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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낭만 인생 가수 최백호

by 자한형 2024.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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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인생가수 최백호/김태완

우연, 우연, 우연이 이어져 운이 좋았다고 할 밖에

마흔여섯에 낭만에 대하여가 알려지면서 지금의 내가 있지, 그 노래가 없었으면 잊힌 가수가 됐을 것

나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나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

여든에는 여든의 호흡으로 아흔에도 숨이 좀 가쁘겠지만 충분히 노래할 수 있어

가만히 드러누워야 찾아오는 사주가 있어요. 난 기다리는 사주

아버지는 제2대 국회의원6·25 때 교통사고로 사망

백호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스승인 철학자 김범부(김동리의 형)가 지어줘

가수 최백호(崔白虎·72)가 작년 11월에 내놓은 앨범 찰나에 담긴 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낮게 읊조리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그의 중저음이 듣는 이의 마음을 쿵쿵 울렸다. 노랫말은 한 편의 시였다.

책을 읽으면 머리카락 몇 올이 돋아나는 것 같아. 아주 큰 무엇은 아니고 딱 그만큼만. 아주 작은 그만큼만. 그래도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신발 끈을 조여매는 힘은 생기지.

노래도 그래. 먼 기적소리처럼 가슴 뛰던 젊은 날의 울림은 아냐. 그냥 헌 모자 하나 덮어쓰고 바다가 보이는 언덕으로 가고 싶은 정도이지. 책을 읽으며 노래를 들으며 아직은 눈물 흔적 지우고 살아. 내가 그래. 당신은 어때?

최백호는 그의 노래를 들을 줄 아는청자(聽者)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떠냐.

답을 하려다 심장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지난 131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그를 만나기 위해 산문집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를 사서 틈틈이 읽어두었다.

최백호 연구를 하며 몰랐던 사실들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崔元鳳·1922~1950)는 제2대 국회의원이며, 막내아들 최백호가 생후 5개월 때 사망했다. 선친과 동갑이었던 어머니(朴惠順·1922~1970)는 그 막내가 스무 살 되던 해에 암으로 이별했다. 부모의 죽음이 그의 삶을 평생 지배했는데, 그가 노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결정지었다. 예컨대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의 첫 소절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는 가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해 쓴 곡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흰 호랑이(白虎)’이고, 그 비범해 보이는 이름을 김범부(金凡夫·1897~1966)가 지었다. 김범부는 소설 등신불을 쓴 소설가 김동리(金東里·1913~1995)의 형으로 사상가의 범주에 드는 동양철학자, 정치인, 한학자다. 김범부와 최원봉은 사제지간으로 함께 의정(議政)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 배경지식을 토대로 그와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제 노래는 되게 어려워요

서울 여의도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최백호는 지금 매일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사진=조선DB

그의 작업실에는 그림이 많았다. 소파에는 기타가 놓여 있었다.

이란 곡을 자꾸 음미하게 됩니다.

누나가 쓴 노랫말을 제가 조금 손본 곡인데 (그 노래를) 좋아하시는 분들을 보면, 조금 특별한 분만 좋아하십니다.”

이 노래의 장르가 뭡니까. 재즈는 아니죠?

“‘은 특별한 장르가 없어요.”

힙합 아닌가요?

하하하. 제가 특별한 장르를 지키려 한다거나 고집한다든지, 그런 것은 없어요.”

근래 지코, 죠지, Colde, Tiger JK, 정승환, 정미조, 주현미, 아이유, 뮤지컬 배우 박은태 등 다양한 분들과 같이 부르더군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아이유와 노래를 같이 부른 것은 기획사에서 나를 추천해서 하게 됐어요. 주현미·정미조씨는 제가 추천해서 불렀어요.”

앨범 찰나의 곡들이 어렵더군요.

앨범 수록곡 중 을 제외하고 다른 작곡자들이 곡을 썼는데 노래가 어려워요. 우리가 불후의 명곡이라 하는 1970~80년대 노래들을 보면 대개 단순하고 가사가 좋아요. 요즘 제 노래는 되게 어려워요. 지금도 따로 연습을 해야 해요. 부르는 사람이 어려우면 일반 대중은 못 부르죠.”

