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⑧ - “음악가의 운명은 순간 위해 모든 생을 바치는 것”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글·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 사진·김현동 기자
물심양면 도움 준 줄리어드 음대 강효 선생에게 음악적 테크닉 익혀…조부모에게 강인한 예술정신, 타인의 삶 배려하는 성숙한 인성 물려받아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인터뷰를 통해 “개인의 예술적 야망을 좇기보다 공동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더 진실된 성공”이란 신념을 밝혔다.
리처드 용재 오닐에게 음악은 마약보다 강렬한 유혹, 도취다. 그는 인간이란 밭에 나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면서 살도록 설계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천국에도 갔다 오게 되는 것이 바로 음악가의 삶이란 인식이다. 그 황홀함은 아주 가끔씩만 찾아오는데, 필생의 노력을 바치지 않는 한 그 궁극의 황홀은 결코 맛볼 수 없다고 말한다.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34)과의 인터뷰는 타이트한 그의 일정 때문에 녹록지 않았다. ‘안녕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위해 2013년 12월 11일 귀국, 12일부터 리허설, 16일 안산에서 제1회 공연을 갖는다. 일단 공연을 위한 리허설이 시작되면 연습과 연주에 전념하기 위해 일체의 언론 접촉을 피한다. 12일 오전 리허설이 끝난 뒤 오후에 인터뷰 일정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음악관과 수업시대의 삽화, 여러 스승과 함께 한 배움의 과정을 들었다.
직설적인 화법에 거침없는 능변이다. 인터뷰의 수확이라면 악기 비올라에 대한 그의 음악적 해석을 비교적 소상하게 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순탄치 못했던 가족사와, 이후 극적인 한국에서의 데뷔, 그리고 그간 보여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성숙한 공감능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인터뷰 중에도 그는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주목한 것은 ‘드라마’로서의 그의 인생보다 ‘음악가’로서의 그의 철학과 도전이었다. 음악적 기예가 세계 최고의 거장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는 아직 이르나, 그 도정에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비올라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최근 비올라가 독주 악기로 부상한 세계 음악계의 흐름에 그가 일조한 몫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비올라에 대한 이해에서는 한국 청중이 세계 최고”라면서 “자신과 비올라를 사랑해준 한국의 청중에게 깊이 감사한다”고 말했다.
향후 도전은 현악4중주와 지휘에 있다. 2014년 2월 예정된 유럽 투어를 신호탄으로 현악4중주라는 서양 고전음악 최고의 음악형식에 도전한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현악4중주를 통해 그들의 가장 높은 수준의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고 완성했고, 현악기 주자들 역시 가장 추상적이면서 철학적인 4중주 형식에 대한 도전과 동경 의식이 매우 강하다.
이 수줍은 청년은 2012년 MBC와 함께 안산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 합주를 가르치는 ‘안녕 오케스트라’를 기획하고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바 있다. 지휘는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고,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하고 싶은 꿈을 오래 간직했다. 카리스마보다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이 지휘의 모토인데, 비올라를 향한 열정과 지휘자로서의 오랜 꿈이 어떤 조화를 이룰지 지켜볼 일이다.
인생과 음악적 이상은 불가분의 관계
인터뷰가 끝난 후 용재 오닐의 인생과 음악적 이상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음악은 지나온 그의 인생 행로, 또 앞으로의 삶의 길과 견고하게 결합돼 있다. 사실 비올라를 자신의 악기로 선택하게 된 배경에도 겸손함, 타인과의 교감에 대한 열망, 끊임없이 향상하고자 하는 열정이 존재하고 작용했다. 가장 황홀한 도취의 순간에도 인간의 보편적 행복에 대한 이상을 놓치지 않는다고 그는 고백했다. 인터뷰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1시간 30분에 걸쳐 이뤄졌다.
만나길 고대했습니다. 먼저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 음악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처절하게 이 길을 걷고 있는 겁니까?
