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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돈황의 사랑

by 자한형 2021.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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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후명

 

나는 여전히 그놈의 쇠 침대에서 잠이 깼다. 낡았지만 언제나 꿈 없이 잠들 수 있는 침대였다. 한겨울에 냉돌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던 차에 우연히 고물장수의 리어카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흥정을 벌였을 때, 아내는 차라리 그냥 스폰지 삼단요가 어떻겠느냐고 내 소매를 끌어 잡아당기기조차 했었다. 세방에 침댄 무슨 침대예요, 그건 침대라고 할 수도 없는 고물이에요. 아내는 그런 두 가지 뜻으로 눈짓을 했었다. 그러나 남대문 시장에서 두툼한 스폰지를 사다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으니 제법 번듯한 침대가 되었다. 그리고 유난히도 추운 그 해 겨울이었지만 그놈의 좁은 쇠 침대에 둘이서 껴 붙어난 결과 냉돌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냉기를 피하는 데는 그보다 더 안성마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방비를 안 들였으면서도 아침에 침대 속에서 나을 때면 뒤에 남아 있는 온기가 식는 것이 마치 전기 미터기가 거저 돌아가는 것처럼 아까웠다. 어쨌든 바깥쪽에서 누가 누워 자든 한번도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눈을 뜨기는 떴으나 간밤에 마신 술로 아직도 골통이 띵했다. 언제부터인가 술을 먹으면 그 기억들이 촌충토막처럼 끊어져 뇌 속을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 예삿일처럼 되었으니 녀석과 어울린 기억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 속에, 노래를 불렀었지, 하는 느낌이 살아 있었다. 그러자 그 장면이 비디오 테이프를 다시 느리게 되돌리는 것처럼 눈에 떠올랐다. 애초에 노래 얘기를 먼저 꺼낸 것도 녀석이었다. 녀석은 요사이 생긴 버릇이라면서 술만 먹으면 동네 사람 시끄럽게 노래를 해서 큰일이라는 것이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라고 자가진단까지 하고 나왔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 다행이라는 내 말에 녀석은 사뭇 하소연 조였다.

"가만 있을 턱이 없지. 우리 집이 워낙 터줏대감이라 차마 고발은 안 하지만, , 날더러 장갈 못 가서 그런대. 저러다가 미친다는 거야. , 장가 못 가믄 술 먹구 노래부르니? 그러다가 미치니?"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무덤덤하게 나오자 녀석은 더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 , , , ? 내가 그때 앨 낳았으믄 걔가 지금쯤 국민학교 몇 학년인 줄 알기나 아냐?"

녀석은 펄쩍 뛰는 시늉까지 했다. 기억이 말짱한 걸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술은 그닥 취하지 않았었다. 그 포장마차가 유별나게도 포장에 '다푸네집'이라고 뼁끼로 써놓았던 것도 새삼스레 떠올랐다.

"얌마, 그건 걱정할 게 아냐. 태평성대엔 그런 거야. 신라가 한창 번성할 전 서라벌에 밤새도록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았다잖어"

하는 내 말에 녀석은

"? 신라 시대?"

하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한동안 눈만 꿈쩍거렸다.

"근데 신라가 왜 망했니 ?"

녀석은 술잔을 들고 말했다,

"망하긴 왜 망해, 임마.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는데."

나는 시치미를 떼고 퉁바리를 주었다.

"나중에 왕건한테 망했잖아. 새꺄, 그러니깐 고려 사람들이 노랠 더 부른 모양이지?"

"뙤놈 같은 고리 하네. 그건 임마 전쟁터에서 부른 노래하군 달러.”

녀석과 어울리면 나는 술이 갈 데까지 가야 헤어지게끔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질세라 악착같이 마셔 댔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번번이, 술이 원수다, 아라비아처럼 술 얼는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편하겠느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건설업체라 들어가서 가믄 될 거 타냐. 가서 술 끊구 마누라 네 명 꿰차구 살은 될 거 아냐"

하는 내 말에 녀석은

"거 좋지."

맞장구를 치면서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알콜이라는 말이 왜 아라비아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마시 지두 못하는 걸 이름은 왜 붙여왔을까? 어때, 알콜? 이름 좋지?"

녀석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콜이라는 명칭 때문에 도리 없이 마신다는 것처럼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 날도 그런 얘기가 오갔을 때는 둘 다 꽤나 취했었다.

너 또 오늘밤 노래깨나 부르계T? 베짱이처럼. 아냐, 신라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빈정거렸다.

"베짱이 ? "

"그래, 임마."

내가 이렇게 대꾸했을 즈음부터 기억의 토막들은 끊어져 달아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시 이조차 자세히는 더듬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하는 녀석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새꺄, 베짱이가 향가를 부르니? 향갈? 무식한 녀석."

"향가?"

"그래, 베짱이가 향갈 부르냐구?"

녀석은 의외로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향가를 한 곡 부르겠다는 녀석의 말을 들었었다고 여겨질 뿐 기억은 끊어졌다. 다만 '아아 신라의 다아알 바아암' 하는 노래의 현 인의 스타카토가 귓가에는 물론 입가에도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그 노래를 따라 불렀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학교 시절에 잠깐 동안 함께 극회(劇會) 회원으로 있었다는 인연밖에는 없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녀석과 나는 사회에 나와서도 줄기차게 만났다. 그러는 동안 제 말마따나 연극에 미친 녀석은 내게 연극을 함께 해 보는 게 어떠냐고 진반농반으로 제의해 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의라고 하기가 어렵다면 권유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권유보다는 농도가 짙었다. 녀석은 만나기만 하면 심심풀이 삼아 그 타령이었다. 하기야 내 표현대로 하면 '연극광하고 연극 무광' 하고 같이 어울린다는 게 이상하긴 이상한 일이었다. 녀석이 내게 요구해 온 것은 내게 희곡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 희곡으로 녀석이 연출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직장을 잃고 노는 것을 보자 이때다 싶게 더욱 극성이었다.

"알잖어, 연극은 내가 무슨 중뿔난 연극이니? 나 암것두 모른다는 건 니가 알 텐데?"

하고 나는그때마다 말했었다.

"넌 프로잖어, 난 아마추어 글쟁이야. 인제 무슨 글이라두 써 볼까 맘먹은 단계란 말야. 순진한 처녀 꼬시지 마."

나는 정중하게 사절하곤 했다. 물론 정중한 사절의 절차에는 없는 돈에 안주 하나를 더 시키든가 술 반 병을 더 부르든가 하는 일이 뒤 따랐다.

