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보다 실이 더 많았던 베트남 전쟁/ 라곰이
19세기 말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
1940년 여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다
당시 베트남 독립 연맹의 수장 : 호찌민
1941년 호찌민을 중심으로 결성된 베트남 독립연맹 베트민
베트민의 목표는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 1946~1954년 : 1차 인도차이나 전쟁 (8년 간의 독립전쟁)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 함대의 하이퐁 포격을 시작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대패한다
: 약 1만 6천여 명의 프랑스군과 약 5만 명의 베트민군이 싸웠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은 대승을 거둠
이 때 베트민을 이끈 리더가 호찌민이다
-> 베트남 독립의 문제를 제네바 협정을 통해 논의했다
: 이것은 베트남의 독립 열망에 찬 물을 끼얹었다
프랑스, 영국, 소련, 중국 등 스위스 제네바에 모인 19개국의 외상들, 이 때 베트민은 프랑스의 철군과 베트남의 독립 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때 협정의 내용은 이랬다
1.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호찌민 정부군은 이북으로, 프랑스군은 이남으로 이동한다.
2. 정치적 통일 문제는 1956년 7월 이전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결정한다.
3. 이후 일체의 외국군대는 증원될 수 없으며, 프랑스군은 총선거 때까지 주둔할 수 있다.
그리하여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 베트남
해방 이후 한국의 38도선 분단과 비슷하게, 의지와 상관 없이 강대국들에 의해 결정된 분단..
북베트남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 남베트남은 비공산 세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 반정부 게릴라 조직 베트콩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음. 남베트남 내 무장 게릴라 조직
남베트남 내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인 베트콩이 있었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운 민족주의자들 또한 존재한다
제네바 협정 이후 한 300일 정도 기회를 주었을 때,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한 약 100만명 이상이 남베트남으로 이주했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를 피해 남으로 내려온 가톨릭 신자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 또한 남베트남으로 넘어왔다.
이런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한 국가: 미국
제네바 협정 2번 조항: 2년 안에 (1956 7월 이전에) 총 선거를 실시하여 정치적 통일 문제를 결정한다.
이게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왜 베트남의 선거를 고민했을까?
총선거를 했는데, 만약 공산주의가 선거에 이긴다면...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줄줄이 공산화가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 도미노 이론
당시 냉전체제로 대립을 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
당시 호찌민이 있는 북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와 함께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원을 받은 새로운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등장 (1901.1.3 ~ 1963.11.2)
그는 열렬한 반공주의자였고, 그랬기에 미국이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황제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유지 중이었던 남베트남
군주제 유지 vs 새로운 정부
당시 응오딘지엠 찬성률 98.2% = 투표조작으로 가능했다
그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고 자유주의의 베트남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공포정치를 펼치는 독재자의 길로 가게 됐다
반체제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키고 처형하기도 했다
약 12,000명의 사람이 처형되었다
1955~1958년 사이 정치범으로 수감된 사람만 약 4만명 이었다
응오딘지엠의 폭정에 혼란스러운 남베트남
이 혼란의 시기, 1961년 1월 취임한 존F. 케네디
그는 자칫하면 남베트남이 공산화될 위기에 있다고 보았다
케네디의 참모들은 "더는 안되겠습니다. 비밀리에 군을 보내야 합니다" 라고 했다
이에, 그해 5월, 400명의 특수부대 및 100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한다
-> 그린 베레 (Green Beret : 당시 베트남에 파병된 미 육군 특수정예부대)
역할: 베트콩을 잠재울 수 있는 남베트남 내 대항군을 육성하는 임무
이는 단지 베트콩의 득세를 막기 위한 미국의 제한적 파병이었다
점점 더해가는 응오딘지엠의 폭정 vs 점점 세력을 불리는 베트콩들
이 때, 민심 폭발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 불교!?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던 응오딘지엠
그러나 당시 남베트남인의 80% 이상이 불교도였다
그는 불교도나 승려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했다
대통령 응오딘지엠, 쿠테타로 인해 결국 체포가 되었다
-> 이후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1963년 이후 남베트남에선 거의 매년 군사 쿠테타가 발발했다
그런데 정확히 응오딘지엠 죽고 20일 지나 미국 대통령 케네디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 케네디의 사망으로 미국의 베트남 정책도 기로에 서게 된다.
미국의 다음 대통령에 이 문제가 넘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케네디 정부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
그는 케네디의 1년여의 잔여 임기를 물려 받는다 : 미국 내 개혁에 치중하느라 베트남 문제에 관심이 없었음
(당시 경제 호황, 흑인 인권 신장 등으로 지지율이 높았던 린든 존슨. 재선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음)
그러나(but) 남베트남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존슨의 측근들은 강력한 군사작전을 요구
-> 린든 존슨의 전략을 180도 전환시킨 사건? (미국이 개입하게 된 사건?)
* 베트남 전쟁의 시발점이 된 통킹만 사건
당시 북베트남 영해에 위치한 통킹만
북베트남군 동태 파악을 위해 통킹만을 순찰하던 미 해군, USS Maddox호가 아무런 사전 포고 없이 북베트남 함정으로부터 공격을 당한다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해군의 1차 공격, 미군은 즉각 대응 안하고 경고만 주는데, 이틀 후 두번째 공격을 당함
->>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결단!
