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예전에 소전 손재형이라는 분이 있었다. 한국서예의 대가이셨다. 그 예전 초, 중, 고 시절의 국어책 제자(제목을 쓰는 것으로“국어”)를 하신 분으로 한국서예의 독보적인 존재였고 일인자였다. 이분이 해방하기 전전해쯤인 1943년 즈음에 김홍도의 세한도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부랴부랴 그 세한도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 갔다. 후지쓰까라는 일본인이 세한도를 갖고 본국으로 귀국한 것이다. 100여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안을 드리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후지쓰까가 세한도를 주겠다고 한다. 단 자기아들에게 유서를 써서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당신에게 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10여일을 간청한 끝에 겨우 세한도를 받아낼 수 있었다. 한가지 안타까운 소식은 세한도를 반납한 한달여가 지난 후 후지쓰까의 집이 폭격을 당해 완전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세창, 정인보 등이 감상문을 쓰기도 할 정도로 귀한 작품이었다. 현재는 손창근 이라는 분이 개인소장중이라고 한다.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세한도는 1844년 추사 김정희가 58세 되던 해에 아끼던 제자 이상적에게 여러 가지로 자신에게 마음써줌에 대한 답례로 그려 보내준 것이다. 세한도(歲寒圖)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와 함께 김정희 그림의 쌍벽을 이루는 백미(白眉)이다. 갈필(渴筆)과 검묵 (儉墨)의 묘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인화로서 제주도 유배 중에 그려졌다.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자 이상적은 이 그림을 연경으로 가져가 여러 문객들에게 보여주고 감상문을 받아와 그것을 같이 연결시켜 놓았을 정도였다. 그 인원이 16명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 그림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그의 아들 김준학에게 전수되었다. 그러다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인사동과 북경을 왔다 갔다 하던 일본인 후지쓰까에게 북경에서 발굴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석으로 곁에 두고 감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그가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자 그 그림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소전 손재형도 정치에 뜻을 두게 되었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세한도를 전당포에 맡기게 된다.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겨우 손창근이라는 소장가가 이것을 소장하기에 이른다. 세한도는 국보로 이름이 높고 그 가치 또한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선비의 전형을 보여주는 발문의 해석을 잠시 감상해보려고 한다.
지난해(1843,헌종9년)에『만학집(晩學集)』과『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두 권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이 지은 『황청경세문편 (皇淸經世文編)』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으로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내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은“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대(제자 이상적)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무와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 없는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제자 이상적)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주지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도 더 소홀히 대해주지 않았다.그래서 내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내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 일 것이다.
아!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浮沈)에 따라 붙좇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下邽)땅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방(榜)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완당 노인(阮堂老人) 씀.
번역 김 동 석
이 글에 의하면 『세한도』는, 불우한 처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작자 자신을 조금도 괄시하지 않고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해주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인품을 엄동이 된 뒤에도 잎이 지지 않는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인데 호가 우선(藕船)이다. 세한도에 관한 글을 우연히 알게 되고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마치 급류를 타듯 세태에 휩쓸리어 가기 쉬운 이 시대 올곧게 자신의 뜻을 지켜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즈음에 날씨도 무척이나 차가워졌다.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의 푸르름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고 했던 선현들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준엄한 금언이 되어 되살아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