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에 대하여/김영태
문제는 뚱뚱한 겉모습 아닌
제 기능을 못하는 내면
적당히 미지근히 살며
공존하고 관리하며 살길
열일곱 고등학교 2학년 때 키는 175㎝, 몸무게는 60㎏이었다. 허리둘레는 30인치가 안 됐다. 이후 15년을 그 몸으로 살았다. 1㎝쯤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코가 높고 눈이 깊어 보였고 턱선이 날렵했다. 공군 중위 시절, 군복을 입으면 꽤 민첩하게 느껴졌다.
로맹 가리가 쓴 '레이디 L'의 한 장면. 소설의 주인공은 이미 늙어버린 여인의 두툼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젊은 시절 조각 같던 턱과 광대뼈를 찾아낸다. 세월은 살 속에 젊음을 묻는다. 결혼 후부터 몸이 불었다. 매년 1㎏씩 몸무게가 붙었고, 0.5인치씩 허리둘레가 늘었다. 80㎏, 34인치를 넘어서면서부터 이런저런 병이 생겼다. 만성적인 고혈압과 고지혈증, 간헐적으로 발현하는 족저근막염 같은 것들이다.
식구를 먹여살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국 자신이 가장 많이 먹었던 탓에 생긴 '가정재해'였다. 회식은 빠질 수 없다는 강박이 만든 '산업재해'였다. 음주나 흡연을 위해 지나친 건강을 삼가자는 생각에 과하게 의존한 '신념재해'였다. 건강검진을 하면 적정 몸무게가 40대 초반 시절의 73㎏쯤으로 나온다. 살을 빼라, 10년 넘게 기록되는 한결같은 주문이다.
비만은 나의 적이다. 우리의 적, 현대 문명의 적이다. 비만의 사회적 비용이나 안티 비만 산업의 성장 스토리는 언급하지 않으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포화보다 자신의 비만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다는 수많은 연구와 조사 결과도 거론하지 않겠다.
하지만 비만에 대한 나와 우리의 걱정은 지나치다. 비만에 대한 증오나 혐오는 과도하다.
스웨덴 작가 레나 안데르손은 '덕 시티'에서 패스트푸드와 다이어트를 동시에 강요하는 현대사회, 미추에 대한 절대적 판단을 비판한다. 대통령이 '체지방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 벌어지는 극단적인 상황, 끊임없는 식욕과 싸우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 비만인을 향한 증오범죄 등을 발랄한 문체로 풀어낸다. 결론에 반전은 없지만 재미있다. 책을 덮으면서 '그렇지' 하며 빅맥 라지 세트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행복한 뚱보들의 작가'로 불리는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그 별명에도 불구하고 "뚱뚱한 사람은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뚱뚱-혹은 통통-했다고 한다. 젊은 날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렇다. 미추 혹은 비만에 대한 판단은 상대적이다.
비만은 파괴의 대상, 전쟁의 대상이 아니다. '공존'하면서 '관리'할 수 있으면 족하다. 문제는 뚱뚱한 겉이 아니라,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제 기능을 못하는 속이라는 것을 알면 된다. 속을 관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잘'사는 것이다. 부지런히 일을 하고-회식만 하지 말고-, 뜨겁게 사랑하며-다 타서 재가 되어버릴 정도까지는 말고-, 다정한 사람들과 미지근한 관계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다.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훌륭한 아내만 있다면 가난과 헐벗음은 아무것도 아냐. 가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가난뱅이야.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아"라고 했다. 가난이라는 단어 자리에 비만을 넣어도 말이 된다.
미국 소설가 제임스 설터는 '가벼운 나날들'에서 결혼한 남자에게 여자는 의무감과 침묵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가정을, 인생을 책임지려면 입 꾹 닫고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되겠다. 만일 미혼이라면, 결혼부터 하라. 적당한 스트레스와 적절한 잔소리, 책임과 침묵의 대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적정치에 도달할 테니.