존슨 대통령: 북베트남의 불법 행위로 인하여 남베트남 국민과 정부에 대한 총체적인 지원은 배가 될 것이다"
통킹만 2차 공격 이후 사흘만에 통과된 미 의회 결의안: 무력 사용에 관한 대통령의 모든 결정을 승인하며 지지한다.
통킹만 사건을 통해 베트남 참전의 명분을 확보하게 된 미국 : 미국과 북베트남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
(베트남에,미국 학교에서는 통킹만 2차 공격을 베트남에서 하지 않았다고 배운다. 가짜였다고 배운다.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 펜타곤 문서: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북베트남을 선제 공격할 것')
=> 불확실한 정보임에도 믿고 싶은 정보들만 받아들인 것이 문제
미국의 개입으로 베트남전이 쉽게 끝날 거라 예상했으나, 당시 전쟁은 10년 이상 계속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위상을 과시할 수 있는 무대였다
당시, 소련, 중국 등과의 확전 우려로 17도선을 넘을 수 없었던 상황
제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미국은 17도 이하에서 제한된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 1965년 11월 14일, 첫 정면 충돌이 벌어진다 :
북베트남 군과의 첫 전투 이아드랑 전투
캄보디아 국경과 맞닿은 이아드랑 계곡
쁠래이꾸와 퀴논을 점령해 남베트남을 두 동강 내려는 전략
동시에 남베트남 베트콩의 무장 봉기를 유도!
양면 전술로 단숨에 남베트남을 장악할 계획
당시 이아드랑엔 북베트남군 33연대가 주둔, 남베트남군을 향한 기습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산악 지형 특성상 이착륙이 유리한 헬기를 활용
그런데, 미군의 예측과는 달리, 북베트남 병력이 만만치 않았다
약 2,000여명 3개 연대가 미군을 포위했다
이 위기에, 무어 중령은 미국 본부에 급박한 요청을 했다: 브로큰 애로우 (적에게 포위된 상황을 뜻함.)
그 지역을 폭파
* 프랑스 식민 시절 독립전쟁 중 만들어진 꾸찌 터널.
독립 전쟁 당시 터널의 길이는 약 48km,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약 250km로 늘어난 꾸찌 터널
손이랑 호미로 팠다
* 호찌민 루트 :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연결하는 산악이나 정글의 작은 길들로 형성된 게릴라 보급로
냉전시기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두려워하여 중립국을 침법할 수 없었던 미국
하지만 호찌민루트에 의한 피해로 결국 공습을 감행한다.
라오스에 58만여 차례의 공중 폭격을 가한 미국
* 고엽제: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 흔히 미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밀림에 다량 살포한 제초제를 가리킴
: 정글을 없애 베트콩을 색출하기 위함 + 베트콩의 군량 보급 차단을 위해 농촌을 황폐화시키는 것
다이옥신 1g의 치사량은 청산가리의 1,000배 이상
* 1968년 1월 30일 시작된 예상치 못한 전투?
당시는 암묵적으로 휴전을 했던 테트 연휴기간이었음
1968년 테트 연휴기간에 기습 공격을 감행한 북베트남과 베트콩
대표적으로 사아ㅣ공의 대통령궁, 공항, 남베트남군 본부를 습격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그러나 정글이 아닌 시가전이었기에 전면전의 기회를 잡은 미군
<베트남 전쟁의 예상치못한 전개 1.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
미군 5명의 희생 후 진압된 베트콩
미국 내 대부분의 가정에서 TV를 통해 볼 수 있었던 베트남 전쟁, aka 최초의 텔레비전 전쟁
베트콩에 의한 미 대사관 총격 흔적 등.. 저녁 뉴스의 90%는 전쟁 소식에 할애되었다
-> 미국인이 TV를 보고 전세가 뒤바뀌었다?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은 그 자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인들
세계 최강 미국에는 쉬운 전쟁이라 생각했으나, 이를 보고 베트콩이 두려워진 미국 시민들
= 반전 지지로 돌아섰다
전쟁의 이유를 찾지 못한 미국인들은 1969년 11월 15일, 반전 시위를 벌인다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미국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난 대규모 반전 시위
-> 1969년 정권 교체가 이뤄진 미국
리처드 닉슨
1969~1974 미국 37대 대통령
: (여론을 의식해) 베트남 주둔 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
그러나, 실상은 닐슨의 명령으로 가해졌던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과 폭격...
결국 대중에게 알려진 닉슨의 비밀 작전
+ 학생들을 향한, 오하이오주 방위군의 실탄 사격
=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이후 미국 전역 약 450개 대학이 동맹 휴학을 함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악화된 여론, 궁지에 몰린 닉슨 정부,
병역을 기피하는 미국의 청년들, 명분 없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가는 미군,
전쟁의 고통을 잊기 위한 미군의 선택 : 마약
1970년 마약 사범으로 퇴역한 미군 약 2만 2천여명...
* Fragging 프래깅 :
군대에서 같은 부대의 구성원을 죽이고 죽는 행위. 특히 상관 살해를 가리키는 미국의 '은어'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나는 프레깅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
베트남과 비밀 협상 제안
: 파리 평화 협정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베트남 전쟁 종결을 위해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맺은 평화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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