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혁론/타이젬
1. 기재奇才genius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은, 그 진의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철학을 일목요연하게 꿰는 사람과 저처럼 철학 자체를 불가지론의 영역이라 치부하고 두 손 들어 버린 '돌덩이' 사이에는 '청산과의 거리' 만큼이나 차이가 나겠지만, 그 의미는 '사물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지 못 한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에게 집이 없다면 잠자리를 찾아 밤거리를 배회해야 하는 것처럼, 사물도 자신의 집이 없다면 바람 부는 거리로 나앉아 지나는 사람들에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끝내 객사하고 말 게 뻔한 노릇이니, 사람이든 사물이든 편안하게 장수하려면 '집'이 필요한데, 사물의 집은 바로 '언어'라는 것이 그의 논조인 것 같습니다. 즉, 존재의 바로미터인 집이 사물에게 있어서는 언어가 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부연하자면, 사물이 집을 장만하기 이전에는 인식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가, 언어라는 집을 마련하고 나서 바야흐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자신의 가치를 획득하여 인식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스토리인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똥이 '똥'이라는 언어로 불리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황'이었다가, 똥이라는 이름을 갖고 나서부터 '사람이나 동물이 먹은 음식물을 삭이고 똥구멍으로 내보내는 찌끼'라는 가치를 얻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전문
마르틴 하이데거는 "시인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다."라고 시인을 높이 샀습니다. 그의 덕담에 화답이라도 하듯, 시인 김춘수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화두에 매달려 오랜 세월 천착해 왔습니다. 그가 그의 시론에서 '무의미의 시'라고 규정지은 일련의 작품이 그것이고, 그가 무의미로 이루어 낸 성과는 그에게 '실존주의 시인'이라는 영예를 안겨 주었습니다.
무의미를 뭐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미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를 버리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기존의 시가 이미지의 심벌(symbol)을 얻고자 했다면 무의미의 시는 이미지의 심벌을 파괴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그려냄에 있어서, 선행되는 일체의 판단(judgment)을 버리고, 그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그려냄으로써, 그 대상의 의미를 완전히 해체하자는 것이 무의미의 시가 추구하는 내막입니다.
김춘수 자신의 고백을 듣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다."
"무의미의 시는 관습이나 기성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꽃>은 연애시로 널리 애송되며 청춘남녀의 애간장을 녹이는 시이기도 하지만, 기실은 무의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입니다. 저는 <꽃>이 연애시로 각광받는 실정을 시인이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헤아려 본 적은 없지만, 독자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할 특권을 가지고 있고, 다의적으로 해석될수록 좋은 시라는 점에서 시인도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꽃>이 무의미를 얼마나 충족시키고 있는가는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지만, 저는 <꽃>에서 제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시에 대한 섭인견이 적잖게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꽃>의 어느 구석에서도 꽃의 '이미지'는 찾아 볼 수 없었으니까요.
<꽃>은 언어와 존재의 인과율(the principle of casuality)을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추출해내고 있습니다.
1연은, 이름을 불러 주기 이전의 꽃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합니다. 누구도 그것을 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바지도 아니고 치마도 아닌, 무용지물의, 정체불명의, 가치를 인식할 수 없는, 실재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2연은, 그것을 꽃이라는 이름을 불러 주고 난 후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꽃'이 되었습니다. 꽃은 '종자식물의 유성 생식 기관'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며 인식의 대상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언어가 꽃을 무에서 유로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꽃>은 꽃의 이름을 불러 주기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통하여,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언어가 그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꽃>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하며, 철학이 지향하는 것 이상을 문학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창혁론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그의 기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기재는 '세상에 드문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러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저는 그의 기재가 독보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기재라면 단연 조훈현이라고 말하고, 눈치 채기 어려우나 이창호가 발군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유창혁이야말로 우리가 그를 천재라고 수긍하는 그 이상의 기재를 타고났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꽃>에서 시인은, 꽃의 이름을 불러 주어 꽃에게 존재의 가치를 선물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누군가 자신의 이름도 불러 주기를 갈망합니다. 시인은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속내를 숨기지 않습니다.
나아가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우리 모두를 실존의 영역으로 끌어 들이는 배려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꽃>의 메시지는 '하나의 몸짓'이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인식의 대상으로 편입되기 이전의 '고독한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라는 것은 고독의 '스타트 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고독은 존재를 앞지른다는 점에서 근원적입니다. 근원적이라는 것은 운명론과 결부되는 것이니, <꽃>은 '모든 존재는 고독하다'라는 운명론을 담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물은 언어라는 존재의 집을 마련하면서부터 인식의 대상으로 편입되지만, 편입 그 자체가 '고독으로부터의 자유'까지 제공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존재를 얻었어도 고독은 여전하다고나 할까요. 존재를 얻었기에 더욱 고독하다고나 할까요.
어떻든 고독하다는 점에서는 달라진 것이 없으므로, 고독을 떨쳐내고자 한다면, 모든 사물은 너나없이 자신과 걸맞은 특정한 대상과 유대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 유대의 필연성을 시인은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서 유대의 대상은 어떤 형태일까요? 그것은 찾아오는 것일까요?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일까요?