“음악가라는 이 직업을 어떤 명예나 부를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음악은 영혼을 열정과 기쁨으로 채웁니다. 음악은 가장 좋을 때, 마치 마약과 같습니다. 아니, 마약보다 더 강력하지요. 가장 좋을 때에는 마치 지구 너머 다른 행성에 저를 데려다 주는 듯합니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천국에만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밭에 나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면서 살도록 설계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천국에도 갔다 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음악가의 삶인 것 같습니다. 음악가들은 연주를 들으러 청중이 찾아오는 딱 그 두 시간을 위해서, 무대에 올라 청중들 앞에서 15분 길이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을 쏟아붓습니다. 정신적 동요와 스트레스를 이겨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것이지요.”
최고의 천재들마저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니 가혹하다는 생각마저 드네요.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음악의 길은 일생에 걸친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 모든 노력이 바로 ‘인간의 조건’과 관련돼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몇번의 짧은 순간들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쳐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그 길은 매우 멀게 느껴지겠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뒤돌아봤을 때,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위대한 순간을 느낄 수 있고, 또 여러 다른 방식으로 거대한 성취감을 주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예술세계로 이끈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줄리어드 음대에서 만난 강효 교수와의 만남이 궁금합니다.
“강효 교수를 만난 건 2001년 9월, 9·11 테러가 일어나기 바로 며칠 전이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막 뉴욕으로 이사한 직후였죠. 버몬트에서 열렸던 유서 깊은 실내악 음악제 ‘말보로 페스티벌’에서 제 연주를 보셨습니다. 음악제가 끝난 후 강 교수님에게 오디션을 보고 그가 이끄는 ‘세종솔로이츠’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강 교수와의 만남, 그리고 세종솔로이츠 입단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모멘텀으로 기록될 겁니다.
뉴욕이 얼마나 비싼 생활비가 필요한 도시인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내내 생활비를 스스로 벌었습니다만 뉴욕의 생활비를 번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강 교수께서는 생활비의 상당부분을 후원하셨고, 제 첫 비올라까지 선물해주셨습니다. ‘가스파로다 살’이 제작하고, 삼성문화재단이 소유했던 이 아름다운 비올라는 매우 비싼 악기였어요. 이 악기를 가진 후 비로소 저의 ‘음악적 목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강효 교수가 지어준 미들네임 ‘용재’
강효 줄리어드 음대 교수. 그는 용재 오닐의 한국 데뷔를 주선하고, 음악적 테크닉을 전수한 가장 큰 스승이다.
강효 교수의 교수법과 그분이 제자를 대하는 스타일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저를 비롯한 많은 젊은 연주자의 멘토였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까워져서 서로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자극, 영감으로 작용했죠. 세심하고 따뜻한 데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해서 학생들과의 거리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을 대할 때 반말보다는 존댓말을 쓰곤 했어요. 저를 학생으로서 내려다본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콘서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유명한 스승인 도로시 딜레이와 같이, 강 교수님도 학생들에게 연주의 테크닉을 가르치는 데 매우 탁월했습니다. 그를 통해 많은 연주기법을 배웠는데, 테크닉적인 면의 대부분은 그에게서 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를 만나 제 연주실력이 일취월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거의 모든 면에 대해 빚지고 있는 셈입니다.”
2002년 세종솔로이스츠 그룹에 합류해 단원들과 포즈를 취한 용재 오닐(앞줄 오른편 둘째). 강효 교수가 오디션을 통해 그를 발탁해 그룹에 합류시켰다.
용재 오닐이 한국에 오게 된 것도 강효 교수의 부인이 낸 아이디어다. 용재 오닐은 세종 솔로이스츠 그룹에 들어간 후 네 달 정도 미국 투어 공연을 했다. 그중 한 투어에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정경화씨에게 초대된 적이 있었다.
일본과 대만, 한국을 다니는 투어였는데, 비발디의 사계를 정경화와 함께 연주했다. 무명의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에게 그 투어공연은 익사이팅했고, 정경화와의 공연은 아찔할 정도로 정신을 자극했다.
