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쓰기를 위한 단상(斷想) /김치홍
1. 꿩 잡는 게 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다. 제 구실을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방법이야 어떻든 목적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기에는 치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목표부터 이루자는 뜻이 내포되기도 한다. 따라서 꿩을 잡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꿩을 잡을 수 없으면 매를 풀어 놓으면 된다. 매가 아무리 멋있고 용맹스러워도 꿩을 잡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따라서 매는 꿩을 잡는 과정에서, 꿩이 날아가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든가, 너무 높이 날았다든가, 또는 꿩의 색깔이 별로 좋지 않다든가, 늙었다든가 그래서 육질이 별로 좋지 않을 거라든가, 또는 누가 잡다가 놓친 것이라든가, 맛이 없게 생겼다든가 하는 것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매의 일이 아니라 매를 부리는 사람이 판단하고 평가할 일이다. 따라서 매는 꿩을 골라잡을 필요가 없고 꿩 잡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꿩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잡을 필요도 없다. 그냥 잘 잡기만 하면 된다.
작가는 좋은 글을 쓰면 된다. 이론이야 어떻든 누가 뭐라고 시비를 걸어와도 누가 읽어도 감동하는 좋은 글이면 된다. 이론은 중요하지 않다. 이론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론이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연구하거나, 어떤 글이 왜 좋은 글인지, 그 이유를 밝히는 사람이 해야 할 목적이다.
남의 글의 좋고 나쁨, 훌륭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평가하고 잘 쓰고 못 쓰고를 가려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은 비평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므로, 시인은 시를 쓰고,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 되며, 수필가는 수필만 쓰면 된다. 평론가는 남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면 된다. 시나 소설이나 수필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시, 소설, 수필이면 된다. 글은 어느 독자가 읽고도 '아 참 잘 썼다. 참 좋다'라고 한다면 좋은 글이다. '왜 좋은 글이냐'는 물음에 독자가 답현을 선뜻 못할지라도, '읽고 나니 그냥 좋다'라고 하면 된다. 왜 좋은 글이냐의 답은 비평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요리사는 맛있고 좋은 음식을 만들면 된다. 그 음식이 영양소 중에서 어느 것이 많고 적어서 몸의 어느 부분에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는 것은 요리연구가의 몫이다.
참고로 어느 글이 좋은 글인가, 왜 좋은 작품인가를 따지고, 가치를 평가하는 영역은 비평의 몫이다. 비평은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작품을 읽어내는 높은 지적 수준과 치밀한 분석 능력과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서 철학과 역사, 심리 문화현상 등을 이해하고, 세계관과 시대정신이 분명한 지성을 소유하고, 그것을 작품을 통해 인간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비평 작업을 통해 문학적 가치질서를 세우는 일이 피병이다. 결국 이 비평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학사에 남는 작품을 골라내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비평은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행위의 글쓰기이지, 그 자체가 좋은 작품은 아니다. 다만 비평문이 좋은 글이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될 것이다.
비평은 남의 작품을 읽고 결점을 잡아내는 꼬투리잡기의 글쓰기가 아니다. 가치평가를 위해서는 먼저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어야 하고, 그에 대한 해석이 명료하고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여야 하며, 또한 빈틈없는 논리전개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논리적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작품을 정확하게 읽지도 못하고 논리전개가 주관적이고 논리적 근거도 박약하거나, 불분명하고, 또는 전혀 관계없이 비약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주장하는 것의 논리적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주장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합당한지 아닌지도 모르고 가져다 쓰면, 그 글은 신뢰성을 잃고 억지 춘양春陽[억지춘향]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주장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가장 보편적인 것은 당송唐宋 팔대가八大家중의 한 사람인 구양수歐陽脩의 삼다三多를 꼽는다. 그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주장했다. 이것은 글자 뜻 그대로 '많이 읽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으로서, 다독多讀은 '다문多聞'과 같은 맥락으로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견문을 넓히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장비를 이용한 매스커무니케이션이나 인터넷을 통한 견문을 넓히는 방법이 다양하지만, 독서가 견문을 넓히는데 유일한 방법이었던 송宋나라 때에야 책은 지식을 획득하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통한 견見과 청각을 통한 문聞은 지금이나 당시나 같다. 이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체험하고, 많이 듣고, 많이 읽는 것'이 중하다는 것이다.