저도 누군가 답을 제시한다면 따라가야 할 입장입니다. 다만 저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원한다거나, 역경과 고난이 닥쳐도 포기할 수 없다거나,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신의 눈에는 훤하게 보인다는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유대의 대상과 맞닥뜨린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길을 걸을 때 '하늘이 정한 사람'이라고, '숙명'이라고 일컬으니까요.
제가 유창혁의 기재를 독보적이라고 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바둑이 지금처럼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잡기로 취급당하던 - 평범한 소년은 바둑이라는 말조차 몰라도 전혀 억울할 일이 없던 시절에 이미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였습니다.
그가 대회에 참가하여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시상대로 다가가, 상품으로 마련된 바둑판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스윽 쓰다듬으며, 자기가 챙겨 갈 시상품에 미리 침을 발라 놓듯 시위를 벌이면,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안의 고수들이 똥을 지리는 얼굴로 돌변했다는 재미난 일화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바둑에 대하여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부할 곳이 없어 기원에서 공부하다 낡은 바둑책을 손에 든 어른과 찍은 그의 어린시절 흑백사진은 우수마저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마귀'들이 들끓는 전국대회에서 특별한 스승도 없이 공부한 소년이 우승했다면 더 이상 수사가 필요 없겠지요.
지금이야 기재가 발견되는 즉시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으므로 소년이 전국대회에 나가 우승한다 하더라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라지만, 시스템도 전무하고 스승도 없고 정보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나 홀로 공부한 소년이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던 기록을 세웠다면, 타고난 기재라는 말이 아니고서야 달리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외롭게 공부해 본 사람은 압니다. 공부를 하는 데 왜 좋은 환경이 필요하고 왜 훌륭한 스승이 필요한가를. 누군가 살짝이라도 손을 잡아 주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언덕도 혼자 오르려면 무르팍이 까지거나 손바닥이 벗겨져야 합니다. 재능이나 재주와 상관없이 누구나 습득할 수 있는 기본적인 데이터도 혼자 깨쳐 나가려면 앞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어린 시절의 체계적인 공부가 그 사람의 호흡을 얼마나 길어지도록 만들어 주는가를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마추어 고수들 틈에서 부대끼며 배운 어떤 것들이 공부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 가운데는 사관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도 넘쳐 나겠지만, 어린 시절의 체계적인 공부가 미술의 데생처럼 기량 발휘의 총체적 기반이 되리라는 사실 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3년이라는 세월을 허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뜻한 바가 있어 입산수도를 감행했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게 아니고 여건상 바둑을 등진 것이라면, 3년의 공백이 지난 후의, 그의 찬란한 행보는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조훈현과 조치훈은 제대로 된 시스템을 찾아 도일했습니다. 이창호는 최강의 스승 문하에서 분위기를 익혔습니다. 이세돌은 권갑룡바둑도장의 걸작입니다.
천재들의 기재를 두고 '뺑뺑이'를 돌리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유창혁이 다른 천재들보다 공부를 게을리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가 그토록 외롭게 공부했음에도 사관생도 출신 천재들의 체계적인 내공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것은, 그의 기재가 그만큼 출중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작금의 명암은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승부의 전방에서 서봉수를 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조훈현의 기재가 일군인 것은 틀림없지만, 저는 서봉수의 기재 역시 조훈현의 기재보다 못 하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봉수가 승부의 일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이면에는 혹시 '정규교육의 부재'로 인한 호흡의 단절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러나 저는 정규교육의 부재로 치자면 별로 나아 보이지 않는 유창혁의 줄기찬 호흡을 지켜보며, 서봉수도 한 번 쯤은 부활하지 않겠느냐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유창혁은 존재의 고독을 떨쳐 버릴 유대의 대상으로서 바둑을 선택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그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그의 타고난 기재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 자신이 진심으로 바둑의 길을 걷고자했을 거라고 믿어지지만, 그 이전에, 그는 그에게 바둑이 숙명일 수밖에 없는 기재를 타고났기 때문에, 먼 길을 돌아갔지만 끝내 바둑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당신은, 존재의 고독을 떨쳐 버릴 유대의 대상으로서, 이 세상의 그 무엇이 당신의 이름을 불러 주기를 바라십니까?
2. 심미안審美眼aesthetices discernment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
많은 사람 오고가는 을지로에서
떠나버린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 설운도 노래 <나침반> 일부
설운도는 이산가족상봉의 현장에서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노래로 떴지만, 그 자신이 가출한 여자를 찾아 거리로 나선 적이 있습니다. <나침반>이 그것입니다.
<나침반>은 애인인지 마누라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한바탕 난타전 끝에 그랬는지 쌀이 떨어지자 그랬는지도 확실치는 않지만, 여자가 보따리를 싸 줄행랑치자 화들짝 놀란 사내가 을지로로 나가, 길모퉁이에 서서, 이 쪽 저 쪽 사방팔방 실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두리번거렸으나 찾지 못하고, 어쩌다 닮은 사람 한두 명씩 오고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망연자실하고 만다는 애절한 스토리의 '뽕짝'입니다.
