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③ 네덜란드/박희석
끝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전쟁 ③ 네덜란드
“법적 책임 끝났지만, 역사 왜곡은 안 돼”
네덜란드 정부, “태평양전쟁 당시 인니(印尼)에 유럽 출신 일본군(日本軍) 위안부 200~300명”
일본군(日本軍), 임신한 13세 소녀(少女) 강간… 출산 직후 아이 죽이고 사체 유기
“일본군(日本軍) 위안부 피해자 중 네덜란드 남성(男性) 최소 4명 있다”
바타비아전범재판소, 네덜란드 여성 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일본군(日本軍)에 사형(死刑) 선고
“일본군(日本軍), 미영독불(美·英·獨·佛 )여성도 위안부로 동원… 헝가리·아랍 여성도 있어”
네덜란드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회원들이 주네덜란드 일본대사관 앞에서 248번째 ‘화요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은 매달 둘째 주 화요일에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다.
7월 14일 화요일 오전 11시40분, 네덜란드 헤이그 일본대사관 부근. 현지 경찰 순찰차들이 길목을 막고 있었다. 현지 경찰들은 그 주변을 순찰하고 있었다. 일본대사관 정문 맞은편에선 네덜란드인 30여 명이 ‘노란 우산’을 들고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 뒤엔 “일본은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고문해 죽였다” “일본은 책임져라!” 등의 문구를 적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한 남성이 기자를 보며 “리틀보이와 팻맨이 내 삶을 구원했다. 고맙다!”고 소리쳤다. 리틀보이는 미국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팻맨은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코드명이다.
집회를 준비하는 이들은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회원들이었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은 태평양전쟁(1941년 12월~1945년 8월)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에게 피해를 당한 네덜란드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1990년 발족한 민간단체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은 1994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매달 둘째 주 화요일에 주네덜란드 일본대사관 앞에서 구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규탄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집회를 연다. 이른바 ‘화요 집회’다.
“아베, 전쟁범죄 피해자들 존중하라!”
바흐덴동크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대표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이 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네덜란드인은 350~500명”이라고 추정했다.
정오 무렵, 바흐덴동크 대표를 비롯한 재단 임원진이 일본대사관 안으로 들어갔다. 주네덜란드 일본 대사는 매달 ‘화요 집회’가 있을 때마다 바흐덴동크 대표와 20~30분씩 면담을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 집회’에 주한 일본 대사가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담소를 나누며 임원진이 나오길 기다렸다. 20분 뒤, 일본 대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나온 바흐덴동크 대표가 집회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의식은 일본군에게 목숨을 잃거나 착취당한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애도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1분 정도 묵념을 했다. 이어 바흐덴동크 대표가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의 248번째 청원서를 낭독했다. 다음은 그중 일부다.
“아베신조(安倍晋三) 총리, 당신과 당신의 전임자들은 무례하게도 지난 25년 동안 우리가 보낸 청원서 247통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자국의 전쟁범죄에 희생당한 이들을 멸시하고 있다는 걸 뜻합니다. (중략) 올해는 2차대전 종전 70주년입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기에 적절한 순간입니다. 아베 총리, 우리는 당신이 일본제국 군대의 전쟁범죄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할 것을 촉구합니다.”
청원서 낭독이 끝나고, 집회 참가자들은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 우산’을 활짝 폈다. 그리고 “어떻게 내가 이 끔찍한 지옥 우리에 와 있는 건가요?”로 시작하는 ‘포로의 노래’를 제창하고 집회를 마무리했다.