“그 투어를 하던 중에 한국 오기 직전 일본에 있을때였는데, 사람들이 이름에 대해서 물었어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죠. 그때 사람들에게 출생과 성장의 과정을 설명했어요. 2004년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강효 교수 부부의 도움으로 KBS 다큐 프로그램 <인간극장>에도 출연하게 됐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줄리어드 출신의 젊은 아티스트였지만 하룻밤 새에 매우 많은 사람이 저와 어머니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죠. 강효 교수가 제 인생에 미친 영향은 정말이지 지대한 것이었어요.”
이 시기에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고 들었는데, ‘용재’라는 이름은 어떻게 갖게 되었나요?
“강효 선생 부부는 ‘Richard O’Neill’과 같이 전형적인 아일랜드나 영국계의 이름 외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용재’라는 미들네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게 처음 이름을 주셨을 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저는 뭔가 좀 더 강한 발음이 들어간 이름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용재’는 재미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의 친구들이 말하기를 그 이름은 ‘소박한 시골 소년의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성인으로서 막진입한 20대에,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각별한 것 같아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은 느낌이랄까요.”
음악에 입문하는 과정에서 조부모의 역할과 그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다고 봅니까? 잊을 수 없는 일화가 많았다고 들었어요.
“지난 몇 년간 아이들과 함께 음악활동을 하면서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행복한 아동기를 보낼 수 있는 것, 인생에서 좋은 출발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마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할머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분은 가장 좋은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셨죠.
제 인격의 대부분은 그분이 만들어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매우 강인한 분이셨고,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는 일이 없었고, 언제나 근면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을 베푸실 때에도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습니다. 음악을 접하게 된 과정은 매우 자연스러웠어요.
조부모님께서는 교육을 통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확신이 있었고, 결코 부유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교육에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읽기나 수학 등은 물론이고, 특히 할아버지는 미술과 공예 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죠. 예술적 방면으로도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중 음악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최초 자신의 음악적 소양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감사하게도 날 때부터 절대음감이 있었습니다. 모든 음악가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명한 음악가의 상당수가 절대음감을 타고 나죠. 절대음감은 음악가에게 매우 중요한 유전적 선물입니다. 어떤 악기든, 어떤 음역의 음이든, 어떤 음질이든 간에 정확하게 음정을 구별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표현할 수 있죠. 연주자에게는 절대적인 강점으로 작용하는 유용한 요소인데, 그 재능을 타고난 건 굉장한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악적 성장과정에는 여러 단계가 있죠. 분수령적 계기가 되었던 사건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음악을 시작한 후 오랜 기간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두 가지의 경험이 제 음악인생을 바꿨죠. 첫 번째는 할아버지께서 첫 음반으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Op.64)을 선물해 주셨을 때입니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은 정말 위대한 곡인데, 이 곡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에뛰드(연습곡)들, 세빅(Sevcik)이나 크로이체르(Kreutzer)를 연습하던 중에도 몰래 베토벤 협주곡을 연습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지역의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매우 어린 나이에 단원으로 받아들여져서 지휘자에게 굉장한 칭찬을 받은 적이 있어요. 유년 시절 일종의 도전으로 하게 된 협연에 주변의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어요. 어렸을 때 매우 수줍음 많고 조용한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번의 경험은 실내악을 처음 접할 때였습니다.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올림픽 뮤직 페스티벌(Olympic Music Festival)’이란 음악제가 열렸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내악 연주자들이 다수 참여하는 음악제였죠. 이 음악제에 어린 아티스트로 참가하게 된 것이 인생을 바꾼 계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케스트라 반주로 협주곡을 연주할 때의 느낌과 실내악에 몰두할 때의 느낌은 사뭇 달랐을 것 같습니다.