사내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자기가 어디로 가야 그 여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묻습니다. 종로냐고. 명동이냐고. 이도 저도 아니면 청량리냐고. 하하. 아시는 분은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낌새를 보아하니 저 밤이 다 새도록 재회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쇳가루' 떨어지면 도망가는 여자하고 살래요?
웃자고 한 이야기지만 그러나 이 단순한 가사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 쪽저쪽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비단 저 사내의 경우에만 해당되겠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비록 우리가 탐험가는 아니지만, 옳은 길, 진심의 길, 영광의 길을 제시해 주는 삶의 나침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노라고, 누군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 프로기사는 대국을 검토할 때마다 '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뇄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일화를 어떤 바둑책에서 단편적으로 접했는데, 이상하게도 끌리는 게 있더니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문장으로 손꼽히게 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바둑판이 돌아가는 품새를 꿸 줄 알아야 일류가 될 수 있다'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를 달리 말하면 '심미안이 있어야 한다'가 될 것입니다. 심미안이 뜻하는 바가 바로 '미를 식별하여 가늠하는 안목'이니까요.
'미를 식별하여 가늠하는 안목'이라는 말은 일견 평범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미의 기준이라는 게 너무도 광범위하고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름답다'가 '추하다'도 될 수 있고 '깨끗하다'가 '더럽다'도 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심미(appreciation of the beautiful)의 의미 - 일체의 연상을 배제하고 그 상태를 직시하여 순수하게 드러나는 미를 찾는다는 좁은 의미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그 상태에서 연상 가능한 모든 변형을 시도하여 드러나지 않는 미를 찾는다는 넓은 의미(저의 생각이니 동의를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사이의 갭까지 감안하자니, 마치 미로를 헤매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미를 식별하여 가늠한다는 것은 창조에 버금가는 영역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아담과 이브 이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이 창조와 심미안을 동시에 괴롭히는 말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똥오줌을 가릴 줄 아는 안목'이라고 쉽게 생각하며, 조만간 제 아들놈도 기저귀를 벗어 던지게 되면 심미안이 생길 거라고 믿는 팔불출입니다만.
'바둑판이 돌아가는 품새를 꿸 줄 알아야 일류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은 당연히 '바둑의 심미안'을 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둑판이 돌아가는 품새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꿰어야지만 '심미안이 뛰어나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반상에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은 그 성질이 어떠하든 '수읽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봐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속력행마가 지나는 자리마다 현찰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조훈현의 포석력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칠흑의 우물 속에서 숨어 있는 반집을 건져 올리는 이창호의 정산력, 불각의 급소를 전광석화처럼 포착하고 살쾡이의 발톱으로 날카롭게 할퀴는 이세돌의 전투력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수읽기라는 범주 안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 서로 다른 기와의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기본 골격은 수읽기라는 서까래이기 때문입니다. 바둑판 위의 모든 소프트웨어는 '읽기전용'이기 때문에 '수를 읽는다'라는 카테고리를 절대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수읽기가 승부 요인의 전부라는 뜻이냐?"고 묻는다면 제 입장이 곤란해 질 것 같습니다. 승부에는 수읽기뿐만 아니라 감각이나 직관 혹은 운이나 기세라는 말처럼 데이터로는 읽어낼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풍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풍을 '그 자신에게 능력 발휘의 가장 큰 시너지를 제공하는 독자적인 스타일' 쯤으로 이해한다면, 기풍 또한 데이터로는 읽어 낼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 자명해 집니다.
저는 그것들을 수읽기라는 내용물을 담는 용기(도구가 아닙니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의 관계라고나 할까요. '음과 양의 조화'라는 말처럼, 바둑도 읽을 수 있는 것과 읽을 수 없는 것의 조화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읽을 수 없는 것의 존재 가치가 읽을 수 있는 것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저는 바둑의 심미안을 '국면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눈'이라고 정의하면 그럴싸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데이터로는 읽어 낼 수 없는 부분이지만, 승부의 끈을 팽팽하게 끌어당기며 수읽기에 넓이와 깊이를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눈이라고 하면 좀 더 정확해 지는 것 같습니다.
위험을 감지하는 후각, 방향 설정의 판단력, 정산을 벗어난 착점의 인지력, 아무에게도 통사정하지 않고 줄행랑 친 여자가 숨어 있는 곳으로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우스개가 아니고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위가 좋은 예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길을 걷는다.
떨어지는 빗방울마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당해서는 안 될 것이기에.
-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살피기 위하여> 일부(번역/흰고독)
'누이 좋고 매부 좋고'로 정형화 된 수의 몽똥그림을 정석이라고 치자면, 정석 이후의 착수에서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고 고민하는 것은 프로도 매한가지인 모양입니다. 아마추어가 몰라서 갈피를 못 잡는다면, 프로는 너무 많이 알아서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습니다. 바둑의 깊이가 들어갈수록 미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석 이후에, 혹은 정석 이후의 이후에, 다시 혹은 정석 이후의 이후의 이후에(포석이라고 하기에는 늦고 중반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그런 시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한 수에 봉착하였을 때, 프로의 착수 기준은 대략 세 가지 같습니다.