"순진한 처녀라니까 더 꼬시구 싶은데? , 너 증말 숫처녀냐? 너하구 나하구 챔피온 한번 먹자. 히히히."

"미친 새끼."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라푸네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녀석은 찰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이 집 아줌마 희랍 여자야. 맞춤법이 서툴러서 그렇지. 푸가 프야. 다프네."

내가 듣든지 말든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리스 신화의 다프네는 아름다운 요정으로서 아폴로의 구애를 물리치고 도망쳐서 월계수(月桂樹)가 되었다고 했다.

", 넌 소도구 신세 언제 면할래?"

안주도 시키지 않고서였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소도구란 말에 어리둥절하기는 했으나 반가운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극회에 몇 번 얼굴을 디밀기는 했어도 극회 회원으로 활동한 것은 아무 것도 업었다. 녀석이 나를 소도구 신기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 한번 공연 팜플랫에 내가 소도구 담당으로 되어 있었던 연고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된 일일뿐이었다, 나를 소도구로 몰아세우며, 녀석은, 실업자가 무엇을 하느냐, 돈은 안 된다마는 그래도 구들장 지고 드러누워 마누라 눈치만 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면서 은근히 남의 약점까지 들먹였다. 처음에는 여느 때처럼 그냥 해보는 소리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꼭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공연에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게 어딨니?"

희곡이란 걸 써 본적도 없고 또 연극에 대해서는 백지에 가깝지 않느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는 녀석이 연출했노라는 연극조차 제대로 본 것이 거의 없었다.

"너 증말 이렇게 나오기냐?"

"뭐가 임마. 재주가 없는 걸 어쩌란 말야. 그 소린 집어치우고 너 요새 연애한다는 얘기나 듣자."

", , , , 이 새끼 봐, 눙치네."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틈을 타서 내가 화제를 돌릴 겸 무엇을 먹겠느냐고 닭똥집이며 꼼장어, 해삼, 멍게 따위가 얹혀 있는 목판 위로 턱짓을 했으나 녀석은 관심도 없다는 투였다.

"아무거나 시켜. 지금 난 중대한 국면을 얘기하수 있는 거야, 임마. 내가 너하구 손을 잡을라는 건 무슨 니가 잘나서가 아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셔. 이건 우정의 발로인즉 다 너 잘 되라구 하는 거란 말야."

나는 녀석의 말을 듣는 등 마는 등 하면서 해삼과 멍게를 한 접시씩 시켰다. 음식점에서 무슨 접두사처럼 습관적으로 '아무거나'를 읊조리다가도 결국 '아무거나'는커녕 까다롭기 짝이 업는 우리네 식성이지만 나는 녀석의 식성을 내 식성만큼이나 두루 레고 있었다. 녀석은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술잔을 홀짝거리면서 다시 '소도구 신세' 운운했다. 녀석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따르면 내가 연극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해야만 과거의 소도구 경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나 사나 소도구 아무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아무개 작()이라고 한번이라도 못박아 놓는 것이 본인이나 후손을 위해서 좋으리라는 것이었다.

"너 비석에 소도구 아무개라구 파두 좋겠어?"

녀석은 어린애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너야말로 노는구나. 죽은 담에 임마 소도구은 어떻구 대도구믄 어때. 그래 넌 비석 걱정하면서 사냐? 장하다 장해. 그리구 난 소도구라는 걸 맡은 적이 없어. 그건 니가 알잖어 ? 소도구'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니?"

내가 소도구 일을 안 했다고는 해도 팜플렛에 이름이 난 뒤로 몇몇 친한 급우들로부터 소도구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내 체구가 작은 데서 비롯된 별명이지 연극하고는 무관한 것일 터였다.

"소도구 얼굴? 바로 니 얼굴이 소도구 얼굴이다. "

"우습지두 않다. "

녀석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녀석이 굳이 나와 함께 일을 벌여 보려는 뜻은 녀석이 강조하듯 '우정의 발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따라서 '돈이 안 되나마' 나에게는 고마운 제안이기는 했다. 멋진 연극이 될 수만 있다면 꽁무니를 뺄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편이냐 하면, 녀석이 드러내놓고 우정, 우정, 하는 데는 메스꺼움이 뒤따르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안주가 나왔다. 녀석이 목판 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옷핀을 뽑아 해삼 토막을 눌러 찍었다. 이제 정중하게 사절이 된 셈인가 하고 나는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해삼 토막에 초장을 발라 입에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던 녀석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너 증말 나하구 손 끊을 거야, 어쩔 거야?"

녀석이 웃음을 짐짓 감추고 다그치듯 물었다.

녀석은 내가 쓰려고 들면 쓸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 때 창작극의 빈곤이니 치졸성이니 되지도 않은 소리를 몇 마디 지껄였던 게 두고두고 화근이었다.

"천학비재를 통감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요지부동을 하자 녀석은

"내가 그럴 줄 알고."

하더니 해삼 한 토막을 또 찍어 입으로 밀어 넣으며 엉뚱하게

"해삼도 예전 해삼하곤 맛이 달라."

하고 말했다. 나는 녀석이 무슨 희떠운 수작을 하는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녀석은 꼬독꼬독 소리까지 내며 한동안 해삼 씹는 일에 골몰했다.

"네놈이 꽁무닐 뺄 줄 알고 내가 기가 막힌 소재까지 마련해 뒀다 친구 좋아하는 것두 큰 병이야, 큰 병."

녀석이 말하며 다시 묘한 웃음을 흘렸다.

"소잴?"

"아무렴."

그 순간 나는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녀석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말하고 있었지만 녀석이 소재랍시고 주워 왔던 것이 과거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넌 맨날 기가 막힌 소재잖어?"

처음에는 극적 요소가 있는 소재를 취재하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나중에는 온갖 잡동사니 이야기를 다 긁어모았다. 그 그물에는 동서고금이 다 걸려들었다. 그래서 이를테면 흑산도에 유배되어 자산어보라는 물고기 생태 이야기를 쓴 조선시대의 정 약전과 물고기 연구에 권위자라는 현 일황 히로히토가 물고기를 놓고 역사의 당위성에 대해 갑론을박을 한다는, 도대체가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에서부터, 나무꾼과 선녀의 후일담(後日譚),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에서의 나폴레옹의 모노 드라마, 고려시대에 원나라로 유학해서 이름까지도 몽고 식으로 티무르라고 바꾼 한 줏대 없는 지식인의 행태를 그린 -() 티무르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라고 제목까지 단 이야기, 인디언들이 백인과 싸우다 죽은 운디드니 전설을 다룬 -아버지의 무릎뼈-, 신라의 무슨 왕이 똥자루가 큰 처녀를 왕비로 맞이한 사실에서 얻었다는 -사랑 흑은 똥-, 미이라에게 삶을 불어넣은 마술사 이야기라는 -목내이(木乃伊) 깨어나다- 등등 밑도 끝도 없었는데, 구태여 공통점을 찾는다면 모두가 역사나 전설에서 얼쩡거린다는 점이었다.

