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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언론사 연재물 등

코로나가 무너뜨린 신화들

by 자한형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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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무너뜨린 신화들/박노자

나는 지금 이 글을 집에서 쓴다. 오슬로대학 캠퍼스가 당분간 폐쇄되어 직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다행히도 프랑스·이탈리아와 달리 식료품과 약을 구입하는 목적 외에도 단순한, 잠시의 외출은 그나마 아직 허용된다. 1945년 이래 최악의 위기를 겪는 유럽에서 그것도 고마운 사치로 느껴질 정도다. 한데 가끔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다.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대비 확진자 수는 이미 한국의 거의 4배나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의 외출에 대한 규제들도 언제 강화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절대 불평하지 않는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데다 실직 위기에 몰릴 일 없는 나 같은 공무원들은, 미증유의 참극을 겪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거의 특권층에 해당된다. 특히 집중 타격을 받은 서비스업이나 여행·숙박·항공업 등에서 휴직과 해고가 속출하여 평상시 3%에 불과했던 노르웨이의 실업률은 이제 10%를 넘었다. 하기야 미국에서 머지않아 예상되는 약 30%의 실업률에 비하면 이것도 그나마 괜찮은 수준인지 모른다.

지금 세계 경제의 최상의 시나리오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단기 불황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전문가들은 단순한 불황에 그치지 않고 1929년 이후 대공황이나 그보다 더 큰 규모의 공황이 도래할 것으로 내다본다. 실은 미국의 실업률이 정말로 30%에 이르면 이는 대공황 시절 최악의 실업률이었던 1933년의 24.9%보다 더 높은 것이 된다. 거기에다가 세계 시장 상황을 크게 악화시킬 수 있는 중-미 갈등이라는 지정학적 위험의 지속적 심화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겪은 일들은 앞으로 전세계에 들이닥칠 연속적 재앙의 서곡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지난 3개월의 코로나 위기만 해도, 적어도 세 가지 신화가 이 위기 속에서 무너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귀중한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첫째, ‘선진국신화다. 근대로의 전환이 더 빨랐던 구미권 선진국들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 여태까지 한국인들의 지배적 집단의식이었지만, 코로나 위기는 이 의식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주었다. 구미권이 근대로 먼저 나아갔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공공성을 크게 약화시켜온 구미 국가들은 무조건 선망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선진국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신종 바이러스와 고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바람에 제때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귀중한 시간을 잃었다. 특히 만성적인 예산부족 등에 시달리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공공의료는 상당한 부실함을 드러냈다. 미국의 영리 목적의 민영병원 위주 의료시스템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대응에 전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미국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선진국일본의 경우, 검사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지금까지 드러난 확진자 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 있다고 <시엔엔>(CNN)과 같은 주요 서방 언론사들이 보도하는 판이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조직적 은폐 의혹이 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공공의료시스템에 대한 부족한 예산지원이나 바이러스에 대응하지 못하는 영리의료, 재난 규모의 은폐와 축소 의혹 등을 과연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배울 점을 배워야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선진국들의 민낯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더 이상 선진국신화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미국신화다. 신자유주의 이전의 미국,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미국은 정부 주도로 무기 생산을 시급히 확충시키는 등 국가가 산업구조에 개입하여 비교적 능숙하게 재난을 극복했다. 그러나 4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지배를 거쳐 미국은 이러한 능력을 거의 상실한 듯하다. 의료설비 부족이 드러나도 국가가 처음에는 생산에 개입하기를 주저해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바이러스 위협이 계속 남아 있고 확진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제약업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공공의료시스템으로의 전환은 절실히 필요한데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본격적·장기적 대책을 수립하는 대신에 트럼프는 중국에 책임을 돌리기에 바쁘고, 확진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도 부활절 이후의 경제활동 재개를 거론하는 수준이다. 이 무책임, 이 인명 경시는 단기적 이익 본위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아직도 반성하지 못하는 미국 지도층의 정신상태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지속적인 중국 탓하기가 중국인과 외관상 식별이 가지 않는 모든 재미 아시아계 소수자들을 정신 나간 인종주의자들의 폭언·폭력에 노출시키고 있는데, 트럼프는 개의치 않는다. 종족적 소수자, 그리고 확진자 수가 가장 많은 노약자층 등의 인명과 인권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고 보호하려 하지도 않는 국가가 세계의 리더를 여전히 자처할 수 있을까. 이번 사태를 거치며 진단키트의 수출 등으로 한국의 위상은 국제적으로 크게 올라갔지만, 미국의 위상은 끝 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시장의 신화다. 시장이 마스크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마스크를 공급할 수 없음을 우리는 여실히 본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기본소득이나 소비 진작을 위해 주민들에게 국가가 현금을 지원하는 것은 급진적 주장으로 인식됐지만, 지금 미국같이 비교적 보수적인 나라마저도 주민들에게 현금 지원을 할 예정이다. 상당수 항공사 등이 어차피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항공업과 같은 사회 필수 시설의 국유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아직 위기의 초기지만, 시장만으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음은 이미 명백해졌다. 앞으로 세계 경제의 재가동·회복을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국가 개입과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이 불가피할 것이다.