급한 자리와 큰 자리와 대세점이 그것입니다.
급한 자리는 급소처럼 얻어맞으면 판 전체가 뒤틀리는 자리일 것입니다. 큰 자리는 말 그대로 다량의 현찰이 보장되는 자리일 것입니다. 대세점은 서로 품을 넓히는 곳이나 두텁게 꼬부리는 곳처럼 그 형태는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지만, 바둑판 전체의 헤게모니를 좌우하는 명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급한 자리는 흔히 절대의 자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석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필연적인 코스라고 여겨지므로 논외로 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큰 자리와 대세점은 선택의 기로로서 괴로움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프로들도 그 판단의 정확성에 혼선을 빚는 것은 흔한 일인 모양입니다. 큰 자리에 대한 유혹은 대세점의 간과로 연결될 소지가 다분하고, 대세점에 대한 집착은 하우스 부족으로 연결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크다면 대세점을 외면해도 좋을 만큼 크냐?' '대세점의 위력이 눈앞의 현찰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냐?'하는 갈등이 그들을 카오스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은 바둑의 등뼈를 형성하면서 앞날의 길흉화복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서 크게 망가지면 십중팔구는 '연탄불 꺼지는' 코스로 바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승부의 길은 멀고, 끝내기에서 뒤집어 질 수도 있는 것이 승부이지만, 결과를 떠나 과정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바둑의 질을 저울질하는 본보기로도 이 시점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미안은 바둑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작용한다고 여겨지지만, 이 시점에서 특히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반상에 돌이 몇 점 없는 허허벌판이거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는 전투의 와중이거나, 끝내기에 들어가 동전을 세는 파장 무렵에서는 미를 가늠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창혁은 이 시점에서 확신을 가지고 처신하는 승부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어느 쪽으로 방망이를 휘둘러야 공을 때릴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선구안이 대단히 발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대세점을 차지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가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라면 하우스로 대세점의 위력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가 대세점을 차지하는 경우라면 하우스를 포기하고 천하를 굽어보는 것이 승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저는 그가 이 시점에서 '바둑을 버렸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방향설정의 심미안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그는 큰 자리와 대세점의 선택이 여의치 않을 경우라면 '동시패션'이라는 특유의 초식을 선보입니다.
'동시패션'이란 고스톱에서 같은 패가 바닥에 두 장 깔려 있을 때 쳐서 먹고 넘겨서 먹고 동시에 쓸어오는 차원 높은 테크닉을 일컫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우연이거나 요행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판판이 '동시패션'으로 짭짤하게 챙겨가는 고스톱의 귀재가 따로 있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은행에 근무하는 제 친구 말에 따르면, 주택을 매매하며 매입자가 담보대출을 받고자 할 때, 채무인수, 소유권이전, 근저당설정 등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일컫는다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집의 가치로도 떨어지지 않으면서 대세까지 아우르는 착점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동시패션'이 반상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저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되겠습니다만, '이적의 수'처럼 그 영향력이 전판에 걸쳐 은근하게 미치는 수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동시패션'은 '유창혁류'라고 불리며 흉내 낼 수 없는 심미안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그의 '동시패션'은 '느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느슨하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압박감이나 중압감이 다소 덜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심미안은 느슨한 면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는 타이트하게 따라붙기보다는 한 칸이나 두 칸쯤 뒤로 떨어져 주시하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손으로 잡으려 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잡으려 한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저는 이 시점에서 그가 대세를 잃거나 하우스 부족으로 시달렸다는 소리를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동시패션'의 성과는 충분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괴물> 후지사와 슈코는 "바둑이 50수로 끝나는 게임이라면 내가 최강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합니다. 저는 '바둑이 50수로 끝나는 게임이라면 유창혁이 최강이다'라고 장담하기를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바둑의 기술을 논할 정도의 실력은 못 되지만, 대국보를 보면서 누가 대세를 이끌었는가를 보는 눈은 조금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창혁이 50수 이전에 리드를 잡아 단 한 번도 리드를 놓치지 않고 승리한 대국보를 꽤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대국을 일컬어 명국이라고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도 불어 가며 마시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라는 말은 '말년병장'의 '안전지상주의'를 풍자한 군대용 우스개입니다. 전역을 목전에 두었으니 체할까 물도 후후 불어 가며 마시고 행여 철모라도 깨질까 떨어지는 낙엽도 슬금슬금 피해 다닐 정도로 안전을 고집하겠다는 발상은, 우스울 뿐만 아니라 여간 기발하지 않은 게 아니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낯설게 하기'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공부하다가 그의 한 시에서 예의 발상과 흡사한 구절을 발견하고는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길을 걷는다' '떨어지는 빗방울마저도 두려워하면서' '빗방울에 맞아 살해당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어떻습니까? 판박이 아닙니까?
