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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수필 작법, 글쓰기 , 기타 ] 비평 수필이론 등

값진 수필

by 자한형 2023.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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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수필/김태길

수필은 사실개념으로서 정의할 수도 있고 가치개념으로서 정의할 수도 있다. 사실개념으로서 정의할 때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모두 수필의 범위 안에 포함된다. 그러나 가치개념으로서 정의할 때는 오직 수필다운 수필만이 수필로서 인정된다.

수필을 수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수필다운 수필의 기준을 객관적으로 정립하는 일은 매우 소망스러운 것이나, 여기에는 철학적인 어려움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시도하는 것은 수필다운 수필의 객관적 기준을 정립하고자 함이 아니라, 주관을 배제할 수 없는 개인적 견해를 정리하는 일이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수필은 어떠한 수필인가 하는 이야기에 가까운 것이 될 것이나, 남들이 좋아하는 수필에 대한 공감도 어느 정도 반영하고자 한다.

창작 활동이 일반적으로 그렇거니와, 원칙적으로 작가의 체험을 소재로 삼는 수필 작품은 인간의 자기 표현으로서의 성격이 현저하다. 이를테면 수필가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표현한다. 수필도 풍경 또는 남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을 수 있으며, 반드시 자기 자신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 아닌 것을 소재로 삼는 경우에 있어서도 수필가는 자연과 인간을 보는 자기의 주관을 표명함으로써 자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뜻에서, 수필은 내가 나 자신을 형상화하는 언어 활동의 대표적인 것이다.

표현되는 대상으로서의 나와 표현하는 문필가로서의 나는 수필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이다. 따라서 수필의 우열은 표현되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우열과 표현하는 문필가로서의 나의 우열의 결합에 의하여 결정된다. 만약 표현되는 대상으로서의 나의 사람됨이 탁월하고 또 표현하는 문필가로서의 나의 문장력도 탁월하다면, 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수필은 더없이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작품에 반영되어 수필을 빛나게 하는 탁월한 인품이란 반드시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상상력, 해박한 지식과 심오한 사상, 뛰어난 예술 감각, 뚜렷한 개성 등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탁월성은 어느 것이나 좋은 수필을 쓰는 데 더 보배로운 자산이 될 것이다. 특히 뛰어난 해학은 값진 수필을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되는 성격 특질이다.

수필가가 자기의 인품이 탁월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동기를 따라서 글을 쓸 때, 그 작품은 결정적으로 실패한다. 성현군자연한 글뿐만 아니라 자신의 박식이나 견문을 과시한 글은 독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의도함 없이 은연중에 작가의 인품이 작품에서 풍길 때 독자는 깊은 공감에 젖는다.

자신의 결함 또는 실패담을 솔직하고 꾸밈 없이 다룸으로써 좋은 작품을 얻을 경우가 있다. 솔직함은 그 자체가 미덕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결합하면 해학을 낳기 때문이다.

수필에 있어서 인품과 함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문장력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문장력'이라는 말은 구상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자신의 체험과 사색을 글로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의 능력을 통틀어서 편의상 문장력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어떠한 인품이 탁월한 인품이냐에 대해서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듯이, 어떠한 문장이 좋은 문장이냐에 대해서도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다. 인품에 있어서나 문장에 있어서나, 탁월성의 기준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인간성과 문화적 전통일 것이다.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글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 뜻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미 전달이 잘 되지 않는 문장은 원칙적으로 좋은 문장이 아니다. 다만 높은 경지에 이른 작가는 더러는 탁월한 독자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글을 쓸 특권을 갖는다.

독자의 미적 심금에 와 닿는 문장은 좋은 문장이다. 다만 어떤 독자층의 미감을 매혹하느냐가 문제이다. 초보적 독자들의 미감과 잘 어울리는 문장을 세상에서는 흔히 미문이라고 부른다.

독자에게도 느끼고 생각할 기회와 여지를 남겨 놓는 글이 좋은 글이다. 모든 말을 다 해 버리면 독자는 지루함에 빠진다. 함축은 수필의 생명이며, 함축을 위해서는 문장이 간결해야 한다. 군소리는 글을 죽인다.

되도록 여러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글이 좋은 글이다. 자기 혼자의 정취나 감흥에 젖어 제 멋에 도취한 글은 소수의 독자에게만 매력이 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멋있는 글을 쓰고자 꾀하면 도리어 저속한 글이 된다. 평범한 듯하면서 평범하지 않은 글이 좋은 글이다.

자기의 성별·연령·지위 등에 따라서 각자에게 적합한 문체는 다를 수 있다. 소재와 주제에 따라서도 그것과 잘 조화되는 문장이 다를 수가 있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작가에게 고유한 문체가 형성된다. 그러나 이 형성은 자연의 조화에 맡길 것이며 성급하게 의도할 과제는 아니다.

품위가 높아야 한다. 문장은 수필의 품위를 좌우함에 있어서 결정적 구실을 한다. 야비하거나 표독한 표현은 글의 품위를 깎는다. 재주를 앞세워도 품위는 떨어진다.

수필은 여운이 길어야 좋다.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려 버리면 글은 여운을 잃는다.

수필에서 삶의 교훈을 얻는 것은 보배로운 일이다. 그러나 작가가 목소리를 높여서 설교를 꾀해도 좋은 것은 아주 특수한 경우에 국한된다.

수필에 있어서 비판 정신은 글을 돋보이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비판은 공정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분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훈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비판도 직선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것이 수필에 어울린다.

같은 작가의 인품에도 여러 측면이 있고, 그의 글 솜씨에도 때에 따르는 기복이 있다. 그리고 한 편의 작품 속에 한 작가의 인품의 모든 측면과 문장력의 전체가 실릴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이 생기게 되는 사유 가운데서 중요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의 문장력의 차이는 근소한 차이에 그친다. 수필의 우열을 결정함에 있어서 보다 큰 차이의 근원이 되는 것은 체험과 사색을 포함한 작가의 인품일 것이다.

우수한 수필을 쓰기가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탁월한 인품을 함양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