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 ①/황혜림
양조위, 그는 누구인가
양조위가 왔다. <영웅>과 함께. 양조위는 20년 연기인생 동안 홍콩의 장르영화와 <비정성시> <화양연화> 등 걸작들을 오가며 영화사에 남을 배우로 우뚝 섰다. 할리우드를 경유하지 않고도, 또 특정 장르에 묶이지 않고도, 세계 영화인들의 별이 된 중국권 배우는 아마 그가 처음일 것이다. 이 남자는, 그래서 특별하다.
저기, 소리없는 한 자락 비애
매니저와 영화사 관계자들에 둘러싸인 양조위는 한눈에 뜨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165cm를 안 넘기는 작은 체구에 웬만한 여배우 못지않게 소담스런 어깨, 그리고 가무잡잡한 얼굴. 1997년 10월 <해피 투게더>의 상영에 맞춰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양조위를 처음 대면했을 때, 그 왜소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근사한 미모라기보다는 아담하고 친근한 인상에, 사춘기 소년마냥 수줍은 눈인사를 건네던 모습이 너무 소박해서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3년 뒤 <화양연화>로 다시 부산영화제에 왔을 때도, 지난 1월14일 새 영화 <영웅>의 시사회가 열리던 중앙시네마에서 만났을 때도, 그 느낌은 여전했다. 상영관 옆의 열린 공간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세를 잡는 틈틈이 쑥스럽게 웃는 표정, 광둥어의 성조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나지막한 음색과 조용조용한 말투, 질문에 답하기 위해 양미간과 눈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찰나의 생각에 잠기곤 하는 버릇까지도, 여전해 보였다.
확실히 양조위는 외모로 승부수를 던진 배우가 아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홍콩누아르의 깃발 아래 운집한 스타들과 더불어 스크린에 등장하긴 했지만, 당대를 풍미한 주윤발이나 장국영, 유덕화와 달리 단숨에 우상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양조위는 강호의 의리를 위해 자기 희생을 불사하는 무협시대의 영웅을 되살린 오우삼의 홍콩누아르를 통해 신화화된 주윤발의 위풍당당하고 남성적인 ‘영웅본색’을 따르기엔 왜소했고, 액션과 <천녀유혼>의 판타지 로맨스를 넘나드는 장국영처럼 선이 곱고 해사한 미남도 아니었다. ‘열혈남아’ 유덕화의 잘생긴 반항아 이미지에 비하면 너무 유순한 눈빛을 띠고 있었으며, ‘동방불패’ 이연걸 같은 발군의 무술 실력도 없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그는, 홍콩누아르와 코미디, 무협 등의 장르영화가 연간 100편 가까이 쏟아져나오던 당시 무난한 감초 역할이나 도드라질 것 없는 영화의 주연을 번갈아 맡는 정도였다.
그런데 홍콩 영화계가 사양세로 접어든 지도 수년이 지난 지금, 양조위는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 있다. 2000년에 <화양연화>로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최근작 <무간도>와 <영웅>이 각각 홍콩과 중국의 박스오피스에서 승승장구 중이다. 주윤발, 이연걸이 할리우드로 떠나고 장국영과 유덕화의 행보가 더뎌진 동안, 양조위는 작가영화와 대중영화의 줄타기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홍콩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배우다. 그리고 <비정성시> <시클로>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처럼 영화사가 기록할 영화들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면서, 그는 세계영화사의 한 기억이 되었다. 그 왜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의 어디에, 그런 내공이 숨어 있는 걸까.