日本軍 수용소에서 네덜란드人 2만1000명 사망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항목 중엔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있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 1940년 5월, 독일군은 영국과 프랑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네덜란드를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이때부터 1945년 5월 5일 해방을 맞기까지, 약 5년 동안 독일 치하에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는 독일의 동맹국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1월 동남아 최대 석유산지인 인도네시아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보르네오, 수마트라, 자바 순으로 점령하면서 인도네시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패망 때까지 인도네시아에 주둔하면서 네덜란드인과 인도네시아인을 대상으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곳곳에 수용소를 만들었다. 네덜란드 군인과 민간인을 잡아넣기 위한 용도였다. 1942년 1월~1945년 8월까지, 일본군은 ▲군인 4만2000여 명 ▲민간인 11만여 명 등 15만여 명의 네덜란드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강제 노역과 폭행, 고문과 같은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했다. 그 결과 네덜란드 군인 8400여 명, 민간인 1만3000여 명이 일본군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또 일부 여성 수용자를 ‘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해 조직적인 ‘성적 착취’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
“日本軍, 13~14세 少女 위안부로 끌고 갔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회원들은 태평양전쟁 시기 2~3년 동안 일본군 수용소에 갇혀 지낸 피해자들이다. ‘화요 집회’ 현장에서 만난 이 단체 회원들은 수용소에 있을 당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네덜란드 여성들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자네트 베이넌(78)은 “수용소에 있을 때 어느 날 일본군이 여자들을 집합시킨 후, 몇 명을 트럭에 태우더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며 “지금 생각해 보면 위안부로 데려간 것 같다”고 말했다.
집회 참가를 위해 미국에서 왔다는 네덜란드계 미국인 엘리자베스(81)와 그녀의 동생도 “일본군이 네덜란드 소녀 6명을 강제로 끌고 가는 걸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저는 어려서 일본군이 왜 그 소녀들을 끌고 가는지 몰랐어요. 나중에 어른들이 ‘그들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이라고 말해줘서 알게 됐죠. 그때 제가 열 살이었고, 끌려간 사람들은 13~14세쯤 됐었던 것 같아요.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겪었을지 생각하면, 같은 여자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얀 루프 오헤른(92)이다. 네덜란드계 호주 여성 오헤른은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 증언을 접한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은 치욕을 공개했다. ‘서구권 여성’ ‘백인 여성’으로선 최초의 증언이었다. 오헤른은 또 1994년에 자신의 위안부 피해 사실을 기록한 《50년의 침묵》이란 책도 냈다.
오헤른의 증언을 계기로, 네덜란드 정부는 1993년 8월 자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4개월 동안 조사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현재 입수 가능한 문서’에 따르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한 유럽 여성 200~300명 중 65명은 거의 확실히 강제로 매춘에 종사했다”고 결론 내렸다.
당초 기자는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 단체들이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개최하는 ‘수요 집회’를 떠올리며, 네덜란드 ‘화요 집회’에서 현지 위안부 피해자를 만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위안부 피해자는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네덜란드 여성은 호주에 사는 오헤른과 2013년에 사망한 엘렌 판 데르 플뢰그, 두 사람뿐이다.
“네덜란드 日本軍 위안부 피해자는 350~500名”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수용소에 갇힌 네덜란드 남성들. 1942~1945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현지 거주 네덜란드 민간인 11만여 명, 군인 4만2000여 명을 수용소에 가두고 학대했다.
하지만 두 사람 외에도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다수 존재한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은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수를 350~500명으로 추정한다.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이 인정한 피해자만 해도 78명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이란, 1995년 일본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일본 정부의 공식 배상이 아닌, ‘도의적 보상’을 하기 위해 만든 민간 법인이다.
참고로 국내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했고, 국내 위안부 피해자 283명 중 222명이 아시아여성기금의 위로금을 거부했다.
1998~2001년, 아시아여성기금은 네덜란드사업실시위원회란 현지 민간단체를 통해 피해자 106명의 비공개 증언을 접수했다. 이 중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입증한 78명은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의료보조비 명목으로 각각 200만 엔을 받았다.