"이건 그런 거하구 달라. 기가 막혀."

녀석은 얼굴이 멍게처럼 상75되어 말했다.

"또 자지 하나 깎을라는 건 아니겠지?"

나는 생각난 김에 아예 들이대고 빈정댔다.

"? 자지?"

하고 반문하던 녀석도 그만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에 취재했다는 이른바 기막힌 소재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표현에 따르면 '그야말로 기가 막힌' 소재였다. 그것은 동해안 삼척군의 어떤 바닷가 마을에 지금도 전해진다는 민속이었다, 녀석은 이 '소재'를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 한 마을 처녀가 바닷가에 나가 조개도 캐고 바닷말도 따고 있었다. 그러나 처녀의 소쿠리 속은 신통치가 않았다. 그러자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마을 총각이 건너편 바다의 작은 바위섬에는 딸 것이 많다면서 처녀를 그곳까지 데려다 준다. 총각은 저녁이 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뒤에 바위섬을 떠난다. 그곳은 정말 손쉽게 딸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처녀는 소쿠리를 그득 채웠다. 저녁때가 되었다. 그러나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한 총각은 웬일인지 오지를 않았다. 일에 쫓기다가 그만 깜박 잊어버린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은 거센 폭풍우가 불어닥쳤다. 그제서야 총각은 바위섬에 데려다 준 처녀와 한 약속이 떠올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파. 밤을 지샌 총각은 바람이 자기가 무섭게 바위섬으로 배를 저어갔다. 그러나 처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배경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민속이 요컨대 기가 막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두 눈을 빛냈다.

"처녀가 죽은 뒤로 마을 사람들은 새해가 돌아오면 나무로 제각기 남근을 깎아 당나무에 매달아 처녀의 넋을 위로한다는 거야."

녀석은 어때, 재미있지 하는 표정을 짓고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토속적인 이야기에 남근이라는 말이 어쩐지 현학적이어서 걸맞지 않는다고 느끼고만 있었다.

"남근이라니? 자지 말야?"

"그렇지,"

녀석은 내 반응이 시원치 않자 사뭇 섭섭한 눈치였다. 하긴 그놈의 자지 형상을 깎아 매달아 놓는다는 기묘하다면 기묘한 민속이 그제서야 이야기 수집광의 촉수에 걸린 게 이상하긴 했다. 나는 녀석이 '기가 막히다'고 빨리 맞장구를 치라는 투로 안달하는 꼴에 공연히 심통이 사나와져서 엉뚱한 말만 꺼냈다.

"남근이라는 말은 토속적인 이야기에는 안 어울리잖어? 그럼 더 유식해지나?"

"남근 숭배란 게 있잖어? 남근 모양을 돌이나 나무로 커다랗게 만들어 놓구 떠받드는 거,,,,,,"

"있지."

"그러니까 그걸 얘기하는 거야. 남근 숭배---"

녀석은 자신이 낚아 온 '기가 막힌'소재에 대해서는 쓰다 달다 말이 없이 엉뚱한 꼬투리만 물고 늘어지는 내가 여간 못마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암튼, 남근 숭배하구 자지 숭배하구 뭐가 다르냐구. 근데 왜 하필이면 어울리지두 않는 어려운 말을 써?"

나는 핀잔을 주었다.

"흥분하지 마. 그래 그래, 자지다, 자지, 임마. 혹시 니 물건에 무슨 컴플렉스라두 있냐?"

녀석은 마지못해 내 말을 받아들인다는 투로 대꾸했으나 곧이어 무슨 변덕이 났는지

"거 좋은데? 제목두 다짜고짜루 '자지 깎기'라고 붙이는 거야. , 대담하게 현대인의 심리의 의표를 찌르는 거야."

어쩌구 하면서 스스로 감탄을 연발했다. 나는 '자지 깎기'가 어떻게 현대인의 심리의 의표를 찌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녀석이 '자지 깎기'를 무슨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쯤하고 견주고 있는 것 같아 고소를 금치 못했다.

"대담? 거 쓸개 한번 크네."

내가 빈정거리는데도 녀석은 아랑곳없이 득의 만면해 있었다.

"하기야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자어를 쓰면 점잖고 의젓하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긴 해."

녀석은 '자지 깎기'라는 제목에 스스로의 의표를 찔렸는지 어쨌는지 그렇게 말했다. 녀석은 다혈질의 체질 때문에 나부대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실은 나름대로 이것저것 해박한 데다가 진지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어서 녀석은 우리 나라 사람은 왜 자지다 보지라는 말을 해야 할 때 바로 못하는가, 동방예의지국이어서 그런가, 대신에 음경이니 음부니 하는 말을 쓰면 그래도 좀 나은가, 자지나 보지는 외설이고 음경이나 음부는 그렇지 않은 것인가, 글 속에 가끔 나오는 '엑스엑스' 또는 '곱표곱표'는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고 나서 국어학자들은 왜 보지라는 말이 남방 계통의 말이라고 밝혀 놓으면서도 자지라는 말의 어원은 밝혀 놓지 않는가, 밝히지 못하는가, 보지가 폴리네시안인지 뭔지 하는 바다 건너 남방 계통의 말이라면 그 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름이 없었단 말인가, 또 자지와 보지가 따로 떨어진 어원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따위의 의문을 제법 학문적으로 제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의 소박한 견해로는."

하고 녀석은 문어 투의 말을 앞세우고 나서

"보지가 남방 말이 확실하다면 자지도 남방 말이 되어야 마땅하리라고 사료돼."

하고 의젓하게 결론을 내렸다.

"나무로 그렇게 깎아서 매달아 놓아야 처녀의 원혼을 달래서 그해 고기잡이가 잘 된다는 거야. 풍어제(豊漁祭)."

그때 나는 무슨 처녀가 자질 그렇게 밝히느냐 하고 농을 던지려다가 그만두었다. 녀석의 기세도 기세려니와 그 기속에 깃들어 있는 어부들의 간절한 소망에 생각이 미쳐서였다. 어쨌든 녀석은 그 기속을 배경으로 삼아 향토색 물씬한 연극을 만들면 기가 막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기가 맥힌다. 임마, 기이하다구 연극이니? 그게 풍어제라면 그건 차라리 시야. 고대인들이 수렵이나 어로를 할 때 수확이 많게 해 달라구 빌었던 게 시 아냐?"