2. 그릇, 강물과 바다
구양수는 그 다음에 다작多作을 꼽았으나, 나는 그보다 먼저 다상량多商量을 주장하고 싶다. 어떤 이는 다상량多商量을 퇴고推敲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글을 다 쓰고 난 뒤에 읽고 다시 생각하고 고치라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나는 이를 타당하다고 인정하나 달리 생각한다. 즉 먼저 읽고 그리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책을 읽고 난 뒤에 많이 생각해서 읽은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주견이 없을 것이다. 남의 의견을 가지고 말하기만 할 뿐 자신의 판단, 자신의 견해는 없는 것이다. 반면에 책을 읽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견문이 좁아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만 있고, 남의 견해는 잘 모르게 된다. 남의 견해를 이해하거나 비판할 정확한 논리적 근거에 의한 보편적 사고思考가 이루어지지 못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읽어 폭넓은 식견을 쌓고 그에 따른 자신의 판단 역량을 넓혀서 옳고 그름,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좁고 넓음 등의 가치평가의 보편적 기준을 마련하게 된다. 견문이 좁흔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판단하게 되고, 폭넓은 지식을 겸비한 사람은 차원이 다른 이해능력을 바탕으로 사상事象을 판단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지식을 접하면, 좁은 소견에서 오는 고지식이나, 아집我執에서 오는 옹졸함을 벗어날 수 있다. 좁은 소견으로 주장하면 남의 비웃음을 사게 되고 끝내는 상종相從을 꺼리게 된다.
글을 많이 읽으면 지식만 느는 것이 아니고 이해의 능력이 심화 확대된다. 독서의 양量이 적으면 지식도 적고, 이해의 정도도 낮고 폭도 좁다. 나는 이것을 물과 그릇에 비유하고 싶다. 물이 지식이라면 그릇은 사람의 독서량이라 할 수 있다. 독서가 적은 사람은 작은 그릇이다. 아마 간장 종지쯤 될 것이다. 그러나 독서량이 많은 사람은 가마솥 쯤 될 것이고, 독서량이 많이 유연한 사고력을 가진 사람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江이 될 것이다. 그보다 더 많은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한 사람은 바다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물을 받아들이는 수용능력은 물을 담아 낼 그 릇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수돗물을 담는 작은 물그릇이 있는가 하면, 가마솥이나 저수지 같은 것도 있다. 아주 드물지만 바닷물처럼 모든 지식을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장삼이사張三李四의 그릇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커 봐야 그릇이다. 바다 같은 온갖 물을 다 받아들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모든 지식을 수용할 수 있는 견문이 폭넓은 사람이 이 경우이다. 그러나 읽은 것도 별로 없고, 생각도 읽은 정도인 사람이라면 앞서 말한 대로 간장 종지이거나 작은 술잔이겠고 커봐야 밥그릇일 것이다. 따라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독서는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지식으로 체계화하는 사색은 더욱 필요하다. 따라서 그릇이 되었던 저수지나 강물이나 바다가 되었든 지식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릇에 물을 담기 전에는 텅 비어 있어서 무조건 유입하지만,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는 이미 담겨진 뒤에도 지식이 풍족해서 스폰지 같이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된다. 이와 같이 지식은 그릇 크기에 따라 그 양이 달라진다. 따라서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마련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읽기는 글쓰기를 위한 예비단계이면서 사회생활에서 유연한 사고를 습득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독서과정에서 자신의 직업이나 관심 있는 분야의 주제를 선택하여, 읽으면서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은 아주 소중한 절차이다. 이 독서의 과정을 통해서 삶과 사회를 배워가는 것이다. 또한 이 삶과 사회를 배운 것이 글쓰기에 소중한 자신이 된다. 따라서 관심 있는 주제를 선택해서 관련된 책들을 찾아 탐독해 나가는 책 읽기를 할 필요가 있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독서를 하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쌓아나감으로써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다양하고 폭넓은 학문적 식견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을 쌓아가는 중에 주제에 의해 체계화 되어진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체계적인 식견이 논리적인 글로 표현된다. 연관성이 없는 잡다한 지식일지라도 체계적으로 나열함으로써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기본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단계 높은 독서는 비판적 책 읽기이다. 모든 글을 비판적이고 분석적으로 읽어야 한다. 저자의 논리를 수용할 수도 있지만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신과 저자와 다른 생각을 변별하고 차별화 한다면 타인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주장을 다른 논리로 구성할 수 없는지도 따져 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다. 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자신의 지식은 언제든지 해체해서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지성에서 지조는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지식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것이 생성되고, 낡은 것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양하고 지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물결 리더십》의 저자 유혜선은 물의 순환성을 배우자고 했다. 빗물로 내려온 물은 하천과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증발해 빗물이 되는 것처럼, 항상 배워서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21세기의 문맹은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려 하지 않고 낡은 지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이제까지 경험이나 교육 등을 통하여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자신의 내부에서 해체하고 이를 새로운 지식으로 보완하여 자신의 사고를 재정비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 고정 관념을 그대로 유지하고서는 물결처럼 넘쳐흐르는 지식의 세계에서 생각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없다.
