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야기 2: 치매, 전립선암, 그리고 국가유공자/왕털풍뎅이 (딴지일보)
6. 택시 운전을 하다 변을 당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자라도 벌겠다며 대전에 내려가 친구분이 운영하는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어느 날은 야간 조로 밤새도록 운전하고 또 어느 날은 주간 조로 낮에 운전한다고 했다. 잠도 회사 숙직실 같은 데서 잔다고 했다.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먹는 것도 제대로 안 챙기고, 밤새 운전하다가는 큰일 난다고, 그만하시라고 말렸다. IMF 외환위기로 젊은 사람들도 내쫓기는데, 당신은 친구 덕에 일자리에 잠자리도 있으니 아버지는 괜찮다고 했다.
그 말에 속이 뒤집혔다. 아버지는 자존심도 없냐고 악을 썼다.
아버지가 자신을 학대하는 듯했다. 어머니를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자꾸만 자신을 괴롭히는 성싶었다. 그런 그에게 체면 따위가 뭐 중요했을까.
매일같이 빚 독촉이 쏟아지는데 나는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나는 버린 자식이냐고도 전화에다 악다구니도 해보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은 어떤지 물어봐 주지도 않는 아버지가 미워, 이젠 나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번은 아버지가 며칠 앓아누웠다는 연락을 받았다. 누나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산속 깊은 곳으로 가자는 젊은 손님을 태웠다가 그날 번 돈, 사납금까지 몽땅 털렸다고 했다. 다행히 돈만 잃고 끝났지만, 아버지가 너무 놀라 병이 난 것 같다고 했다.
한밤중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홀로 당황했을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이 든 할배라고 나의 아버지를 얕보고 도둑질한 놈들을 잡아, 분이 풀릴 때까지 두들기고 싶었다. 그런데 그보다, 그깟 돈 몇 푼 벌겠다고 건강도 체면도 다 버리고 고생하는 아버지가 밉고 안타까웠다. 그 순간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아버지가 딱하고 처량했다. 한참을 울었다.
7. 25년 홀아비 그리고 손주
사주팔자를 보고 오신 어머니가 얘기하셨던 적이 있다. 아버지 사주에 외로울 '고(孤)'가 있다더라고. 어머니 당신이 아버지 곁에 있어 그 외로움을 덜어주고 있는 형국이니, 다행으로 알고 잘하라고. 아버지는 쓸쓸하게 웃어넘겼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삼 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부터 대전으로 나와 고학했다. 대학에 꼭 가고 싶었으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게 육군사관학교였더랬다. 부모님도, 위로 계셨던 두 형님도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갑자기 고아가 됐다.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에게, 아버지 당신은 이제 부모·형제 없는 고아라고 서글퍼하시던 장면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어머니와도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다. 서울 근교의 부대에서는 관사에서 가족이 함께 지냈지만, 전방부대에 근무할 때는 그럴 수 없었다. 몇 년은 베트남에 다녀와야 했다. 군복을 벗은 후에도 사우디아라비아로, 울산으로, 대전으로 다니며 늘 혼자 지냈다. 어머니의 장롱 안에 아버지가 외국에서 보낸 편지들이 가득 모일 만큼의 세월을 떨어져 지냈다. 아버지 어머니가 온전히 함께 지낸 것은 내가 고등학생이던 3년,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에 다녀왔던 몇 년뿐이다. 사주에 있다던 외로울 '고(孤)'를 덜어주던 어머니를 먼저 보내시고 또 25년을 홀아비로 지내왔으니 우리 아버지, 참 외로운 사람이다.
내가 결혼하면서 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없는 집에 시집와 준 아내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염치없었다. 그럼에도 혼자남은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시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부르며 오히려 나보다 더 살갑게 대해준 아내 덕에,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측은함으로, 화는 안타까움으로 뒤섞여갔다.
내 아이를 처음 안아보시던 날, 조용히 눈을 감고 아기의 숨결을 느끼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당신의 손주에게 아버지는 한없이 너그러웠고 정성스러웠다. 아이의 투정에도 끝까지 웃으며 밥을 먹이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 손을 잡고 놀이터에 다녀오시곤 했다. 외출했다 돌아오실 때면 어김없이 시장에서 분유, 빵과 우유, 간식거리 등등 아이 먹일 거리를 열심히도 사 오셨다. 아직 음식 많이 있으니, 그만 사 오시라 해도 소용없었다. 그것이 당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8. 치매, 전립선암, 골절
아버지는 젊은 시절 외에는 술·담배에 거의 손을 안 대셨다. 같은 나이대의 어른들에 비해 건강하고 훨씬 젊어 보이는 덕에, 아버지가 늙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랬던 아버지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당신의 나이 여든이 넘어 시작된 가벼운 치매부터였다. 처음엔 가벼운 건망증 정도인 줄 알았다. 대답해도 똑같은 질문을 두 번씩 하시는 통에 적잖게 짜증을 냈다.