시장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다가 공공시스템의 부실을 떠안게 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이제 팬데믹 위기의 약한 고리가 되었다. 그들을 포함해서 팬데믹 이후의 세계는 과거 신자유주의 시대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불황 내지 공황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1930년대 미국의 뉴딜을 방불케 할 수준의 국가적 경제 개입이 필요할 것이고, 앞으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함께 공공부문, 그리고 재분배 장치들이 대대적으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이 세계적 추세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앞으로 공익·공공성 위주의 경제 모델과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할 것이냐의 여부보다는, 한국형 복지국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가 사회적으로 핵심적 화두가 될 것이다.

우리를 과연 인간이라 부를 수 있나?

요즘 진보언론까지 포함해서 아덴만 여명작전의 대성공에 들떠 있다. ‘아덴만에서의 쾌거로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군의 위상이 강화됐다고 기뻐하는 보수언론의 심리를 쉽게 알 수 있지만, 진보언론들까지도 해적 소탕 성공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 국민들이 잘 구출되고 외국 범죄자들이 응징을 잘 받았다는 데에 대해 긍정 일변도로 반응하는 민심에 민감한 나머지 주류와 질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나 외국 범죄자들이 살해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국민이 구출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는 순박한 민족주의적 심리를 이용해 아덴만에서의 승리에 대한 다수의 한국인들의 비이성적인 기쁨을 부추기는 텔레비전과 보수신문들은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다. 살해당한 이들에 대한 기본적 측은지심도 저버린 이 반인륜적인 국민적 환희는 앞으로 우리에게 수많은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다.

같은 국내인이 극단적 궁핍을 이기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인질 범죄를 범하게 된다면 우리는 통상 그 범죄에 대한 당연한 공분과 함께 빈민을 범죄자로 만든 딱한 사정에 대한 일말의 연민을 당연히 느낀다. 그러면 보편적인 인류애의 차원에서는 비록 국내인을 상대로 범죄를 벌인 외국인이라 해도 같은 시각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소련과 중국의 후원을 받아 사회주의적 성향을 천명한 소말리아 국가는 사실상 1991년에 동구권과 함께 붕괴, 소멸됐다. 그 후로는 전략적 요충지인 소말리아는 1993~1995년간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세력들의 무장 침공부터 시작해서 계속 외세의 간섭에 시달려왔다. 최근 미국의 사주와 후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의 침략(2006~2009) 등으로 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내우외환 속에서 국가재건이 계속 지지부진해 주민들의 생업은 늘 위협을 받아왔다.

상식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해적이라고 하는 집단들은 붕괴된 국가가 더 이상 외국 어선으로부터 지키지 못하게 된 어장들을 빼앗겨 생계 곤란에 빠진 해안지구의 어민들이다. 이들의 인질 범죄를 당연히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외세에 시달려본 한국인들은 과연 그들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이해해줄 만한 아량마저도 없는 것인가?

범죄사회학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범죄 근절 전략으로서는 소탕이 아닌 생계형 범죄 예방 차원의 민생대책이야말로 최적이다.

소말리아의 경우에는, 급한 것은 인질의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도박형 구출작전이 아니고 외세 간섭의 차단과 이슬람주의 세력 등 유력 반대파와의 타협, 국가재건과 어업의 부흥일 것이다. 더군다나 소탕 작전의 과정에서 해적이 살해되는 경우에는, 이는 그 작전을 벌인 국가 소속의 선원들에 대한 차후의 복수를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호재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지만, 차후에 언젠가 아덴만에서 복수를 당할지도 모를 무고한 해운업 노동자들의 생명에 대해서 약간이라도 신경을 써주기나 하는가?

