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13
그런데 오타 유미는 만화스토리를 오래 쓴 작가도 아닌 데 ‘고스트 바둑왕’ 단 한 편으로 ,200만 부를 히트시켜 떼돈을 벌었다는 소리에 강철수 화백이 탄식한다.)
강철수 : 제기랄! 역시 일본의 만화시장은 알아줘야 해.나는 평생 동안 2000권 이상 만화를 펴냈지만 요 모양 요 꼴로 사는데......
(그러자 국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조훈현 : 누가 뭐래. 나는 평생 동안 2000국 이상 바둑을 두었지만
요 모양 요 꼴 아닌감!
(듣고있던 필자가 기막혀 한 마디 안 할 수 없었다.)
필 자 : 그 놈의 요 모양 요 꼴 좀 빌려줘 보세요.
우리도 그렇게 좀 살아보게 말입니다!
#3. 제주도 중문 롯데호텔 특별대국실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제1국이 벌어지고 있는 대국실 옆 해설장.
넓디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고작 열 손가락 안팎이다.
조선일보 관계자 및 한국기원 관계자, 그리고 기사 몇 명.
오타 유미씨,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유 미 : 이거 세계대회 맞나요?
필 자 : 그러믄요. 엄청 큰 대회구요. 두 기사 중에 우승자는 그랜드슬램 을 이루는 중요한 시합이죠.
유 미 : 그런데 분위기가 좀 썰렁하군요?
필 자 : 아아~ 이런 일들이 하도 빈번해서 이젠 별 이슈가 되지 않은 겁니다.
유 미 : 그렇군요. 하긴 최근에 한국기사 분들이 워낙 우승을 휩쓰니까 감동은 덜 하겠네요.
필 자 : 맞습니다.
(얼렁뚱땅 둘러 붙였지만 무척 비중이 큰 세계대회임에도 불구하고 매스컴과 바둑팬들의 관심이 다소 빈약했다는 점에서 주최 측의 이벤트 홍보 전략에 좀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4. 제주 공항
(일본으로 떠나가는 오타유미와 다카하시에게 한국바둑계를 돌아본 소감을 물었더니 즉각 튀어나온 대답들-)
유 미 : 한국바둑계는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프로들의 정신도 파워풀하고, 소년들의 실력과 의욕도 상상을 불허하며, 무엇보다도 일반기원에서 만나본 시민들의 바둑에 대한 열정이 너무 부러워요. 앞으로도 일본이 한국을 따라잡기는 요원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다카하시: 바둑사이트 타이젬의 인상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 예상할 순 없지만 느낌상 한국에서는 바둑이 스포츠와 인터넷 게임으로까지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습니다.
앞으로 ‘고스트 바둑왕’의 무대는 한국이 됩니다.
우리가 만난 조 국수님, 박영훈 천원, 김성룡 사범 등을 비롯한
소소회 멤버들과 한국기원 원생들 모두 만화에 등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서 한국바둑을 주시하고 본받으려는 바람이 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소감을 피력하고 그들은 제주공항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바둑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오타 유미 일행은 한국에 건너와 실로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바둑소재 만화로 대히트를 날린 그들을 부러워했지만 그들은 또 우리의 기름진 바둑토양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1979년.
정계는 어지러웠다.
유신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궐기를 진압하느라 정부는 진땀을 뺐었고 마침내 철권의 통치자는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부터 총탄을 받고 쓰러졌다.
갑작스런 권력의 진공에 국민들은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다.
그 공백을 서서히 메워나간 주인공들은 정치군인들.
암담한 나날들이 중첩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훈현은 그 혼돈의 어둠 속에서 찬란한 개인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제3회 기도문화상 5개 부문 중 최우수기사상, 최다승기록상, 연승기록상, 승률1위상을 휩쓸어버린 거였다.
서봉수의 명인성(城) 하나만 제외하고 중원의 모든 성을 장악한 조훈현.
관철동 사람들은 그 파천황의 기세를 지켜보며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한국바둑계의 두께가 아무리 얇다해도 한 사람의 전횡(專橫)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조훈현의 독재를 막아야 하는데......
서봉수 이외에는 대안이 부재했다.
결정적일 때 괴력을 발휘하는 서봉수 명인도 조훈현과의 상대전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띄게 벌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1979년.
여자 복은 없었던 황태자
어느 날 조훈현은 여자를 만났다. 결혼을 전제로 만난 파트너였다.
육촌 조카딸 유기숙이 대학동창인 친구를 소개한 것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미화(鄭美和).
용인 출신으로 수원의 동남보건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고향의 제일약품에서 영양사로 근무하고 있는 처녀였다.
농담 비슷하게 던진 조카의 중매알선이 갑작스럽게 현실로 진행된 것은 조 국수의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살짝 웃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확고부동한 국가대표 프로기사로서 활동하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갖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게 필요했다.
