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어머니로서 카오스/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여정 1/31]
“어둠이 심연 위에 있고, 바람은 물 위에서 퍼덕인다”
카오스는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하는 빈 공간… 빅뱅을 통해 등장한 시간과 공간 속 인간정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우주는 빅뱅을 통해 ‘무(無)’에서 시작됐다. ‘없음’이 존재했던 아득한 세상의 시원은 인류에게 창조 신화로서 많은 영감을 부여했다
지난 3년여에 걸쳐 <성서의 위대한 질문>, <예수의 위대한 질문>을 잇따라 연재해 독자를 감동시켰던 배철현 교수가 11월호부터 인류 문명의 발자취를 탐구하는 새 기획 <인간의 위대한 여정>을 연재한다. ‘위대한 여정’은 인간의 문명적 성장과 문화적 성숙의 지난한 과정을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유장한 기획이다. 문학과 예술, 과학과 철학이 부여한 혜안으로, 그는 인간 정신의 놀라운 전개과정을 탐구한다. 필치는 강렬하고, 통찰은 심원하다. 배철현 교수가 펼치는 생각의 너른 광장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0. 인간은 누구인가?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
인류는 항상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왔다. 거의 모든 문화엔 창조 이야기가 등장한다. 찰스 다윈이 1859년 진화론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해답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같은 동물이며 원숭이와 기원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다음처럼 정교해졌다. 무엇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들었을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특징들은 무엇이며 이 특징들은 어떻게 진화되었는가? 이 특징들 중 다음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두 발로 걷기, 불 다루기, 상징적인 언어, 자유의지, 유머…. 18세기 스웨덴 생물학자 린네가 만물을 분류했을 때,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즉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세상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고 자신과 주변에 관해 의식할 수 있는 동물이다. 약 20만 년 전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에 가장 최근에 등장한 동물이지만 단시간 내에 지구를 정복한 동물이기도 하다. 이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인간의 위대한 여정’을 인문-과학-예술분야에서 준 혜안으로 추적하려 한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인간이 등장하기 전에 어떻게 우주와 태양계, 지구와 생명의 등장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1. 빅뱅 이전에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과학자들에 의하면 137억 년 전에 ‘빅뱅’이란 전무후무한 신비한 폭발로 우주가 탄생했다고 말한다. 더 좋은 과학이론이 등장하면 빅뱅이론을 대체하겠지만, 현재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설명이다. 그렇다고 빅뱅이론에 모든 과학자가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지, 빅뱅 이전엔 무엇이 존재했는지 정확하게 아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이론은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이 우주를 말로 창조했다는 이론이나 고대 이집트 멤피스 창조신화에서 프타라는 신이 생각과 말로 창조했다는 주장만큼 황당해 보이지만, 과학을 종교만큼이나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겐 빅뱅이론이 ‘진리’처럼 보인다. ‘빅뱅’을 통해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물질, 에너지,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빅뱅이 마련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물질과 에너지들이 뭉쳐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냈다. 원자와 분자 그리고 다른 화학적 성분들이 만들어졌다. 빅뱅이 만든 수천억 개의 돌덩어리 중 하나인 지구에 생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38억 년 전에 이 다양한 분자가 크고 작은 생물체들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빅뱅 혹은 빅뱅 이전 상태를 목격한다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빅뱅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등장했기 때문에, 빅뱅 이전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빅뱅 혹은 빅뱅 이전에 남긴 미세한 흔적을 나름대로 관찰하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미세한 흔적이란 드넓게 펼쳐진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대한 분석에 불과하다. 우주에서 볼 때 바닷가의 모래 한 알보다 작은 지구에 살면서 우주의 처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어쩌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삶에는 답하기가 불가능한 질문이 많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질문의 대상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지탱하는 공기와 유사하다. 그것들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해야 하는 가치를 잃을지도 모른다. 우주, 생명, 정의, 아름다움, 질서, 진리, 착함, 신뢰, 사랑 등의 기원이나 작동원리에 대해 우리는 알려고 노력할 뿐이다.