대중가요는 가수 혼자 부르는 게 아니다

20091019일 나무를 주제로 한 첫 미술전시회 모습이다. 최백호는 오래전부터 그림을 그려왔다. 사진=조선DB

그 곡(어려운 곡)을 선택 안 하면 되잖아요.

앨범을 기획할 때 기획사가 작곡가를 뽑습니다. 그나마 제가 부르기 쉬운 곡을. 곡은 참 좋은데 사람이 따라 부르기 어려워요.

대중가요는 가수 혼자 부르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같이 불러야 해요. (대중에게) 양보를 많이 해야 하는데, 자기만족이 안 되면 그게 불편해요. 자기[기자의 귀에 이렇게 들렸는데 문맥은 가사일 것 같다]가 뭔가 평범하면평범한 데서 좋은 멜로디를 뽑기가 참 어려워요. 멜로디에서가 아니면 (다른 곳에다) 뭔가 자극을 줘야 하는데 자극이 없으면쉬운 걸로 표현하기가 더 어렵잖아요.”

그의 말이 알 듯 말 듯했다. 다만 이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이가 좀 드니까 매사 이해하기 쉽고 단순한 것들이 좋아져서 시()도 복잡하고 머리 한참 굴려도 알 수 없는 현대시보다 소월(金素月·1902~1934)과 서정주(徐廷柱·1915~2000) 선생님의 글에서 새삼 더 감동을 받아요.”

이 말도 이해하기 편했다.

나보다 음악을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나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드물 거라고 생각해요. 매일 새벽 6시 반에 일어나서 두세 시간씩 노래 부르고 그림을 그립니다. 10시부터 12시까지 하는 SBS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14년째 하고 있어요.”

사랑, 떨어지려 오르는 운명

2012년에 나온 앨범 다시 길 위에서는 팝 재즈, 누에보 탱고, 집시 스윙 같은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던 트로트 가수가 아니었다.

당시 젊은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 음악을 기초부터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서 되게 어려웠어요. 너무 힘들게 노래해서 덕분에 음악 공부도 많이 했어요. ‘말로가 쓴 목련이라는 곡이 있어요. 그 곡, 정말 좋아요. 편곡도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인 조윤성이라는 분이 했는데 정말로, 정말어디 내놔도 아깝지 않은 곡이에요. 녹음할 때 너무 힘들었어요.”

노래 목련을 음미해보았다.

사랑, 떨어지려 오르는 운명/ 홀로 타오르는 가여운 불꽃/ 사랑, 대답 없는 외로운 몸짓/ 홀로 부르다가 사라질 노래여, 노래여/ 못 견뎌 그리운 마음 하얗게 눈물처럼 터져가네/ 바람 부는 날 그 몸 지고 나면/ 푸른 잎들 무성해 흔적도 없겠지만/ 뜨겁던 마음을 잊지는 말아요, 이 봄 가기 전에

최백호가, 한국 대중음악에서 찾기 어려운 환상적인 누에보 탱고(Nuevo Tango·새로운 탱고)를 부른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있는데요, 미국의 프랭크 시나트라 밴드에서 수석 피아노 연주자였대요. 어릴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미국 대학[버클리, 뉴잉글랜드음악원]에서 재즈피아노를 배운 사람인데 정말 대단해요.”

그러더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참 아까워요. 우리 환경이받아들이지 못하는.”

재능이 있으면 끝내는성공하나요?

운이 좋아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우연, 우연, 우연이 이어져 운이 좋았다고 할 밖에. 마흔여섯에 낭만에 대하여가 알려지면서 지금의 내가 있지, 그 노래가 없었으면 잊힌 가수가 됐을 겁니다.”

물론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있지만

최백호는 정말 실력이 뛰어나고 좋은 노래를 불렀어도 묻혀버린 가수들이 정말 많다유명한 히트곡들을 모아 계속 들어보면, 결국은 소리’”라고 했다.

소리요?

어떤 소리를 내느냐에 달려 있어요. 조용필·나훈아·송창식·김광석, 이런 분들의 소리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정말 개성 있는 소리, 만들어낼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네요.

운명이고 사주고 팔자고.”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요?