휴대폰을 스마트 폰으로 바꿔드렸는데 외출하신 아버지가 통 연락이 되지를 않아 크게 걱정한 적이 있다.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왜 전화를 안 받으셨냐고 따졌다.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쌓였는데도 전화 온 것을 몰랐다고 하시는 터였다. 혹시 고장인가 싶어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화면을 쓸어 넘기는 동작 자체를 어려워하시는 듯했다. 수십 번 조작법을 가르쳐 드렸지만, 결국 그동안 쓰시던 폴더폰으로 다시 바꿔드려야 했다.
얼마 후, 이번에는 아버지가 길을 잃으셨다. 한 번은 동네 아저씨가 아버지를 모셔서 왔다. 또 한 번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고 온 동네와 시내를 훑은 후에야 아버지를 찾았다. 처음엔 그저 잠깐의 실수일 거라 믿고 싶었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니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치매 진단받으면서도 나의 아버지만큼은 다를 거로 생각했다. 조금만 노력하면 나아지실 것이라고 믿었다. 신경과 약을 한 보따리를 받아오면서도 아버지에게 별거 아니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당신도 두려웠던지, 아버지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고 외출도, 산책도 안 하고 집에만 있으려 했다.
두 번째 파도가 밀려왔다.
전립선암이었다. 소변보시는 소리가 영 시원치 않아 전립선 비대증을 의심했으나 결과는 더 나쁜 쪽이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비교적 고령인데다가 전립선암은 진전이 느린 편이니 수술보다는 주사와 약으로 치료하자고 권했다. 주사와 약으로 PSA(prostate-specific antigen, 전립선특이항원) 수치를 낮추고 당신의 기대여명 동안 관리해 나가자는 전략이었다. 치료를 시작하고 불과 몇 달 만에, 의사 의 말대로 PSA 수치가 극적으로 낮아졌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전을 늦추고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감사할 일이라 생각했다.
시간은 참 냉정하다. 그만하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병마는 공격의 수위를 높여왔다. 2019년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아버지가 침대 아래 바닥에 누워계신 것을 발견했다. 늦더위에 바닥에서 주무신 줄 알았는데, 아파서 일어나지를 못하셨다. 뼈 골절이었다. 밤사이 화장실을 다녀오다 낙상을 하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뼈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했다. 골절된 3번 등뼈 내부가 마치 호두 껍데기처럼 텅 비어있더랬다. 약해진 3번 등뼈가 위아래 2번과 4번 등뼈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뭉그러진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다른 뼈들도 많이 약해져 있는데, 어쩌면 호르몬 주사가 골다공증을 유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골다공증이 심하면 과속방지턱을 넘는 정도의 충격에도 뼈가 부러지기도 한다고 했다. 하나를 잡으니 다른 쪽에서 밸런스가 무너졌다.
한두 달 입원해서 통증 치료를 하면서 부러진 뼈가 굳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다른 뼈가 또 부러질 수 있으니 수술은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달이 지나도록 큰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보호대를 차고 침대에 기대 상체를 일으키는 정도가 다였다.
이번에도 역시 나의 아버지는 다를 거라 믿었다. 치료받고 재활하면 꼭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대전보훈병원으로 전원했다. 이번엔 등뼈에 골시멘트를 채우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부위가 아물 때쯤 아버지는 훨씬 덜 아프다고 하셨다. 재활치료를 시작했다. 아버지를 걸음마 보조기에 태워 여기저기로 산책하러 나가봤다. 힘이 빠진 아버지는 계속 주저앉았다.
누워계신 시간이 길어졌다. 아버지는 자꾸만 쇠약해져 갔다. 결국 아버지는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사이 진료과목도 비뇨기과와 정형외과, 신경과, 소화기내과, 호흡기내과까지 자꾸만 늘어갔다.