만물은 죽음과 태어남을 반복한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고대인들은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보면서 자신의 눈으로 쏟아지는 별들의 처음에 관해 알고 싶었을 것이다. 새벽이면 사막의 지평선에서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아침이면 예외 없이 떠오르는 태양은 누가 만들었을까? 인간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감히 맨눈으로 오랫동안 보다가는 실명할 수도 있는 태양을 과연 누가 아침마다 땅거미에서 밀어 올리나?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의 모헨조다로와 이란의 수사를 거쳐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온 대상무역상의 밤길을 밝혀주는 달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밤하늘의 모든 별은 빙글빙글 움직이는데, 누가 자기 자리로부터 한치도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저곳에 매달아놓았을까?
그(들)는 우주의 처음에 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처음을 ‘없음’이라 규정했다.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할 수 있을까? 이 ‘없음’은 ‘있음’에 대한 반대 개념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하기 전의 상태, 즉 존재와 비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우주창조 이전의 상태인 혼돈에 관한 대표적인 신화들, 즉 고대 힌두인들이 남긴 서사시 ‘리그베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기원전 17세기에 남긴 ‘에누마엘리쉬’ 신화,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기원전 6세기에 남긴 ‘창세기 1장’의 내용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2. 힌두 서사시 <리그베다>의 혼돈
창조에 관한 신비는 구전돼오다 기원전 12세기경 정형화돼 종교의 틀을 갖췄다. 최초로 창조설화를 기록한 <리그베다>로부터 파생된 <아베스타>는 조로아스터교의 근간이 됐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이 의식을 행하는 모습.
<리그베다>는 기원전 1500년부터 800년 사이에 구전으로 전승된 노래 모음집이다. <리그베다> 중 10장 129절은 ‘우주 창조’에 관한 내용이다. 인도-유럽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 지금의 이란과 인도로 내려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1200년경에는 구전으로 우주의 처음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사실 기원전 12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지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이때 수천 년 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노래들이 정형화되었고, 여러 집단이 이 노래를 바탕으로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종교를 탄생시켰다. 서양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 러시아 남부 발트 연안에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집단은 이란에 정착해 <아베스타(Avesta)>라는 경전을 남겼다. <아베스타>는 후대 조로아스터교의 근간이 되었고, 또 다른 집단은 인도에 정착해 <리그베다>를 남겨 불교의 기본 틀을 제공했다. 이들은 세상이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객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우주 창조 이전의 혼돈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리그베다> 10장 129절 1~2행의 번역과 해석을 살펴보자.
<구약성서>(사진)의 창세기는 우주 기원을 다룬 대표적인 기록물이다. 창세기는 리그베다, 에누마 엘리쉬와 함께 혼돈(무질서)으로부터 질서가 생겨난 창조의 여정을 담았다.
(1행)“그때에는 비존재(ásat)도 없었고 존재(sát)도 없었습니다./ 그때에는 ‘공간의 범위’도 없었고 그 너머에 하늘도 없었습니다./ 누가 덮었습니까? 어디에서? 쉴 만한 공간이 있습니까?/ 그때 바닥이 없는 깊음에 물이 있었습니까?”
<리그베다> 10장 129절은 창조 이전에 이해할 수 없는 ‘빔’만 있다고 말한다. ‘있음’도 존재하지 않았고 ‘없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없음과 있음은 상호 배타적이면서 상호 필연적이다. 그때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첫 구절부터 난해하기 짝이 없다. 만일 없음이 존재한다면, 있음이 부재한 없음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없음도 하나의 개념이 되어 있음이라는 속성을 지닌다. 만일 없음이 어떤 것이 부족한 상태라면, 이 없음은 어떤 다른 것이 부족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하다.
없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없음이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떤 것이 없음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가? 이 딜레마는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에 숨어 있는 어려운 문제다. 하늘을 덮는 것은 성서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궁창(firmament)’과 유사하다. 천동설을 신봉하던 고대인들에게 태양, 달, 별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기적으로 가는 천체다. 고대인들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물’이라고 상상했다. 이 물은 자신들의 땅을 둘러싸고 있으며, 무한하고 불변해서 바닥이 없는 물체로 생각했다. 만물은 결국 소멸한다. 나무, 산, 심지어는 별들도 불규칙하게 움직이지만 바다만큼은 고정적이다. 그러나 힌두 시인은 감히 의심을 품는다. 바다의 불변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의심한다.