저는 정말로, ()은 아니고 조상님들이.”

그는 스스로 효교(孝敎) 신자라고 했다.

신은 안 믿지만 영혼의 존재는 믿어요. ‘라는 존재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혼()들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위대한 결정체입니다.”

부모의 혼들이 겹겹이 쌓인 결정체라면, 인간을 너무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 아닌가요?(웃음)

타고난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저는 운명이라는 게 결정이 돼서 모양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은 안 합니다. 내가 오늘 어떻게 사느냐, 행동하느냐에 따라 변한다고 봐요. 물론 운명이라는 게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오늘의 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사람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죠.”

“(제 노래가) 무겁다는 것은 칭찬

10년 전인 2013125일 한 카페에서 팔을 괴고 누워 자세를 잡은 최백호. 그는 무슨 포즈를 취해도 일단 낭만적으로보이게 노력했다. 사진=조선DB

, 아까 하던 얘기인데, 소리는 타고나야 하는 것이죠? 최 선생님은 어떤가요.

어떤 면에선 타고났는데 훗날에 만들어졌어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요.

이게 음색(音色)나이가 들어 변하면서, 노래도 많이 변했어요. 그런 면에서 좋은 쪽으로. 운이라고 생각하는 게, 호흡이 예전보다 못하면서 소리가 좋아졌다고 해요.”

좀 풀어서 설명하자면?

제가 이야기해놓고도 어렵네요. (웃음) 예를 들자면, [음계의 종류와 으뜸음의 위치를 밝히는 용어]를 낮춰서, 예전에는 키를 낮추면 노래 부르는 맛을 못 느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키를 낮췄어요. 그랬더니 다른 소리가 나와요. 그걸 발견한 게 근래입니다.

요즘 자주 부르는 부산에 가면이란 노래가 있는데 에코브릿지라는 분이 만들었어요. 이 곡을 처음 듣고 이건 내 거다는 느낌이 와서 당장 하겠다고 했어요. 그분 왈(), ‘형님 키로는 낮으니까 한 키 반 정도 위로 올려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했어요. 그대로 하겠다고 했죠. 제 키보다 훨씬 낮게 불렀어요. 녹음하고 들어보니까, 제 목소리의 다른 면이 보이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서, 운이 좋게도, 좋은 운으로 변해왔어요, 소리가.”

개인적으로 최 선생님 노래를 들으면 무거워요. 슬픔에 젖어 너무 무겁게 다가옵니다.

무겁다는 것은 (제게) 칭찬입니다. 목적한 바를 이룬. 그런 면이 좋습니다.”

나는 사실 노래할 때 작두를 탄단다

요즘 젊은 가수들 노래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고음으로 막 소리를 지르는 가수들의 발성법이 대개 거의 비슷해요. 실용음악과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발성을 가르치며 호흡까지 다 정해줍니다. 그러니 노래가 다 비슷해요. 너무 잘해서 매력이 없지요. 가창(歌唱)은 학교에서 배우면 안 된다 생각해요. 정미조·나훈아·조용필·송창식 노래는 다 달라요. 누구한테 배운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만의, 자기 속에서 계속 소리를 내며 다듬어온 분들이죠. 자기만의 소리가 있는 겁니다.”

그는 지금도 음악 공부를 많이 한 동료나 후배들에게서 이런저런 핀잔을 듣는다제발 악보대로 박자 좀 맞춰서 불러라, 같은 노래를 부르는데 부를 때마다 그렇게 다르면 어떡하냐 등등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산문집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나는 말이야. 사실 노래할 때 작두를 탄단다. 음악이라는 아주 예민하고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무당처럼 춤을 춘단다. 맨발로, 머릿속은 완전히 비워지고 완벽한 무념의 상태에 들어가 훌쩍훌쩍 뛰여 춤을 춘단다.

상상을 해본다. 가수 최백호가 훌쩍훌쩍 작두를 타며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입영전야’ ‘영일만 친구’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는 모습을 떠올렸다.

여든이 되어도 나는 입영전야를 부를 수 있어요. 젊은 시절에 한 호흡으로 부르던 대목을 두세 호흡으로 나눠 부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든에는 여든의 호흡으로 아흔에도 숨이 좀 가쁘겠지만 충분히 노래할 수 있어요.”

