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 / 정아경
"어디 가세요?”
또·또…… 뱉어놓고 나서 입을 막는다. 나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자주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럭저럭 안면만 있는 사람을 만나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만나도 이 말을 한다. 그러면 상대는 상황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 ‘시장가요.’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멋쩍어 얼버무리다 1층에 닿아 황급히 내리는 이도 있다. 내 취향이 특이해서 남의 사생활을 파고자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나름대로는 더 가깝다는 친근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며칠 전이다. 술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에 신이 났다. 9시 30분, 저녁 챙겨주고 들뜬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친구들 만나 늦은 밤까지 수다 떨 생각에 발보다 마음이 더 서둘렀다. “어디 가세요?” 먼저 타고 있던 아저씨의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장 보러 간다.’ 하려니 거짓말이고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하려니 왠지 정숙하지 않은 인상을 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저 아저씨 이상하네. 남이야 어디를 가든?’하며 그의 인격까지 의심하며 난처해하던 나는, 그 말이 누굴 만나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던 나의 말임을 알고서는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어디 가세요?”
말하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 묻는다면 참 난감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더 그러하다. 내 친근함의 표시가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무수히 내뱉은 나의 무지함을 느끼자 당황했을 그네들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런저런 반성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는 ‘비밀’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대는 ‘거짓말’ 모순인 두 단어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그렇다. 더 가까운 친구 몇이서 만날 때는 굳이 다른 친구에게 말하지 않는다. ‘비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공식적인 만남에서 보면 오랜만인 것처럼 너스레를 떤다. 거짓이다. 이렇듯 하루에도 몇 번씩 야누스 같은 두 얼굴로 오늘을 살아간다.
누가 내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어린 왕자’ 나 ‘데미안’을 이야기한다. 내면의 성장에 지침 같은 책이다. 하지만 전율을 느끼며 본 또 다른 책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다. 스물다섯에 누군가의 아내가 된 난, 그 책을 비밀스럽게 읽었다. 마치 나의 이야기인 양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 있을 때만 읽었다. 여주인공 프란체스카의 사랑에 감동하고, 가정을 지킨 그녀의 선택에 무언의 동조를 보냈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비밀이 부럽기도 했다. 결혼했다고 해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목석(木石)은 아니지 않은가. 가슴 뜨거워지는 상대를 만나 화산처럼 터지는 사랑 한번 꿈꾸지 않은 이가 있을까.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말하지 않으므로 비밀은 더욱 비밀다워진다. 학창 시절 그 많았던 비밀이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아직도 비밀인지 묻는다. 기억나지 않는 비밀도 있고, 지금은 모임의 단골 안주가 돼버린 비밀도 있다. 세월 지나 웃어넘길 일일지라도 근사한 비밀 하나 간직하고 싶다. 비밀을 간직해 본 이는 알 것이다. 그 두근거림을. 비밀은 현실의 또 다른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굳이 ‘그날’ ‘어디서’ ‘뭘 했냐?’고 묻는다면 밉지 않을 거짓말이라도 하며 비밀과 해후할 날을 기다리고 싶다. 그 비밀이 거창하든 소소하든 상관없다. 너와 나. 우리 둘만이 가졌던 일을, 우리 둘만이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그립게 하듯이. 그렇게 비밀 하나쯤 간직하고 싶다. 비밀은 그 특별함만으로도 당분간 화창할 것이다. 가끔 혼자 웃기도 하겠지. 비밀은 나만의 작은 섬이니까. 그렇게 비밀을 담근다. 공간이란 옹기에 시간이란 유산균을 첨가하여 밀봉해 두면 맛깔스럽게 익어서 세월 앞에 감칠맛을 내놓을 그 무엇이다. 지금 나의 비밀은 숙성되고 있는 중이다.
“어머, 오늘 참 멋지네요.”
“서울은 비 온다는데 여긴 후덥지근하죠?”
사생활 침해 소지가 있는 인사말을 바꾸기 위해 의식적으로 내가 하는 말들이다. 잘못을 알면 고쳐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말하면서 실천하지 못한 적이 더 많다. 찰라 같은 만남 속의 짧은 한마디는 긴 시간 여운이 되어 행복하기도 우울하기도 할 것이다. 출근길 처음 만난 사람이 ‘오늘 멋지다’고 하면 종일 멋진 삶을 살지 않을까? 마음은 물질로만 전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한 울타리에 사는 이들에게 내가 하는 말 한마디로 유쾌해질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그것이 거짓이 가미된 찬사라 할지라도. 어차피 우리는 비밀 한 움큼씩 품고 사는 동반자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