쉰 살이 넘어서부터 내 몸무게는 70㎏대 끝자락에 걸쳐 있다. (뱃살만 빼면) 그런대로 괜찮다.
뒷모습에 대하여
앞모습은 순간이자 가면
각인되고 오래가는 건 뒷모습
지나간 과거나 회상 아닌
이면에 숨은 '진실'에 초점을
미국 저널리스트 헤더 라드케가 '엉덩이즘'이라는 책을 냈다. 원제는 'Butts: A Backstory'이다. 엉덩이의 해부학적 구조부터 인류가 엉덩이에 상당한 시선을 보내는 문화인류학적 이유까지 400페이지를 써 내려갔다. 폭넓은 분석에 비해 결론은 좀 싱겁다. 엉덩이는 엉덩이일 뿐이니 과하게 생각하지 말자, 엉덩이에 대한 과민과 집착에서 해방되자는.
엉덩이를 생각하다 뒷모습을 떠올렸다. 늘 같이 있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조차 좀처럼 보기 힘든. 그런데 엉덩이와 뒷모습은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전자는 또 다른 외면이지만 후자는 다른 형태의 내면인 까닭이다. 앞은 순간이지만 뒤는 오래간다. 눈은 앞을 좇아가지만 입은 뒤를 더 좋아한다. 첫눈에 반하지만 스파크일 뿐이고 뒷모습은 각인되면 이야기가 생긴다. 앞모습은 시작이지만 뒷모습은 지속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 선생의 작품 중 '뒷모습'이라는 수필집이 있다.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의 작품에 글을 더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앞모습은 가면, 페르소나(persona)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의 페르소나로 살지 못한다. 그런데 뒷모습은 하나다. 굳이 다른 모습을 만들 필요가 없기도 하거니와 만들기도 어렵다. 그래서 뒷모습은 무의식이며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시인들이 뒷모습을 시로 썼다.
김은지의 '막'이란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절연한 슬픔/ 절연하지 못한 슬픔/ 그리워하는 나를 그리워하는 막막함/ 코끼리 같은 동물의 엉덩이를 중심으로 뒷모습// 네 시도 나를 두고 간다".
이규리는 시 '뒷모습'에서 "…뒷모습은 남의 것이라지만,/ 너무 참혹할까 봐 뒤에 두었겠지만,/ 누군가 내 뒷모습 본다면/ 역시 분홍색으로 읽을 것이다/ 해답은 뒤에 있다"고 적었다.
떠나간 자리에 진실이 남는다. 직장을 그만둬 본 사람들은 안다. 떠난 후에 어떤 모습이 어떤 소리가 남는지. 사랑도 마찬가지다. 떠난 뒤에 어떤 표정이 어떤 울림이 남는지, 그리고 시간에 따라 작아지는지 커지는지. 떠날 것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때 잘한다.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문제다. 뒷모습을 평소에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겠다. 얼굴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 1년에 한 번쯤이라도, 누군가의 렌즈에 잡힌 사진으로라도 자신의 뒷모습을 기록해야 하는 이유겠다.
아버지가 되면 더 그렇다. 아이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이탈리아 네오레알리스모의 명작으로 꼽히는 흑백영화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말이다. 아이는 실의에 빠져 축 처진 아버지의 어깨에서 지금 삶의 고통을 읽는다.