지난 3월에는 코로나가 확진되어 2주간 중환자실에 격리되기에 이르렀다. 내내 누워만 계셨던 탓에 등에는 욕창이 올라왔다. 식사량은 더욱 줄어 기력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오른쪽 폐에 흉수가 차올랐다. 심지어 그동안 잘 관리되고 있던 PSA 수치가 다시 조금씩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주사에 면역이 생겼거나, 다른 기관에 전이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의 활동이 많지 않아 현재는 무리가 없으나, 흉수가 늘어 폐가 더 큰 압박을 받게 되면 호흡 곤란이 올 수도 있다고 했다. 가슴에 삽관을 권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몸속은 마취가 잘 안되어 통증이 무척 클 것이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는 한 번 삽관 시술을 하면 튜브를 꽂은 채 삽관 상태를 무기한 유지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삽관 시술은 거동을 더욱 불편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가슴에 구멍을 뚫은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에 감염관리가 무척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수액주사도 잡아 뺄 만큼 치매가 나빠지고 있는데, 아버지가 흉수 튜브를 빼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튜브를 잘못 잡아 빼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양손을 결박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끝에 삽관 시술은 하지 않기로 했다. 삽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흉수가 차는 원인을 알아내는 것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침대에 묶인 채 고통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에게 해드릴 수 있는 상책은 아니겠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저 안 아프고 편안히 지내시는 것을 치료 목표로 삼아 달라고 했다. 의사도 동의했다. 응급상황이 닥치면 그때 응급실에서 주사기로 흉수 일부를 덜어내는 정도의 처치는 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퇴원을 결정하고 병원 식당에 앉아 밥을 먹었다. 누나가 지어온 밥을 국에 말아 몇 수저 뜨셨다. 좋아하시던 빵과 커피도 드셨다.
9. 아버지의 뺨 그리고 국가유공자의 집
큰 누나로부터 아침 전화를 받은 것은 그렇게 병원을 퇴원하고 꼭 이주일 째 되던 날 아침이었다. 혈중산소포화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버지가 편찮아지신 후 처음 나온 이야기였다. 응급상황이라는 생각에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전으로 내려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지를 쳤다. 상태는 어느 정도일지, 산소포화도가 떨어졌다는데 알아보시긴 할지, 아버지와 대화는 가능한 정도일지, 혹여 많이 안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과거의 모습에서부터 앞으로 닥쳐올 일들까지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온갖 시나리오를 따라가다 보니 가슴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생각을 돌리려고 라디오를 틀어보았다. 뉴스에 나오는 온갖 심각한 소식들이 한없이 먼 세상의 덧없는 이야기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아버지의 상태는 다행히 촌각을 다툴 만큼 응급 상황은 아니었다. 열, 산소포화도, 기력 저하 등등 좋지 않은 시그널에도 우리를 알아보셨고 대답도 잘하셨다. 호흡도 비교적 편안해 보였다.
흉수 상태는 전에 비해 나빠지지 않았으나, 열이 오르고 염증 수치가 높아진 것으로 보아 폐렴이 의심된다고 했다. 입원해서 며칠 동안 수액과 항생제 치료를 받기로 했다. 응급실을 나온 지 2주 만에 또다시 입원이다.
코로나 관리 때문에 보호자는 병실에 들어갈 수 없단다. 간호사실을 통해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사항을 전달받는 것이 현재로서는 환자 가족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검사를 받느라 아버지는 많이 지치신 듯했다. 입원 수속하는 동안 말없이 휠체어에 눈을 감고 앉아있는 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누나가 말했다. 이렇게 입·퇴원을 반복하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 같다고. 그래도 오늘 아침에 비하면 마음이 훨씬 좋다고, 아침엔 정말 큰 일 나는 줄로만 알았다고. 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했다. 얼른 아버지가 다시 퇴원하셔서 일상으로 돌아오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하루를 보냈지만, 그래도 오늘은 아버지가 우리 곁에 함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신 동안, 보훈처에서 우편물이 왔다.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문패였다. 아버지가 베트남전에서 무공훈장을 받으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문패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에게 가져가 보여드렸다.
"좋구나."
너무 먼 과거의 일이기 때문일까, 아버지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지만, 난 그 명패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만일 아버지가 군인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까. 난 더 많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반대로, 아버지는 지금 행복할까, 아버지가 정말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나와 함께 지냈던 그 시간은 행복했을까 하는 질문에 이르렀다.
그랬으면 좋겠다. 힘겹고 외로웠을지 몰라도 가족이 있었기에 행복했었노라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등뼈 골절로 쓰러져 입원했던 날, 아버지를 간호하며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의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감히 평생 단 한 번도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누워있는 아버지를 껴안고 얼굴을 비비며 진작에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평생을 외로웠던,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아버지를, 쓰러진 후에야 껴안고 쓰다듬어 드린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진작에 그랬다면 아버지는 조금 외로움을 덜 수 있지 않았을까. 마음을 표현하는데 미숙했던 아버지는 그동안 당신의 아들이 살갑게 손 한 번 잡아주기를 혹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아버지와 뺨을 비비고 그를 아끼는 마음을 전할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아버지가 앞으로 얼마나 우리 곁에 머물러주실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 오게 될 이별의 순간을 가능한 만큼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지만, 연명치료는 거부하기로 했다. 아버지를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드리기는 싫기 때문이다.
오늘에 감사하며, 아버지를 더 많이 껴안고, 더 많이 쓰다듬고, 더 많이 웃음을 나누는 것으로 시간을 채우고자 한다.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고, 자연의 한 조각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분명 자연의 품 안에서 언제고 다시 만나 하나가 될 것이라고,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시라고 이야기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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