나는 얼버무리고 나서

"오늘날의 진정한 예술 활동이란 그런 엽기적인 것보담 평범한 일상의 자자분한 제반사에 뿌리를 박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돼."

하고 녀석의 진지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것을 '자지 깎기'였다.

그런데 또다시 녀석이 '기가 막힌' 소재를 가져왔다는 것이니 웃음이 안 나을 수가 없었다. 쓰잘 데 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녀석이 또 무슨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하는가 싶어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녀석이 뒷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꾸겨진 잡지 기사 몇 장을 꺼냈다. 아트지의 화보에 백상지의 본문 몇 장씨 곁들여 진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거창하냐? "

녀석은 내가 농조로 나오자 얼굴이 더 불콰해졌다. 녀석은 말없이 그것을 목판 위에 펼쳐놓았다.

"이건 돈황에 관한 기사야."

녀석은 엄숙하게 말했다.

"돈황?"

나는 술잔을 입술에 대고 되받았다.

", 돈황인데 중국의 서역 쪽에 있는 고대의 불교 유적지지. 굴을 파구 맨들어 놓은 절이 천 개가 넘는다는 곳이야. 막고굴이라구두 하지."

돈황 유적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서 단편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었으나 막연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해삼뿐만 아니라 멍게두 죄다 양식인가 보다고 혼잣말을 하면서 멍게를 찍어 입에 넣었다. 무슨 말인가 열심히 하려던 녀석은 때아닌 멍게타령에 김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양식이구 왜식이구간에 내 말 좀 들어봐, 임마. 돈황은 아주 중요한 유적이야, 수많은 굴 속에 불상이니 벽화니가 엄청나거든. 이걸 연구하는 돈황학이 있을 정도야."

"그게 우리하구 무슨 관계가 있니 7"

"내가 얘기하구 싶은 것두 바로 그거야. 아무리 중요한 것일지라두 우리하구 직접 관련이 없으믄 무의미하다는 거지."

녀석의 말에 생기가 돌았다.

"이 유적이 우리하구 무슨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 되는데?"

지구촌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지구 위에 있는 어떤 것일지라도 우리의 삶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는 포괄적인 견해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나는 녀석이 그 따위 공소한 소리를 중얼거리려는가 해서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니가 말하는 직접적인 관련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모르겠다만 내 소박한 견해로는 우리가 그 관련을 캐고 부각시키는 데 따라 양상이 달라지리라구 생각해."

"과연 소박한 견해로구나. "

", 이 멍게 같은 소도구야. 이건 장난이 아니란 말야, 임마,"

녀석은 일갈하고 나서 내게 우리 문화에 대한 사명감이 없다느니, 서른도 채 안된 놈이 퇴영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도무지 발전성이 보이지 않는다느니, 심지어는 암적 존재라느니, 어디서 주워 들은 그럴 듯하다 싶은 문자들로써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녀석이 고루한 문자

들만 동원하여 부아를 내는 꼴이 우습기만 해서

"니 말이 옳다. 넌 남을 꾸짖는 데도 문끼가 넘치는 구나."

하고 얼르고만 있었다.

"들어보란 말야. 돈황이 우리한테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 임마. 혜초있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여기서 발견되었단 말야."

녀석이 목청을 돋구었다,

"신라의 중 혜초?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어떻게 거기서 발견돼?"

"그러니까 하는 얘기지."

녀석이 거 봐,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얘기도 어디선가 책에서 본 것 같았다.

"이 이걸 보란 말야."

녀석이 목판 위에 펼쳐져 있는 페이지의 사진을 가리였다. 실은 처음부터 내내 들여다보았던 페이지였다. 석굴 속이었다. 한가운데에 금니를 칠한 듯한 불상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로는 비구, 보살이 놓여 있고, 좌대 밑으로는 공양자들, 약차와 사자(獅子)가 그려져 있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네 벽에는 천불 ,천정에는 비천(飛天).

"이 옆의 장경동에서 프랑스의 펠리오라는 사람이 많은 유물을 꺼내 갔는데 그 속에 혜초 것이 있었다는 거야. 이 굴이 발견된 건 참 우연이라지."

녀석이 그 동안 긁어모은 이른바 소재에 비하면 그래도 웬만큼 격이 있어서 나는 처음으로

"그래?"

하면서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비록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그 속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오늘의 나의 삶과 어떤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는 전혀 실감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중국 감숙성의 거리는 먼 것이었다. 사진 속의 석굴은 새로 보수되고 단장되어 발견 당시에 황량한 사막에 버려져 있었다는 탐험자들의 기록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혜초의 책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여기 오래 머물면서 그 여행기를 썼다는 거야."

나는 떠뜩 연전에 다모관음 지현 스님이 천축(天竺) 땅을 둘러보고 와서 펴낸 책 혜초의 길을 따라서가 떠올랐다.

그러나 책 내용 대신에 어디선가 다모관음이 '인도에서는 살아 남는 것이 곧 구도(求道)의 길이다. 제 오줌을 먹으며 광막한 뙤약볕 밑을 가야 한다'고 한 말이 머리에 뱅뱅 돌 뿐이어서, 녀석이 펼쳐놓은 페이지의 굴 속 사진에서 과장되고 완연히 희화적 (찰즈또)인 사자 모습만을 보며 사자를 타고 다닌 것은 문수보살인가 하는 쪽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본디 천 개도 넘는다는 돈황의 석굴들은 현재 육백 개 남짓 남아 있고 그 중의 492개에 불상이니 벽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이들 석굴들은 형식에 있어서의 예배굴과 복합굴로 나뉘고 있었다. 예배굴은 승려들이 머무는 승방이 없는 형식이며 복합굴은 승방이 딸린 형식이었다. 이러한 석굴 형식은 애초에 인도에서 기원한 것으로 경주 석굴암의 원류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녀석의 웅대한 기획에 따르면 돈황을 무대로 펼쳐지는 연극은 혜초가 예배굴에서 선정(禪定)에 들어간 장면에서부터 막을 올림으로써 장엄미를 돋보이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내용은 혜초의 사랑을 다루되 제목을 '돈황의 사랑'이라고 했으면 제격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어때? 이거야말로---,"

하고 녀석이 다시 장황하게 나오려고 하는 낌새였다. 나는 녀석의 말을 가로막았다.