85년 <무명경찰>로 데뷔할 때만 해도, 양조위는 TV의 후광을 업고 영화계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아이돌 스타였다. 홍콩 의 배우스쿨 과정을 수료한 81년 이후, 장난기 넘치는 악동 캐릭터로 분한 <녹정기>와 <의천도룡기> 등 무협 시리즈와 풋내기 경찰로 뛰어다닌 <신찰사형>이 안방극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기 때문. 하지만 86년 관금붕과 함께한 세 번째 영화 <지하정>은, TV 태생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일부 거두어줬다. 우연히 만난 세 여인 중 하나가 피살된 뒤 남은 둘과 미묘한 감정의 교차로에서 헤매는 20대 청년으로 일상적인 감성의 연기를 보여준 덕분이다. 오래 전이라 “관금붕의 꼼꼼한 연출” 외에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지만, 즉물적인 쾌락에서 차츰 진심을 고민하는 토니와 안락한 스타덤의 소파에만 안주하지 않으려는 조숙한 고집을 드러내는 24살 무렵 양조위는 어딘지 닮은꼴이다. 이후로도 당분간 <녹정기>의 캐릭터를 변주한 TV드라마와 <은행풍운>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병행하긴 했으나, <지하정>은 양조위를 허우샤오시엔에게로 이끄는 다리가 됐다.
“제작사는 시장에서의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홍콩 배우를 기용하길 바랐는데, 그 모든 배우 중에서 내가 탄복했던 사람은 둘이었다. 하나는 주윤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국 캐스팅하게 된 양조위였다. <비정성시>는 기존 대만영화들과 달리 동시녹음으로 찍었다. 양조위가 만다린어와 대만어로 연기하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를 귀머거리에 벙어리로 만들었다.” (허우샤오시엔)
허우샤오시엔의 선택은 지극히 실용적인 것이었지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비정성시>의 사진사는 양조위란 배우의 인상화를 바꿔놓은 배역이라 할 만하다. 4형제의 막내로 작은 사진관에서 일하는 임문청은 귀머거리이자 벙어리. 사진을 찍고, 정세에 민감한 주위의 지식인들과 친교를 쌓기도 하지만 주류 소통의 질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저 종이에 열심히 끼적거린 문답으로 제한된 교감에 족하며 세상을 묵묵히 관찰할 뿐. 그처럼 무해한 관조자로 살아왔음에도, 대만 근대사의 격랑에 휩쓸린 일가의 비극과 사상범으로 몰리게 되는 운명을 감내해야 하는 문청의 눈빛은 너무 선량해서 더 처연하다. 절제된 표정과 거의 침묵으로 일관된 정물적인 연기의 체험은, 양조위에게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표현의 가능성을 돌아보게 했다. 그래서 <비정성시>는 “가장 어려웠던 작품 중 하나”이자 스스로 꼽는 베스트 5 안에 드는 영화다. <비정성시>는 89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세계적 절찬을 받은 20세기 최고작의 대열에 들었고,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토니 렁’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비정성시>를 거치면서 한층 더 깊어진 눈빛이야말로, 양조위의 진가를 드러내는 창이다. 짙고 두터운 눈썹 밑에 슬쩍 꼬리를 내린 눈매, 아무리 작심해도 사악해질 수 없을 듯 선량하고 서글픈 깊이를 품은 눈. 신분을 감추고 범죄조직에 잠복해 폭력과 배신으로 점철된 갱스터의 삶에 물들어가는 <첩혈속집>과 <무간도>의 비밀경찰, 자신을 배신한 아내를 잊지도, 용서하지도 못한 채 떠돌며 시력을 잃어가는 <동사서독>의 검객처럼, 양조위의 눈은 종종 소리없는 비애와 허무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다. 이미 어찌할 수 없으리란 체념과 미처 떨쳐내지 못한 한 가닥 희망의 불안한 떨림이 교차하는, 바닥 모를 우물처럼 깊숙한 그 눈빛으로 그는 많은 말을 대신하곤 한다.