이 시의 앞부분은 한 여자가 한 사내에게 '나에겐 당신이 필요하다'고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포로로 잡힌 사내가 길을 걸을 때에도 떨어지는 빗방울에 맞아 살해당할까 두려워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가 되는 셈입니다. 이 시의 내막은 좀 더 복잡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나면 몸조심에 환장하게 되는구나'라고 받아들이고 시침 뚝 떼도 시비 거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내용이 그러니까요.
사랑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심정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하늘이 높아 보입니다. 땅은 넓어 보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됩니다. 필요 이상으로 관대해 집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년병장이 아니거나 사랑의 포로로 잡히지 않았더라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생일는지도 모릅니다. 존재라는 것은 늘 시한폭탄을 품속에 안고 사는 것처럼 위태로운 것이니까요.
승부사들이 반상의 길을 걸을 때 얼마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걷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입니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라는 말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처와 영광의 궤적이 서로 닮아 있다는 뜻도 되지만, 바둑이나 인생이나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더욱 리얼한 것 같습니다. 반상의 어느 구석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에 승부사들은 걸음을 떼는 그 순간부터 안전지상주의자로 돌변합니다. 오죽하면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건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유창혁의 걸음은 부드럽고 명료합니다. 마치 자기는 모든 함정을 다 꿰고 있다는 듯이. 그게 아니라면 자기는 어떤 함정에 빠져도 능히 헤쳐 나갈 자신이 있다는 듯이. 그가 그토록 위험한 길을 그처럼 유장하게 걸어 갈 수 있는 것은 그의 심미안이 그만큼 출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살아있는 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끝없는 도전 속에서, 그의 심미안은 바둑의 신이 그에게 제공한 천혜의 자원이자, 그를 영광의 길로 견인하는 나침반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창혁의 애칭은 <일지매>입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그의 다른 애칭도 그를 정확하게 비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운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일지매> 쪽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일지매>의 출처는 고우영의, 동명의 장편만화입니다. 일지매는 조선시대의 참판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입니다. 그는 강보에 싸여 강물에 버려지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청나라로 입양됩니다. 그 후 귀국하여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을 돕는 의적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이른 봄 매화나무 아래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일지매라고 이름 지어졌습니다. 그는 재물을 턴 자리에 매화가지 하나를 남겨 놓고 사라짐으로써 그의 존재를 각인시킵니다.
그의 애칭은 두 가지 사실에서 착목하여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일지매의 미모가 대단히 뛰어나다는 점이고(그는 기생으로 변장하여 미인계를 펼치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지매가 검술, 창술, 표창술, 변장술, 권법, 축지법 등 모든 무술에 능한 '한국판 닌자' 이른바 '자객'이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말진 부디 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소이다.
반타고 꺼질진댄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 이은상 <사랑> 전문
그가 과연 일지매의 이미지와 흡사한가 여부를 따지는 것은 계면쩍은 부분이지만, 그의 얼굴이 승부사로서는 드물게 부드러운 동안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승부사가 꼭 우락부락하거나 날카롭거나 선이 굵은 얼굴이어야 한다는 법은 육법전서 어디에도 없고, 오히려 승부사 대부분이 준수한 얼굴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는 얼굴만 놓고 보면 정적인 느낌이 강해서, 바둑문외한에게 그가 공격의 대명사로 통하는 천재기사라는 사실을 납득시키고자 한다면 꽤 애를 먹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작자는 정중동을 표현하기 위하여 일지매를 여성취향적인 인물로 설정했을 터이지만, 그 이미지와 흡사하게 맞아떨어지는 승부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이한 것 같습니다. 그의 기풍과 일지매의 신출귀몰하는 무술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본령은 공격입니다. 그는 공격이라는 위험부담이 큰 분야를 개척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 파이터입니다. 그는 공격의 허점이 보이지 않는 - 도저히 공격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돌을 절묘한 수순으로 엮어 공격하는 재주가 비상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늘 공격을 생각하고 바둑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공격을 위한 공격을 하게 되었다. 급기야 스텝이 엉켜 바둑을 그르치게 되었다."라고 고백하였듯이, 그는 공격을 절대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애칭과는 달리 그가 '호전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공격 바둑의 계보로는 <살인청부업자> 가토 마사오가 있고, <철녀> 예내위와 <쎈돌> 이세돌이 있습니다.
공격이라면 떠오르는 심상은 격렬함입니다. '살을 떼 주고 뼈를 깎아 온다'라는 말처럼 공격이라는 단어 속에는 온 몸을 불살라 죽기 살기로 '쇼부'를 치겠다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공격이라는 단어 뒤에는 일변도라는 말이 붙어야만 제격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가토 마사오는 노골적인 대마 사냥을 서슴지 않았고, 예내위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상대 돌의 마지막 한 알까지 다 잡아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몰아붙였고, 이세돌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맞받아치며 '싸울 만하니까 싸운다'는 '공격지상주의'를 천명하고 파이팅 넘치는 기질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번 불타기 시작하면 재만 남을 때까지 다 타야지, 반타고 꺼지려 하느니 차라리 생나무로 있는 게 낫다는 이은상의 <사랑>처럼,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마땅하고, 공격을 하다가 멈추려면 공격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강성 기류가 공격이라는 단어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습니다.