자신의 뒷모습을 기록하다 보면 사물 혹은 사건의 뒷모습, 진실에 다가가는 실마리가 생긴다. 단선적 평면적 사실에 휘둘리지 않고, 입체적 다차원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뒷모습을 기록하는 데 있어 경계할 것이 있다. 과거 지향, 회상형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 현재형이 되는 게 낫다는 점이다. 뒷모습은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표면에 대비되는 이면, 가면 속의 '생얼', 거짓에 대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소년에게도 청년에게도 그리고 중년에게도 뒷모습이 있다. 죽음에 다가섰을 때에도 있을 것이다. 뒷모습은 떠나보낼 것이 아니라, 붙잡아 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동률 노래 '뒷모습' 가사처럼 '죽도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운 혹은 태도에 대하여
행운은 그저 덤일뿐
할 일 다 한 뒤 바라는 것
다가오는 유혹은 밀어내고
운명은 받아들이되
그에 맞서는 태도 잃지말길
유혹은 스며든다. "좋은 땅이 매물로 나왔다. 최우수 고객에게만 제공되는 특별 혜택"이라고 하면 귀가 쏠린다. 일주일 만에 수십 % 수익을 올렸다는 주식 투자방 링크에도 손가락이 반응한다(심심할 때는 그들과 통화도 하고 답신도 보낸다. 도대체 어떻게 나를 꼬실 것인가를 궁금해하면서).
스며든 유혹에 대해 내 반응은 미리 정해져 있다. "그렇게 좋은 것을(이) 내게 줄(올) 리 없다."
이미 세상에 가장 귀한 운은 거의 다 잡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이상 바라는 건 과하다. 가난했지만 성실하고 건강한 부모 밑에서 믿음직한 형과 함께 자랐다. 아름다운 아내와 딸이 있고, 귀엽고 다정한 댕댕이 냥냥이와 같이 산다.
운은 내가 할 일을 다 한 뒤에 바라는 것이다. 아무리 제 할 일을 다 한다고 해서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디폴트도 아니다. 이미 많이 받은 자에게 운은 덤이다,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유혹에 초연한, 심지가 굳은 놈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게 아니다. 수시로 스며드는 유혹들에 얼마나 흔들리며 살았는지. 운에 대한 생각을 심플하게 정리한 때가 마흔일곱 즈음이다.
삶의 비밀 중 하나는 운이다. 운명이라 해도 좋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드니 디드로는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에서 우리가 운명을 이끌고 간다고 믿지만, 실은 운명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무엇을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좋은 것은 나쁜 것을, 또 나쁜 것은 좋은 것을 가져오는 법이라고 했다. 요즘의 과학은 운명을 유전자 혹은 DNA로 풀기도 한다. 최정균 KAIST 교수는 '유전자 지배 사회'에서 "내가 유전자를 소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나를 지배한다"고 적었다.
살아보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표현으로는 많이 모자라고, 운구기일(運九技一) 정도 해야 들어맞는다. 심지어 '오직 운뿐'일 때도 많다. 성공은 '운발'이고, 실패는 노력 부족이다. 어차피 정해진 것이니 애면글면하지 말고 수용할 수밖에. 그런데 (한때 나와 닮았다는) 현빈이 '시크릿가든'에서 그랬다. "그게 최선입니까?" 다시 생각의 회로를 돌린다. 다른 가능성을 찾고 싶다. 옛사람들도 운명과 의지 사이에서 무척이나 방황했었다.
'스토너'의 작가 존 윌리엄스의 역사소설 '아우구스투스'의 한 대목. 시저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소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그의 미래를 두고 그리스의 현자가 말한다.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어…나중에 뭐든 되겠지. 그야 저 아이의 성격과 운명의 장난이 결정할 일이니." 성격, 즉 '운명에 대한 태도'에 방점을 찍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성공의 비결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가난하게 태어난 것, 둘째 허약하게 태어난 것, 셋째 배우지 못한 것.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많은 세상 경험을 했다.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고 노력할 수 있었다.
행운은 붙잡지 않는다. 유혹은 스며들지 못하게 방수 처리한다. 이미 받을 만한 것은 다 받았다고 믿는다. 운명은 수용한다. 그러나 운명에 맞서는 태도는 견지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젊은 독자들이, 심지어 그 시절의 나조차도 역시나 꼰대라고 비난해도 할 수 없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 들면서 얼굴이 제법 두꺼워져서 웬만하면 견딜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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