피는 피를 부를 뿐이다. 가난과 고용 불안에 시달려 위험천만한 아덴만으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국내 선원이든, 아이를 먹여주려고 호구지책으로 해적선을 타는 소말리아 어민이든 그 생명은 똑같이 귀한 것이고, 똑같이 해치면 안 되는 것이다. 2500년 전에 성인이 승리를 기뻐하는 것은 살인을 기뻐하는 것과 같다. 승리해서 돌아오는 군을 장례식을 치르듯이 맞이하라고 했다(<도덕경>, 31). 이 말에 비추어 볼 때에, 어쩔 수 없이 해적이 된 가난뱅이 8명을 성공적으로죽였다고 기뻐서 난리 치는 우리를 과연 계속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있어야 할 자비심이나 생명에 대한 경외, 피부색과 무관한 이웃사랑은 우리에게 과연 남아 있는가?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임이 부끄러울 뿐이다.

코로나 위기, 신화가 무너졌다.” 선진국 중심의 질서가 깨졌다는 박노자 교수의 진단은 우리가 더 이상 기존의 사회를 믿으며 살 수 없음을 알렸다. 전염병과 경제 위기에 직면한 이 시점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당신들의 대한민국이후 20,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미아로 산다는 것의 메시지는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박노자 교수는 그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꾸준히 비판적 목소리를 내왔다. 그에게 한국 사회의 현재를 물었다.

코로나 위기 이후 세계는

2주간 격리를 마치고 한국에 왔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의 모습은 어떤가.

외국이나 한국이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아마 단기간에 끝나진 않을 것이다.

노르웨이 상황도 궁금하다. 코로나19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북유럽이라고 체계적으로 대처하는 건 아니다. 노르웨이는 한국처럼 추적을 치밀하게 하지 못하고, 자가 격리도 자율에 맡긴다. 다만, 의료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장점이 있다. 감염자가 늘어도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거다. 인구가 몰려 있지 않으니까 비교적 유리하기도 하다. 서울의 인구가 노르웨이 인구의 거의 2배니까.

지난해 3월에 쓴 칼럼 코로나가 무너뜨린 신화들이 화제가 됐다. 선진국 중심의 신화가 팬데믹 상황을 맞아 깨졌다고 봤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이번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만큼 위상도 꺾이고 경제적 타격도 만만치 않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더 이상 미국, 유럽이 옛날처럼 중심 역할을 못 할 거다. 더 다양한 중심이 있는 세계로 가는 길목이라 본다.

이번 책에서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포착하려는 태도가 느껴졌다. 10년 전에 비하면 말을 건네는 방식이 친근해졌다는 느낌도 든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큰 그림을 보려는 욕심이 생긴다.(웃음) 사회가 어떻게 발달하는지 큰 변화를 그려보고 싶다. 최근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를 보면서, 누군가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위치에서 큰 그림을 그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완벽하게 객관적인 것은 없겠지만, 객관성을 향해 노력해야만 전체 사회에 유익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말을 건네려다 보니, 자연히 말투도 부드럽게 느껴진 게 아닐까?

우리는 미아가 되었다

미아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미아라는 키워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박노자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고 지금은 노르웨이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위치와도 연결되는 것 같다.

내 상황이 미아 같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태어나고 자랐던 소련 사회가 갑자기 없어졌고, 한국에서 살다 유럽에서 20년을 산 셈인데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 그건 역사적인 경험이 달라서인 것 같다. 노르웨이는 내 체질에는 지나치게 편하다. 러시아에서는 공동체와 개인이 공멸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았고, 한국도 굉장히 파란만장한 사회였지 않나. 그런 면에서 노르웨이는 공유하는 것이 적다. 물론 몸은 편하지만.(웃음)

미아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사회적인 의미와도 연결된다. 젊은 세대 전체가 공동체를 잃고 미아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미아처럼 뿌리 뽑힌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전처럼 평생 직장도 없고, 미래에는 젊은 세대 전체가 일을 해도 워킹푸어계층이 될 거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가족의 해체. 산업화, 민주화와 맞먹는 엄청난 사건이다. 기존 가족 형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가족이 생겨나기도 한다. 50년 후면 한국에서 전통적인 가족은 없어지지 않을까?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엄청난 수의 개인들이 쏟아져 나올 거다.