"혜초가 무슨 사랑을 어떻게 했단 말이니? 그런 건덕지두 찾아볼 수 없잖어---"

그러자 녀석은 안색까지 변했다. 녀석은 끌끌 혀를 차더니 상상력의 빈곤이니 연극적 센스의 결여니 어쩌느니 하면서 삿대질을 했다.

"얌마, 넌 사랑이라믄 어째서 무조건 여관방만 연상하는 거냐? '돈황의 사랑'은 그런 게 아니라니깐. 에로스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어떻게 승화하느냐 하는 걸 다루는 거야."

녀석은 사뭇 기세가 등등했다. 혜초가 무슨 사랑을 어떻게 했다는 건덕지가 없다는 것은 추구하고자 하는 본질에는 하등의 문제거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국 여인과의 애절한 사랑이 곁들여져야만 그의 위대한 구도(求道)에의 길을 더욱 위대하게 되살릴 수 있다고 녀 석은 역설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의 승리라는 거야, 임마."

"난 잘 모르겠는데?"

", 이 구제 불능아, 오늘밤에 가서 가슴에 손을 얹구 생각해봐. '돈황의 사랑'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자는 거니까 말야. 설정이 우선 그렇게 맞아 떨어지잖냐."

녀석이 말하는 '본질'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언제나 그렇듯이 녀석은 혼자 열을 올리다가는 며칠 못 가서 제물에 주저앉을 것이니 굳이 맞상대를 하고 있을 필요조차 없었다.

"돈황의 사랑'보담 '돈환의 사랑'이라구 달구 돈환이 여자 따먹은 얘기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비아냥거렸다.

"? 돈환? 돈환의 사랑?"

"그래. 스페인 사람 있잖어. 돈주앙이라곳도 하지. 돈환은 닥치는 대루 꼬셔서 따먹었다면서? 니 말투를 빌리는 그런 돈환의 애정 편력을 통해 에로스의 본질을 그리자는 거야."

녀석은 돈황이 돈환으로 바뀐 것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으나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암튼 집에 가서 좀 진지하게 생각해봐."

하면서 펼쳐놓았던 잡지 기사를 접어 내 호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술병에 술이 꽤쾌 남아 있는데도 술 한 병을 더 달라고 소리쳤다. 그런 다음 녀석은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술에 취하게 만드는 것은 양보다도 속도였다. 나도 녀석의 보조에 맞추어 연거푸 들이켜다 보니 순식간에 막바지로 치달았다. '다푸네집'의 술을 다 푸자고 외칠 때쯤에는 녀석도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아내가 출근 시간에 쫓기면서 밥상을 차리는 소리가 문 밖에서 달그락거리며 들려 왔다.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 침대 발치에 걸쳐놓은 웃도리 호주머니의 잡지 기사가 없어지지 않았나 살펴보았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의 화면은 깜깜하게 끊어져 있었으나 그것은 얌전하게 접힌 채 들어 있었다. ‘돈황의 사랑'이라--- 작취 미성인 걸 ....’ 나는 혼잣말을 하며 그것을 빼들고 다시 침대에 벌렁 나자빠졌다,

감숙성의 돈황 현성에서 동남쪽으로 50리쯤 떨어진 곳에 모래 언덕으로 이루어진 명사산)이 길게 자리잡고 있다. 북경에서 4천 킬로미터, 잇수로 따져 꼭 1만 리다. 적막하고 웅장한 명사산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밟으면 모래가 허물어지나 산마루는 날카롭고 올라가면 웡윙 산이 울리는 소리가 난다. 사막 지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이 명사산 동쪽 기슭에 열 개의 왕조와 1천 년의 세월에 걸쳐 갖가지 양식으로 만들어진 석굴의 무리가 막고굴이다. 천불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막고굴은 처음에는 서역으로부터의 영향을 짙게 나타내다가 점차로 중국화되어 당나라 때는 중국 예술의 정수로 나타난다. 이곳이 처음 탐험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그보다 앞선 1898년 이곳 석굴을 지키고 있던 왕원록이라는 도사(道士)가 하루는 필경생을 시켜 문서를 베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필경생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이상하게도 벽 틈으로 스며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는 벽 틈을 살펴보았다, 벽에는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즉시 석굴 속의 벽을 허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에서 많은 옛 문서, 경전, 그림 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소문이 바깥으로 안 퍼질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중앙 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열강들에 의해 차례로 약탈되고 말았다. 1905년에는 소련의 오브르체프대(), 이듬해에는 영국의 스타인대가, 그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대가 여기에 가담하였다. 뒤에는 일본의 오다니대까지도 가담했다.

이렇게 약탈해 간 돈황 유물을 대상으로 이른바 돈황학이 생기기도 했다. 이곳에서 현재 조각이나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 석굴 492개는 당()나라 때의 것이 가장 많고 수(), (), 오대(五代), 서하(西夏), (), () 때의 것 등 다양하다. 이곳 석굴의 창건에 대해서는 서기 303년 이전 진()나라 혜제때 이룩되었다는 설, 그보다 50년 뒤인 동진 영화 9년에 이룩되었다는 설, 366년 진() 나라 건원 2년에 낙준 스님에 의하여 이룩되었다는 설 등세 가지 설이 있는데, 어쨌든4세기 때의 일이었다.

이 석굴 492개에 안치되어 있는 색칠한 소상(塑像)2415몸이며, 벽화를 모두 연장해 계산해 보면 5미터 높이로 25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곳 소상들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이는 이 언저리의 돌이 왕 모래가 섞여 있는 사력질이기 때문이다. 벽화도 벽에 흙을 바른 뒤 그렸다. 소상은 먼저 나무 뼈대에 새끼를 단단히 묶고 점토와 삼베와 모래를 뒤섞은 반죽으로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백토로 마감하여 색깔과 금박으로 칠한 것들이었다. 이 채색 소상들은, 초기 것들은 석굴과 함께 붕괴되어 남아 있지 않고, 가장 오래된 것이 5세기 전반 북량(北涼) 때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렵의 소상들은 중국적인 양식에 인도와 서역의 양식이 짙게 가미되어 있는데 이는 그 뒤 북량을 멸망시킨 북위(北魏) 때에 들어와서도 계속된다.

