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구사일생
‘사자의 도시’ 싱가포르 공화국(Republic of Singapore)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도시국가이자, 놀라운 경제발전을 통하여 작지만 강하고 부유한 강소부국(强小富國)의 대명사로 통한다. 현재는 1인당 GDP 아시아 1위(88.450달러, 세계 5위)에 빛날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불과 약 200년전만해도 싱가포르는 쓸모없는 늪지대로 둘러싸인 ‘죽음의 섬’에 불과했다.
열악한 지리적 환경과 강대국의 수탈, 수많은 정치적 격동기를 딛고 싱가포르는 어떻게 오늘날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글로벌 경제강국으로 올라설수 있었을까. 또한 싱가포르의 화려하고 빛나는 성공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는 무엇일까.
7월 2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61회에서는 ‘죽음의 섬 싱가포르는 어떻게 부국이 되었나’ 편을 통하여 싱가포르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명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싱가포르라는 지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착각에서 비롯됐다. 싱가포르의 기원은 1299년 ‘싱가푸라 왕국’에서 출발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싱가는 사자, 푸라는 도시를 의미한다. 인도네시아 팔렘방 왕국의 왕자였던 상 닐라 우타마의 일행이 섬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범상치않은 위용을 과시하던 호랑이를 보고 사자로 오인하면서 섬의 명칭을 ‘사자의 도시’로 삼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14세기 싱가푸라 왕국이 멸망하면서 그 지배세력은 새로운 지역에 터를 잡고 이슬람 군주가 통치하는 믈라카 술탄국을 세웠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하면서 유럽 강대국들이 말레이 반도로 잇달아 진출하여 아시아 무역항로를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패권경쟁을 펼쳤다. 말레이 반도는 19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의 영향권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강대국들의 관심은 주로 믈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에 집중되었고 싱가포르는 400여년 가까이 버려진 심으로만 남았다.
스탬포드 래플스(1781-1826)는 동인도 회사의 직원으로 싱가포르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개척한 인물이다. 당시 싱가포르는 척박한 환경에다가 해적과 살인자들의 은신처로 활용되던 죽음의 섬에 불과했다.
하지만 안목이 남달랐던 래플스는 당시 싱가포르의 지리적 위치와 높은 잠재력에 주목했다. 그는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조호르 술탄국에 거액을 주고 싱가포르섬을 사들인데 이어 과감한 투자를 통하여 아시아를 대표하는 새로운 항구도시로 발전시켜나갔다. 영국은 1824년 3월 네덜란드와‘영국-네덜란드 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편입시키기에 이른다.
영국의 대대적인 도시개척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싱가포르는 중계무역의 거점이자 군사기지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한 이후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무역을 잇는 항구로 싱가포르의 전략적인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됐다.
싱가포르가 국제적인 항구로 명성을 떨치게 되면서 다양한 인종들이 사람들이 몰려들며 인구도 크게 증가한다. 이중 싱가포르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중국계 화교(華僑,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들이었다. 당시 화교는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진출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고 싱가포르에서의 전체 인구와 생산력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며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영국도 이러한 화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41년 2차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싱가포르에 암흑기에 찾아온다. 동남아시아 식민지 확대를 노리던 일본 제국은 1942년 싱가포르를 무력으로 점령했고 자본을 갈취하기 위하여 화교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당시 90만에 이르던 싱가포르 인구만 약 5만명 이상의 화교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의 지배로 돌아왔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어 세계각자이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며 오랫동안 서양 열강의 지배를 받아오던 식민지에서 독립 및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라야 연방측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지만, 자체적인 생존이 어려웠던 싱가포르는 영국 정부에 자치권만을 요구했다.
1959년 싱가포르에 최초의 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6월에는 의원내각제 기반의 보통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총리로 당선된 것이 훗날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리콴유(李光耀 이광요, 1923-2015)라는 인물이다.그는 1990년까지 무려 31년간 총리로 장기집권하여 싱가포르 성장의 기틀을 닦은 지도자로 꼽힌다.