(2행)“그때에는 죽음(mr. tyús)도 없고 비죽음(amr. ta)도 없습니다./ 밤이나 낮의 표식(praketa)도 없었습니다./ 숨이 없는 어떤 것이 자생적인 힘으로 숨을 쉽니다./ 그때에 하나(ékam)가 존재하고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초적인 ‘없음’에는 당연히 죽음도 비죽음도 없다. 비죽음은 영원이 아니라 죽음의 부정을 뜻한다. 2행을 보면 밤이나 낮의 표식도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밤이나 낮을 표시하는 물질적인 기호인 달과 태양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표식을 의미하는 ‘프라케타(praketa)’는 산스크리트어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쓰인 <베다>에만 등장하는 어휘다.
천체의 움직임은 고대인들에게 신비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천체가 비가시적인 어떤 힘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 어떤 힘이란 무엇일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모든 형태는 그것이 물질적인 모습으로 구체화되기 전에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고대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는 것은 그 원형에서 만들어진 생각, 즉 의도로 출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우주는 창조되기 전에 누군가 우주를 창조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고대인들은 그 의지를 ‘에캄(ékam)’이라 했다. 에캄은 창조 이전에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한 어떤 것을 말한다. 에캄은 세상을 등장하게 만드는 창조주이다. 에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에캄의 특징은 숨이 없지만 스스로 숨을 쉰다. 이것은 창조 이전에 어떤 것이 없음으로 존재한다는 모순에 대한 은유다. 즉 원초적인 에캄인 ‘있음’을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여기서 창조자인 에캄의 숨은 살아 있다는 보편적인 표식이다. 이 표식은 플라톤의 이데아(idea)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Primus Motor)와 유사하다.
3. 바빌로니아 신화 <에누마 엘리쉬>의 혼돈
고대인들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물’이라고 상상했다. 생명의 요람인 동시에 형태가 없으면서도 형태를 갖춘 신비한 물질로 인식했다.
창조 이전의 상태인 혼돈을 의미하는 영어 카오스(chaos)는 굳이 번역하자면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하는 비어 있는 공간’이다. 카오스는 원래 ‘하품하다’라는 그리스 동사 ‘카이노(khaino)’에서 유래했다. 하품은 무료할 때나 졸릴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호흡 동작으로 평상시보다 길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말하자면 카오스는 입 앞에 있는 공기가 구강을 통해 들어갈 때 목구멍이 만들어놓은 빈 공간이다. 카오스의 반대는 코스모스(cosmos)다. 코스모스는 질서를 뜻한다. 이는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군인들을 준비시키고 배치하는 행위다. 더 나아가 하늘에 천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행위와 그 결과물인 우주를 말한다. 화장품이라는 뜻의 영어 코스메틱(cosmetics)은 밤 사이에 혼돈의 상태가 된 얼굴에 ‘질서’를 부여하는 제품이라는 의미다.
1849년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1817~1894)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기원전 668~627)이 지은 도서관의 유적에서 조각난 토판 문서를 발견했다. 쐐기 문자로 기록된 토판 문서에는 성서의 창조 이야기와 유사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후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George Smith)는 그 내용이 <창세기> 1~2장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곳에서 발견된 약 스무 개의 토판 문서와 함께 1876년에 <칼데아인의 창세기(The Chaldean Account of Genesis)>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는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영국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에 편지를 보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라고 알려진 <에누마 엘리쉬>가 유럽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바빌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축제가 있다. 이 축제를 ‘아키투(akitu)’라 한다. 아키투는 원래 수메르어로 ‘보리’라는 의미인데, 바빌로니아인들이 차용해 ‘보리’ 혹은 ‘신년’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수메르에는 1년에 두 번 농경 축제가 있었다. 춘분(春分)에는 보리를 파종하고 추분(秋分)에는 보리를 추수한다. 이 중에서도 춘분 축제는 오늘날에도 중근동의 가장 중요한 축제다. 수메르인,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아프가니스탄인, 쿠르드족, 바하이족 모두 봄의 시작을 정교한 의례를 통해 기념한다. 아키투 축제는 가장 오래된 종교 축제 중 하나며, 태양력 3월 21일에 시작한다. 축제일 이전은 죽음과 혼돈을 뜻하고 축제 이후에는 생명과 창조를 뜻한다. 겨울 내내 바닷물에 절어 있던 휴경지는 춘분 때가 되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흘러 들어와 소금기가 제거되고 땅이 부드러워져 경작이 가능해지고, 추분이 되면 추수를 시작한다. 춘분에 거행되는 아키투 축제는 신이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 처음으로 선택한 도시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한 것을 기념하는 행렬이다. 이 축제를 통해 새로운 장소와 시간이 창조된다. 12일 동안 진행되는 축제의 넷째 날 밤에<에누마 엘리쉬>를 상연한다. 우주와 신들의 탄생과 함께 마르둑 신과 바빌론 시를 찬양한다. 다음은 <에누마 엘리쉬> 제1토판 1~9행 번역이다.