그런 눈을 가진 양조위의 분신들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그 중심에서 한발 비껴난, 세상이 더이상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이다. <첩혈가두>에서 우발적인 살인에 말려든 벤은 두 친구와 함께 새 삶을 찾아 베트남으로 떠나지만, 범죄와 전쟁의 포화로 뒤덮인 비정한 거리에서 성공은커녕 오랜 우정마저 잃는다. 전후 베트남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씨클로>의 포주도, 폭력과 매춘의 굴레에 묶여버린 밑바닥 인생에서 빠져나오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적응하지도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동생이 같은 진창에서 뒹굴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피워무는 담배 연기로 한숨을 숨길 뿐. 무심함을 가장한 표정과 피로한 어둠이 서린 눈빛에 절망을 감추고,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다.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서 다른 꿈을 꾸지만, 결코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이들의 질곡과 회한을 담는 양조위의 연기는 눈빛 하나부터 절절하다. 그래서 그 깊숙한 창을 들여다보는 동안, 북극에 갈 수도, 소외된 세상에 안주할 수도 없는 그들의 통증이 어느새 전염되고 마는 것이다.
비애가 담긴 눈빛에, 대체로 과묵하고 생각이 많은 양조위의 페르소나는 그 자신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8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청력과 말을 잃은 문청처럼, 그는 10살 무렵 말을 잃었다. 부모가 이혼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소년은 반 친구들이 아버지의 부재를 알까 두려워 아예 입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그때, 혼자 놀기를 좋아했던 소년은 틈만 나면 공상에 빠졌고, 영화를 또 하나의 위안으로 삼았다. “60년대에는 오락거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다들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엄마랑 이모, 삼촌들이 극장에 갈 때마다 어린 날 데리고 다녔고,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친구들과 일요일마다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로만 폴란스키의 <두려움 없는 뱀파이어 사냥꾼>,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처럼 18세 이상 관람가의 작가영화까지 섭렵할 만큼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친구인 주성치가 그를 잡아끌지 않았다면 자폐적인 소년이 배우가 되는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양조위 ②
“주성치는 늘 난 배우가 될 거야, 스타가 될 거야, 하는 꿈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아무래도 날마다 듣다 보니 세뇌가 됐는지 나도 모르게 그래 그게 좋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스무살 즈음의 두 친구는 TV에서 TVB 배우스쿨 모집광고를 봤고, “주성치가 가자, 가자, 하기에 아직 젊으니까 이것저것 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같이 원서를 냈다. “어차피 1년 과정이니까 싫으면 끝나고 나서 더 안 하면 된다”는 심정으로 그냥 한번 내 봤다는 원서는, 뜻밖에 평생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됐다.
1년간의 연기 수업이 끝나고도 그만두지 않았던 이유는, 새로운 소통 방식에 매료된 탓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들거나 열받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꾹꾹 눌렀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고, 사람들 앞에서 폭발시키지 못했는데 연기를 하면서 아 이런 방법이 있구나 했다. 그동안 꾹 눌러왔던 정서들을 연기를 통해서 하나씩 표출할 수 있었다. 나처럼 자폐증이라고 생각해온 사람한테는 아주 좋은 치료법이다. (웃음)” 캐릭터에 따라 다양한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연기는, 양조위에게 비밀의 구멍과 같았다. 