공격 바둑의 계보를 이어온 기사들은 비교적 공격이라는 단어가 닦아 놓은 루트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창혁은 공격의 대명사로 불리며 실제로 공격을 통하여 항서를 받아 내는 행보를 거듭하여 왔지만, 그가 공격이라는 단어가 닦아 놓은 루트를 충실하게 걸어 왔느냐하는 점에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승과 패라는 결과의 측면에서 보면 '공격을 선호한다'는 것도 단지 하나의 방법론일 뿐입니다. 바둑을 공격과 수비라는 상대적인 두 관점으로만 보더라도 공격이 수비보다 웃질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는 말은 기세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지, 공격하는 입장이 우월하다거나 방어는 생각하지도 말고 무조건 공격하고 나서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유창혁은 냉정한 자기 성찰을 하는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공격의 흐름을 탈 줄 아는 기재를 타고났지만, 쾌도난마식의 공격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걸려들었을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공격에 실패했을 경우 알거지가 되고 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그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노도가 밀어닥치듯 급박하고 전면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아웃 복서가 링사이드를 돌며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리듯 서서히 데미지를 입히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공격이 약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스트레이트가 세계를 정복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스트레이트는 훅이나 어퍼컷처럼 한 방에 상대를 보내지는 못하지만, 누적되어 자빠질 경우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훅이나 어퍼컷은 걸리면 한 방에 골로 가게 만들지만, 들어가다 상대에게 카운터블로라는 역습의 기회를 줄 우려도 있고 정확하게 꽂히기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는 잽과 스트레이트로 부지런히 가격하여 다리의 힘을 빼앗고, 시간이 흐르면 가만히 놔두어도 저절로 주저앉게 만드는 지능적인 플레이를 펼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유창혁의 완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제 3회 <롯데배한중교류전>에서 위빈과의 대국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초반에 위빈의 교묘한 '네다바이'에 그가 말려들어 한 귀의 대마를 몽땅 죽이고 필패의 국면이 되었습니다. 골병이 들어도 단단히 든 것입니다. 곧 던져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진장 '끓기라도' 한 것처럼, '뗑깡'을 부려 뒤집기를 노리다가 미수에 그치면 바둑만 지는 것이 아니라 '쪽팔림'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이중고를 무릅쓰고, 초강경 수단으로 '다구리'를 붙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잽과 스트레이트를 버리고, 안쪽으로 바싹 파고들어 상체의 리듬만으로 훅과 어퍼컷을 무차별적으로 날리며 전성기의 퍼넬 휘태커를 연상케 하는 파워와 스피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빈은 부자 몸조심을 하느라고 시종일관 후진기어만 집어넣었습니다. 하하.
결과는 유창혁의 역전 KO승(만방입니다!)으로 끝나며 '선작50가필패'라는 루머가 루머만은 아님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물론 위빈의 부자 몸조심이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거라고도 볼 수 있지만(이와 비슷한 코스의 역전패가 가끔 나오는 걸 보면 조훈현이 유리할수록 더욱 강하게 부딪치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비록 '더욱 강하게'가 또 다른 역전패의 불씨가 된다 하더라도), 유창혁이 강완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차이만 더 벌어졌을 뿐이지 결코 역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력에서 결코 밀리지 않는 그가 밀착 보디 체크를 지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공격 그 자체로 대마의 숨통을 끊어 놓는 것보다는, 대마가 몰리는 과정에서 떨어뜨리는 떡고물을 챙기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대마가 몰리다 보면 초가삼간 다 버리고 목숨만 부지해서 야반도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주인 없는 빈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고 찹쌀떡을 먹으며 동지섣달을 따뜻하게 보내려는 심보인 것 같습니다. 시쳇말로 때려죽이자는 게 아니라 굶겨 죽이자는 것입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청명에 뒈지나 한식에 뒈지나' '맞아 뒈지나 굶어 뒈지나' '뒈지는' 건 마찬가지가 되겠지만, 아무래도 굶어 죽는 쪽이 더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야 할 테니까 열 받는 것도 더할 듯싶습니다.
그는 칼을 뽑지만 휘두르지는 않고 저만치 서서 외칩니다. "목숨을 내놔라!"가 아닙니다. "인절미와 연탄을 내놔라!" 입니다. 이것은 대마의 숨통을 직접 끊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의 상황까지 고려한 고난도의 전술 같습니다.