작가 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그리셀다 몰레만스(51)는 아시아여성기금 위로금 수령자 중엔 남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몰레만스는 내년 5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서적 출판을 목표로 수년 전부터 네덜란드와 미국, 영국, 호주 등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다음은 그녀의 말이다.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위로금을 받은 78명 모두가 여성은 아닙니다. 그중엔 남성도 있습니다. 돈을 받기 위해선 증언을 해야 합니다. 그 증언을 기록한 문서가 네덜란드 국립기록물보관소에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최소한 남성 4명이 일본군에게 지속적으로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망가졌죠. 이건 지금까지 전혀 다뤄지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신문에 기고한 후 한 남성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13세 少女가 겪은 강간→임신→낙태→강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미힐스 크라크가 6세 때 어머니와 찍은 사진. 그녀는 13세 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3년 동안 성(性)노예 생활을 했다.
기자는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듣기 위해 네덜란드사업실시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인사에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비공개 증언을 한 피해자들은 자신의 일이 외부로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릴 뿐 아니라 다들 고령이라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도 많다”며 난감해 했다.
대신 이 활동가는 자신과 가깝게 지내던 피해자 미힐스 크라크(2007년 사망)의 딸 리아 버베르너(66)를 연결해 줬다.
버베르너에 따르면 크라크는 1929년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자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라크의 아버지는 농장을 운영했다. 그 덕분에 크라크는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1942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하면서 그녀는 어린 나이에 큰 고초를 겪는다. 다음은 버베르너가 얘기한 크라크의 피해 사실을 요약한 것이다.
〈크라크는 6세이던 1935년 가톨릭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녀가 13세가 된 1942년 3월, 바타비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기숙학교를 폐쇄했고, 크라크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집엔 어머니 혼자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쟁 발발 후 네덜란드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싸우다 붙잡혀 태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몇 달 후, 집에 머물던 두 모녀에게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바타비아에 있는 치댕 수용소로 두 사람을 끌고 갔다. 성인과 미성년자를 분리 수용했기 때문에 크라크는 입소 직후 어머니와 헤어졌다. 일본군은 크라크에게 항공대 막사 청소, 의류 세탁과 다림질 등을 시켰다.
어느 날 막사 복도 청소를 하던 크라크에게 일본군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히죽거리면서 그녀를 방으로 끌고 가 윤간했다. 당시 크라크는 13세였다.
그날 이후, 일본군들은 하루에도 수차례씩 그녀를 덮쳤다. 얼마 뒤, 크라크는 아이를 가졌다. 이를 알게 된 일본군 군의관은 강제로 낙태를 시켰다. 일본군은 낙태하고 온 그녀를 또 겁탈했다. 크라크는 얼마 뒤 또 임신을 했지만, 일본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했다.
1943년 10월, 크라크는 아들을 낳았다. 일본군은 막 태어난 아이를 죽이고, 시신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당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우는 것뿐이었다.
출산 후 크라크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때 크라크에게 접근한 사람이 일본군 장교 요시다였다. 그는 크라크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갔다. 지금까지 크라크가 겪은 일본군과 달리 친절했다. 밥도 잘 챙겨줬다.
크라크는 요시다가 자신을 딱하게 생각해 잘해주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크라크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요시다는 그녀의 몸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이후 요시다는 매일 밤 크라크를 강간했다. 그 결과 크라크는 요시다와의 사이에서 다케시(1944년 10월)와 아키라(1945년 8월)를 낳았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연합군은 인도네시아에 주둔하던 일본군 장교들을 체포했다. 요시다도 잡아갔다. 크라크는 두 아들과 함께 고향 집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후 석방된 요시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엄청난 고통 평생 안고 산 엄마… 너무 불쌍해”
크라크의 딸 버베르너는 “엄청난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야 했던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고 말했다.
“제가 어릴 때 엄마는 항상 화난 상태였어요. 자주 아프기도 했고요. 왜 그렇게 아픈지, 왜 우리에게 그렇게 신경질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엄마가 놀아주지 않으니까 무척 섭섭했어요. 그런데 언젠가 엄마 몸에 난 상처를 봤어요. 온몸에 학대를 당한 흔적이 있었어요. 등 쪽엔 담뱃불로 지진 자국도 있었고요. 그걸 보고 ‘옛날에 엄마가 안 좋은 일을 겪었구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모친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란 사실을 언제 알았습니까.
