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애도하는 방법, “괜찮아, 젠장, 좋다고!”/김태완(문장에 물들다 〈15〉)
‘사람들은 손바닥을 세게 누르며 생각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는 날 때부터/ 행각승이 되고 싶었다/ 세상에 온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도망 중일 때, 그들은 결국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일러스트=조선DB
한유주의 소설 《달로》(2006)
때로는 내 안으로 도망쳐야 할 때가 있다. 멀리 갈 수가 없다 해도 내 안은 미로니까. 남들이 길 안을 못 볼 테니까. 그런데 내가 내 안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지? 헤매다 헤매다 지쳐 쓰러져도 결국 내 안으로 돌아오겠지. 한유주의 소설 〈암송〉의 한 대목을 읽어본다.
〈모든 사람들이 도망 중일 때, 그들은 결국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삶이 되돌아오고, 그렇게 누구나 익사자들의 생을 살게 되는 그때. 하나의 음악에 두 귀가 휩쓸려가지 않도록, 자신만의 음악을 입안에 단단히 매어두는 그때. 사람들은 손바닥을 세게 누르며 생각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한유주의 소설 〈암송〉 중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것이다. 말하고 싶어 더 내면으로 도망치는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입속의 세 치 뼈, 한 덩어리의 혀가 감추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기억, 기억들. 말하고 싶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 말하고 … 싶다.’(〈암송〉 중에서)
하지만 이럴 때는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니 ‘안으로 닫혀 존재의 심연으로 깊어지면서 은유적인 독백 조로 웅얼거릴 수밖에 없다.’(우찬제 문학평론가)
알룩달록한 것을 만드신 신께 영광을 돌려라
박형서의 소설 《핸드메이드 픽션》(2011)
기적도 염치도 없는 비정한 현실에 맞서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나 자신을 애도하는 것이다. 애도하는 길은 세상이 원래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걸 받아들이는 식이다. 그러나 그렇게 끔찍하게 수치심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 “괜찮아, 젠장, 좋다고!”라고 외치는 배짱이 필요하다. 개가 당신 다리를 물면 당신도 개 다리를 물어보라. 절반은 두렵고 나머지 절반은 흥분으로 변해 심장에서 요동치리라.
오늘 하루만 당신 안에서 허풍쟁이가 되어보면 어떨까. 전쟁기념관의 귀주대첩 기록화 앞에서 지휘봉을 쥐고 먼 산을 향해 진군(進軍)을 외쳐보는 것이다. 미친 것일까. 한번 미쳐본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줘선 곤란하다. 박형서의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에 나오는 단편 〈나는 《부티의 천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를 소리 내 읽는다.
〈바로 이 순간부터 유럽에 닿기까지 이백 년에 걸친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궁금하면 내년이나 내후년에 나올 내 책 《부티의 천년》을 참고하시라.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을 예정이다. 전봇대로 이를 쑤시는 괴물과 맞닥뜨리고, 중동의 사막에서는 수압저울을 발명해 부자가 되기도 한다. 성인 독자를 위해 반쯤 벗은 아낙네들도 등장시킬 작정인데 특히 이 부분에는 스즈키 하루노부 풍의 우키요에를 손수 그려 넣을 참이니 조금만 기다렸다가 꼭 사 읽으시기 바란다. 최고급 스포츠카들의 폭풍 추격신도 고려했지만 때는 12세기였다.〉(박형서의 소설 〈나는… 쓸 것이다〉 중에서)
소설 속 ‘나’는 일종의 편집증 환자다. ‘내’ 소설의 아이디어를 누군가 갈취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 기존 유명 작품들이 죄다 ‘내’ 것이라며 씩씩거린다. 그러니 남이 빼앗지 못하도록 ‘나’는 장편소설 《부티의 천년》에 담을 내용을 장광설처럼 떠든다.