대마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반상의 모든 집은 초토화되기 마련입니다. 살려주면 외려 하우스 부족으로 코피 나기 십상입니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상대는 호시탐탐 되치기를 노릴 것입니다.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묘수가 튀어 나올는지 모릅니다. 묘수 한 방에 역전되는 바둑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는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바둑을 두고자 하는 것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공격이라는 그의 기재와 유연함이라는 그의 기풍이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고뇌의 절충안 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의적 일지매는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지만 그들의 목숨만은 살려줍니다. 그는 대상에 따라 '쌔비는' 방식을 달리하며 나아갈 자리와 물러날 자리를 철저히 가립니다. 그는 경쾌하고 자유로우며 화사합니다. 그는 모든 무술에 능한 자객이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드러나는 걸 원치도 않습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기풍과 '기똥차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유창혁은 실리에 대하여 첨예한 감각을 타고난 것처럼 보입니다.
반상의 파노라마가 아무리 변화무쌍하더라도 결국 종착역은 하나입니다. 집! 정산에 관한 한 이창호가 '천상천하유아독존'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부처가 세상에 나오며 울음을 대신한 일성이라는데, 저는 이창호가 태어나면서 '응애응애응애' 우는 대신에 '집집집'하고 운 건 아니었을까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산에 관한 한 유창혁도 결코 만만치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창호처럼 정밀하다거나 끝내기가 강하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저는 그가 실리를 '땡기는' 기술에 있어서 만큼은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의 실리에 대한 기량이 가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마가 경쾌하고 화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행마의 기본 축은 '두터움'입니다(두터움은 구상과 비구상의 중간 쯤에 위치하는, 조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영역이 아닐는지요. 바둑의 고찰이라는 측면에서 누군가의 심층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두터움의 실체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두터움 이퀄 이창호'라는 공식은 불변이지만, 저는 유창혁이야말로 두터움을 제대로 아는 승부사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두터움이 '장래에 집을 보장받는 가장 안전한 투자'임은 이창호에 의하여 입증된 바가 있습니다. 이창호가 두터움을 집짓기에 활용한다면 그는 공격과 집짓기라는 양수겸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두터움을 활용하여 공격에 나서지만 최종 목적은 현찰인 것입니다. 이창호가 숨어있는 집을 찾아내는 스타일이라면, 그는 돌과 돌의 역학관계에서 집을 쥐어짜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행마가 부드럽고 명료하다고 하여 그가 모양을 중시한다고 오해하기 쉬우나, 그는 모양의 구애를 거의 받지 않는 편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일본 바둑을 "미학에 집착한 나머지 탄력과 임기응변이 떨어진다."라고 평한 데서 드러나듯이, 그의 바둑도 '실전적'이고 탄력적인 한국류에 비교적 충실한 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유창혁에게 있어서 '실전적'이라는 것은, 어떤 자세에서도 펀치를 날릴 수 있는 공격력뿐만 아니라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는 스타일이 구겨지는 것도 불사한다'는 의미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황무지를 괭이질 몇 번에 옥토로 개간하는 놀라운 농사 기술을 여러 차례 선보인 바가 있습니다. 바둑 평론가 박치문이 '누더기를 기워 비단을 만드는'이라고 평한 이 농사 기술은, 그가 집에 대하여 얼마나 실전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성이가 낫을 간다
풀 한 포기
자를 수 없을 만치 무디기만 한
낫날이
살점뿐 아니라
통뼈라도 단숨에 잘라버릴 만큼
날카로워졌음에도,
씨발눔 씨발눔 연신 씨부렁거리며
물 대신
눈물로 낫날을 적셔
삭 삭 삭
낫을 갈고 있다
- 박완호 <낫> 전문
그는 큰 승부에 강합니다. 세계대회를 우승하려면 그에 걸맞은 실력에 운도 적절히 따라 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세계대회에서 승부의 추를 잡고 흔드는 또 하나의 변수가 '심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국 상대가 친숙한 경우라면 따질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기보와 동향은 정보를 통하여 얼추 접했다고 하더라도, 승부 호흡을 직접적으로 느껴 보지 못한 '아웃사이더'라면 심장 싸움이 크게 작용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는 세계대회의 단골 우승자였습니다. 그의, 심장의 크기를 재고자 자를 찾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사람은 큰 나무 밑을 지나가더라도 성장하는 법이니, 큰 승부를 거듭해야만 심장도 강해진다는 '캐리어론'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캐리어론의 한계는 명확해 보입니다.
