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서정 / 이종화
한강은 수만 년의 세월을 잇고 이어 느릿느릿 유유히 흘러간다. 시원(始原)에서 달려왔을 물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찬찬히 강바닥을 핥으며 지나는 이곳, 바로 여기가 섬 아닌 섬, 여의도다.
강은 아름답다. 흘러가기에 아름답다. 강을 보면 흘러가는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다. 잠시 내 손에 쥐어졌다 날아간 모든 것을, 순간과 그 순간들이 모여 이룬 세월. 사랑과 미움 그리고 이젠 그 어느 쪽도 아닐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 가끔씩 찾아왔던 기회란 이름의 위기와 위기로 불렸던 진정한 기회, 그리고 이제는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는 모든 것마저 너그럽게 인정하는 내가 된다.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강, 그건 그저 ‘흐름’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 강가에 서면 흐름과 다른 ‘흘러감’의 뉘앙스를 깨닫게 된다. 그 차이는 단지 ‘달림’과 ‘달리고 있음’의 문제, 현재와 현재진행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문득 달력을 보며 가을임을 확인하는 것과 초야(初夜)의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이 왔음을 새삼 느끼는 것의 차이, 그래 꼭 그만큼일 것이다. 무관심 속에서도 한강은 여전히 흐르지만, 흘러감은 오직 관심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침저녁으로 마포대교를 건너던 때의 한강은 그저 흐름이지만, 어쩌다 친구와 맥주 한 캔 들고 찾은 한강은 내 눈에 ‘흘러가는 강’이 되었다.
인위적 무위(無爲)-여의도 공원
여의도, 아주 먼 옛날 하도(河道)가 이룬 뜻밖의 벌판에 개발(開發)의 이름으로 둘러친 섬둑 안으로 너도나도 지어올린 수많은 빌딩들이 숲을 이룬 이곳, 그 인위의 흔적이 아픈 강은, 이제는 제법 거센 비바람이 몰려와도 둑과 둑 사이에서 용울음을 터트릴 뿐 좀체 그 너머로 범람하지 못한다.
그렇게 일궈낸 삶의 터전 속에 인간은 여의도 공원이란 자연의 터전을 만들어 줬다. 인위 속의 무위. 인간이 자연에 공간을 허락한다는 발상. 이건 분명 뭔가 거꾸로 된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런 걸 문명이라 부르고, 나는 그걸 ‘인위적 무위’라 이른다.
이 무위의 공간에 찾아왔던 작년 그 가을이 돌아왔다. 초저녁 퇴근길. 한참 농구시합에 열심인 사내아이들 사이로, 인라인 스케이팅을 가르치는 아빠와 사이좋은 아린 딸. 강아지와 산책 나온 마음씨 좋아 보이던 여인 사이로 불었던 스산한 가을바람은 한 폭 풍경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운동 좀 한답시고 끊임이라곤 없는 자전거도로를 따라 한껏 달음박질치다 가쁜 숨이 버거우면, 헉헉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그렇게 한참을……. 심장 소리가 귀에서 멀어질 즈음 풀숲 여기저기서 또렷이 들리던 밤벌레 오는 소리에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느꼈던, 그 가을이 왔다.
그런 가을밤이 기억나는 건,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서다. 안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 한 토막. 그걸 바라보는 일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때의 밀(密) 이 아닌 창을 통해 밖을 보는 현(顯)의 편에 더 가까웠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지만 결코 서로를 관찰하지 않음은, 여의도공원이 인위적 무위의 공간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살짝 비껴서 각자의 삶을 외면한 채 각자의 가을밤을 누리는 자유가 좋아, 그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리 뛰어다녔다. 함께라도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 그게 이 공원이 준 매력 아니었을까.
도심 속의 낙엽-행변풍경(行邊風景)
늦가을로 접어들 무렵, 은행 잎에는 바싹 마른 낙엽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군다. 낙엽은 가을의 시심을 자극한다. 허나 기실, 도심에는 가을을 느낄만한 게 그리 많지 않다. 이곳에는 운무(雲霧)대신 스모그가 있고, 흙길 대신 포도(鋪道)가 있으며, 별빛 대신 가로등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도심에선 행인의 긴 소매와 낙엽이 가을의 깊이를 재는 척도가 된다.
낙엽은 쓸쓸하다.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그 외로움이 그러하고 나그네 발길에 아무렇게나 짓밟히는 그 대수롭잖음이 또한 그러하다. 일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는 직장인들에게 일각(一角)이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지나가고 또 그렇게 잊히는 것이기도 하다.
은해 앞에서 아침마다 트럭을 세우고 샌드위치를 파는 아저씨. 거리에서 촌각을 다투며 전단지를 낙엽처럼 뿌려대는 영업사원들, 그리고 테이크아웃 커피점에서 부지런히 라떼를 섞는 아주머니의 바쁜 손길이 짓는 표정 속에 여의도의 하루는 시작된다. 그렇게 변함없는 그분들의 매일 아니 가을은 수북이 낙엽을 따라 깊을 대로 깊어 간다.
도심은 인위의 공간. 자연의 손길이 잘 드러나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도 가을빛은 햇살처럼 내린다. 울긋불긋한 낙엽은 이불처럼 거리를 덮는다. 시간이 쌓이며, 변하지 않아보이던 행변의 풍경도 결국 변하고 만다. 계절이 돌면 그리움도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