“‘고래사냥같은 곡을 만들고 싶었다

젊은 시절 최백호. 그는 어려웠지만 가수로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최백호는 싱어송라이터다. 창작과 표절, 모방의 담장 위를 걸어야 할 운명이다. 늘 양심 앞에 떳떳하려고 애썼다.

노랫말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을 수 있어요. 근래 자주 읽던 그분의 시를 읽다 보면 단어에서. 그러나 멜로디로는 전혀.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때는 송창식의 고래사냥같은 곡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만든 게 영일만 친구’ ‘입영전야입니다. 카피한 것은 아니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따라가려고 했어요. 지금은 남의 노래에 전혀 영향은.”

그는 툭 던지듯 이런 말을 했다.

요즘 굉장히 많이 떠올라요. 요즘 곡을 정말 많이 써요.”

악상이 많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작곡하나요.

기타나 피아노를 치거나. 그리고 악보로 그립니다. 이게 불안한 거예요. 빨리 발표를 하고 싶어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면, 내가 아마추어지만, 그림이 쌓이면 전시회를 해야 된다 해요. 집에 놔둘 데가 없어서. 노래도 빨리 음원으로 만들어야지, 하는 조바심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노랫말을 곡보다 먼저 쓰죠?

.”

근래 쓴 곡 중에 발표 안 된 노래를 월간조선독자를 위해 소개한다면?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부를 노래를 만들었어요.”

마지막으로?

그냥마지막으로 부르면 좋겠다는. ‘마지막 계절이란 노래인데, 노랫말이 이래요.”

그는 시를 낭송하듯 외웠다.

마지막 계절은 가을이면 좋겠어, 낙엽 치는 창가에는 노을이 타고, 아련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면 나는 애틋한 눈물을 흘리겠어. 가을이 가고, 하얗게 겨울이 오면, 누군가 누군가 나를 기억해줄까.”

올해 새 앨범에 이 곡을 담을 겁니까.

아닙니다. 이 거는 이번에 할 게 아니고, 마지막에 부를.”

그럼 월간조선에 공개하면 안 되겠네요.

아니, 관계없습니다.”

노래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부산 동래시장 근처 수안파출소 부근의 어느 허름한 다방이라고 한다. 힘들었던 시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에이스 캐논(Ace Cannon)의 색소폰 연주곡 로우라(Laura)’가 흘러나왔다. 그 자리에서 스무 번을 넘게 이 곡을 들었다. 그런 기억을 더듬어 만든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

이 노래를 발표하기 이전에는 막연하게 다른 뭔가가 내게 있을 거다고 생각했어요. ‘노래는 평생 할 게 못 된다,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노래만으론 생활이 안 됐으니까요.”

최백호는 “‘낭만에가 알려지면서 가수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버티면 그렇게 성공합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렇다고는 생각 안 해요. 버틴다고 되는 것은 아니고요, 저마다 사람에게는 뛰어다녀야뭔가를 얻는 사주도 있고, 가만히 드러누워야 찾아오는 사주도 있어요. 난 기다리는 사주입니다. 지금껏 매니저를 안 뒀기에, 매니저는 일거리를 찾아다니잖아요. 난 먼저 누구에게 다가가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난 운이 좋다고 할 밖에요. 내가 찾아가서 된 게 아니고, 찾아왔기 때문에.”

다만 최백호는 덧붙여 말하기를 뭔가가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의식하고 준비한다고 할까?”라고 했다.

김수현 작가의 목욕탕집 남자들덕분에사진=조준우

그런 기대감은 19771월의 겨울, 힘들게 첫 앨범을 내놓은 후 어느 날, 명동을 걷다가 레코드 가게의 스피커에서 거리를 쩡쩡 울리며 흘러나오는 자신 목소리에 온몸을 떨며 울고 섰던 그 감동의 순간을 다시 맛보게 되나 하는, 기다림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1996년 가을 어느 날, 다급하게 걸려온 음반회사 여직원의 전화. “선생님 이상해요, 오늘 갑자기 앨범 주문이 1000장이나 들어왔어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내놓은 지 1년 반이나 지난 노래가, 한 달에 겨우 스무 장이나 팔릴까 말까 하던 앨범이 갑자기 이 무슨 조화로.’