세계대회 결승에 다섯 번이나 얼굴을 들이민 창하오가 결정적인 찬스라 여겨졌던 제 6기 <삼성화재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코피 난 것을 두고 캐리어의 부재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제압하고 올라갔으니 실력이 부족하다고 믿기도 어렵습니다. 기세로 쳐도 더 이상의 상승기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유리한 바둑을 연거푸 역전 당했습니다. 심장싸움에서 지고 들어가,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리다 결국 되치기를 당해 코피 나고 만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근자에는 우리 기사의 허리 층이 두터워져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기보다 세계대회 출전권을 확보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계대회 결승 진출자에 비추어 그 타이틀의 향방은 극히 일부의 기사에게만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챔피언을 꿈꾸는 승부사라면 강한 심장과 오기와 근성으로 대성이처럼 부단히 낫을 갈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큰 승부일수록 힘을 내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강자를 만나면 움츠러들고 배당이 클수록 떨리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는 반대로 더 신바람 내며 승부하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상금이 많은 시합일수록 승부욕에 불탄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강심장의 사나이라는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막장에 가고 싶다. 거기 가서 내 삽을 찾고 싶다. 탄가루 묻은 내 도시락통, 땀에 쩔은 수건과 검은 작업복, 거기 그냥 두고 온 내 도구들을, 수직갱으로 하강해 가던 검은 나를 찾고 싶다. 탄 더미 속에 반짝이던 두 눈, 하이얗게 빛나던 치아, 쏴아 쏴아 불어오던 원시 밀림의 바람 소리, 거대한 두 발 짐승의 발자국 소리, 나는 막장에 가고 싶다. 내 삽과 곡괭이, 그리운 내 도시락, 땀에 쩔은 작업복. 오늘 나는 막장에 가고 싶다. 거기 가서 내 삽을 찾고 싶다
- 이건청 <삽> 전문
그는 기복이 심한 편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고뇌형이냐 감각형이냐를 따지자면, 이창호나 이세돌의 경우처럼 그 경계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감각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복이 심하다는 것은 감각형 천재의 일반적인 특징에 부합합니다. 고뇌형 보다는 감각형 쪽에 천적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복 안에는 객관적인 데이터 상으로 도저히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는 상대에게도 코피 난 경우가 제법 들어 있어서 그의 집중력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그는 덜컥수와 착각의 악몽에도 적지 않게 시달려 왔습니다. 제 5기<삼성화재배> 최종국에서 요다 노리모토에게 99.99% 이긴 바둑을 막판 실족으로 역전패 당하고, 홀로 비 오는 밤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는 일화로 대표되는 그의 덜컥수와 착각 역시 그의 집중력에 일말의 불안을 갖게 합니다.
저는 후반에 두드러지는 그의 집중력 부족은 그가 어린 시절에 체계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3년의 공백기간을 가졌던 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어린 시절에 사관생도식 교육을 받고, 3년의 공백기간이 없이 공부에 전념했더라면?
문득 인간의 잃어버린 원시성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삽>은 인간의 잃어버린 원시성에 대한 그리움을 절박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승부사에게서 인간의 원시성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세돌이 '빗방울에 맞아 살해 당'할까 두려워하기는커녕 우박이 떨어지든 눈보라가 몰아치든 '되빠꾸치고' 대미를 향하여 돌진하는 것도 원시성입니다. 이창호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폭하지 않고 인내의 화신이 되어 수모와 굴욕을 견디며 권토중래를 꿈꾸는 것도 원시성입니다.
제가 유창혁이 '어린 시절에 사관생도식 교육을 받았더라면?'이라고 가정했지만, 어쩌면 그따위 가정은 전혀 필요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천재기사로서 충분히 바둑의 역사를 새로 써왔습니다. 설령 그에게 '어린 시절에 3년의 공백기간이 없었더라면?' 이라는 가정이 유효한 가정이 되더라도, 누군들 그가 불굴의 투혼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고 바둑의 역사를 더욱 새롭게 써 나가리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책 이야기
최근에 저는 동네 헌책방에서 진귀한 책 한 권과 만났습니다.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무희>에서 최승희의 예술 세계를 다루었다고 하여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명인>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명인>은 소설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명인>은 소설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관전기입니다. <명인>은 일본 최후의 명인이라 불리는 슈사이 <본인방>의 현역 은퇴 대국을 세밀하게 기록한 관전기인 것입니다.
슈사이의 대국 상대는 기타니 미노루(<명인>에서는 오다케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입니다. 그는 조치훈의 스승입니다. 후에 그는 조훈현의 스승인 세고에 겐사쿠와 더불어 일본 바둑의 양대 산맥을 이룹니다. 기타니 미노루와 세고에 겐사쿠는 일본 바둑계 '도제수업'의,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들이 타계한 이후 도제수업의 맥은 끊겼고 일본바둑도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슈사이와 기타니 미노루의 대국은 장장 6개월 동안 두어졌다고 합니다. 저라면 지겨워 죽었을 것 같습니다. 불혹을 눈앞에 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그러나 결코 지겨워하지 않고 이 대국의 전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명인>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슈사이 명인의 장엄한 최후의 현장에 증인으로 나서서 필력을 다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슈샤이는 은퇴한 이듬해에 고인이 되었습니다. <명인>은 슈샤이의 죽음을 모티브로 작품화 되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슈샤이의 죽음에 보통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무라카미라는 서술자가 되어 <명인>을 발표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하니까요.
저는 <명인>을 읽고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하품만 나오다가 끝내 잠이 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슈샤이 명인에 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깊은 애정은 신뢰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문학과 바둑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우리도 이런 종류의 관전기가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역사는 일천하지만 우리에게는 불세출의 천재들이 즐비합니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서봉수, 그리고 유창혁. 저는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꿀릴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보의 전달에만 머물지 않고, 승부사의 애환과 기백과 혼을 담은 정통 관전기가 그립습니다.
'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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