화교 4세 출신의 리콴유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리콴유는 영국 통치시절을 거울삼아 싱가포르의 번영을 위해서는 다인종간의 화합을 강조했고, 교역 중심에서 산업중심의 사회로의 변화를 공약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냉전(Cold War) 시대의 개막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은, 싱가포르에 뜻하지않은 위기를 불러온다. 영국과 서방진영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특히 중국계 화교가 인구의 75%를 차지하던 싱가포르에서는 중공의 출범 이후 사회주의 세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사회화를 경계한 영국은 1963년 강력한 반공주의 연대를 표방한 말레이시아 연방을 수립하면서 싱가포르를 포함시켰다. 이에 동의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자유무역항으로서의 입지를 유지하면서 말레이 연방과 공동시장 조약을 맺으며 새로운 경제통합과 성장 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리콴유의 기대와 달리, 말레이 연방은 이후 싱가포르와의 공동시장 조약을 지키지않았다. 말레이 연방은 본토 위주의 개발과 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밀어붙였고, 이는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로서는 받아들일수 없는 차별정책이었다. 싱가포르내에서는 서로를 적대시하던 말레이인과 중국계 화교간의 인종갈등이 점차 악화되었다.
1964년 7월에는 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예언자 무함마드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던 도중 중국계와 충돌하여 대규모 사상자가 속출하는 폭력사태로 번지게 된다.이 시점에서 이미 말레이시아 연방과 싱가포르는 도저히 공존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툰구 압둘라만 말레이시아 연방 총리는 1965년 8월 헌법 개정을 통하여 싱가포르를 2년만에 연방에서 축출하기로 결의한다. 당시 방송에 출연한 리콴유는 연방 축출 통보의 충격으로 인하여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이 잠시 중단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로서 싱가포르는 독립국가로서 홀로서기에 나서야했다. 리콴유가 먼저 주목했던 것은 다인종 국가였던 싱가포르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이었다.
리콴유는 대통령으로 말레이인이던 유솝 빈 이스학을 임명하면서 인종간의 화합 메시지를 강조했다. 또한 화교와 말레이인, 인도인이 다수를 차지하던 싱가포르에서 과감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했으며, 중국과 말레이의 국기 디자인을 결합시킨 싱가포르만의 국기를 제작했다.
이어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리콴유는 철저한 ‘무관용 원칙’을 표방하며 철저한 규칙과 질서에 따라 운영되는 법치국가를 추구했다. 싱가포르는 정부는 1952년 총리 직속의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설립하며 강력한 수사권을 부여했고, 1960년에는 부패방지법을 도입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패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선언했다. 리콴유는 1959년 한 연설에 각료들과 함께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하며 청렴결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리콴유는 공무원들이 부정부패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을 사전 차단하기 위하여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싱가포르 총리를 비롯한 관료들의 연봉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싱가포르는 지난 2023년 발표된 세계 국가 청렴도 순위에서 83점으로 아시아 1위, 세계 5위(1위는 덴마크)를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는 ‘엄벌주의’문화 때문에 싱가포르는 ‘벌금의 왕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 손 운전, 타인의 와이파이 사용, 길거리나 껌을 뱉거나 쓰레기를 투척하는 행위 등을 하면서 싱가포르에서는 막대한 벌금을 물거나 봉사활동을 해야하며 외국인에게도 예외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21세기에 현대 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진 태형(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이나 사형까지도 집행되는 나라가 싱가포르다. 태형을 집행할때는 빤쓰까지 벗기고 맨살을 노출하여 엉덩이에 피가 나올 때까지 풀스윙 매질을 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고통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1993년 미국인 소년 마이클 페이가 싱가포르에서 차량 50대를 연이어 파손하는 비행을 저지르다가 체포된 후, 강대국인 미국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태형을 집행했다. 2002년에는 베트남계 호주인 투옹 반이 싱가포르에 마약을 반입하다가 적발되어 호주 정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엄벌주의 정책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인권을 소홀히 여긴다는 비판도존재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법과 원칙에 예외가 없다는 일관된 이미지와 안전한 치안에 대한 신뢰를 주는 요소로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는 교육에 있어서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철저한 ‘엘리트 위주의 차등교육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교육 기관들은 초-중-고상위 단계로 갈수록 진학의 기회가 줄어들고 경쟁에서 이겨만 상급 학교로 진학할수 있는 피라미드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다. 학업성적에서 떨어지는 학생들은 직업훈련원으로 가서 기술을 습득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싱가포르에서는 대학 입학이 곧 엘리트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장학생으로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국제학교를 설립하여 글로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세계대학순위 상위 20위에 싱가포르 대학이 두 곳이나 이름을 올릴만큼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편으로 리콴유는 1961년부터 국가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국가주도하의 공업중심 개발정책, 해외 자본 유치,파격적인 세금 감면 정책을 추진하며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이어 리콴유는 지리적으로 좁은 도시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규모 간척사업을 추진했다. 1965년만 해도 서울보다 작았던 싱가포르의 국토는 지속적인 간척사업으로 영토를 22%나 확장하며 현재는 서울의 약 1.2배까지 넓어지게 됐다.