이러한 양식이 6세기에 진정한 중국 양식으로 바뀌면서 북제(北齊), 북주(北周)와 수, 당으로 이어진다. 특히 당나라에 와서는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불교 미술이 전성기에 도달해서 많은 걸작들이 만들어진다. 벽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서 처음 북량 시대에는 인도, 서역의

영향이 깊지만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와서는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 주는 현란한 변상도들이 아름답고 신비한 이상(理想)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대충 살펴보고 난 나는 그 중의 한 그림에 시선이 머물렀다. 어디선가 눈에 많이 익은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중들이 그린 그림에 사냥 그림은 웬 사냥 그림일까 하고 들여다보던 나는

"이상한데, 이건 고구려 무덤 벽화인 수렵도하구 너무 같잖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위(西魏) 시대의 석굴의 천정에 그려져 있다는 그 벽화는 사슴이 뛰는 산골짜기에서 말 탄 무사가 호랑이를 활로 겨냥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고구려 벽화에 견주면 말이 멧돼지같이 둔하고 호랑이가 용처럼 두루뭉수리로 그려져 있었지만 생동감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깼어요? 어젯밤엔 웬 술이 그렇게 취했어요? 생각나요?"

어느 틈에 아래가 동그란 플라스틱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도대체가 많은 부분이 기억 상실증에 걸린 듯한 나로서는 아내의 말에 또 무슨 몹쓸 일을 저질렀는지 몰라 가슴이 뜨끔했다.

"뭐가 ? "

"돈환이니 혜초니 운디드니니 도무지 못 알아먹을 소리만 하구 하구 또 하니까 견딜 수가 있어야죠."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슬며시 아내의 얼굴을 외면했다, 늘 녀석의'소재'를 빈정거리는 주제에 술 취해서 기껏 했다는 소리가 그것을 되풀이한 소리였으니 스스로 돌이켜보아도 한심한 노릇이었다,

"그리구 또 처녀가 밝힌다는 건 또 뭐예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나 마실 물이나 좀 줘."

"딴전은. "

딴전을 피우려고 해서가 아니라 갈증이 몹시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거기 있잖아요, 그 옆에."

침대 머리맡 위의 작은 나무상자 위에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몸을 모로 돌리고 주전자를 들어올려 물을 다 비우다시피 들이켰다.

"혹시 나가서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죠?"

"이상한 짓이라니 ? "

"그럼 돈환이니 처녀가 밝힌다느니 하는 건 무슨 말이냔 말예요?"

입맛이 썼다. 생각 같아서는 뭐라고 면박을 주었으면 싶었으나 간밤에 내가 갰을 짓거리가 혐오스러워서 꾹 참고 요즘 처녀들 노는 꼴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일반론이 아니겠느냐고 흐지부지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내도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새삼스럽게 무슨 의심을 해서는 아님이 분명했다.

"밥 안 먹어요?"

아내가 다그쳤다.

"생각이 없어. 먹구 출근하라구."

"의사가 굶구 오래요. 국이나 한 그릇 마시죠 뭐."

아내도 밥상은 거들떠보지 않고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내가 병원에 들르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속이 메슥거리고 쓰려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만 있었다.

"운디드닌 또 뭐예요?"

방바닥에 앉아서 스타킹을 신던 아내가 심심풀이라는 듯 말을 건넸다.

"거 여자 왜나 귀찮게 구네."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요. 간밤엔 안 듣는다구 아예 목을 매달구 달라붙더니."

간밤이라는 말에는 도무지 맥을 출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는 마당에 그만한 추궁 정도가 오히려 고마운 지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연신 혀를 차면서 아내가 빨리 나가 주기만을 기다렸다.

"인디언이 아버지라구요? 무슨 소린지 도통,,,,,,"

아내가 놀리고 있는 듯도 싶었다. 역시 녀석의 '소재'가 말썽이었다. 녀석은 인디언이 아시아에서 건너간 몽고족의 일파로서 아파치족은 아버지라는 말이 변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아버지의 무릎뼈'는 운디드니에서 몰살한 인디언의 비극을 다뤘으면 한다고 포부를 밝혔던 것이었다. 녀석의 정체불명의 아리송한 발상을 내가 왜 술 먹고 그대로 읊어댔는지 실로 울어도 시원찮은 노릇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이 아시아에서 건너갔다는 얘기야. 몽고족이란 얘기지. 아파치족의 이름이 아버지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얘기야."

나는 만사가 귀찮아서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내뱉었다.

"그걸 뭘 그렇게 어젠 심각하게 야단이었어요? 인디언 아버지가 죽었다느니 운디드니가 운다느니."

"? 운디드니가 울어?"

"암은요."

"허어,"

아내는 헤쭉 웃기까지 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육갑을 떨었구나 하고 헛구역질가지 올랐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 만한 심각한 사연이 있지 하는 투로 애써 생각에 잠긴 체하고 있었다. 아내는 그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꼬치꼬치 들춰내는 아내가 얄미운 데다가 또 간밤의 내 행위에 어떤 정당성을 불어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입을 열었다.

"운디드니란 말야. 더불유, , , , , , , 운디드에 케이, , , , 니이란 말야. 다친 무릎이지. 지명이야. 인디언들이 백인하구 결전을 벌였던 곳이지. 죄 죽었으니 무덤인 셈이지."

나는 녀석이 하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게 어쨌단 거죠?"

아내는 아무래도 뚱딴지 같은 얘기가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내가 녀석에게 보였던 반응이 또한 그랬었으니 일이 꼬여도 이만저만 꼬인게 아니었다.

"거 꽤나 간죽거리구 있네. 서방님 말할 때는 아녀잔 잠자코 있는 거야."

"좋겠쑤우."

아내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이리저리 속이 뒤틀렸다.

"시끄러. 아침부터 말대답이나 듣자구 하는 얘기가 아냐. 이봐, 아까 인디언들이 몽고족이라구 했지?"

나는 공연히 핏대까지 세워 목소리를 돋구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내는, 글쎄, 그래서요? 하는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답답하니깐 술 먹구 자꾸 얘기하게 되는 거야."

"말해 보세요, 어서. 어제두 지각했는데."

아내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밥상에 신문지를 덮어놓는다, 비닐 옷장의 지퍼를 올려 닫는다, 하면서 바쁘게 서둘렀다.

"난 지금 몽고족에 대해서 얘기하구 있는 거야. 몽고족이 도대체 누구야? ? 누구냐구?"

나로서도 어찌된 셈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인디언이겠죠 뭐."

아내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뭣이 ? 몽고족이 인디언?"

"왜요? 뭐 틀렸어요?"

"내가 언제 그랬어 ? 몽고족이 인디언이라구 언제 그랬느냐구? "

"고정하세요. 방금 그랬잖아요. "

아내는 샐쭉 눈까지 흘겼다.

"이 여자 사람 잡네."

나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왜 그러슈?"

그럴수록 아내는 더 여유작작이었다.