고대인들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물’이라고 상상했다. 생명의 요람인 동시에 형태가 없으면서도 형태를 갖춘 신비한 물질로 인식했다.
① 위로 하늘이 아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② 아래로 땅이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았을 때,
③ 최초(rēštu)의 압수(Apsû), 그들의 아버지,
④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낳은 모체(mummu), 티아맛(Ti’āmat)이
⑤ 그들의 물이 하나로 섞여 있었다.
⑥ 그때에는 들판이 형성되지 않았고, 갈대밭도 찾을 수 없었다.
⑦ 어떤 신도 나타나지 않고,
⑧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았고,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때,
⑨ 신들이 그들 가운데서 창조되었다.
여기서 1과 2행은 태초에 우주의 창조 이전을 말한다. 다른 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인들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우주 전체를 ‘하늘’과 ‘땅’으로 표현한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장소는 땅이라고 정의한다. <에누마 엘리쉬> 저자는 빅뱅 이전의 상태를 하늘과 땅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전이라고 말한다. <에누마 엘리쉬>의 첫 두 줄은 <창세기> 1장 1절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 두 이야기 모두 자기 나름대로 ‘처음’을 표현한다.
생명의 강과 죽음의 바다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던 고대 바빌로니아(사진)에는 춘분을 기점으로 죽음과 혼돈, 생명과 창조가 교차한다고 믿었다. 이를 기념하는 게 ‘아키투 축제’다. 현재까지 발굴된 축제 중 가장 오래됐다.
자신의 존재를 확정하고 구성하는 추상적인 공간인 위와 아래, 그리고 그것이 구체화된 공간인 하늘과 땅이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그 대상의 개념을 언어로 포착해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이름이 없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혹은 그 대상이 존재했지만 아직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원초적인 ‘없음’을 상징하는 두 개의 물체 ‘압수’와 ‘티아맛’이 등장한다. 이 두 물체는 스스로 존재하는 물체로 무엇을 다른 것에게 요구하지 않는 ‘자동사성(自動詞性)’을 지닌다.
압수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뜻한다. 메소포타미아는 아르메니아 아라랏산에서 발원해 바빌론을 거쳐 페르시아 만(灣)으로 유입되는 이 두 강의 선물이다.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했듯이,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압수는 우주 창조에 필요한 씨를 간직한 자연이며 후에 등장하는 창조물의 ‘아버지’이고, 별명은 ‘최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처음’이라는 히브리어 ‘레쉬트’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했다. 이 강물에 들어 있는 담수가 바로 우주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처음’이다.
한편 티아맛은 혼돈의 여신으로 바닷물을 상징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바닷물에 시달렸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발원지인 아라랏산의 눈이 춘분이 되면 녹기 시작해 메소포타미아로 내려온다. 이 물이 바빌로니아까지는 산세가 가팔라서 잘 흘러내려오지만 그곳에서 페르시아만까지는 지세가 완만해 잘 흐르지 못한다. 오히려 지세가 낮아 바닷물이 거꾸로 유입되어 늪지대를 만들거나 농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일쑤다. 바닷물 티아맛이 끌고 온 염수는 곧 가뭄이자 기근이며 죽음을 상징한다.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곳에서 거친 자연의 도전과 대면해 공동체를 만들고 도시를 만들어 조직적인 수로 공사를 시작한다. 메소포타미아 초기 왕들은 바로 이 수로 공사의 감독관들이었다. 두 강이 부수적으로 끌고 내려온 침적토를 강바닥으로부터 퍼올리는 일이 도시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만에서 유입되는 바닷물의 화신인 티아맛 여신은 역설적이게도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스스로 기지를 발휘해 문명 사회로 진입하게 만드는 발판이 된다. 모든 생명과 문명을 배태시키는 ‘그들의 어머니’가 됐다. 직역하면 ‘그들을 모두 낳은 여인’이라는 의미다. 그녀의 별칭은 ‘뭄무(mummu)’다. ‘뭄무’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등장하는 ‘수용체’와 유사하다. ‘뭄무’는 바빌로니아에서 동상을 만들기 위한 ‘주조 틀’을 이른다.