그렇다면 앞으로 가족을 잃은 개인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고 외롭지 않게 살아갈까.

이제 개인들은 안정적인 가족과 직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노르웨이에서도 젊은이들은 대부분 미혼을 택한다. 같이 살아도 동거 형태지 결혼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이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보다는 사정이 낫다. 결국, 개인들이 다양하게 관계 맺는 방식을 배워가야 한다. 과거의 수직적인 공동체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평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계약을 맺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이 변화를 어떻게 보나.

자본이 세게 선수 친 거다. 자본은 개인을 유사 자영업자로 만드는 게 꿈이다. 사람을 쓰고 싶을때만 쓰고 책임을 질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플랫폼 노동자는 등록은 자영업자이지만 노동자성을 부정당한 노동자다. 휴가비, 의료보험, 연금 등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다.

산업별, 기업별로 뭉치던 개인들은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혼자로는 불가능하다. 수평적으로 모이는 노동자들의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반격을 시작해야겠지. 아마 긴 과정이 될 거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인 성 평등의 문제도 적극적으로 언급했다. 여성에 분노를 표출하는 일부 한국 남성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일부 한국 남성들이 여성을 비난하는 걸 보면, 백인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게 떠오른다. 미국 트럼프 정권하에서 백인 하층민들이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유색인종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처럼. 현재 한국에서는 인종보다 젠더 문제가 더 뜨겁다. 20년 전만 해도 여성들이 사회 진출이 쉽지 않았다. 공무원 사회에서 국회에서 여성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에야 조금씩 평등이 실현되고 있는 건데, 왜 자꾸 여성 탓을 하는지 모르겠다.

불평등한 사회, 희망을 찾는 법

최근 출판계의 키워드 중 하나는 차별이다. 그만큼 차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면 할수록 다수가 고통받는다는 자각이 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차별에 분노하고, 그게 출판 시장에도 반영되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이 성장 신화를 믿고 있다. 경제가 성장하면 개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갈 거라는 믿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외형적인 성장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부를 가져다주지 못하지 않나. 부자들만 돈을 버는 구조고, 부동산 가격만 오르고 있다.

한국을 급의 사회라고 봤다. 학벌, 나이, 성별 등 모든 면에서 등급을 매기고 거기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재력의 힘이 가장 세다고 했다.

신자유주의의 큰 원칙 중 하나는 국가 위에 자본이 있는 거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대기업의 이해관계를 국가가 알아서 봐주는 시스템이다. 이 구조에서는 자본가만 승리하고, 대다수는 노동을 하면 할수록 가난하고 병든 삶을 살게 된다. 노동은 더욱 값싸지고, 자본가들은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다. 지금은 세금을 강하게 매기고 있다고 해도 큰 흐름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국가 시스템은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학벌이 한국 사회의 중심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학벌 중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부의 세습을 합리화하는 수단이다.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했다는 건 곧 사회의 상류층에 속하게 된다는 뜻이고, 명문대 출신들은 대학 시절의 경험을 배경 삼아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 그리고 실제로는 부모의 재산이 자녀의 학벌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능력의 결과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지배층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현재 사회는 비관적으로 보지만, 한국 사회에 거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은 신자유주의로 전환된 것이 큰 비극이었지만, 아직은 낙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인권 의식은 급속도로 성숙했다. 내가 1991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의식 있는 대학생들조차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조롱하고 혐오했다. 소수자를 인간답게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 최근 성소수자들이 사회로 나오고 있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해 대체복무제도 신설됐다. 90년대에 비하면 정말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평등한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실현될까.

단기적으로는 쉽지 않을 거다.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은 쉽게 뭉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단 밀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배타성 속에서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럼에도 낙관을 잃지 않는 이유는 촛불집회 이후 시민사회가 꾸준히 성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극단적인 세력이 잠시 집권한다 해도, 저항적인 시민 의식 덕분에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되리라고 믿는다. 내가 한국 사회에 희망을 거는 이유다.

* 박노자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까지 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 국립 인문대학교 강사를 거쳐 학생과 강사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대학 생활을 보냈던 그는 '박노자'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귀화한다.

박노자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 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난 한국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귀화한 것은 스스로 한국사회에서 국적, 또 외국인과 내국인이라는 장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리트머스지가 될 것을 결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