“1994년입니다. 자식들 다 키우고 시집·장가 보낸 다음에 말씀하셨어요.”
—50여 년 만에 ‘비밀’을 밝힐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요시다가 데려간 두 아들을 만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까 답답하셨던 거죠.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의사에게 얘기했어요. 그 의사는 가족들에게 얘기하고 협조를 구하라고 조언했고, 그 이후 우리 9남매에게 모든 걸 말씀하신 거죠.”
—당신의 부친은 자기 부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란 걸 알고 있었나요.
“아버지는 결혼 전에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계셨어요.”
—모친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란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그전부터 뭔가 어렴풋이 짐작한 게 있었으니까 많이 놀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왜 좀 더 일찍 말씀하시지 않았는지…. 그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큰딸인 저한테만이라도 말씀해 주셨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을 텐데…. 엄마가 너무 불쌍했어요.”
—당신의 어머니는 생전에 일본으로 간 두 아들을 만났습니까.
“아니요. 엄마는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 국왕에게 편지도 쓰고, 일본 흥신소에 의뢰해 두 아들을 찾아달라고도 했었어요. 하지만 성과는 없었어요. 결국 엄마는 ‘아들들이 보고 싶다.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꼭 찾아서 만나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군의관, 性病 검사한다면서 겁탈… 포주도 덮쳐
네덜란드 위안부 관련 단체 대표를 역임한 작가 마르게리트 하메는 “진실을 왜곡하는 아베는 정말 끔찍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인 네덜란드사업실시위원회 이사장을 역임한 작가 마르게리트 하메(74)가 2013년 8월 출간한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 《상처받은 꽃》에서 ‘엘렌’이란 여성의 피해 사실을 요약한 것이다.
〈1942년 3월, 엘렌은 부모님, 동생과 함께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항구 도시 수라바야 교외에 살고 있었다. 당시 엘렌은 막 중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비서로 취직했다. 하지만 얼마 후 일본군이 쳐들어와 일자리를 잃었다.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났을 때 일본군은 엘렌과 그녀의 어머니를 자바섬 중부 지역의 암바라와 수용소로 보냈다.
1년8개월이 지났다. 일본군은 엘렌을 비롯한 100여 명의 여성에게 “담배공장에서 일해야 한다”며 짐을 꾸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들은 자기 딸을 끌고 가지 말라며 눈물로 애원했다. 일본군은 총을 휘둘러 그들을 제압하고, 소녀들을 트럭에 태워 스마랑 위안소로 끌고 갔다. 거기엔 더 많은 소녀가 먼저 와 있었다. 일본군 장교는 소녀들에게 일본어로 작성한 서류를 내밀면서 서명을 강요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서류엔 “자유의사에 따른 겁니다”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튿날 엘렌은 성병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 병원 안에서 소녀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렌은 ‘보통 검사’가 아니란 걸 직감했다. 군의관은 엘렌을 검사실로 끌고 가 바지를 벗기고서 책상 위에 눕혔다. 엘렌은 몸부림쳤다. 하지만 일본군 두 명이 그녀의 몸을 꽉 붙잡고 있어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군의관은 그녀를 능욕했다.
그날 저녁, 한 일본군 장교가 엘렌을 덮쳤다. 엘렌은 “손대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 장교는 엘렌의 뺨을 수차례 때린 다음 그녀의 옷을 벗기고 강간했다. 장교의 뒤를 이어 군의관과 포주가 들어와 엘렌을 겁탈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엘렌은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그 뒤 엘렌은 매일 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엘렌은 그 사이 임신을 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죄의식을 느끼며 낙태를 했다.