“연주 첫 회부터 베토벤의 현악4중주를 하면서 실내악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실내악이 가장 이상적인 연주 형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연주자에게 일정한 자율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실내악은 민주주의 같은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휘를 받거나 연주법을 지시받지 않고, 협연하는 동료들과 함께 결정을 내리죠. 그 과정에서 협연자들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많은 위대한 작곡가는 그들의 실내악 작품 속에 마음속 가장 깊은 감정들을 담아내곤 합니다. 그래서 실내악에 참여했던 경험, 음악제에 참가했던 12세부터 15세 때까지의 여름들이 연주자의 길로 인도했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음악가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화음의 중간에 서게 된 비올라의 경험
용재 오닐은 ‘올림픽 뮤직 페스티벌’의 첫 두 여름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참여했다.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드보르작의 4중주, 베토벤의 4중주와 같은 어려운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마지막 여름 음악제에서 운명적인 일이 벌어졌다. 참가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 늦게 지원서를 냈는데, 음악감독인 어윈 아이젠버그(Irwin Eisenberg)에게 ‘너무 늦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비올리스트로 들어온다면 가능하다는 것이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비올라를 빌려 연습을 시작했는데, 매우 쉽다고 생각한 비올라가 결코 쉬운 악기가 아니라는 것을 곧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올리스트로 음악제에 참가해서 처음으로 부여받은 과제곡이 슈베르트 첼로 5중주 다장조였죠. 바이올린 주자로 연주하게 되면 일종의 인솔자 역할, 항상 멜로디만 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비올라를 연주하면서 갑자기 화음의 중간에 서 있게 된 것이죠.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다른 악기 파트의 모든 음들이 들리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맛보게 된 겁니다. 비올라는 음악적 구성요소와 화음의 정 중앙에 위치합니다. 바로 그 역할, 그런 위치의 비올라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비올라를 통해 훨씬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화음의 어느 부분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멜로디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비올라는 마음을 사로잡았고, 비올라와의 숙명적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비올라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나요?
“아니,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도 할머니께 받은 영향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절대로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었거든요.”
예컨대 글렌 굴드가 바흐를 가장 즐겨 연주했던 것처럼, 연주자로서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를 꼽을 수 있을까요?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곡가들로 빼곡한 음악사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예술사이기 때문이죠. 모든 작곡가는 모두 다른 이유로 음악사 내에서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일종의 연속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주 인생에서 저의 역할은 일종의 음악적 큐레이터라고 생각하는데, 돌아보면 그 큐레이팅 작업에 모든 작곡가가 필요한 것 같아요. 물론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거장들이 있긴 하지요. 예를 들어 바흐는 음악 역사 상 최고의 재능을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모든 것을 했어요. 음악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사랑한 베토벤, 음악 못지 않게 인간으로서의 베토벤을 사랑합니다. 모차르트는 음악 역사상 아마 가장 생동감이 넘치고 드라마틱한 작곡가일 겁니다.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알았던 드문 능력을 가졌죠. 그리고 슈베르트는 가장 위대한 ‘노래와 멜로디의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작품은 하나하나 모두 특별하고,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를 고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존경하는 비올리스트는 누구이며, 그에게 받은 음악적 영감을 무엇이었습니까?
“비올리스트로서의 음악적 우상은 윌리엄 프림로즈(William Primrose)라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영국계 미국인 비올리스트인데, 그를 통해 비올리스트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그가 있기 전에는 비올라 솔로이스트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연주자가 시도는 했지만 프림로즈야말로 하이페츠나 오이스트라흐 같은 바이올리니스트,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첼리스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비올리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거장들 중에서도 어떤 악기의 선구자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프림로즈는 아마도 가장 위대한 비올리스트로 꼽아야 할 겁니다.”
프림로즈라는 비올라의 대가가 있었다니 그의 음악을 한번 찾아 들어보고 싶네요.
“그의 파가니니 레코딩을 들어보면 알 수 있지만 그는 비올라로 바이올린 곡들을 너무나 쉽게 연주했습니다. 위대한 건 바이올린 거장들과 맞먹는 기교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정말 놀랄 만한 음색을 가졌는데, 비브라토와 뛰어난 타이밍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것입니다.