3. 항해
고정관념이 없이 늘 재정립하여 체혜화된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항해航海이다. 밥그릇에 담겨진 물에는 배를 띄울 수가 없다. 강물이나 호수가 되거나 바다가 되어야 배를 띄울 수 있다. 많이 써야 하고 다시 읽어 퇴고推敲를 거듭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덕목으로 다독, 다작, 다상량 외에 성의誠意를 더 보태기도 한다. 많이 쓰되 성의 있게 쓰라는 것이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니체(Freidrich W. Nietzsche)는 '피로써 쓴 글'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피로 쓰라'는 니체의 주문은 바로 성의를 다해 쓰라는 것이다. 성의 없는 글은 독자를 우롱하고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여서 읽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독서가 순항하는 배와 같으면, 즐거운 책읽기가 되지만,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도가 넘실거리는 상태가 되면, 그 여행은 아주 고된 여행이 될 것이다. 독서도 이와 같은 항해와 같다. 성의 있게 쓴 글은 형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빈틈없이 논리를 전개하고, 논거의 자료가 충실하며 주장도 참신하고 진솔하여야 성의가 있는 글이다. 순항을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배가 튼튼한가, 기관은 다 제 구실을 하고 있는지, 연료는 충분한지, 항해를 위한 인적 구성은 잘 짜여져 있는지 등 여러 가지를 살펴봐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독서와 사색을 통해 식견이 충분해지면, 주제를 명확히 하고 논리전개가 매끄럽고 논리적 근거가 분명하며 적확的確하여야 하고, 주장은 독창적이고 참신하며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독자가 보기에 논리전개가 허황되며 모호하고, 글쓴이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안 된다. 더구나 그 자장에 논리적 근거가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것이면, 억지주장을 한다고 생각하여 읽다가 덮어버린다.
4. 잘 빚어진 항아리
미국 신비평(new criticism)의 기수라고 불리는 클리언스 부룩스(Cleanth Brooks)는 《잘 빚어진 항아리 (Well Wrought Urn)》에서 '잘 빚어진 항아리( a well wrought urn)는 마치 커다란 무덤처럼 위대한 영혼의 재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존 돈(John Donne)의 시 <성도가 되다(The Canonization)>의 4연에서 그들의 사랑이 영원한 사랑임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사랑의 이야기가 열왕기 같은 대작은 아닐지라도 소네트는 된다는 뜻으로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잘 빚어진 항아리는 소네트를 의미하며 커다란 무덤은 열왕기를 의미한다. 큰 무덤은 위대한 영혼을 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잘 빚어진 항아리에도 위대한 영혼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위대한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글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뒤에 체계화 되고 논리적인 안목이 형성된 뒤에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 글쓰기지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잘 짜여진 작품을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동양에서는 잘 쓴 글을 흔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한다. 중국 한대漢代에서 북송北宋초까지 설화를 모은 《태평광기(太平廣記)》곽한郭翰의 고사에 있는 말인데, 선녀仙女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주로 시나 문장文章이 기교技巧를 부린 흔적(痕跡·痕迹)이 없어 아주 아름답고 매끄러워 더 이상 손질할 데가 없는 잘 쓴 글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글을 이와 같이 잘 쓰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다작多作은 많은 연습을 의미한다. 많은 연습을 하고 보면 글 쓰는 요령을 알게 되고 표현 능력도 세밀해지며, 언어 구사 능력도 향상된다. 써보지 않고 생각으로만 좋은 글을 쓸 수는 없다. 어떤 이는 과장해서 표현하기를, 만권을 읽고 자기 키만큼 써보라고 한다. 그러면 세상 만물의 법칙이 보이고 삶의 원리를 터득하였을 때, 비로소 자신의 논리를 정확히 표현하고 글을 통해 새로운 미와 진리를 창작하여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막상 이렇게 원칙을 이야기했지만, 나 자신도 문장의 기본인 주술관계도 모호한 비문非文을 쓰기도 하고, 논리적 전개도 비약이 심하여 과장된 표현을 하는가 하면, 논리적 근거는 전후 문맥에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전개에 파탄破綻을 불러 일으키는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참신하고 진솔함은 그만 두고, 최소한 나의 주장이 상식을 벗어난 것은 아닌지 염려하고 너무 뻔한 이야기를 또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끄러울 때도 있다. 참으로 좋은 글 좋은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을 뿐이지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