당시 김수현 작가의 TV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배우 장용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낭만에 대하여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치밀하고 강력한 힘으로 김수현 작가의 차에서 라디오를 켜게 했고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대목을 슬쩍 흘려 당시 최고의 인기 드라마에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나게 만든 것이었다.

가끔 자문자답해요. ‘낭만에를 내가 어떻게 썼지? 하고요. 내가 글을 쓸 정도로 공부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노랫말을 만들어요. 책을 내고요. 제 누님도 노랫말을 써서 제게 주세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머님이 내 안에서 작용하신 거라고요. ‘가을에 떠나지 말아요라는 노랫말도 그래요. 정말 그전에는 글을 한 번도 쓴 적이 없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냥 메모를 해둔 게 있어요. 그게 노래가 된 겁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막내아들에게 철없는 놈 놔두고 가려니 걱정이 돼서 주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믿고 있어요.

어머니는 제게 지금도 절대적으로.”

아버지 최원봉과 김범부, 이범석

아버지 최원봉 제2대 국회의원(1922~1950).

기자는 작년 9월 부산 기장에 내려간 적이 있다. 향토사학자 공태도(孔泰道·90) 선생을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정당 당수(黨首)였던 여걸 박순천(朴順天·1898~1983)의 흔적을 더듬은 적이 있었다. 공 선생은 부산 국제신문부산일보의 부산 동래군, 양산군 주재기자로 35년 동안 일했다. 당시 공 선생이 기자에게 기장 사람들(기장군 간, 20203)이란 책을 주었다. 책에는 놀랍게도 국회의원 최원봉과 아들 최백호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최백호의 말처럼, 운명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다. 5개월 전에 받았던 기장 사람들속에 최원봉과 최백호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기자는 공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태도 선생에 따르면, 최원봉은 1922년 기장군 장안면 좌천시장에서 포목상을 하던 최창민의 3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원봉은 장안초등학교(11)를 나와 30km나 떨어져 있던 동래중학교까지 집에서 사육하고 있던 말을 타고 다녔다. 태어날 때부터 호랑이상에다 그 음성마저 컸으며 겁이 없는 학생이었다.

경북 경주에 살던 동양철학자 김범부(김동리 형)가 어느 날 그의 친구인 좌천마을 김기복씨 집에 머물게 됐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말을 타고 통학하는 범상치 않은 얼굴을 한 학생을 보고 어느 날 학생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고 한문과 민족학을 가르치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1942년 동래중학을 나온 최원봉은 모교인 장안초등학교에 신설된 장안공립청년훈련소의 지도선생으로 취임해 1학년 담임까지 맡게 된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최원봉은 광복된 조국을 위해 일을 하라는 김범부의 충고에 따라 1947년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가 이범석(李範奭·1900~1972) 장군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을 노크했다. 최원봉을 본 이 장군은 면담 후 큰 인재를 얻었다면서 조직책 등 중요 직책을 맡겼다.

1949년 이범석 장군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겸임할 때 최원봉은 국방부 감찰과장으로 발탁됐으나 그의 꿈은 국회의원이었다. 그래서 그는 명년(1950)에 있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 김범부 선생과 의논했다.

아버지의 죽음

아들 최백호가 그린 아버지 최원봉의 모습이다.

스승인 김범부가 좌천(현 기장군 지역)에서 출마할 뜻을 밝힘에 따라 최원봉은 손위 동서가 선박업을 하고 있던 부산 영도에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선거일은 1950530일이었다. 후보 등록은 마쳤으나 딴 후보들처럼 트럭에다 현수막을 달고 다니는 형편도 못 됐고 고무신이나 술잔치, 돈 봉투는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선거일을 한 달여 앞둔 423일 첫아들이 태어나 그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며칠 후 그는 좌천으로 달려가 그의 은사인 김범부 선생에게서 아이의 이름을 받았다. 그 해가 범띠해가 돼 그런지는 몰라도 흰빛을 띤 호랑이라는 이름의 백호라고 지어줬다.