그 구멍에 지금껏 드러내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고, 전혀 다른 극중 인물로 포장해 봉할 수 있었기 때문. “가수라면 사람들과 직접 마주하고 혼자 무대에서 노래를 해야 하는데, 다들 나만 쳐다보기 때문에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연기는 항상 하나의 막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 막을 통해서 나를 보기 때문에 내가 움직여도 양조위가 아니라 그 인물이라고, 내가 울어도 그 인물이 운다고 생각하니까 뭐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얇은 막을 사이에 두고, 실은 진짜 양조위를 조금씩 엿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디오헤드의 이 흐르는 나이트클럽에서 지독한 우울함에 잠긴 <씨클로>의 시인같은 갱도, <중경삼림>의 소심하지만 사람 좋은 경찰도, 명예나 돈보다 빈민가에서 창녀들을 기꺼이 돌보는 삶을 즐기는 <양조위의 류망의생>의 속 깊은 의사 유문도, 변덕스러운 연인 때문에 마음 아파 하는 <해피 투게더>의 아휘도, 다들 조금씩 그와 닮아 있는 셈이다. “어쨌든 시나리오를 골랐을 때는 그 안에 내가 있다. 내가 양조위를 완전히 벗어나서 이연걸이 될 순 없다. 한번도 안 해본 역할, 전혀 나랑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어서 골라도 결국 나랑 공통점이 있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나라서 피할 수 없다. 배우가 할 수 있는 게 많진 않다. 내가 완전히 딴판으로 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대의를 위해 진나라 왕의 암살을 포기하는 <영웅>의 사색적인 검객 ‘파검’까지, 양조위의 캐릭터들은 “과묵하고, 수줍어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굉장히 신경 쓰고, 피동적”인 양조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또 반대로 너무나 많은 역할들을 해보기 때문에 그 역할들의 성격이 오히려 지금의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도 있다. 아무래도 심리치료사를 찾아가 봐야 하지 않을까”
왕가위의 94년작 <중경삼림>에서, 연인과 헤어진 경찰은 방 안의 온갖 사물들을 향해 대화체의 독백을 읊조린다. <아비정전>으로 왕가위 감독을 만났을 무렵, 아마 양조위도 그 비슷한 독백을 되뇌고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네 꼴이 뭐냐고. 오우삼의 <첩혈가두>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지만, <마화정> <천녀유혼3> 등 많게는 1년에 5편이 넘는 졸작 행진에 지쳐갈 때였다. “영화와 TV 시리즈물을 오가며 심각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연기를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었는데, 왕가위가 <아비정전>을 찍자고 했다.”왕가위가 <포지티브>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중국영화로 <비정성시>를 꼽은 점을 감안하면, 두 사람의 만남은 시간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열혈남아>를 재밌게 봤던 양조위는 2부작으로 예정됐던 <아비정전>의 1부 주인공으로 흔쾌히 합류했다. “처음엔 꽤 헤맸다. 왜 그런지 모르겠더라. 난 10년 이상 배우로 활동해왔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단순한 장면 하나를 끝낼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 장면을 보곤 스스로 놀랐다. 지금은 다시 하래도 그렇게 안 나온다. 매일 아침 도박을 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도박사의 습관적인 모습인데, 그때 한 게 가장 자연스럽고 최고다.” 결국 <아비정전>은 완성되진 못했지만, 양조위는 지금도 손톱을 다듬고, 머리를 빗고, 돈과 카드를 챙기는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을 “자신있게 제일 잘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할 정도다.
“양조위는 카메라 앞에서 비상식적인 것을 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그는 섬세하고 매우 집중력 있는 배우다. 난 그에게 변화를 주고 싶었고, 그의 균형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에게서 다른 악센트를 끌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왕가위)
“음악 한곡, 시놉시스 열줄 정도”는 있지만 각본도, 스토리도 거의 현장에서 나오는 왕가위와의 작업은, 양조위의 연기에 또 다른 숨통을 틔워줬다. “굳이 꼽으면 나와 제일 비슷한 캐릭터”라는 <중경삼림>의 경찰, <동사서독>의 검객, 번번이 상처받으면서도 떠났다가 돌아오길 반복하는 연인을 감싸안는 <해피 투게더>의 아휘, 아내의 불륜 상대의 부인과 미묘한 감정에 빠지는 <화양연화>의 차우 등 왕가위의 영화들에서 양조위는 비로소 가장 편안해진 듯하다. “배우에게 많은 자유를 주지만 자신이 그 배우에게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왕가위의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역할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휘가 보영과 이별한 슬픔을 땅 끝에 묻어주겠다는 장의 녹음기 앞에서 흐느낄 때나, <화양연화>에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차우의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내릴 때, 양조위는 사랑에 버림받은 이들의 상처의 속살을 세심하게 드러낸다.