1960년대 높은 실업율을 개선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정부는 노동력 중심의 단순 제조업 의존도에서 벗어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석유화학, 컴퓨터 제조업 등 기술집약적 산업에 집중투자를 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제조공장들도 싱가포르에 대거 진출한다.
무역업과 금융업. 관광업 등도 싱가포르에서 번성했다. 1960년대 7억달러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무역 GDP는 이미 1980년대 초반에 이르면 66억 달러로 20년만에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싱가포르의 관광수익은 2022년 기준 한화로 약 14조 8천억에 이른다.
또한 싱가포르는 70년대부터 외환 자유화를 도입하고 전세계 은행의 지점들을 유치했으며 1984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금융선물거래소까지 설립했다. 이로 인하여 싱가포르의 금융업계는 각종 수수료와 환전 수익만으로도 막대한 차익을 확보하고 있다. 세금 우대정책으로 인하여 전세계의 부자들이 세금을 피하여 싱가포르로 귀화하는 일도 빈번하다. 2023년 현재 싱가포르는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홍콩과 더불어 세계 4대 금융도시에 선정되며 국제 금융거래의 요충지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이러한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엄격하고 권위적인 사회 통제로 인하여 싱가포르는 2023년 언론자유지수에서 ‘나쁨’ 수준인 126위, 민주주의 지수는 69위로 ‘결함있는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등 부정적인 면모도 동시에 안고 있다.
“지도자는 비전을 가져야한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의 통치철학을 드러내는 어록이다. 싱가포르가 철저한 국가 주도 정책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각종 산업을 개발하며 아시아 최부국까지 기적같은 경제발전을 이뤄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다. 하지만 번영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해낸 지금, 이제는 그 성공을 지켜내고 이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내는 것은 앞으로의 싱가포르에게 남겨진 과제다.
싱가포르가 선진국이 될수 있었던 이유/싱가포르 투자정보
유전자 분석에서의 용어중에 Polygenic Risk Scor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다유전성 위험도 분석정도로 번역이 된다.
이 의미는 우리의 Trait, 즉형질이나 질병의 위험도를 유전적으로 분석할때 다수의 유전자에 각각의 가중치를 두어서 계산하여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이다.
예를들어 비만에 관련된 대표적인 유전자는 FTO라는 유전자가 있는데, 많은 비만환자에게는 이 FTO유전자의 변이가 발견된다. 그러나 이 FTO뿐만아니라 많은수의 유전자가 이비만에 연관이되고 각각의 유전자가 다른 가중치를 가지고, 이 비만의 유전성을 결정한다.
유전자 하나가 하나의 질병에 1:1로 매칭이 되는게 아니라 다수의 유전자가 질병에 연관이 있기때문이다.
이기법을 사회, 문화,정치, 경제 현상 분석에도 쓸수 있다. 예를들어 싱가포르가 선진국이 될수 있었던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 요소에 각각의 가중치를 두고 계산하면 좀더 객관적인 분석을 할수 있고, 이 가중치의 결정은 다른나라와 비교분석해서 결정하면 된다.
이런 과학적인 접근없이 단순히 사회 문화적으로 접근하여 그 국가의 발전요인을 분석하다보면 이상한 분석이 된다. 예를들어 많은 한국의 역사, 문화학자들은 한국의 성공을 한국인의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 민족성으로 분석한다. 이것은 잘못된 분석이다. 같인 민족인 북한의 경우는 전세계 최빈국이며, 싱가포르도 화교로 인한 성공으로 분석하기에는, 화교의 본진, 중국의 후진성이 설명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Multi Factorial, 즉 다중 분석이 필요한거다.
그래서 필자의 나름대로의 싱가포르 성공의 분석을 뇌피셜로 해보았다.
1. 지리적위치 (15%)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가운데 있고 유럽, 중동과 아시아를 있는 통로이다. 특히 싱가포르 밑의 싱가포르 해협을 통해서, 전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인 한국, 중국, 일본으로 중동의 에너지가 수송이 된다. 이런 전략적위치 때문에 무역의 중심지가 될수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 위치만으로는 부국이 될수 없다. 같은 위치에 있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밑에 있는 인도네시아 섬, 바탐은 같은 지리적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부국이 되지 못했다.