530일 개표 결과 그는 여야 정당 후보들을 물리치고 34%7445표를 얻어 당당히 당선됐다. 기장 쪽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김범부도 당선돼 같이 원내(院內)로 들어갔다.

개원된 의회에서 최원봉 의원은 임시특별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비롯해 국민학교 후원회비 폐지건추곡수매에 관한 건11월까지 단독으로 국회에 상정시킨 의안이 무려 10건이나 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 가운데 단독으로 80여 명 의원들의 서명을 받아 상정한 6·25전쟁에 대비 못 한 무능한 국무위원들의 사직권고결의안118일 국회서 보류됐는데, 폭탄적 이 의안을 두고 말썽이 뒤따르기도 했다.

이틀 뒤인 1110일 최 의원은 트럭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다 경북 김천을 지나던 터키(튀르키예) 군용차와 충돌해 세상을 아깝게 떠났다. 국가를 위해 한창 일할 수 있는 2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후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있다는 탄원 등이 있었는데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나도 내 이름이 세서 싫었다

늘 최백호에게 바다와 같은 그리움의 대상인 어머니 박혜순(1922~1970).

동료로서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백임학(96) 선생을 비롯해 차동엽(90·전 장안면장)씨 등은 진정한 농민들을 위한 지도자였는데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고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고 한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동갑내기 아내 박혜순(당시 28)12녀를 데리고 고향[부산 기장]으로 돌아와 좌천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가족들은 학교 사택을 이용했다.

서생에 있는 국민학교를 비롯, 일광국민학교에 이르기까지 교사로 재직한 16년 동안 아들 최백호는 부산에 있는 학교까지 기차통학을 했다. 주변에선 얌전하고 착실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공 선생이 전해준 최백호 가족의 풀 스토리다.

기자는 그에게 가족 이야기를 더 물어보았다.

어린 시절, 바닷가인 부산에서 나고 자랐어요. 이름은 흰 백(), 호랑이 호() 자를 써서 흰 호랑이 같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다섯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와 집안 어르신들은 제 이름이 세서(강해서) 그렇게 됐다고들 하셨어요.”

어떻게 이름 탓을.

이름은 김범부 선생이 지었는데 용() 자가 들어가는 누님의 이름도 지었어요. 센 이름이죠. 한 번은 제가 도장 파러 갔더니 세공(細工) 할아버지가 이름만 듣고서 양친 안 계시지?’ 하고 묻는 거예요. 나도 내 이름이 세서 싫었어요. 엄청 싫었어요.”

유어 캡틴 고 다이(Your captain go die)”

197910월 미국 동포 위문 공연 당시 허참(왼쪽)과 최백호(오른쪽).

신인가수 시절 197910월 초 언감생심(焉敢生心) 미국 동포 위문 공연을 가게 됐다. MC 허참, 훗날 축구선수 허정무의 아내가 될 최미나를 비롯해 가수 조미미, 박경희, 장은숙, 배우 정윤희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의 40대 초반의 남자 한 분이 동행했다.

이색적인 선진문화의 풍경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 넋을 잃어버렸어요. 미국이라니, 그것도 뉴~욕이라니.”

알고 보니 40대 초반의 범상치 않은 남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과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분이었다. 그는 밤 9시 이후 외출 금지, 친인척이 아닌 동포 접촉 시 꼭 자신에게 보고할 것 등등을 요구했다.

동포위문단은 뉴욕을 시작으로 댈러스, 시애틀,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부마항쟁과 강압적인 진압으로 만심이 움직이고 있었고 교민사회 분위기도 많이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공연하는 장소마다 김대중 연설회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었어요. 그 연설회를 방해하려 공연을 기획했던 겁니다.

LA에서의 공연 날이었는데 흑인 친구 하나가 헤이 유 코리언?’ 하고 물었어요. 그 친구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유어 캡틴 고 다이(Your captain go die)’라는 겁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한데 리허설을 하고 있는데 동양인 중년 남성이 들어와 갑자기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만세! 박정희가 죽었다!’라고 소리치는 게 아닙니까? 그 흑인이 말한 캡틴이 누군지 알게 된 것이죠.”