어느덧 마흔둘. 불혹을 넘긴 나이지만, 양조위에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라는 ‘화양연화’는 바로 지금이다. 어린 날의 상처에 관대해지면서 삶을 즐길 여유도 생겼고, “운명적으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을 만났다”는 영화를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동경공략>같은 액션영화도 찍는 한편, <아비정전>부터 헤아리면 12년 동안 5편의 영화를 함께한 왕가위와 함께 6번째 영화 을 찍으면서, 그는 이번에는 또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해하고 있다. “미래사회에서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라는 것 정도만 확실한 왕가위의 영화처럼, 영화가 있을 거라는 것 정도만 확실한 수많은 날들이 남아 있지만, “한 계단 지나 또 한 계단인데 망설일 게 뭐가 있나”(<양조위의 류망의생>, 유문의 대사 중에서).
˝현실이 싫어서 연기가 좋았다˝
양조위, 그 스스로가 말하길…
1984년 장만옥과 첫 만남,
TVB 드라마 <신찰사형>(新紮師兄)
그때 장만옥은 연기가 뭔지 몰랐던 사람이었다. 아마 처음 아니면 두 번째 출연작이었을걸 굉장히 잠재력 있는 사람인데 스스로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야 연기를 즐기게 됐지만. 나 난 첫날부터 연기하는 것 자체를 즐겼다. (웃음) 현실을 워낙 싫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보는 장만옥
똑똑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정말 연기를 좋아하는 배우. 홍콩에서 요즘 나온 신인 중에는 연기를 좋아해서 하는 배우들을 보지 못했다. 유명해지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정말 연기가 좋아서 하는, 그리고 자신이 열심히 한 연기를 나중에 보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만족하는 배우가 사실 드문데, 장만옥은 그런 배우다. 이런 배우만이 점점 더 자랄 수 있다. 연기 외의 다른 곳에 목표를 두고 있으면, 자신의 연기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달라지지 않을까. <영웅>만 해도, 시나리오 받은 날부터 찍기 시작한 날, 그리고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거의 매일 서로 영화에 대해 얘기했다. 정말 연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왕가위와 나
나처럼 18년 정도 연기를 하다보면, 자신만의 리듬 혹은 전형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많이 준비하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연기를 제한하게 된다. 그걸 깨고 싶어 하지만 익혀온 것, 배운 것을 잊기란 정말 힘들다. 왕가위와의 작업은 그걸 잊을 수 있게 했다. 준비할 수도 없고, 뭘 할지 모르니까. 그냥 가서 제로 상태부터, 본능대로 하는 거다. 왕가위는 각본도 거의 없고, 어느 배우가 먼저 몰입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내가 몰입했다 싶으면 얼른 와서 나를 찍고, 다른 배우가 몰입하면 그쪽을 찍고, 혹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입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몰입하면 자기 생각대로 찍는다. (웃음) 매일매일 변한다. 이런 방식은 왕가위 감독과만 가능하다. 왕가위는 이미 가족이 됐고, 이제 그의 현장에 가면 거의 모든 사람을 다 아니까 꼭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집에 쉬러 온 것 같은. 정말 편하다.
홍콩에서 배우로 산다는 것
알다시피 홍콩 배우들은 다작을 한다는 게 특징인데, 장단점이 있다. 단점은 너무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짧아질 수 있다는 것. 배우로서는 위험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다작을 통해 많은 역할을 해볼 기회가 생기는 것은 장점이다. TVB 연기 수업을 마친 당시 물론 연기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만약 내가 홍콩 배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실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겠지. 홍콩에서 배우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 생각 외의 이런저런 역할들을 해보며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보통 여성들에게 많이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나한테는 ‘지금’이 ‘화양연화’라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경험이 있고, 좀더 성숙해졌고, 삶의 모든 사소함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