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무엇인가?(1)/ 장기성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여러 명의 ‘나(개인)’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사장님과 만났을 때, 부모님과 같이 있을 때, 애인과 같이 있을 때의 내가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도 ‘진정한 나는 하나뿐이다’라는 생각이 우리 상식 속에 이미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마이클 조던(1963 ~ )은 미국의 은퇴한 농구 선수이다. 약 120년에 이르는 농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 받는다. 1984년부터 NBA 선수로 활동하였으며, 2003년 은퇴했고, 현재는 NBA 샬럿 호네츠와 NBA G 리그 그린즈버러 스웜 구단주이다.
최근에 인간 이세돌과 인공지능 ‘한돌’의 세기적 바둑대결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다시금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흔하지만, ‘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생뚱맞게 들리기도 하고, 대답하기가 참 난감하다.
최근 2월말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내 일부가 죽었다”라는 신문 표제어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57)이 LA에서 열린 코비 브라이언트(42)의 추모식에서 눈물 흘리면서 했던 바로 이 말이다. 눈물범벅이 된 조던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여기서 말하는 ‘내 일부’는 무슨 말일까?
코비 빈 브라이언트(1978.8~ 2020.1)는 미국의 전 농구선수로, 선수 시절에는 전미 농구 협회(NBA)의 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소속으로 활약하며 5회의 우승을 거두었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WNBA의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의 전 감독으로 활동한 조 '젤리 빈' 브라이언트의 외아들이기도 하다. 현역 시절 별명은 "블랙 맘바"다. 올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위키백과
코비 빈 브라이언트(1978.8~ 2020.1)는 미국의 전 농구선수로, 선수 시절에는 전미 농구 협회(NBA)의 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소속으로 활약하며 5회의 우승을 거두었다. 현역 시절 별명은 "블랙 맘바"다. 올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위키백과
‘나’라는 ‘개인’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없는 것일까. 우리말의 ‘개인’(個人)을 영어로는 ‘individual’이다. 이 낱말을 이루는 구성성분을 뜯어보면 「‘in’ + ‘dividual’」로 나눠진다. ‘divide’(나누다)라는 동사에, 부정접두사 ‘in’이 붙어 만들어졌다. 그래서 ‘individual’을 우리말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이라는 의미로 사전에 실려 있다. 영어의 어원(語源)에서 보자면, ‘개인(나)’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뜻일 게다. 뭐 좀 복잡한 설명이 됐다. 정말 그럴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영(靈)과 육(肉)으로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육(肉) 즉 육체의 측면에서는 이 말이 당연히 맞는 말이다. 인간을 죽여서, 토막을 내지 않은 한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靈)에 해당되는 ‘마음’, 즉 ‘인격’(人格)은 어떨까? 몸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여태껏 여겨져 왔고,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식의 명제(命題)가 사뭇 확고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마음)은 유일무이한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인간은 누구나 의식적으로 싫어해 왔기 때문에, 이 말에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핵심이 되는 ‘진정한 나’, 즉 ‘인격’은 하나며, 바로 여기에 한 인간의 본질이 있고 주체성과 가치관이 담겨있다고 확신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심청은 좋은 사람이고, 홍길동은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烙印)처럼 말이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그러할까라는 반론에서 이 글을 시작해 본다.
작가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자아(自我), 즉 인격은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가 늘 힘들어지고, 문득문득 자신이 싫어지기도 한다는 것인데. 그가 쓴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 무척 흥미롭다.
일상이나 직장생활에서 나를 한번 되돌아보자. 혼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누군가와 마주하게 된다. 만약에 그 숱한 사람들과 마주할 때 마다 똑 같은 얼굴과 표정으로 타인을 대한다면, 과연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까? 내 인격은 이런 것이야 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나는 나’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공감과 유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나’ 혹은 ‘본질적인 나’는 몇 개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일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히라노의 대답을 빌리면 명료하다. 변하지 않는 ‘진정한 나(자아)’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대인 관계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진정한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히라노는 ‘나’라는 ‘개인’과 더불어, ‘분인’(分人)이란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 냈다. 그는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가 아니고, 소설가다.
이 발상의 근원은 더 이상 분할(分割)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나’라는 ‘개인’에 대해, 더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있다는 데서 우선 출발한다. 이 작은 단위가 바로 ‘분인’(分人)이란 개념이다. ‘분인’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다. 그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여러 명의 ‘나(개인)’가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익히 느끼며 알고 있다. 사장님과 만났을 때, 부모님과 같이 있을 때, 애인과 같이 있을 때의 내가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도 ‘진정한 나는 하나뿐이다’라는 생각이 우리 상식 속에 이미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났을 때의 ‘나’는 진정한 ‘나’가 아니라, 가면을 쓴 인격이란 뜻의 ‘페르소나’가 존재한다고 여태껏 믿어 왔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분인’의 개념은 ‘진짜 나’가 마음(인격)의 으뜸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가져다 쓰는 게 아니라, ‘나’는 여러 개의 ‘나’로 따로 존재하며 그 ‘나’들이 모여 이루는 네트워크 전체가 바로 ‘나’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여태껏 우리는 내 인격 속에 여러 개의 ‘나’들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 생각해 왔다.