저녁에 LA 한인타운에 갔더니 군사독재 종식등의 붉은 벽보가 붙어 있었고 축제 분위기였다. 당시만 해도 동포들 중에 군사정권을 피해 이민 온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얼마 전 길에서 정윤희씨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적이 있어요. 변함없이 아름다우신 모습은 나를 스물여덟 총각 시절로 데려가더군요.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권력도 세상 부러울 것 없던 그 젊음도 지나고 보니 모두 부질없는데.”

! 내가 누구 아들인데

아버지의 사망 경위를 훗날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생각해도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왜냐하면 경북 김천을 지나 대구로 가는데 갑자기 터키 군 차량이 이탈해 아버지가 타신 트럭을 들이받았거든요.

당시 아버지의 국회 발언록을 보면 ‘6·25 동란의 책임을 지고 각료들 다 사퇴해라고 굉장히 강하게 다그치는 대목이 나와요. 당시 ○○이 이승만의 정적을 제거했다는 소문이 많았어요.

그런 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무언가가 내게 있어요. ‘! 내가 누구 아들인데그런 느낌이죠. 지금도 있어요. 그래서 함부로 안 움직여요.”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것도 다 그런 부모님 영향을 받았군요.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며느리를 보살펴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나 봅니다.

“(어머니를) 싫어하셨어요. 장손인 나도 싫어하셨어요. 한 번은 중학교 기성회비를 못 내서 학급 반 편성이 안 됐어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할아버지를 찾았죠. 할아버지는 , 오지 마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군대 간다며 할아버지를 찾아간 적이 있어요.”

그 이후 친가 쪽하고 인연이?

요즘 사촌들이 전화 와서 만나 식사도 하고.”

제 목소리는 아버지를 닮았나 봅니다

최백호는 군에 입대하자마자 폐결핵 진단으로 의가사 제대를 했다. 요양을 하던 당시의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다 손주가 예쁜데 왜 그랬을까요.

아들에 대한 어떤 그런 게 굉장히. 주위에서 할아버지에게 아들, 손자 이름이 세서 그렇다. 그게 묘해요.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미신이지요.”

저는 미신 안 믿습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대로 산다던데 최 선생님 삶도 백호처럼 사셨던 거 아닌가요?

정말 살아온 하루하루가 참 힘들게 살았어요. 그래도 참 운이 좋았어요. 말년에 이만큼 살 수 있다는 것.

아버지가 키도 크고 목소리가 쩌렁쩌렁하셨대요. 아버지는 마이크도 없이 달랑 의자 하나 들고 다니며 연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의자 위에 올라가 생으로 말씀하셨대요. 제 목소리는 아버지를 닮았나 봅니다.”

아버지 묘는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없다고요?

. 묘가 있었는데 내가 친가 쪽하고 결정적으로 단절한 게 뒷날 선산까지 땅을 다 팔아버렸어요. 집안 할아버지들(의 묘)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옮기지 마라. 화장해서 뿌리라(뿌려라)’고 했대요. (화장하려고 보니) 아버지 묘터가 굉장히 안 좋았어요. 20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있더라고요. 시신이 안 썩고.

그 후 내가 가수가 됐어요. 사는 게 안정이 됐어요. 나는 사주나 풍수를 믿습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처럼 산다고 느낍니까.

이름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이름을 한 번 들으면 사람들이 안 잊어버려요. 그런 면에서 가수라는 직업에 유리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교사를 하셨군요.

시댁에서 어머니가 견디시기 힘드셨나 봐요. 생계를 잇기 위해 교사가 되신 겁니다. 어머니는 지금의 부산 동래여고, 과거엔 동래일신이라는 5년제 여학교를 나오셨어요. 우리 식구들 다 데리고 나와 가난했어요. 시집에서 너무 힘드셨으니.

(어머니가 교사로 계셨던) 부산 기장의 일광국민학교라고, 지금은 폐교가 됐어요. 거기 사택에 살 때, 벚나무 3그루가 있었는데, 주말에는 사람이 없어서 저 혼자 놀았어요. 나무 위에서 자기도 하고, 그러면 어머니가 찾으러 오고. 그 폐교가 예술고로 바뀐대요. 그래서 벚나무를 없앤다 하던데, 내가 그 나무를 애틋하게 여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나무를 보존해서 최백호 나무로 이름을 짓는다고 하더군요. 실은 그곳이 그리워 고향에 갈 때마다 그 사택 부근을 찾아갔었어요.”