압수가 상징하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그리고 티아맛이 대표하는 바닷물이 하나로 엉킨 상태가 바로 우주 창조 이전의 모습이다. 5행에 “그들의 물이 하나로 섞여 있었다”라고 전한다. 이 원초적인 시간에 들판도 없었고 갈대밭도 없었다. 들판은 농경을 의미하고 갈대를 문자의 철필로 사용하기 때문에 갈대밭은 문자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농경이라는 것도 문자라는 것도 몰랐던 시절이다. “그때”에는 만물의 생사화복이라는 순환도 없었고 그것을 결정하는 운명도 없었다. 물론 신들도 등장하지 않았다. <리그베다> 와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한 혼돈의 이미지가 <창세기>에서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4.<창세기>에서의 혼돈
우주는 무질서와 질서, 존재와 무존재가 뒤섞인 혼돈의 세계다. 혼돈은 우주를 낳은 어머니이자, 우주의 질서의 일부이기도 하다.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갖춘 우주를 보며 고대인들은 인류의 기원을 탐구했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제이다. 학자들은 이 저자를 ‘사제저자’라고 부른다. 그는 1장 2절에 우주 창조 이전의 상태를 나열한다. “그때에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땅은 매우 혼돈하였다. ‘토후 와-보후’는 유사한 의미를 지닌 두 단어인 ‘토후’와 ‘보후’가 접속사 ‘워(wə)’로 연결됐다. 이 두 단어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기보다는 혼돈을 나타내는 의성어다. 토후 와-보후는 영어로는 ‘formless and empty’, 라틴어로는 ‘inanis et vacua’, 그리스어로는 ‘보이지 않았고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로 번역했다.
여기서 인간이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세상을 ‘그 땅’이라고 표현한다. ‘땅’이라 번역된 ‘하-아레츠’라는 히브리어는 ‘아래’라는 의미도 있으며 후에 동식물의 삶의 터전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 땅의 상태를 “토후 와-보후(비어 있었고 비어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훗날 2세기 중반에 활동한 영지주의 사상가 발렌티니우스(Valentinius)는 그리스도교를 플라톤주의와 연결시킨다. 그는 영원한 천상의 세계를 ‘꽉 참’이라는 의미를 지닌 ‘플레로마(pleroma)’로, 가변적인 현상의 세계를 ‘비어 있음’이라는 의미의 ‘케노마(kenoma)’로 명명한다.
‘토후 와-보후’는 <에누마 엘리쉬> 1장 5절에 언급된 “그들의 물이 하나로 섞고 있었던” 창조 이전의 무질서를 지칭하는 용어다. 이 문구에 대한 고대 언어나 현대 언어의 번역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토후 와-보후’라는 문구의 의미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빅뱅 이전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두 단어 모두 ‘-후’로 끝나 숨을 가파르게 뱉어내는 소리로 인간의 몸 안에서 공기나 빠져나간 상태를 의미한다. ‘토후 와-보후’는 헨다이어디스(hendiadys), 즉 ‘두 가지 유사한 단어를 나열해 그 각 단어가 전하는 유사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이사일의(二詞一意)’라는 수사학적 용례다. 굳이 번역하자면 ‘완전하게 버려진/공허한’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심정을 잘 드러내는 문구다. 유대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바빌로니아제국의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기원전 605-562년경)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다. 유대인들은 유프라테스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전을 기억하며, 자신들의 정체성도 말살된 절망적인 상태를 ‘토후 와-보후’라고 했다. 창조와 질서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고 사나운 동물들이 득실거리며 불법과 살육이 판치는 거대한 황무지다. 그는 <창세기>에서 ‘토후 와-보후’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 질서의 신과 혼돈의 신이 우주 탄생을 위해 전쟁을 치르는 곳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 2절 후반에 등장하는 혼돈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둠이 심연 위에 있고 강한 바람은 물 위에서 퍼덕이고 있었다”