주변의 친지들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자꾸 조훈현을 닦달했다. 그 해 봄날 롯데호텔 커피숍.
두 사람은 수줍은 얼굴로 처음 맞선을 봤다.
남자는 여자의 첫인상이 순진하다 느꼈고, 여자는 남자가 날카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남녀는 한달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별다른 대화 없이 그냥 인상만 확인하고 헤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미화는 조훈현이 뭘 하는 사람이고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다.
조훈현은 생애 처음 만난 여자에게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독특한 성장환경 탓에 여지껏 여자를 가까이 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애가 바둑이라면 아마도 카사노바 뺨치고 돈환을 엎어 치는 플레이보이였으리라.
치밀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성동격서, 도남의재북(圖南意在北)으로 치고 빠지며 능수능란하게 데이트를 주도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숙맥이었다.
자기를 표현하는데도 서툴렀고, 상대를 칭찬하는데도 인색했다.
그들은 그렇게 다소 어색한 월간 데이트를 계속 이어갔다.
한달에 한 번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의무적으로 만나 관성적으로 인사했으며 관례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고 헤어졌었다.
운명적인 파트너라는 인식이 누구에겐가 스며들어 온 것도 아닌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단지 어눌하고 순진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명제를 쉽게 풀어 가는 해법은 찾지 못하고 그저 상대를 배려해서 다음 약속을 하는 소극적 데이트를 반복했던 것 같다.
당시 조훈현은 주말이면 산행을 빠트리지 않고 즐겼었다.
그래서 정미화를 만난 이후에는 곧장 산으로 가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화제도 산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정미화는 ‘이 사람이 나보다 산에 더 관심 있나보다’ 하는 섭섭한 생각을 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 것은 다름 아닌 ‘전화사건’-
모처럼 조훈현이 정미화의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사람은 미래의 장인 정운영(鄭運永)씨.
그날따라 무슨 일로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있던 빙장(聘丈) 어른은 맏딸 정미화를 찾는 청년의 음성에 왈칵 역정을 내고 만다.
“자네 누군데 미화를 찾아?”
“네, 저는 조훈현이라는 사람입니다.”
“조훈현이 누구냐구? 일 없으니까 끊어!”
빙장은 그렇게 매몰차게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옆에 있던 정미화는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신음을 꿀꺽 삼켰다. 조훈현은 기가 막혀 한참동안 수화기를 쏘아보았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담!”
가만 생각해보니 문제가 많은 만남이었다.
여자가 집안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를 만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딸과 사귀는 남자한테 어찌 빙장어른이 이처럼 모욕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자존심 빼면 쓰러지는 조훈현은 그 순간 마음 속으로 결별의 획을 주욱 긋고 말았다.
“끝이다!”
그런 해프닝과 관계없이 두 사람의 맞선에는 여러 친지들의 관심이 얽혀 있었으니 그 무렵 등장하는 사람이 정미화의 외사촌 오빠.
그는 공군 출신으로 조훈현의 존재를 익히 알고있는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커플
그 때 외사촌 오빠가 정운영씨의 특명을 받고 조훈현을 탐색하기 위해 동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전우 조훈현에게 다짜고짜 사랑에 관한 훈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둑에 관해서는 국보급인 조훈현이 사촌동생과 맞선을 보고 있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었던 것이다.
한편 조훈현은 느닷없는 인물의 따뜻한 훈수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사실 그 자리는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데 여자의 사촌오빠라는 사람이 달콤한 버터를 발라주고 있었으니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정씨네 집안의 의중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고 오빠는 결합을 위해 애를 쓰다니 좀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수순(手順)이었다.
그런 혼란으로 인해 두 사람의 데이트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본격적으로 무르익어 가는 두 남녀의 사랑.
마침내 정운영씨는 사윗감을 보기 위해 딸과 함께 상경합니다.
그에게는 맏딸 정미화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
그래서 조훈현을 여러모로 재보다가 집안 어른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이 사람아 재고 자시고 할 게 뭐 있어.
그런 인물이라면 냉큼 딸을 줘야지!“
그런 사연으로 순진남과 순수녀의 결합이 이뤄지게 됩니다.
욱일승천
조 국수의 전적은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뀔수록 상승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삼성화재배를 꿀꺽하더니 엘지배 타이틀을 놓고 유창혁과 모순(矛盾)의 쟁기(爭棋)를 벌이고 국내 최대의 KT배를 접수하는가 하면 일본으로 날아가 도요타 덴소배 1차전에서 왕년의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 뿐인가?
곧장 오키나와로 건너가서 오오다케 9단과 임해봉 9단을 꺾으며 제1회 바둑 아시아컵 퍼펙트 우승에 기여했다.
이 번 주에도 엘지배 결승전이 준비되어 있는데 승패의 결과를 떠나서 50을 바라보는 노(?) 국수의 맹위(猛威)는 그저 경이롭기 짝이 없다.