요즘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모두들 기교적으로 완벽한 연주에만 골몰하지만 옛날의 거장들은 타이밍과 속도를 통해 곡을 해석하는 능력을 보여줬지요. 지금 운이 좋게도 프림로즈가 썼던 활을 사용합니다. 그는 바이올린 활처럼 매우 가벼운 활을 좋아했는데, 이 활을 써보면 그가 왜 이 활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어요. 정말 멋진 활이죠.”
한국 청중의 비올라 이해 수준은 세계 최고
용재 오닐은 자신의 음악적 인생이 ‘더욱 더 나아지고 싶다’는 동기에 기반해 있다고 설명한다.
비올라라는 악기의 매력이 궁금합니다. 바이올린, 첼로와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올라는 규격화된 사이즈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더블베이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악기가 가진 음역에 걸맞게 악기 사이즈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바이올린과 첼로는 과학적으로 계산된 그 음역에 딱 맞는 사이즈를 갖고 있어요. 그래서 기술적으로만 보자면 바이올린의 몸통 길이가 14인치라면 비올라는 21인치가 되어야 하죠.
비올라에는 비올라다 브라치오(viola da braccio)와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가 있는데, 다 감바는 첼로처럼 다리 사이에 잡고 연주하는 방식인데 반해 거의 모든 연주자가 사용하는 비올라는 다 브라치오로 팔에 들고 연주하는 방식입니다. 연주할 수 있도록 사이즈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비올라와 더블베이스는 매우 흥미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바이올린도, 첼로도 아닌 소리죠. 바이올린보다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한 소리를 갖고 있고, 규격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타입의 비올라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베이스 음색이 짙고 좀더 걸걸한 소리를 지닌 정말 거대한 비올라가 있는가 하면, 매우 작아서 바이올린과 흡사한 비올라도 있지요.”
그간 비올라는 바이올린에 비해 ‘덜 중요한’ 악기로 인식되었습니다. 그 독특한 음색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봐야 하나요?
“비올라의 위상은 학창시절과 비교해보더라도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또한 한국 대중들의 비올라에 대한 선호는 대단합니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비올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은 곳도 드물 겁니다. 비올라가 실내악의 중요악기로 등장하게 된 것도 놀라운 발전이라 할 수 있죠.”
음악가들은 자신의 스타일이 있죠. 자신만의 음악적 색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연주자가 악기를 드는 순간 악기는 그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갑니다. 다섯 살 때부터 악기를 연주해왔으니까 제게 악기란 거의 ‘제2의 천성’이라 할 만하죠. 악기와 함께하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누가 음색에 대해 물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어머니 색깔의 혼합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매우 많은 측면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굳이 말한다면 제 음색은 인간적이고 어두운 편이라고 할까요? 비관적인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적 측면이나 지나간 삶의 과정을 보더라도 인간의 조건에 대해 보다 민감한 편입니다. 그래서 그 음색은 아마도 ‘암적색(dark red)’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황이나 노랑처럼 너무 밝은 색은 아니고, 파랑은 너무 차갑고… 아마 어두운 빨간색 계열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멤버로 있는 ‘앙상블 디토(ditto)’는 젊은 연령층을 공략한 클래식 앙상블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그룹인가요? 혹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듣고 싶네요.
“첫 리사이틀인 2004년 이후 저는 몇 년간 협연이나 리사이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 지금 소속해 있는 매니지먼트사 ‘크레디아’의 대표이사인 정재옥 씨와 만나게 되었어요. 플라자호텔에서 늦은 오후 차를 마시면서였던 것 같은데, 그가 이렇게 물었어요.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리사이틀은 비올리스트로서는 한국 최초로 콘서트홀 매진의 기록을 세운 그런 성공적인 연주회였다. 매우 기뻐할만한 일이긴 하지만, 용재 네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요.