혼돈을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표현은 어둠이다. 어둠이 ‘심연’ 위에 있었다. 심연이란 무엇인가? 심연은 바닥이 없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블랙홀이다. 여기서 심연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는 ‘테홈(təhōm)’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테홈은<에누마 엘리쉬>에 나오는 티아맛과 어원적으로 같다. 셈족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혼돈을 상징하는 신화소로 테홈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신화소는 셈족인들에게 혼돈의 여신과 관련한 이야기를 구축하는 최소 단위가 됐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티아맛은 후에 등장하는 질서와 창조의 신인 마르둑과 싸우는 혼돈의 여신이나 <창세기>의 테홈은 자연의 일부로 등장한다. 그러나 두 단어의 어원이 같다는 점에서 테홈에는 무시무시한 혼돈의 여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둠이 심연 위에 있다”라는 말을 <에누마엘리쉬>에서 얻은 힌트를 통해 다시 번역하면 ‘짙은 어둠이 혼돈의 여신이자 괴물인 티아맛의 얼굴 위에 자욱이 내려앉고 있었다’가 될 것이다. 창조 이전의 상태는 <에누마 엘리쉬>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듯이 온통 어둠뿐이었고 그 밑에는 혼돈의 화신이자 거대한 바다의 여신 티아맛 만이 존재했다.
창조 이전의 혼돈을 깨우는 것은 무엇일까? 혼돈을 상징하는 바닷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바람이다. 바닷물을 상징하는 티아맛을 무찌를 무기는 마르둑의 할아버지인 ‘아누(Anu)’ 신(하늘 신)이 준 네 개의 바람이었다. 이 강력한 바람으로 흉흉한 바닷물을 몰아냈다는 메타포는 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둑 신이 티아맛을 바람으로 제압하듯이, <창세기> 1장 2절에서도 ‘가장 강력한 바람’이 물을 짓누르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다. 여기서 ‘짓누르다’라는 표현의 원래 의미는 ‘새가 바닷물 위에서 먹이를 잡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는 모습’이다. ‘강한 바람’이 혼돈을 상징하는 물을 가르기 위해 바람을 일으킨다.
5. 질서의 어머니, 혼돈
우주를 낳은 어머니는 혼돈이다. 이 혼돈은 아마도 우주라는 질서의 일부다. 오늘날 빅뱅이론과 같은 과학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달과 별을 보고 질서정연한 우주의 기원을 혼돈이라고 상상한 고대인들의 혜안이 놀랍다. 우리 모두도 세상에 나오기 전에 어머니 뱃속이라는 혼돈에 있었지만, 그 혼돈이 우리 모든 것의 기초를 마련해 주지 않았는가!
[박스기사] “우주와 인류가 걸어온 혁신의 발자취 돌아볼 터”
이번 새로운 연재는 종교적 색채를 벗어난 주제를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경전은 수천 년 동안 이뤄낸 인류의 경험을 글자라는 매체와 종교라는 틀을 통해 전해준 삶의 지표다. 그러나 이번 연재물인 <인간의 위대한 여정>에서는 종교를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인문·과학·예술에서 나타난 인류의 위대한 혁신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혁신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고학자처럼 그 발자취를 추적하려 한다.”
이번 시리즈의 끝은 어디까지 이르게 되나?
“빅뱅으로 시작해 태양계의 등장, 생명과 인류의 출현 등 우주와 인류의 시원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문명을 이룬 기원전 4천 년대를 거쳐 기원전 6세기 ‘축의 시대(Axial age)’ 등장 이전까지 오늘날 인류문명과 인간본성의 기본이 된 혁신들을 탐구할 것이다.”
새 연재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한 결과물로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다. 이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어제까지 알았던 지식을 과감히 폐기하는 무아(無我)를 연습하고 독자들과 함께 ‘가보지 않는 길’을 가고 싶다. 그 길이 다른 길보다 좋은 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유일하고 최선의 길이라고 스스로 독려하고 싶다. 독자들도 자신의 길을 이 글을 통해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배철현 칼럼(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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