때로는 허풍쟁이가 되어보자. 나 자신에게 말이다. 그렇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겠지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가 시를 읽고 소설을 읽으며 문학을 논하는 것과 같다. 오늘부로 잠시잠깐 유별난 괴짜가 되어 판타지 작가를 꿈꾸는 것이다. 사사로운 관찰, 기묘한 환상, 기발한 착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알룩달록한 것을 만드신 신께 영광을 돌려라.
얼룩무늬 젖소처럼 두 겹의 색을 가진 하늘에,
헤엄치는 송어에 점점이 박힌 장밋빛 반점에,
갓 불붙은 석탄 같은 떨어진 알밤에, 작은 새의 날개에
목초지 휴경지 경작지로 조각조각 나뉜 풍경에,
그리고 모든 생업과 이를 위한 연장과 도구와 장비에,
완전히 다르고 독창적이고 진귀하고 기이한
변화무쌍하든 무늬가 있든(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누가 알까?)
빠름과 느림, 달콤함과 시큼함, 빛남과 흐림을 가진 이 모든 것에,
아름다움을 초월한 신을,
그를 찬양하라
-영국 시인 홉킨스의 시 ‘다채로움의 아름다움(Pied Beauty)’ 중에서
목자는 이리로 표변하고…
우리를, 나를 누르는 압력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지자. 혹세무민의 요설가가 되어 세상을 걱정거리로 만들어보자. 아니면 말고 식이다. 이렇게 말하고 웃음을 참아보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2016년)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목자는 이리로 표변하고, 사제는 거짓 증언을 밥 먹듯이 하고, 수도사는 속세를 탐하고, 거러지는 두목을 대접하지 않고, 부자는 자비를 잃고, 정의는 오로지 불의만을 편들 것입니다. 도시는 지진에 흔들릴 것이요, 만방에는 역질이 만연할 것이며, 폭풍우는 땅을 뿌리째 뒤집을 것이요, 달에서는 이변이 일어날 것이며, 별은 제 길을 잃으면서 미지의 별이 나타나 하늘을 갈고 다닐 것이요, 계절이 미쳐 여름에는 눈이 오고 겨울에는 폭염이 내릴 것입니다. (하략)〉(에코의 《장미의 이름》 중에서)
그리고 아주 디테일하게 무언가를 묘사하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것을 아주 신화적으로. 왜? 내 안의 상상력에 혼을 불어넣어 만들어질 형상을 꿈꾸는 것이니까. 나는 성주(城主)이고 내 백성을 즐겁게 만들 책임이 있으니까. 성주로서 베풀 선물이자 특권으로서 상상력에 생기를 부여한다. 터무니없는 뒤집기, 묵직한 성경마저 희화화시킨다. 이런 식이다.
〈벌렁 나가떨어진 아담이 트림을 시작하자 갈비뼈 사이에서 포도주가 쏟아져 나왔다. 노아는 잠결에 함을 저주했고, 홀로페르네스는 코를 골았고, 요나는 나 몰라라 하고 잠을 잤고, 베드로는 닭이 울 때까지 깨어 있었고, 예수님은 처녀를 화형에 처할 음모를 꾸미는 베르나르 기와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의 귓속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 잔이 제게서 비켜가게 하소서’ 하고 외치셨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 끄덕도 않고 마시는 사람, 웃으면서 죽어가는 사람, 죽어가면서 웃는 사람, 통째 마시는 사람, 남의 잔으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하략)〉(에코의 《장미의 이름》 중에서)
문학은 거짓을 앞세우는 양식이다. 거짓을 양식화하는 양식이다. 마치 어두운 색 공들 사이에 밝은 색 공을 던져 뒤섞듯이 여러 거짓 속에 진실을 드러낸다. 거짓 속에 숨은 진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소설이요 문학이다. 불행한 사건 사고로 가득한 신문 사회 면에 손바닥 반만 한 미담 기사를 발견하듯 말이다. 진실을 거짓더미 속에서 발견할 때 더 가치가 있다고 믿는 식이다. 거짓 속에 휩쓸려 진실이 질식해버릴지라도, 진실의 운명이 그런 법이니까.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중국의 은전. 사진=numista
문학은 피천득(皮千得·1910~2007년)의 수필 〈은전 한 닢〉에 나오는 ‘은전’일지 모른다. 가공(架空)할 삶의 목적, 현실의 고통을 극복할 용기,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내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새로운 도전과 극복이 ‘은전 한 닢’이리라. 수필은 피천득이 중국 상하이에서 겪은 일을 썼다.