정 대표는 제 인생을 바꾼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분으로 항상 저의 꿈에 관심이 깊었고, 그 꿈을 실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는 분이죠. 그분에게 ‘실내악’을 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정 대표는 ‘그렇다면 용재 오닐이 앞장서서 실내악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일생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를 한번 꾸려보고 싶다고 했지요.”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란 연주조직의 형태가 실내악의 대중성을 끌어올리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인가요?
“하겐 현악4중주단(Hagen quartet)과 같이 세계 최고 수준의 4중주단이 국내에 오곤 하는데 어느 연주회장을 가보아도 객석은 4분의 1 정도밖에 차지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4중주단인데 왜 청중은 오지 않을까? 역시 초일류라 할 수 있는 에머슨 현악4중주단(Emerson quartet)의 공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적지 않은 관객이 오긴 하지만 대단한 관객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매진이 되진 않는 겁니다. 협연 솔로이스트나 오페라, 교향악 연주에는 객석이 꽉 차는데 실내악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제가 속한 링컨 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에 착안한 것이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입니다.
현악4중주단처럼 고정된 그룹이 아니라 한 무리 연주자들의 자유로운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무대극의 멤버와 같은 것이죠. 원하는 어떤 극이더라도 많은 배우가 서로 교체해가며 출연이 가능하고 여러 다른 조합의 공연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매년 햄릿만을 공연해야 하는 게 아니라 레퍼토리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개방적인 운영방식이죠.”
2007년 출범한 앙상블 디토는 클래식 청중의 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훨씬 더 새로운 시도를 했다.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함께 ‘슈베르트의 해’를 기획했고 디토의 인기도 상종가를 쳤다. 아마도 2008년은 디토의 가장 성공적인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 이후부터도 디토는 계속된 새로운 기획으로 청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많은 클래식 음악 단체가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습니다. 청중이 없고 지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디토라는 매우 젊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고, 청중들은 우리를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그들의 성원에 감사하고,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에 흥분하고 있어요.”
‘니벨룽겐의 반지’ 지휘하고 싶었다
세계적인 지휘자들과의 협연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확장해온 용재 오닐은 스스로 지휘대에 오르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이홍렬의 동요 ‘섬집아기’를 여러 음악회에서 연주해왔죠. 어떤 의미가 있는 곡인가요?
“‘섬집 아기’는 제게 파블로 카잘스의 ‘새들의 노래(Song of the birds)’와도 같습니다. 첼로의 거장 카잘스는 이 곡을 연주회의 앙코르곡으로 여러 번 연주했지요. 카잘스를 너무나 잘 나타내는 ‘카잘스의 음악’그 자체라 할 수 있어요. 그가 연주한 무수히 많은 훌륭한 작품이 있지만 이 민요곡에는 매우 심오한 감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제게 ‘섬집아기’도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를 너무나도 많이, 잘 담고 있는 곡입니다. 종교적인 의도는 없지만 가끔씩은 연주회를 마무리하는 축복 기도로 여기기도 합니다. 민요에는 민중들의 삶과 삶의 방식을 대변하는 깊은 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하지만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어요”
지휘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지휘란 음악적 커리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도전인가요?
“제 음악인생은 ‘더욱 더 나아지고 싶다’는 동기에 기반해 있습니다. 절대로 제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음악은 끝이 없고 무한하며, 음악이라는 구조와 시스템은 정말 위대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로 음악인생을 시작했지만 어릴 때부터 지휘하는 것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2012년에 MBC와의 안산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합주를 가르치는 ‘안녕 오케스트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아이들을 이끄는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
보통 팀에 속해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휘는 늘 편하게 여겨온 공간을 벗어나 누군가를 리드하는 역할을 맡으며 스스로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씩 팀을 벗어나 협연을 하곤 하지만 지휘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해내야 하는 일이지요. 매우 큰 책임감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지휘를 한번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좋은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지휘자의 꿈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관심 분야가 참 많았습니다. 한때는 바그너를 너무 좋아해서 바그너 오페라의 세트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바그너의 반지 4부작(Ring Cycle) 오페라를 모두 외웠고 <니벨룽겐의 반지>는 직접 지휘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어린아이였으니까 그런 시도를 할 기회는 당연히 없었지만 항상 지휘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각기 다른 이유로 지휘대에 서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독재자’의 입장에서 지휘대 위에 설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제가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길 바라지 않아요. 아마 가장 큰 약점은 너무 착하다는 것일 텐데, 저는 사람들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의 최선을 다할 것이란 믿음이 있습니다.”
