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규 호 (李奎浩)
우리는 어떤 구체적(具體的)인 상황(狀況, 또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고, 또 그 상황에 필요하다고 믿는 ‘말’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말은 좋지 않은 방향(方向)까지도 포함(包含)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생각할 때에는, 말에 따르는 ‘책임(責任)’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말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두어 보기를 들어 보려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말의 창조적(創造的) 역할(役割)을 이해(理解)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에 따르는 책임에 관해서도 말해 보려 한다. 어쩌면 우리의 언어 생활(言語生活)을 반성(反省)하는 계기(契機)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말의 힘
어떤 의사(醫師)가 그에게 온 환자(患者)를 진찰(診察)한 뒤에 “폣병(肺病)입니다.” 하고 말했다 하자. 또 어떤 판사(判事)가 사건(事件)을 심리(審理)하고 나서 “이것은 과실 치사(過失致死)다.” 하고 말했다 하자. 그리고, 서로 잘 만나는 두 남녀(男女) 중의 한 사람이 그의 상대방(相對方)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말했다 하자.
이 밖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말의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경우는, 말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방식(方式)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따지는 것은 너무 힘든 작업(作業)이므로, 여기서는 피하기로 하겠다.
우선, 폣병(肺病)이라고 진단(診斷)한 의사의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이 떨어지기 전에도 물론 그 환자의 몸엔 폣병이라고 하는 병(病)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가 진단을 내리기 이전의 상황(狀況)은 불확실(不確實)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짐으로써 환자와 그의 가족(家族), 그리고 병원측(病院側)은 어디서 무슨 병이 들었는지,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아니,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實際)로 어떤 구체적(具體的)인 행동(行動)을 벌이게 된다.
과실 치사라고 하는 판사의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상황은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정당 방위(正當防衛), 과실(過失), 고의(故意) 등 구구하게 해석(解釋)되는, 모호(模糊)하고 다의적(多義的)이고 가변적(可變的)인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짐으로써 유동적(流動的)인 상황이 고정(固定)되고, 이에 따라 피고(被告)와 그의 관계자(關係者)들은 희비(喜悲)를 체험(體驗)하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실제(實際)로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잘 만나는 두 남녀는 양쪽이 다 사랑을 느낄 수도 있고, 한쪽만이 느낄 수도 있다(서로 싫어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있을 수 없으므로 생각지 말자.). 그런데, 사랑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關係)를 결정(決定)하는 데 필요한 조건(條件)은 되지만, 그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못 된다. 다시 말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상황(狀況)은 불분명(不分明)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짐으로써 분명하게 되고,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생활은 변모(變貌)하기 시작한다. 양쪽이 서로 애정(愛情)을 느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대체로 좋은 반응(反應)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애인(愛人)이란 관계로 묶이고, 이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사랑을 사양(辭讓)한다든지 결혼 생활(結婚生活)을 설계(設計)한다든지 하게 된다. 다음은 한쪽만이 애정을 느끼고 사랑을 고백(告白)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좋은 반응을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前者)의 경우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될 것이며, 후자(候者)의 경우는 애인이 될 수 없는 관계로 묶이고, 이에 따라 두 사람은 대체로 복잡(複雜)한 심적 동요(心的動搖)를 체험(體驗)하면서, 한쪽은 더 간곡(懇曲)히 고백하고 다른 쪽은 보다 정성(精誠)스러운 위로(慰勞)의 말로 단념(斷念)하도록 이끈다든지 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예를 검토(檢討)해 보면, 말은 불확실(不確實)하고 유동적인 상황(狀況, 현실)을 일정(一定)한 것으로 고정하고 또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힘,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큰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귀납(歸納)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창조(創造)하는 힘인 것이다.
말과 책임(責任)
우리는 어떤 소지품(所持品)을 잃고서 친구를 의심(疑心)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이 못 되지만 더러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의심하는 뜻을 담아 “혹시 내 만년필 못 봤니?”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몸이 불편(不便)하면 의사의 진찰(診察)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의사는 우리를 진찰하고서 “늑막염(肋膜炎)이군요.”와 같은 말로 진단(診斷)을 내린다.
이런 말들도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일정한 것으로 고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임(責任)’이란 면에서 이 말들을 살펴보자.
의심이 의심으로 끝나면 그래도 다행(多幸)스러운 일이다. 의심하는 동안에, 잃은 물건(物件)을 찾으면 그것으로 의심이 풀릴 수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 의심이 친구에 대한 나의 행동에 영향(影響)을 줄 수도 있지만, 이것도 대체로 나 혼자의 문제(問題)로 그친다. 그러나 의심(疑心)하는 뜻으로 “혹시 내 만년필 못 봤니?” 하는 한 마디의 말이 떨어지고 보면, 이 말은 곧 가시가 되어 그 친구의 가슴에 박히고 만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데서 그 물건(物件)을 찾았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나의 의심하는 말을 취소(取消)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취소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취소한다고 해서 앞서 한 말이 정말로 취소될까? 서먹서먹해진 두 사람은 취소한다는 말로써 우정(友情)을 회복(回復)한 것처럼 보이고, 또 두 사람이 다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의심한 적이 있다.’는 생각, 또 ‘너는 나를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친구의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늑막염(肋膜炎)으로 진단(診斷)을 받은 환자는 그 병을 고치기 위하여 자기의 최선(最善)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차도(差度)가 없다. 그래서, 의사는 다시 진찰(診察)을 하고, 그것이 늑막염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질환(疾患)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늑막염 정도의 질환이 오진(誤診)될 리는 없겠지만, 하나의 예로서 살펴보자. 의사는 늑막연이란 진단(말)을 취소하고 새로운 병명(病名)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알맞은 치료(治療)를 베풀어 환자의 병을 고쳐 주었다. 여기서도 취소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환자는 자기의 병이 늑막염(肋膜炎)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確信)하게 되었으므로, 의사의 취소는 정말 취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완전한 취소는 되지 못한다. 훗날 그 환자가 무슨 까닭으로인지, 가령 때때로 옆구리가 결리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 때 그는, 옛날 그 의사가 늑막염이라고 한 말을 상기(想起)하면서, 그것이 오진(誤診)이 아닐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이런 예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의 취소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은 한번 입에서 떨어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아무리 취소해도 취소해도 최소되지 않는다. 다만, 취소된 듯이 보일 뿐이다. 취소한다고 해서 이미 한 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취소한다는 말과 함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로 남는 것이다.
우리 선인(先人)들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란 교훈(敎訓)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어찌 남아(男兒)뿐이겠는가. 우리가 하는 말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참으로 어렵게 발견하고 애써서 선택(選擇)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국어과(國語科) 교육 과정(敎育課程)의 일반 목표(一般目標)에서, ‘성실(誠實)한 태도(態度)’를 그 요소(要素)의 하나로 포함(包含)시킨 뜻도 이와 관련(關聯)이 있는 줄 안다.
나는 위에서 말의 힘과 말에 따르는 책임(責任)에 관해서 간단(簡單)히 말해 보았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을 위한 말의 창조적(創造的) 역할(役割)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의 언어 생활을 반성하는 계기(契機)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우리가 말의 창조적 역할을 이해한다든지 각자의 언어 생활을 반성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활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指摘)하고 이 글을 맺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