자금은 미국 정부의 한국 원조자금으로 1953년부터 매년 2억~3억 달러씩 제공됐다. 상환 기간 10여 년에 이자도 매우 저렴한 데다 외화를 배정받으면 산업은행의 융자까지 제공되는 엄청난 특혜였다.
미국의 한국 원조자금 통해 사세 확장
1963년 유일한 (앞줄 왼쪽)은 연세대에 유한양행에 관한 개인 소유 주식을 기증했다. / 사진:유한양행
1955년 7월 1차로 ICA 자금이 제약업체들에 배정됐는데 유한양행 15만 달러, 동아제약, 동양제약과 근화제약이 각 8만 달러, 서울약품 7만5000달러 등이었다. 이 자금으로 한국의 제약업체들은 갈망하던 항생물질 제조시설, 주사약 제조 및 정제 시설, 무균시설 등을 미국과 서독에서 도입해 제약 현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유한양행은 ICA 자금과 대충자금 5200만환으로 소사공장 복구 및 주사시설 확충, 페니실린 제제의 안약, 정제, 고약과 신제품 비타민제와 파스, 이소니코틴산 등 신제품을 개발해 시판에 착수했다. 1955년 7월에는 유일한 회장이 수완을 발휘해서 세계 최고의 아메리칸 사이나미드 제약 한국 총대리점권을 획득하는 등, 구미 지역으로부터의 신기술 도입에 열중했다. 그 결과 1956년에는 전 년 대비 무려 100% 이상 상승한 3억환의 매출을 기록했다.
정부는 국내 제약업 육성을 위해 1956년부터 완제의약품 수입금지 품목을 82종으로 대폭 확대했다. 유한양행은 계속 ICA의 자금 지원을 받아 생산시설을 최신식으로 자동화했다. 또 최신식 화학 연구실험실을 설치하고 1958년부터 새로 가축 및 농약품을 생산했다.
한편 유한양행은 1958년 10월에 임직원 복지를 위해 국내 최초로 우리사주제를 실시했다. 사원들 중 희망자가 자사주를 매입하면, 그 대금을 상여금에서 공제하고 간부사원들에게는 공로주로 지급했다. 국내에는 10년 후인 1968년 11월 상장법인의 유상증자 때 신규발행 주식의 10%를 종업원에게 우선 배정하도록 하는 내용의 ‘자본시장육성법’이 제정됐다.
같은 해에 유일한 회장은 유한양행의 창업정신을 담은 ‘유한의 정신과 신조’를 발표했다. “우리 민족은 일본보다 못하지 않다. 우리는 힘을 다해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 그렇기 위해 첫째, 경제 수준을 높이며 둘째, 한결같이 진실하게 일하고 셋째, 각자와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한편 유한양행은 1960년 3·15선거에서 또다시 홍역을 치른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유한양행에 선거자금 3억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거금을 선뜻 내놓기도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 회사의 창업정신과 배치되는 탓이었다. 그러자 1959년 11월 치안국은 유한양행이 6000만환을 탈세했다는 혐의로 본사와 소사공장에 대한 압수 수색을 실시하며 경영진을 압박했다. 검찰 조사에서 이 사건은 날조임이 확인됐지만 정권의 칼날은 여전해 유한양행은 5000만환을 강제로 헌납했다. 당시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치르기 위해 1959년 8월부터 1960년 3월까지 56개 기업으로부터 62억9185만환을 갹출한 사실이 4·19혁명 이후 드러났다.
1960년대는 한국 제약업계가 크게 발돋움한 시기였다. 6·25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현대적 기업으로 변신한 제약업계는 생산량이 매년 거의 2배씩 늘어났다. 완제의약품 수입액은 1968년의 332억 달러에서 1971년에는 263억 달러로 떨어졌다. 이 무렵 국내 제약업계의 선두주자는 유한양행을 비롯, 동아제약, 한독약품, 종근당제약, 동화약품, 서울약품, 한일약품, 일동제약, 중외제약, 유유산업, 한국화이자, 동광약품, 삼일제약, 일양약품 등이었다.
국내 제약업계 1위인 유한양행은 창업 이후 일관되게 “국민보건을 위해 일하자”는 ‘유한 정신’에 입각한 경영을 해온 덕분에 시장에서 ‘양심 상품’으로 인식되며 지속성장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유한양행은 국민기업 전환이라는 신선한 충격을 더했다. 1962년 10월 5일 재무부 장관의 인가를 얻어 11월 1일 유한양행 주식 80만 주가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것이다. 상장 직후 유한양행의 주식은 액면가의 6배로 거래됐다. 국내 제약업계 최초이자 민간기업으론 두 번째이며 국영기업체까지 포함하면 국내 다섯 번째였다. 또한 1974년 5·29 기업공개 촉진보다 무려 13년이 앞섰다.
죽어서도 관철한 ‘유한 정신’
1969년 유일한(오른쪽)은 제44기 주주총회 석상에서 조권순 사장에게 유한양행 경영권을 이양했다. / 사진:유한양행
당시 사내에서는 외부 자금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며 반대가 심했으나 유일한 회장은 “우리나라 기업이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장족의 발전을 기할 수 없다. 다소 시끄러워질망정 많은 사람을 참여시켜야만 회사 발전에 도움이 되고 국가 발전에도 기여한다”며 기업공개를 밀어붙였다.
유일한 회장은 1969년 10월 30일 제11대 정기주주총회에서 사장직을 사임하고 1년 6개월여 만인 1971년 3월 11일 향년 77세로 영면했다. 이때 사람들을 감화시킨 것은 그의 사후 1개월 만인 4월 8일에 공개된 유언장이었다.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회사 대표 조권순 사장, 고인의 장녀 유재라와 누이동생 유순한, 고인의 벗이던 법학자 이종극이 공증인으로 입회했다.
유언장에는 유일한 소유의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당시 시가 2억2000만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기증해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 7세인 손녀 유일링의 대학 졸업 때까지 학자금으로 고인의 소유 주식 배당금 중 1만 달러를 지급하고 자신의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중고 구내에 있는 묘지 및 그 주변 대지 5000평을 상속하되, 이를 유한동산으로 만들 것을 당부했다. 고인은 생전 딸 재라와 아들 일선 등 1남 1녀를 두었으나 외아들 일선에게는 “대학을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라”고만 언급했다.
유일한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창업기업가였다. 일제 치하인 1926년 일본 제약업자들이 장악한 국내 약품시장에 후발주자로 참여하며 처음부터 품질경영과 합리적 가격으로 유한양행을 키웠다. 또한 그는 청교도적 기업가정신으로 부정과 불의를 배격함은 물론 ‘나라 사랑’의 대의(大義)를 실천했다. 유일한은 기업경영을 통해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이자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번영의 아버지였다.
'월간중앙 신년기획 (이한구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홍제 (0) | 2024.07.28 |
---|---|
다시 기업가정신이다.1 (1) | 2023.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