지휘자 하면 일단 ‘카리스마’라는 말이 떠오르죠. 카리스마를 중시하는 것과 친화력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스타일 사이에는 오랜 대립이 존재했던 것 같아요.
“연주자로서 지휘자를 만날 때 그 지휘자가 저를 존중해주고 연주를 도와주는 지휘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그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가장 멋진 연주를 들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 스타일이죠. 누군가는 지휘대에 있을 때에도 제가 너무 실내악 연주자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흉내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거짓 흉내내기는 싫습니다. 지휘대에 서서 보면 오케스트라가 마치 하나의 팔레트같이 보입니다. ‘청각적 색’에 매우 깊게 반응하는데, 이런 다양한 악기의 조합을 보고 있으면 매우 황홀한 색채감을 느끼곤 합니다.”
지휘자의 길과 비올리스트의 길을 동시에 추구할 생각인가요? 그리고 클래식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지휘자는 누구이며,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휘자와 비올리스트의 길은 서로 다른 길이죠. 하나는 좀 더 단호함이 필요한 분야이고, 또 다른 하나의 길은 비올리스트로서, 실내악 연주자로서 부드럽게 타인과 호흡해야 하는 길입니다. 후자의 길이 제게 잘 맞는 길이긴 하나, 지휘자로 활동하는 또 하나의 도전도 해보고 싶은 거예요.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놓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지금까지 매우 많은 훌륭한 지휘자와 협연을 했습니다. 가장 최근 협연한 앤드류 데이비스 경도 훌륭하고, 마치 발레리노와 같은 블라디미르 유롭스키의 연극적 지휘(theatrical performance)도 압권이었습니다.
현대 지휘자들 중에서 좋아하는 지휘자는 앤드리스 넬슨의 ‘유능한 지휘’가 떠오릅니다. 제임스 레바인은 현존하는 지휘자 중 최고라는 생각이 들고요. 제게 그보다 더 위대한 지휘자는 없는 것 같아요. 통솔력있고 이해력이 깊으며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그밖에 열정의 화신 주빈 메타, 카를로스 클라이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조지 셀, 게오르규 솔티,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지휘자의 음악을 들으며 제 자신을 형성했습니다.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들 만큼 위대한 지휘자가 많지요.”
조수미 ‘넬라 판타지아’ 노래에서 숭고미 느껴
2012년 안산 다문화가족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합주 교육 프로그램에서 연주법을 가르치고 있는 용재 오닐.
안산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1년 동안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며 활동한 감동적인 봉사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했으며, 본인은 무엇을 배우고 또 어떻게 변화했나요?
“아이들은 더욱 건강하고, 행복해졌으며, 지금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아이들의 영혼 위에 구름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면 이제는 그런 구름이 많이 걷힌 느낌입니다. 여자 아이들 중 하나인 선우는 이전에는 매일 후드를 쓰고 다니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몇 달 동안이나 후드를 벗고 다니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변화입니다. 많은 아이가 매우 빨리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아이들은 눈에 보이게 달라졌고, 우리는 아이들의 친구들을 포함해서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 것이 확실합니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사용하기보다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까 늘 생각하게 됩니다. 개인의 성공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예술적 야망을 좇기보다는 공동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더 진실된 성공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물의 본성을 갖고 있는데, 그 본성을 키워 서로를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사회가 전체적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외음악회인 ‘파크 콘서트’를 통해 성악가 조수미 씨와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조수미의 음악적 개성과 능력, 음악에 대한 열정 등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릴 때부터 오페라를 사랑했죠. 제게 음악의 ‘음색’은 아름다운 일몰과 같은 것이었어요. 물론 시각적으로 자극을 받기도 하지만 음색은 정말 나를 취하게 합니다. 조수미는 정말 놀라운 발성기관을 가졌습니다. 묘사하기 매우 어려운데, 그녀의 소리를 듣는 순간 마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적 거장입니다. 똑똑한 성악가, 열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성악가는 많지만 그녀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어요.