‘나’라는 한 ‘개인’ 안에는 여러 개의 분인(分人)들이 독립적으로 섞어있다는 말이다. 부모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직장에서 동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등과 같이, 나와 인맥을 맺고 있는 지인(知人)이 천 명이라면 ‘내’ 자아 속에는 천 개의 분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천 개의 분인의 집합체가 ‘나’ 하나의 ‘개인’이고, ‘나’ 하나의 ‘인격체’란 것이다. 그래서 한 ‘개인’은 이런 ‘분인들의 모둠(group)’이 된다. 한 ‘개인’을 정수(整數) ‘1’이라고 치면, ‘분인’은 분수(分數)로도 나타낼 수 있다. 사람마다 연결되는 대인 관계 숫자가 다르므로 분모(分母)의 수는 제각기이다. 1/n인 셈이다. 이 점이 중요한데, 상대와의 접촉 빈도수나 친화도에 따라 분자(分子)는 바뀐다. 상대와의 관계가 농익을수록 분자의 숫자는 커지고, 관계가 얕은 수록 분자의 숫자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일단 이 모든 분인들을 합하면 ‘1’이 되어야한다. ‘1’이라는 정수가 바로 ‘나’이고 한 사람의 ‘개인’이 된다.
‘나’라는 한 ‘개인’ 안에는 여러 개의 분인(分人)들이 독립적으로 섞어있다는 말이다. 부모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직장에서 동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등과 같이, 나와 인맥을 맺고 있는 지인(知人)이 천 명이라면 ‘내’ 자아 속에는 천 개의 분인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한 ‘개인’ 안에는 여러 개의 분인(分人)들이 독립적으로 섞어있다. 부모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직장에서 동료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분인 등과 같이, 나와 인맥을 맺고 있는 지인(知人)이 천 명이라면 ‘내’ 자아 속에는 천 개의 분인이 따로 존재한다.
길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 ‘야!’라고 소리 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 용(用)의 분인과 연결된다. ‘진정한 나’가 부랴부랴 의식적으로 가면을 쓰거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니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분인들 가운데 하나가 그저 순식간에 그와 연결될 뿐이다. 이 연결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온전히 제어나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으로 찰나의 순간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知人)이 1만 명이라면, 그 1만 명 각자는 크든 작든 나의 분인이란 뜻이다. 1만 명 각자는 어떤 순간에, 나를 직접 만나던 혹은 나를 그냥 생각만 해도 내 분인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보자면, 인간관계란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분인과 분인과의 관계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내 일부가 죽었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Jordan)이 LA에서 열린 코비 브라이언트(Bryant)의 추모식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했던 말이다. ‘내 일부’가 죽었단 말이 무슨 말이지 이제야 알 것만 같다.
나’란 무엇인가?(2)
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연결망이 끊어지는 것이니, 무수한 사람이 동시에 죽는 것과 같다. 장례식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가지고 있던 분인의 1/n이 빠져나감을 또렷이 의식하기 때문이다.