그러고 보니 나무 그림을 많이 그리던데.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무의식적인 영향이?

.”

스무 살 막내아들 외동아들로 세상물정 모르고 철없던 그는, 갑자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다고 한다.

의식은 멍하니 눈앞에 펼쳐지는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처럼 바라보기만 했고, 몸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어요. 눈물마저도 나오지 않았죠. 그저 순간순간의 시선만 움직이고 있었을 뿐, 어쩌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렸을 겁니다. 배가 고프고 잘 곳이 없다는 뼈아픈 현실도 심각하게 와닿지가 않았어요.”

긴 세월 참으로 격렬히 살았어요

졸지에 고아가 된 최백호는 그렇게 3년을 유령처럼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다가온 생명의 끈, 정신없이 그 끈을 잡고 매달렸다. 그 끈이란 다름 아닌 노래였다.

돌아보면 긴 세월 참으로 격렬히 살았어요. 많이도 부딪치고 많이도 고집하고 죽을 듯이 좌절하기도 했죠.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능력과 기회와 마음가짐에 따라 사는 것 같은데, 나에게 주어진 것이 너무 보잘것없고 초라해서 숨죽여 울었던 적도 많았어요.”

그래도 꾸역꾸역 그 운명의 굴레를 짊어지고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보니, 이제 여기 와보니, 모두 길어야 백 년, 겨우 그 테두리 안에서, 특별히 부러워해야 할 인생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이제라도 모두 내려놓고, 가능하다면 느릿느릿 이야기도 하며 웃기도 하고 쉬다 가다, 가다 쉬다 살면 안 될까요?”

최백호는 일흔 예찬론을 펼쳤다.

“70이 되니까, 뭐랄까 60 때하고 또 달라요. 옛말에 70이 되면 귀신이 보인다고 하던데, 정말로 70이 되니까, 죽음이 현실로 다가와요. 내가 얼마만큼 살겠냐 하는 게 보이고. 과거엔 스스로에게 ‘70까지만 견뎌내라. 그때부턴 죽어도 된다그랬거든요. 70이 되고, 누나가 그래요. ‘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요.

그 전에, 내가 겪은 고통, 그런 외로움, 갈등, 다 아파했던 시간이70이 되고 보니, 소중했던 순간이었다 싶어요. 70이 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어요. ‘절대 힘들어하지 마라. 지금 충분히 괜찮다, 이겨낼 수 있다. 겪어내라. 70이 되면 (삶이) 아름답고 그립게 느껴질 것이란 얘기를.”

70이 되면 뭔가 보입니까.

, 저는. 음악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예민해졌달까요, 묘하게도. 옛날에 했던(불렀던) 노래가 잘못됐다(잘못 불렀다)고 느껴져요. 그걸 알 수 있게 되니 70이 참 좋아요.”

매일매일이 정말 행복

그는 몇 년 사이 되게 아팠다고 했다. “심각하게 아파서 10kg 정도 빠졌는데 지금은 4~5kg 회복됐다는 것이다.

() 쪽이 좀 심각했죠. 아픈 시간을 겪으면서 많이 좀생각이 깊어졌고 말도 조심해서 하고.”

사람은 고통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나 보네요.

죽음을 마주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의사선생님을 잘못 만났어요. 그분이 표현을 잘못했어요. ‘당신이 그러면 극단적으로 갈 수 있다고 겁을 줬어요. 약을 안 먹으니까. 그때 큰 충격이었어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 과정을 이겨냈어요. 약을 안 먹고 그걸 극복했어요. 몸이 아플 때 노래하면 입에서 목에서 피가 났어요. 찰나앨범은 겨우겨우 녹음한 겁니다.

그렇게 이겨냈고, 지금 너무 좋아요. 지금 너무너무매일매일이정말 행복해요.”

이제 경지에 올랐나 봅니다.

.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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