거기에 우주가 선물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요. ‘넬라 판타지아’를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그녀가 고음부를 부를 때마다 저는 ‘숭고미’를 느꼈습니다. 보통 ‘숭고하다’는 단어는 잘 쓰지 않지요. 스카이다이빙을 하기 위해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그 끝없는 심연에 곤두박질 할 때의 그 순간, 그리고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과 같은 느낌이겠지요. 조수미의 고음을 들을 때 저는 바로 그 ‘숭고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하늘이 그에게 준 선물입니다.”
2014년 3월의 데뷔 10주년 콘서트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2012년 3월에도 ‘My Way’라는 이름으로 리사이틀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많은 일들을 돌아보는 리사이틀이었죠. 2014년 3월 리사이틀에서 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할 일과 함께 데뷔 후 지난 첫 10년 동안의 일을 함께 묶어 되돌아보는 테마입니다. 이 모든 것의 일부는 다시 강효 선생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강효 선생님이 했던 것처럼 저 역시 뛰어난 젊은 아티스트들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지난 7년간 앙상블 디토의 주자로 있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젊은 음악인과 교유하게 됐습니다. 디토는 아무래도 고정된 그룹이라서 디토에서 보여주지 못한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번 10주년 연주회에서는 많은 뛰어난 젊은 인재와 함께하는 공연이 될 겁니다.”
2014년 가장 비중 있게 추진하고 있는 공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3월에 10주년 투어가 끝나고 6월에는 벌써 디토의 시즌8 공연이 시작됩니다. 테마는 모차르트고, 임동혁과 클라라 주미 강을 포함한 뛰어난 연주자들과 함께 하는 훌륭한 음악파티입니다. 그 두 행사가 2014년 가장 큰 이벤트죠. 그리고 2015년에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아직 공개할 순 없지만 그때 놀랄 만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4년 2월에는 생애 첫 현악4중주 투어를 하게 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와 함께 유럽 데뷔를 할 예정이지요. 런던의 위그모어 홀, 파리의 루브르, 암스테르담과 옥스퍼드, 버밍햄에 이르기까지의 큰 투어공연입니다. 언젠가는 이 현악4중 주단과 한국에서도 공연할 수 있겠지요.”
가르치고 배우는 전통 계승의 사이클에 참여
우연한 기회에 비올라를 접하게 된 용재 오닐은 독주 악기로서의 비올라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창작곡에 대한 도전이나 새로운 음반발매 계획, 학생이나 신인들을 가르칠 스케줄은 확정되었나요?
“유럽 현악4중주 투어와 함께 새로운 곡의 녹음도 예정돼 있습니다. 존 하비슨은 엘리엇 카터 이후 미국 작곡계의 최고의 거장인데, 저를 위해 곡을 썼습니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위한 현악 3중주죠. 1월에 하모니아 문디(Harmonia Mundi)에서 녹음을 하고, 곧 초연을 하게 됩니다. 이 곡을 연주하기까지 무려 3년이나 기다려왔는데, 길이가 35분이나 되는 매우 큰 작품이에요. 제겐 커다란 선물과 같은 곡입니다.
그 밖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드레스덴의 투어가 예정되어 있고, 여름에는 ‘뮤직 아카데미 오브 더 웨스트(Music Academy of the West)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예정입니다. 15년, 20년 전에 했던 일들을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교수의 신분으로 하게 되는 것이죠. 가르치고 배우는 전통 계승의 사이클에 제가 참여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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