다시 1979년 겨울
빙장 어른의 전화 해프닝 이후 조훈현, 정미화 커플의 데이트는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속담처럼 두 남녀의 관계가 공고해진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순진함이 맘에 들었다.
천하의 조훈현을 몰라보다니......
한편으로는 섭섭했지만 딴에 그 무식(?)이 진실과 더 가까운 쪽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유명세와 관계없이 그저 사람 하나만 보고 수줍게 나타나는 여자.
여자는 남자의 심플한 매너에 반했다.
결혼에 관해 그다지 깊은 고민을 해본 적 없었던 그녀는 친구 소개로 만나기 시작한 이 남자와 어떤 사연을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심화시켜야 하는지 알 바 없었다.
그렇다고 칼로 무를 싹둑 자르듯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를테면 소극적 교제를 일관한 셈인데......
어느 날 용인의 빙장 정운영씨는 맏딸의 이성교제를 확실히 마무리해줄 요량으로 상경 롯데호텔 커피숍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함께 동행한 사람은 집안의 형님뻘 되는 유석현(현 동인신용금고 회장)씨.
정미화와 조훈현의 멋쩍은 대화를 지켜보고 나서 정운영씨가 유석현씨에게 말했다.
“인상은 좋아 보이는구만. 그런데 바둑을 두는 직업이 좀 마음에 걸리는 걸. 바둑을 둬서 마누라 밥 먹일 수 있나? 하는 수작을 좀더 본 다음에 여차하면 퇴짜를 놓아야겠어. 내가 어떻게 키운 딸인데......”
그러자 유석현씨가 그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와 호통을 쳤다.
“ 이 사람아. 자네가 뭘 안다고 큰소리인가? 아무 소리 말고 혼사를 밀어붙이게. 저 청년이 보통사람으로 보이나? 어지간한 걸물이 아니라 국보급 문화재니까 당장 약혼식을 강행시키게. 섣부른 객기로 망쳐놓지 말고!”
유석현씨는 조훈현이 바둑계의 거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앞날도 창창하다는 걸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의 충고에 따라 정운영씨는 엉겁결에 맏딸의 이성교제를 최종승인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었으니 알고 보면 그들의 혼사에 있어 일등공신은 다름 아닌 유석현씨라고 해도 좋았다.
결과적으로도 유씨의 판단은 아주 정확한 거였다.
조훈현만큼 ‘修身齊家治國 平天下’의 교훈을 몸으로 실행하고 있는 위인이 과연 이 시대에 얼마나 되겠는가?
특별한 계기도 없고 짜릿한 연애경험을 축적하진 못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구축한 두 사람은 마침내 1980년 3월 15일에 약혼식을 올렸다.
차남의 혼사를 앞두고 보문동의 조씨네는 이사를 결행했다.
거의 이십 년 넘게 뿌리내리고 살아왔던 정든 보문동 한옥을 떠나 화곡동 양옥집으로 옮긴 것이다.
경동고등학교 담벼락 기슭에 위치한 보문동 한옥은 조씨네 가족들에게 있어서 모태(母胎)와도 같은 둥지였었다.
장남과 차녀, 삼녀를 여기서 시집보냈고 신산스런 가난에 부대끼면서도 정겨운 家族愛로 세월의 강을 건너왔던 터전이었다.
고지대인 까닭에 전망이 좋아 일출과 일몰의 아름다운 햇살을 즐길 수 있었고, 야간에는 동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던 곳.
그러나 돌산을 쪼아 세운 보문동 집은 너무 비좁았다.
더욱이 국수의 며느리를 들이기에는 신방조차 만들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사정을 전해들은 집안의 외삼촌 박남술씨(박순애 여사의 남동생)가 자신의 화곡동 양옥을 추천했다.
우장산 기슭 신도로 변의 주택.
당시에는 신개발지여서 주변환경이 쾌적한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조씨네는 무려 이십 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사를 한 후에도 조 국수는 보문동 집에 대한 애착이 가시지 않아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그 집을 매입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곤 했었다.)
1980년 봄
아무도 나라의 운명을 점칠 수 없을 만큼 정세는 혼미의 극을 달렸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기존 정치세력들이 철퇴를 맞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대학가의 교문에 빗장이 드리워졌다.
그 해 4월 30일.
남산 입구의 앰배서더호텔 연회장에서 조훈현과 정미화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호텔 입구에는 각 언론사들의 대형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그리고 KBS, MBC......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언론사 사주들의 화환은 신랑 조훈현에 대한 존경과 축복을 담은 선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조훈현은 그 언론사들이 주최하는 바둑대회의 거의 모든 타이틀을 쥐고 있는 주인공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3개월 뒤 신랑은 한국바둑사에 길이 남을 전타이틀 석권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신부 정미화씨는 그 호텔 예식장에서 비로소 남편의 존재가 예사롭지 않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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