영화 ‘원 데이’(One Day)의 주인공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이다. 서로가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있지 못한 다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게 어디 있을까. 단 하루(one day)만이라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문장이 깊이 각인 되어있다. “Whatever happens tomorrow, we’ve had today”(내일 어떻게 되던, 우린 오늘 함께 있잖아). 죽음의 슬픔을 피하려는 단출한 문장이다. 출처=위키백과
세속적으로 볼 때 죽음은 일단 모든 것의 종말이다. 그 토록 애지중지 간직해왔던 갖은 추억과 관계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니 말이다. 처음엔 가족과 작별을, 그 다음엔 세상과 결별하는 순서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의 전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왜 슬플까? 그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과 그리움이 사리지고, 앞으로는 더 이상 추억을 만들지 못할 거란 아쉬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가지는 슬픔의 공통점은 어쨌든 ‘대체(代替) 불가능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체 불가능성’이란 오직 그 사람과는 더 이상 앞으로는 어떤 추억도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일 게다. 그는 지구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란 의미다. 그러니 슬플 수밖에. 죽음이 주는 슬픔을 이같이 애달프게 이해하며 우리는 여태껏 살아왔다. 제1部에서 ‘나란 무엇인가?’는 ‘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살펴봤다면, 한걸음 나아가 2部에서는 ‘죽음의 슬픔’을 또 다른 측면인 ‘분인’(分人)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
우리는 매일 주위의 타자(他者)들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거듭해간다. ‘나’라는 개인은 이런 소통을 통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분인(分人)들의 덩어리인 셈이다. 그래서 인적(人的) 네트워크라는 망(網)을 통해 확보한 집합체가 바로 ‘나’이며, 동시에 한 ‘개인’이며 한 ‘인간’이란 뜻이 된다. 좀 어렵게 설명됐지만, 결국 ‘나’란 바로 ‘분인들의 집합체’다. 분인은 반드시 살아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인터넷으로만 교류하는 어떤 대상이어도 괜찮고, 자기가 좋아하는 문학, 음악, 미술 일 수도 있다. 반려동물인 개나 고양이와의 연결되는 ‘분인’도 우리는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구를 어떻게 사귀느냐에 따라 ‘나’ 속의 분인들의 구성 비율이 바뀌게 되지만 그 총체인 n이라는 ‘자아’ 즉 ‘나’는 하나이다. 10년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달라졌다면, 그 까닭은 교제하는 사람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말이며, 따라서 망(網) 크기가 바뀌고 읽는 책이나 살고 있는 장소가 바뀌어서 분인의 양과 질의 구성 비율이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가깝게 지내던 연인(戀人)과 헤어져서 다른 연인과 사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당신 자신이 연인을 대하는 분인들에 변화가 왔을 게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개성이나 과 인격은 날 때부터 타고난, 일생 동안 불변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말이다.
죽음도 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으면 왜 그토록 여러 사람들이 슬픈가. 망자(亡者)를 통해 생성된, 분인들 가운데 1/n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 사람 앞에서만 냉큼 나타나던 분인의 삶도 마침내 끝났다는 말이다.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고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지인의 죽음이 끔직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인들의 망(網)이 모두 끊어졌다는 의미다. 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들의 연결망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의 그물들이 연쇄적으로 끊어짐을 뜻한다. 예로 망자(亡子)와 연결되어있던 지인(知人)의 숫자가 만 명이라면, 만 명들이 각자 따로 그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분인들이 동시다발적 대규모 죽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실연(失戀)보다 훨씬 큰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는 것일 게다. 실연의 경우에는 비록 작게나마 ‘나’ 안에 분인으로 남아있지만, 죽음의 경우에는 분인이 사라져 더 이상 연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대체 불가능한 상황에 빠졌다는 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상대와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갱신(업데이트)되면서 활성도(活性度)가 유지되지만, 상대가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면 이제 두 번 다시 분인을 갱신(更新)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을 이제껏 구성하던 분인 하나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1/n이 사라졌으니, 그 상실감에 대한 슬픔이 클 수밖에 없다.
부고(訃告)의 슬픔은 대개 뒤늦게 밀려온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순간에 바로 눈물 흘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충격은 받았지만, 얼마동안은 도무지 실감이 안 날 때도 있다. 분인이 빠져나가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우연한 순간에 고인(故人)을 떠올리며, 그의 부재(不在)를 통감하고 내가 사랑했던 타자(他者), 요컨대 고인과의 분인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인은 망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 갱생될 기회는 더 이상 없다. 갱생이 불가능한 분인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다.
한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들 끼리의 연결망이 끊어지는 것이니, 무수한 사람들 속에 간직하던 분인들이 동시에 죽는 것과 같다. 장례식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망자(亡者)에 대한 가지고 있던 분인의 1/n이 빠져나감을 또렷이 의식하게 된다.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오든(W.H.Auden)의 시(詩)가 울려 퍼졌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먹먹해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까. 사진은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앤디 맥도웰’(Andie MacDowell)이다. 출처=위키백과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서 오든(W.H.Auden)의 시(詩)가 울려 퍼졌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먹먹해지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 모두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사진은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앤디 맥도웰’(Andie MacDowell)이다. 출처=위키백과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에는, 오든(Auden)의 시(詩)가 나온다. 「장례식 블루스」(Funeral Blues)라는 제목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분인의 상실을 통한적(痛恨的)으로 읊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 못해 아려온다.
‘그는 나의 북쪽이고, 나의 남쪽이며, 동쪽이고 서쪽이었다,
나의 일하는 평일이었고, 일요일의 휴식이었다.
그는 나의 정오, 나의 자정, 나의 대화, 나의 노래였다.
사랑이 영원한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별들은 이제 필요 없으니; 모두 다 꺼져버려.
달을 싸버리고 해를 철거해라,
바닷물을 쏟아버리고 숲을 쓸어 엎어라;
이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왜 슬플까? 그와 함께 만들었던 추억과 그리움이 사리지고, 앞으로는 더 이상 함께 추억을 만들지 못할 거란 아쉬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분인(分人)의 상실이 그 요체이고 근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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