2. 인종 (15%)
그나라의 민족성도 국가발전에 중요하다. 민족성이라는 것은 서로 공유하는 공통적인 문화, 습성이다. 예를들어 무슬림은 라마단이 있고, 여러가지 종교적 제약이 있다. 그리고 화교들은 동남아의 이방인, 이주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의 부를 쓸어담었다. 특히 싱가포르는 화교비율이 70%로 동남아시아에서 화교비율이 제일 높다. 이 가장 높은 화교비율도 선진국으로 가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 높은 화교비율만이 선진국이 될수 있는 비결은 아니다. 이 화교의 본진, 중국을 보면 이게 쉽게 설명이 된다.
3. 토지제도 (10%)
TVN의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싱가포르 성공의 첫걸음은, 토지국유화의 토지제도라고 설명한다. 이 토지국유화를 통해서 국가가 토지의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계획도시로 만들었고, 심시티 처럼 철저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다. 토지가 국유화가 안되었으면, 마스터 개발 플랜을 세워도 진행이 안되고 토지 보상 문제로 도시 개발도 제대로 안되었을것이다. 서울의 도시재생 사업이나 재건축 사업도 진행이 더딘것도 이보상문제이나, 싱가포르는 토지가 국가소유라서 국가가 원하는 개발계획이 있으면 그냥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도 싱가포르가 선진국이 된것의 일부분의 요소이다. 중국이나, 베트남도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다. 그리고 태국도 왕실이 방콕의 주요 대부분의 부동산을 왕실이 소유한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싱가포르처럼 발전하지 못했다.
4. 식민지 유산 (10%)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전에는 그냥 정글이었고 말레이시아의 부족들이 살던 그냥 부족마을이었다. 국가도 아니었고 부족사회였다. 이 부족사회에서 영국이 들어옴으로서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그당시 최고선진국이었던 영국의 인프라가 깔렸고, 지금 싱가포르의 보타닉 가든, 항구, 도로, 도시계획등은 영국에 의해서 깔렸고, 사법체계, 교육체계, 사회시스템도 영국시스템으로 도입되었다. 과장되게 말하면 철기 시대문명에서 근대 사회로 3단계로 순식간에 점프한거다.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금기시 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일본의 근대시스템 도입이 국가의 발전에 일정 부분기여를 한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말을 하면 바로 친일파로 매장당해서 말을 못할 뿐이다.
5. 정치적 리더쉽 및 사회시스템 (50%)
싱가포르의 국부이자 창업자 리콴유의 정치적 리더쉽및 사회시스템이 싱가포르를 전세계 최고부국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싱가포르 국민들도 이점을 인정하고 국제적으로도 리콴유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싱가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라고 인정한다. 아시아가 태평양 전쟁이후로, 현대사회에서 대부분 공산주의노선으로 가서 막장 국가로 갈동안,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의 노선을 택해서 선진국의 반열로 갔다.
1950년대 국민들은 자본주의,공산주의가 뭔지 모른다. 심지어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의 세상, 인민들을 위한 세상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이 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리콴유는 이 공산주의는 반드시 패망하고, 전국민을 빈곤으로 몰것이라는 강력한 반공사상이 있었다. 리콴유도 처음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노선의 정당에 있었으나, 이공산주의자들의 위선 및 거짓을 경험하고 바로 노선을 갈아탔다.
1950,60년대 싱가포르도 곳곳에 파업 및 공산주의 혁명운동이 일어나서 사회가 불안정하였는데, 리콴유는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사회를 안정시켰고, 국민들을 설득하여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노선으로 국가를 끌고 갔다.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넘어서는 선진국과 교역노선을 택했고, 외국자본과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인프라 수준이 선진국 수준이 되야 한다고 판단되어, 막대한 인프라 투자를 하여서, 글로벌 기업 및 인재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서 외국기업 및 자본 유입을 막았는데, 싱가포르는 적극적으로 외국자본 및 기업 유치를 통해서 국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
결국 국가의 부를 결정하는것은 주어진 자원과, 국가의 위치보다도, 사람이 만들어내는것이다 .이사람중에 리더쉽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국민들이다. 감독과 선수가 조화를 이루어야지 성적이 난다. 싱가포르는 이 감독과 선수가 주어진 조건을 잘 활용하여 팀워크를 발위해서 지금의 선진국 위치에 올랐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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