"이 사람아, 사람 말을 좀 바루 들어야지. , 똑똑히 대답하라구. 몽고족이란 누구냐?"

나는 아내의 턱을 손등으로 받쳐 얼굴을 내게로 돌려놓고 다그쳤다.

"인디언 아니예요?"

소용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간밤의 일을 들추어냈을 때 끙 하고 돌아누워 있느니만 못했다. 나는 맥이 빠졌다.

"들어봐. 어린애들 엉덩이에 푸릇푸릇한 반점 있지? 그게 뭐야? 그게 몽고족에게 나타나는 몽고 반점이란 거야. 몽고족은 바로 우리야. 우리란 말야. 사람 말을 똑바루 들어야지. "

곤혹스럽기 짝이 얼었다. 이야기가 이토록 옆길로 빠지리라고는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내친 걸음이라 어쩌는 수가 없었다.

"아깐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똑바루 안 들은 게 어딨어요?"

"좋아, 방금 내가 뭐랬지 ? 몽고족에 대해서 뭐라구 그랬지?"

나는 윽박지르듯 물었다.

"바로 우리들이라구 그랬지요."

"그래 좋아. 잠깐만 기다려. 그럼 우리가 인디언이란 잘야7"

아내는 무슨 속임수에 걸린 게 아닌가 따지는지 눈을 깜짝거렸다. 그러더니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생똥하게 뒤집고 나섰다.

"이런 여자 봤나? 몽고족이 인디언이라며?"

"아까 그러잖었어요?"

아내는 반문하며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깐 똑똑히 들으라는 거야. 난 분명히 인디언이 몽고족이랬지 몽고족이 인디언이라지는 않았어."

"언디언이 몽고족이랬지, 몽고족이 인디언이라지는?"

"그래."

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러쿵 저러쿵 늘어놓은 내가 잘못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흥미를 잃어버렸다. 물론 처음부터 하고 싶지도 않았던 이야기였다. 녀석의 '소재'니만큼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내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더 이상 나간다면 '모든 인디언은 몽고족이지만 모든 몽고족이 인디언인 것은 아니다' 운운하면서 무슨 논리학처럼 설명할 일이 가마득해서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운디드니에서 운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아내가 다시 꺼내지 않는 것만이 다행이라 싶었다. 아내는 더 들어 봐야 그게 그거사고 나름대로 치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녁에 만날 거죠?"

아내가 시계를 차면서 물었다, 직장에서 좀 일찍 퇴근해서 병원에 들렀다 오는 길에 저녁이나 먹자고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럼."

나는 침대가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며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내가 방문을 열고 서서 돌아보았다.

"어디서 만나요 ? "

"글쎄."

나는 알을 멈추고 몇몇 곳을 떠올리다가 언뜻 대답했다.

"다친 무릎에서,"

"아직 그 얘기 다 안 끝났어요?"

왜애, 끝났지."

"지금 바쁘단 말예요. "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니까 말야. 싸움하면서 죽어 가는 거니까 말야. 결혼하구 싶어서 노상 만났던 그 다방, "

나는 웃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좋아요. 그럼 그 무릎에서 만나요, 일곱 시가 좋겠죠?"

"좋지."

아내는 구두를 신느라고 기우뚱거렸다. 잘못 사서 발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는 구두였다, 구두를 다 신은 아내는 방안에 머리를 삐쭉 들이밀었다.

"다친 무릎 좋아하시네. 시간 지켜요."

하고 혀를 날름 내밀고는 내빼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내가 나간 다음부터의 시간은 늘 뒤죽박죽이었다. 대개 잠을 더 자거나 확실치 못한 앞날에 대한 공상에 자지거나 하는 것이었지만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쇠 침대에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아내와 쓰잘 데 없는 얘기라도 나눌 때는 좀 나았던 것 같았으나 뒷골이 띵하고 무겁게 잡아당겼다. 정신도 흐릿했다. 나는 억지로 눈을 붙이고 비몽사몽간에 왜 오랫동안 잠에 빠져들었다. 오후에 접어들었으나 역시 지겹게 긴 시간이 맘아 있었다. 아무래도 나들이를 해야 된다면 다방으로 가기 전에 또 녀석을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매형이 사업장으로 얻어든 사무실의 한 구석을 합판으로 막은 이른바 연습실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연극학도들과 둘러앉아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있었다.

", 왔냐? 잠깐만 가다려."

하고 급히 화면으로 얼굴을 돌리는 것으로 봐서 꽤들 열심이었다. 무슨 내용인가 기웃거리자 녀석이

"봉산(鳳山)."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봉산 탈춤이었다. 나는 열심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일단의 젊은이들 뒤에 엉거주춤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래, 어젠 잘 들어갔나?"

녀석이 돌아보았다.

"그럼. "

"하루 만에 또 나타난 걸 보니 어젯건이 왜 감동이 컸던 모양인데?"

녀석이 화면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마누랄 만나기로 했어. 시간이 좀 남아서."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마누란 집에서 노상 만나잖어 ? 왜 도망쳤냐?"

"그래, 도망쳤다."

봉산탈춤의 비디오 테이프는 녀석을 만나는 동안 서너 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서너 번이라고 하는 것은 앞부분을 보다가 만 적도 있고 뒷부분만 본 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모아들인 연극 지망생들인지 화면을 응시하는 눈들은 진지하면서도 당혹스러워 보였다.

붉은 원동에 녹색 소매를 단 더그레에 붉은 바지를 입고 방울을 짤랑이는 취발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와 있었다. 추황색 바탕에 희고 검은 반점을 그린 탈에는 흑이 일곱 개나 돋았다. 취발이가 노장과 소무(小巫)와 어울리는 것을 보면 취발이가 소무를 유혹해서 차지하는 마당인 모양이었다. 취발이가 소무에게 다가들 때마다 노장이 취발이를 때린다. 취발이는 노장을 귀신이나 도깨비에 비유하면서 점차로 둘의 싸움이 격해진다. 드디어 취발이가 노장을 쫓아 버리고 소무를 차지한다. 소무는 한삼 달린 색동저고리에 홍상(紅裳)을 입고 큰 비녀를 찔렀으며 족두리를 얹었다. 소무의 횐 얼굴 바탕에 붉은 입술이 선정적으로 강조되어 보인다.

"점심은 먹었냐?"

녀석이 돌아보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투로 물었다.

"지금이 몇 신데?"

"어쨌든 잠깐만 기다리라구. 이 아이들 이거 금방 끝나니까."

녀석의 열정만은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탈춤에 관심을 기울인 건 그리 오래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공부까지 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 이 춤을 봅시다."