엘렌의 지옥 같은 위안소 생활은 두 달 뒤에 끝났다. 일본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위안소를 폐쇄하고, 소녀들을 원래 있던 수용소로 돌려보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엘렌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바타비아에 머물다가 네덜란드로 갔다.〉
“日本軍, 24개국 女性 위안부로 강제동원”
이런 증언 외에도 일본군이 네덜란드인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한 걸 뒷받침하는 근거는 많다. 그중 가장 명확한 건 194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바타비아 임시국제군법회의의 판결이다. 당시 재판부는 1944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위안소’로 강제연행하고, 매춘을 강요한 일명 ‘스마랑 사건’과 관련해 오카다 게이지(岡田慶治) 일본 육군 소좌에게 사형, 나머지 11명의 일본인에겐 징역 2~15년형을 선고했다. 이 재판 결과는 후일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편 작가 몰레만스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중엔 한국, 중국, 네덜란드, 동남아 국가들뿐 아니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구미권 국가도 여러 곳이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그녀의 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목격자들의 진술서에 따르면 자바섬의 블로라에는 독일과 헝가리 여성 위안부가 각각 1명씩 있었습니다. 팔렘방의 탈랑 캠프 장교위안소에선 호주 간호사 4명이 매춘을 강요받았습니다. 암본의 몰루칸섬엔 아랍 여성 1명이 일본군 장교의 위안부로 있었고요. 하루쿠섬 파페다곶 근처 일본군 기지의 위안소엔 자바와 메나도에서 잡혀온 미국·호주 여성이 위안부로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일본군은 총 24개국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습니다.”
아베, 2007年부터 ‘고노 담화’ 무력화 시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07년 1차 집권 때부터 과거 일본 정부가 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를 부정해 왔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일본 관방장관은 일본군과 관헌이 위안부 모집, 위안소 설치·운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한,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나아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위안소가 설치되고, 많은 수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중략)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에서 처참한 것이었다. (중략)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본 건은 당시의 군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낸 문제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겠다.—‘고노 담화’에서 발췌〉
이후 일본 정부는 한동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고노 담화’를 계승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제1차 집권 때인 2007년 3월 “정부가 발견한 자료에는 군·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직접 보여주는 것과 같은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고노 담화’를 부정했다.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는 ‘고노 담화’ 수정론을 주장했고, 지난해엔 ‘검증’하겠다고 나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반발을 자초했다.
“아베, 사죄 안 할 것… 日王이 나서야”
무라오카 다카미쓰 레이던대 명예교수는 “과거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과 인권 유린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구역질나는 범죄’”라고 비판했다.
아베 정권의 ‘고노 담화’ 흔들기에 대해 작가 하메는 “진실을 왜곡하는 아베는 정말 끔찍한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일본이 자행한 어두운 과거사를 감추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2차대전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비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아베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사이 위안부 피해자들은 세상을 뜨고 있습니다. 아베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죽을 때만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무라오카 다카미쓰(77) 네덜란드 레이던대 명예교수도 “아베가 ‘고노 담화’를 부인하는 건 피해자들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무라오카 교수는 2008년 네덜란드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주제로 《강제연행》이란 책을 집필했다. 또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사로 지난 5월엔 일본 기독교계 인사들로 구성한 ‘사죄와 화해 방문단’의 단장으로 방한(訪韓)했었다.
무라오카 교수는 “과거 일본군이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성적 착취를 하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한 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구역질나는 범죄’”라며 “과거 정권이 한 사과마저 부인하는 아베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무라오카 교수는 “일본 정부는 반드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을 비롯한 피해국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솔직하게 과거를 정리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그렇다면 국왕이 나서야 합니다. 그가 정직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사죄하는 것만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1941년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서 태어난, 프랭크 판 카펜 자유민주국민당(네덜란드 집권 여당) 상원 의원도 일본의 사죄를 요구했다.
“일본은 2차대전 당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독일처럼 철저한 자기반성, 피해자들에 대해 사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피해자뿐 아니라 일본 국민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야 일본 국민이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으니까요.”
