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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마주친 100개의 인생(딴지일보연재물 등)

소설 달과 6펜스 2

by 자한형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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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달과 6펜스 2 

원하는 바가 서로 달랐던 스트릭랜드와 블란치

오른쪽이 스트릭랜드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상종하고 싶지 않은, 구역질 나는 존재였지만 스트릭랜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모든 것이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블란치는 로마 왕족 집안의 가정교사였다. 그 집 아들이 블란치를 유혹했고, 블란치는 임신했으나 버림받았다. 그때 스트로브가 나타나 그녀에게 헌신을 베풀었고 둘은 결혼을 한 것이다. 이것이 블란치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 스트로브의 아내가 된 사연이었다.

거리로 내쫓긴 미혼모의 처지 때문에 스트로브를 선택한 그녀였다. 스트로브의 사랑이 그녀에겐 모욕이었고 그녀의 쾌활함은 절망에서 오는 쾌활함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 앞에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남자, 거칠고 투박하며 크고 건장한 남자 스트릭랜드가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욕망덩어리, 바커스 신의 무녀(巫女)가 되어버린 것이다.

블란치는 스트릭랜드를 사랑했고, 그를 소유하려 했지만 스트릭랜드에게 그녀는 쾌락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는 구속을 원치 않았다. 블란치는 스트릭랜드의 애인이 되고자 했지만 스트릭랜드는 그녀가 단지 모델이 되어주길 원했을 뿐이었다. 스트릭랜드는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여자의 지배욕을 용납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고.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꿈을 완성한 스트릭랜드와 비참한 최후

스트로브는 네덜란드로 떠났다. 일주일 뒤엔 스트릭랜드가 마르세유로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뒤로 나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내가 타히티를 여행하지만 않았다면 스트릭랜드에 대한 나의 혼란스러웠던 추억도 단지 과거의 흔적으로 끝났을 것이다. 타히티는 그가 오랜 방랑 끝에 이른 곳이며 자신의 명성을 확립시켜준 그림들을 그려낸 곳이었다. 나는 타히티에서 그의 마지막을 확인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타이티'.PNG

이곳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타히티 위치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그 어느 바다보다 황량한 태평양. 그곳에 타이티가 있었다. 높이 솟은 푸른 섬이다. 그곳에는 신비가 깃든 침침한 유곡(幽谷)이 있고, 그곳에서는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태고의 삶이 아직까지 영위되고 있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타히티에 가까이 갈 때 공상 속의 황금 왕국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불타는 하늘의 푸르름과 현기증을 일으키는 강렬한 색채가 있는 곳. 스트릭랜드가 이곳에서 최후를 보낸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닥터 쿠트라가 스트릭랜드의 비참한 최후와 그의 마지막 작품에 대해 말해 주었다. 어느 날 아타라는 원주민 처녀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했다. 그녀는 17살의 나이에 스트릭랜드와 결혼해 아이까지 여럿 나은 상태였다. 아타는 스트릭랜드가 아프니 왕진을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고 한다. 닥터 쿠트라가 그녀의 애원을 거절하지 못해 찾아갔으나, 스트릭랜드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말했다.

스트릭랜드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 혐오스러운 병으로 일그러져버린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산속 자신의 오두막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닥터 쿠트라가 두 번째 그의 오두막을 방문했을 때는 모든 원주민이 떠나고 오직 아타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으나 스트릭랜드는 이미 흉악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작품, 벽화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숨이 막혔다. 이해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는 감정이 그를 가득 채웠다. 창세(創世)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에게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삶의 완성이자 그가 그토록 원했던 예술의 완성인 그 벽화를 보러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닥터 쿠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오두막과 벽화 모두 스트릭랜드의 유언에 따라 아타가 불태웠다고 말했다.

결국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인생의 목적, 꿈이냐 돈이냐

하늘엔 달이 떠 있고 발밑엔 은화 하나가 떨어져 있습니다. 둘 다 둥글고 은빛으로 반짝입니다. 그러나 모양과 빛깔이 같을 뿐이지 둘은 전혀 다릅니다. 달빛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설레게 합니다. 신비한 그 자태가 그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리고 욕망을 자극합니다. 저 달을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 저 달을 밟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욕망은 충동으로 바뀝니다. 그것의 이름은 입니다.

발밑에 있는 은화는 그저 손을 뻗기만 하면 내 것이 됩니다. 주어서 주머니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밥으로 바뀌기도 하고 소주로 바뀌기도 합니다. 설렘과 욕망, 그리고 충동 같은 것은 없지만 참으로 유용합니다. 하루하루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보다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당장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달과 은화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야 어두운 밤하늘에 동그랗게 떠 빛나는 달이 신기하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달을 쳐다보다 가끔씩 돌부리에 걸리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동전을 놓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 본 달이 아닙니다. 진부할 뿐입니다. 어른들이 하늘의 달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누군가 꿈을 꾸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성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일부만 맞습니다. 어른들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질 것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챙겨야 할 가족들이 생깁니다. 사회생활이 쌓여가면서 자신만을 위해 존재했던 취향과 관심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니 옷, 자동차, 집 등 반드시 가져야 할 것들이 늘어납니다. 이 모두를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어린 시절 가슴에 품었던 둥근 달이 점점 작아집니다. 그리고 끝내 그 달은 동전만 한 크기가 됩니다. 스트릭랜드로 태어나 스트로브로 늙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존재에서 가족과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인생의 대부분을 돈을 버는 존재로 바뀌어 살아갑니다. 꿈이 돈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기쁨과 자존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생명체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란 없습니다. 가난이 주는 고통이 끔찍한 것을 잘 압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받아야 할 멸시의 시선도 살면서 충분히 느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인생의 목적이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인생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꿈이냐 돈이냐, 당연히 꿈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모두 독립된 하나의 세계입니다. 인생이란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고 혼자서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릅니다. 돈은 누구나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타인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 내 인생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꿈을 추구한다는 것,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때로는 비난이 따를 수도 있는 외롭고 두려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한 의무이고, 내 인생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물가가 무섭게 오르고 있습니다. 술을 좋아하지만, 요즘은 좋은 안주로 쉽게 외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술이 필요할 때는 가급적 집에서 혼자 마십니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택시비나 대리비가 많이 아깝습니다.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전철이 끊기기 전에 자리를 파합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 꿈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아직 그 꿈을 아직 잊지 않았음에 뿌듯해집니다.

착한 사람이 아닌 오직 자신의 꿈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나쁜 남자’, 스트릭랜드의 활화산 같은 삶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누구보다 은화가 필요했지만 팔기 위한 그림이 아닌 자신을 위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인생이었습니다. 매일 밤 꿈을 꾸던 시절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던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소개해드리며 서른여섯 번째 인생탐구를 마칩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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