늙은 거지 하나가 전장(錢莊·돈 바꾸는 집)에 가서 떨리는 손으로 일원짜리 은전 한 닢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 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주십시오.”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이 전장 사람의 입을 쳐다본다. 전장 주인은 거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돈을 두들겨 보고 “하오(좋소)” 하며 돈을 내어줬다.
그는 ‘좋소’라는 말에 기쁜 얼굴로 돈을 받아서 가슴 깊이 집어넣고 또 다른 전장을 찾아 들어갔다. 품속에 손을 넣고 한참 꾸물거리다가 그 은전을 내어 놓으며 다시 “이것이 정말 은으로 만든 돈이오니까?” 하고 물었다.
전장 주인은 호기심 있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 돈 어디서 훔쳤어?”라고 다그쳤다.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천득 선생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길바닥에서 주웠다는 말이냐?”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빠뜨립니까? 떨어지면 소리는 안 나나요? 어서 도로 주십시오.”
거지는 손을 내밀었다. 전장 사람은 웃으면서 “하~오(좋소)” 하고 던져주었다.
그는 얼른 집어서 가슴에 품고 황망히 달아났다. 뒤를 흘끔흘끔 돌아다보며 얼마를 허덕이며 달아나더니 별안간 우뚝 섰다. 서서 그 은전이 빠지지는 않았나 만져보았다. 거친 손가락이 누더기 위로 그 돈을 쥘 때 그는 다시 웃었다. 그러고 또 얼마를 걸어가다가 어떤 골목 으슥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더니 벽돌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돈을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았다. 피천득 선생이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누가 그렇게 많이 도와줍디까?”
그는 선생의 말소리에 움찔하면서 돈을 가슴에 숨겼다. 그러고는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했다.
〈“염려 마십시오, 뺏어가지 않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하였다.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는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였다.
“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원짜리를 줍니까? 각전(角錢·1전이나 10전 따위의 잔돈-편집자) 한 닢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여섯 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대양(大洋·중국 화폐인 은전을 가리킴-편집자)’ 한 푼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얼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문학은 꼭 내게 필요 없는 ‘은전 한 닢’일지 모른다. 너무나 갖고 싶은, 그러나 내게 없다 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날 것도 아닌, 그래도 꿈을 꿀 수 있는 게 ‘은전’이다. 은전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은 빵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은전 한 닢’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 목숨과 바꿀 수도 있다. 어두운 다락방, 오래 묵은 단어로 가득한 삶의 어둑한 진실이 문학이요 ‘은전 한 닢’이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학이 진실을 드러내는 거짓의 양식이라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노(老)시인 이문길(李文吉·84)의 작품들은 정색을 하고 진실을 말한다. 그에게 문학은 궁극의 장르다. 거듭거듭 진실에 다가서려 한다. 시인은 최근 시집 《초가삼간 오막살이》(브로콜리숲)를 펴냈다. 시 ‘행각승’과 ‘걱정’을 소개한다.
나는 날 때부터
행각승이 되고 싶었다
세상에 온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기 전부터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나는 갈 곳이 없어도 가는
행각승이 되고 싶었다
사는 것이 싫으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 늙어서야 시인이 되었지만
시인이 싫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시인보다
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무도 안 볼 때 구름처럼
혼자 산을 넘어가는 행각승이 되고 싶었다
-이문길의 시 ‘행각승’ 전문
시인이 왜 ‘세상에 온 것이 싫’은지 알 순 없지만 그가 느끼는 게 진실이라면 그는 시인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늘 행각승을 꿈꾸었다. 행각승을 택할 수 있었음에도 되지 않았다. 왜? 삶이 행각승과 다를 게 없으니까. 그는 운명론자처럼 ‘가던 길을 계속 갔’고, 마흔이 넘어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되었지만 시인이 싫었다고 고백한다. 행각승을 꿈꾸었지만 행각승이 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모순이다. 삶은 모순이니까, 독자는 그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다. 시 ‘걱정’과 ‘새 한 마리’를 소개한다.