“네덜란드 정부, 對日 교역 감소 우려해 소극적 대응”
네덜란드 하원도 예전부터 일본의 과거사 왜곡 시도를 비판해 왔다. 2007년 당시 아베 총리의 ‘고노 담화’ 부정 발언과 관련해 네덜란드 하원은 그해 11월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2011년에는 일본 정부에 ▲고노 담화와 상충하는 발언 금지 ▲생존 피해자 대상으로 한 도덕적·금전적 배상 실시 ▲교과서 등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알릴 것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의 태도는 의회, 민간단체와 조금 다르다. 바흐덴동크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 대표는 네덜란드 정부가 일본 정부의 과거사 왜곡 시도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비판했다. 작가 하메와 몰레만스도 같은 주장을 했다.
지난해 6월 20일 일본의 ‘고노 담화 검증팀’은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 이사회에 〈고노 담화 검증 결과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일본이 ‘고노 담화’를 작성할 때 한국 측을 배려해 줬다는 것이다.
‘고노 담화’ 중 일본군 ‘위안부’ 모집과 관련해 ‘군의 의향을 따른 업자’란 당초 문구에 대해 우리가 ‘군 또는 군의 지시를 받은 업자’로 표기하자고 했고, 이에 일본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로 수정했다는 주장이다.
‘고노 담화’는 일본의 자체 조사·판단을 기초로 한 게 아니라, 사실과 다른 문안을 한국이 요구해 상당 부분 반영했다는 것이다.
우리 외교부는 즉각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당시 일본 측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비공식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였던 것뿐”이라며 “우리 정부는 진상 규명의 경우 양국 간 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었다”고 반박했다.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도 네덜란드 현지에서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며 일본의 ‘고노 담화 검증’을 규탄했다. 또 마르크 뤼테 네덜란드 총리에게 ‘고노 담화’ 검증 결과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일본 총리에게 항의해 달라고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하지만 네덜란드 외교부는 고노 담화 검증 관련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바흐덴동크 대표는 “네덜란드 정부가 일본과의 교역 감소를 우려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여타 일본군 위안부 관련 활동가들도 같은 주장을 했다.
[인터뷰] 崔鍾賢 駐네덜란드 대사
“大使 부임 직후 네덜란드 위안부 피해자 관련 단체 대표 면담… 활동 지원”
최종현 대사는 1985년 공직에 입문한 이래 외교통상부 정보상황실장과 정책기획심의관, 주(駐)오만 대사, 의전장 등을 역임했다. 주오만 대사 근무 시절엔 삼호주얼리호 구출 작전(2011년 1월)과 관련해 ▲부상자 호송 헬기 지원 ▲현지 군 당국의 함정 지원 등 오만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 국내 언론으로부터 ‘작전 성공의 숨은 주역’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 부임한 최 대사는 “부임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네덜란드 각계각층의 인식 제고를 위해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
—네덜란드에서 한국의 위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한류 동호회도 생기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를 배우려는 사람도 늘고 있습니다. 일례로 기존에는 네덜란드 대학 내에 한국 관련 강의는 이 나라 최고 명문 레이던대학에만 있었는데, 최근 흐로닝헨대학에 석사 과정 학생들이 듣는 ‘한국 경제 발전’ 관련 강의가 개설됐습니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긴밀합니까.
“1641년에도 막부가 쇄국을 하고 1854년 미국에 의해 개항할 때까지, 일본과 교역한 구미 국가는 네덜란드가 유일했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네덜란드의 주요 교역국입니다. 네덜란드 정부도 경제통상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긴밀한 사이입니다.”
—지난해 10월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은 일왕과 아베 총리가 참석한 만찬장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만행, 네덜란드 희생자들의 고통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실제 네덜란드인들의 대일 감정은 어떻습니까.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에도 반일(反日) 감정은 있습니다. 특히 과거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했을 때 그들의 행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피해자와 그 가족인 경우,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경우엔 우리나라와 비슷한 대일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네덜란드 대사로서 이와 관련해 부임 이후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지난해 11월 부임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연대 구축 차원에서 네덜란드 민간단체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그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도의적 책임을 묻는 재단’의 바흐덴동크 대표는 부임 직후 면담했고, 그 뒤에도 자주 만나 일본의 과거사 왜곡 언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 바흐덴동크 대표를 소개하고, 그의 활동상을 알리는 등의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나요.