새벽까지
불 켜놓고 있는 집을 보고 있으면
걱정이 된다
옛날 젊었을 때
우리 부부처럼
싸우느라 밤새도록
불 켜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왜 싸웠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그때 왜 싸웠는지
알 수가 없다
-이문길의 시 ‘걱정’ 전문
잊히지 않는다
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저녁 무렵 지금은 없어진
옛 대구농고 커다란 전봇대 나무
매타쉐콰이어에
어디서 날아와 잠들어 버리던
비둘기만 한 새 한 마리
한평생 잊히지 않는다
앉자마자 솔방울같이 잠들어 버리던
새 한 마리
-이문길의 시 ‘새 한 마리’ 전문
그날 이후 나는 하늘을 쳐다보는 교인이 되었다
가끔 밤늦게 불 켜진 아파트 창을 본다. 밤새 꺼지지 않는 창. 누가 살고 있을까.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있을까. 밤새워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을까. 밤새워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있을까. 시인은 걱정이 된다. ‘싸우느라 밤새도록/ 불 켜둔 것’은 아닐까 하고. 시인은 공감(共感)하는 이다. 공감하는 마음이 없으면 시인이 될 수 없다.
1939년생인 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수료하고 마흔둘 되던 1981년 첫 시집 《허생의 살구나무》를 펴냈다. 이후 17권의 시집을 냈다. 그리고 시산문집 《석남사 도토리》, 동시 선집 《눈물 많은 동화》 또한 펴냈다. 두 책은 작년에 나왔다. 노시인의 산문 〈망했다〉를 소개한다.
〈언제던가 나와 아내 딸 셋이서 청도 운문사에 간 적이 있다. 방문객은 우리뿐이었다. 그날 성철 스님이 오셔서 비구니들에게 법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범같이 무섭게 생긴 성철 스님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스님은 이상하게도 말씀을 하시다가 자꾸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큰 소나무 아래에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그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왜 중이 되었나 물어보고 싶어 해인사 산골짝 끝에 있는 암자를 찾아갔다. 마침 스님은 출타 중이시고 웬 젊은 중 하나가 나를 보고 숨어버리는 통에 하는 수 없이 담 아래 자라고 있던 담쟁이덩굴만 몇 개 뽑아와 집담 밑에 심었더니 잘도 자랐다. 그러나 3년을 지나지 않아 담쟁이는 담을 넘어 이웃집으로 건너가 할 수 없이 모두 뽑아버리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성철 스님에게 딸 하나가 있는데 그 딸도 승려가 되었고 스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성철 스님 집안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슬펐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 어느 날 대구 동인동 교회 문 앞에서 김치대 목사님이 나를 보고 말했다. 너를 보면 자꾸 위대한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목사님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목사님은 내가 쓴 시를 좋아했다. 어느 날 내가 술에 취해 목사님을 보고 “하나님이 정말 있어요 없어요” 하고 자꾸 물었더니 목사님은 “내가 우예 아노” 하고 도망을 갔다. 그날 이후 나는 하늘을 쳐다보는 교인이 되었다.
(중략)
그 후 세월이 훨씬 지나 어느 날 누가 김수환 신부님에게 신부님은 5개 국어를 잘하신다고 하는데 무엇을 제일 잘하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신부님이 웃는 얼굴로 대답하시길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쳐다보는 교인이 되었다.
내가 평생 기를 쓰며 안 것은 세상 생명은 저승이 없다는 것이다. 나같이 저승이 없어 갈 곳이 없어 망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이문길의 산문 〈망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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