“네덜란드 정부는 1956년 일본과 ‘네덜란드 국민의 특정 유형의 개인청구와 관련된 문제 해결을 위한 네덜란드-일본 의정서’를 체결했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있습니다. 단,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 수정 시도를 비롯한 과거사 왜곡 문제에 대해선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세계적으로는 2차 대전 종전 70주년입니다. 주네덜란드 대사관에선 이와 관련해 어떤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주네덜란드 대사관이 있는 헤이그는 1907년 이준(李儁) 열사가 순국한 곳입니다. 우리 동포 한 분이 당시 이준 열사가 묵었던 호텔을 매입해 ‘이준 열사 기념관’을 개관했습니다. 대사관은 현재 ‘이준 열사 기념관’과 함께 8월 15일에 광복 70주년 및 기념관 개관 20주년 행사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지난해 10월 일본을 방문한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은 아키히토 일본 국왕과 아베 총리가 참석한 만찬 석상에서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에 희생당한 네덜란드인과 그 가족들의 슬픔에 대해 언급했다.
네덜란드는 대외 개방형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란 얘기다. 네덜란드의 2014년 기준 연간 교역 규모는 1조2413억 달러다. 중국,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 5위다. 6위를 차지한 한국(1조982억 달러)보다 1431억 달러나 많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4년 네덜란드 연간 국내총생산 7494억 달러 대비 재화·용역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88%(6568억 달러)에 달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 ‘안정적인 대외 관계’를 유지하는 건 ‘생존’이 걸린 일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에 일본은 그리 큰 시장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2014년 국가별 수출 현황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네덜란드에 가장 큰 수출 시장은 중국이다. 대중(對中) 수출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 정도다. 대일(對日) 수출 비중은 이보다 훨씬 낮다고 얘기할 수 있다. 수입의 경우엔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다. 따라서 네덜란드 정부가 ‘교역 감소’를 걱정해 일본의 과거사 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와 관련, 네덜란드 외교부에 공식 입장을 확인했다. 일로나 데 르아이터 네덜란드 외교부 공보관은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충격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와 일본은 지난 400년 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양국은 현재 여러 방면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역사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지난해 10월 우리 국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는 아키히토 일본 국왕과 아베 총리가 참석한 연회장에서 제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희생당한 네덜란드인과 그 가족들의 슬픔을 얘기했습니다. 또 외교부 장관은 일본을 방문하기 전에 민간단체 대표를 만났습니다.”
지난해 10월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은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그는 아키히토 일본 국왕, 아베 총리가 참석한 만찬장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 민간인과 병사가 체험한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전쟁의 상처는 지금도 많은 사람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희생자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네덜란드 정부, “日, 배상·사죄 이미 했다”
르아이터 네덜란드 외교부 공보관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는 1951년 일본과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체결로 전쟁피해 관련 청구권 문제를 정리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승전한 연합국 48개국이 일본의 전후 처리방안에 대해 합의한 조약이다. 이 조약 14조에 따라 연합국은 전쟁피해 관련 대일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
이에 일본은 1956년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국민의 특정 유형의 개인청구와 관련된 문제 해결을 위한 네덜란드-일본 의정서’를 조인하면서 “전쟁포로와 무고한 시민을 억류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다”면서 자발적 위로금 1000만 달러를 건넸다. 이로써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배상 문제는 마무리됐다는 게 네덜란드 정부의 입장이다.
사과 문제도 마찬가지다. 르아이터 공보관은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과 하시모토 당시 일본 총리 명의의 사과 편지를 전했다”면서 이미 일본은 충분한 사과를 했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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