녀석의 말에 따라 화면을 보니 취발이, 노장, 소무는 사라지고 취발이보다 얼굴이 동그란 먹중이 등장해 있었다.

"먹중 아닙니까? "

하고 누군가가 아는 체를 하는 물음이 들려왔다

"그렇지. 이건 먹중이야. 봉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니까 자세히 보자구. 지금부터 추는 춤이 불림, 불림은 처음에 나와서 장단을 부른다, 청한다는 뜻이 있는 춤사위야."

화면이 멈추다가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들이 주의 깊게 화면에 쏠렸다.

"이 춤은 봉산탈춤에서 기본이 되는 춤의 하나야. , 다리를 벌려 놓지?"

먹중이 다리를 어깨 넘어로 벌려 놓으면서 한삼이 늘어진 두 팔을 어깨 높이로 올린다. 두 발은 자연스럽게 앞을 벌린 모습이다.

"이것이 준비 자세. 이어서 따악, 일박이 떨어지면."

녀석이 여유 있는 자세로 화면을 바라보는 데 비해 '아이들'은 지나칠 만큼 어색하게 긴장한 자세였다. 먹중이 뒤꿈치를 들고 온몸을 위로 솟구칠 듯이 펴면서 허리를 중심으로 몸통을 오른쪽으로 튼다.

왼팔과 오른팔이 호를 그린다. 순간 무릎을 굽혀서 솟구쳤던 몸을 낮추면서 허리와 어깨를 제자리로 당긴다. 양팔은 원을 그리며 비스듬히 앞쪽으로 온다.

"이것이 일박의 사위야. , 다음. 따악, 이박이 떨어지면.

먹중이 좀 전과 비슷한 춤사위를 되풀이한다.

"이박은 약박(弱拍)이므로 약하게 틀지. 무릎을 더 낮춰서 거의 땅에 닿을 듯이 앉어."

굽혔던 무릎을 펴고 처음의 준비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 이박이었다.

"어느 탈춤에서나 불림의 동작에 따라 음악 반주가 나오게 되니까 간단한 것처럼 보여두 중요한 거야. 연극의 큐 같은 거니까."

녀석의 말하고는 달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녀석은 대학을 졸업한 지 5년이 되도록 연출자로서 변변한 활동도 못하면서 그 언저리에서 거의 떠돌아다니다시피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 떠돌이 생활 중에서 나아가는 길이 조금씩 달라졌다고 한다면 손튼 와일더의 (우리 읍내)라든가 테네시 윌리엄즈의 (유리 동물원) 같은 번역극에서 점차로 창작극에 발을 들여놓았고, 드디어는 탈춤에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탈춤반이 전통 예술의 전승을 꾀한다기보다는 탈춤의 익명성에 의지한 해학과 풍자를 현실 비판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대해서 녀석은 오히려 우려와 반감을 나타냈다. 예전의 탈춤이 양반에 대해 삿대질을 하고 상소리를 했던 것은 양반의 묵인 내지는 비호 아래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본디 현실 비판의 도구라기보다는 고도의 화합의 도구였다는 게 녀석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탈춤의 전승, 발전도 긍정의 자세에서 출발해야 산 탈춤이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대학 탈춤반이 뜻하고 있는 바와는 자연히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녀석이 탈춤에 본격적으로 달라붙는 것도 아니었다. 아예 어느 탈춤의 전수생으로 들어가보지 그러느냐고 권했을 때 녀석은 씩 웃기만 했을 뿐 별말이 얼었다.

", 그럼 다시 이 춤, 먹중의 외사위를 보자구. 외사위는 탈의 귀면성, 재담의 운율조하고 어울려 남성적인 활달함으로 장쾌한 운동감을 느끼게 해 주는 춤이란 걸 기억하구."

화면에 먹중들이 사자와 함께 나타났다.

"사자 말구 먹중만 봐. , 일박."

먹중이 발끝을 위로 향하도록 오른쪽 무릎을 직각으로 올리고 두 팔을 어깨 높이로 털리더니 몸통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떤다. 녀석의 설명대로 귀면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듯 탈을 부르르 부르르 떤다. 오른손의 한삼을 머리 뒤에서 앞으로 원을 그리듯이 감아 뿌린다. 오른

손과 왼손이 대각선을 이룬다. 사자가 오락가락한다.

"다음 이박."

몸통을 본디 위치로 돌리며 올렸던 발을 내려놓는다. 오른손을 등 뒤로, 왼손은 앞으로 온다. 두 팔을 양옆으로 가져오며 중심을 오른 쪽 다리에 옳기고 다음 동작 준비를 한다.

"사잔 보지 마, , 삼박,"

발끝이 위로 향하게끔 왼쪽 무릎을 직각으로 올리고 두 팔은 어깨 높이로 올리며 몸통을 왼쪽으로 틀어 띨다. 탈을 또 부르르 떤다. 한삼이 머리 뒤에서 앞으로 원을 그리듯이 감아 뿌린다. 오른손과 왼손이 대각선을 이룬다.

"마지막 사박."

몸통을 원위치로-돌리며 올렸던 발을 땅에 내린다. 왼손은 등 뒤로, 오른손은 앞으로 온다. 두 팔을 양옆으로 가져오며 중심을 왼쪽 다리에 옮겨 다음 동작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봤지? 삼박과 사박은 일박과 이박의 반대 형태가 되는 거."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던 나는 알 수 없이 서글퍼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의 열정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녀석이 마치 화면 속에서 탈을 쓰고 느린 동작의 춤사위를 보여 주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문만도 아니었다. 나는 구석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탈춤이 왜 내게 슬픈 느낌을 주었을까. 전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탈에 벽사(辟邪) 진경(進慶)의 뜻이 새겨져 있는 것이라면 슬퍼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탈은 우락부락한 남성 탈이거나 얌전을 떤 여성 탈이거나 한결같이 슬픈 상이다. 익명성이 슬픈 것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은하수' 연기를 허파꽈리 속에 깊숙이 들이마시며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사자가 떠올랐다. 먹중들 사이에서 슬프게 오락가락하는 사자였다. 그렇다, 그런 사자가 돈황의 벽화에도 그려져 있었다.

탈춤을 처음 대했을 때 사자는 하나의 경이(驚異)였다. 우리나라에 없는 동물인 사자가 친근하게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내 질서를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이질성의 놀라운 친화력이 무엇일까, 하는 혼란에 빠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숭이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녀석의 연습실을 드나들며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것이지만, 갈기를 날리는 이 수컷 사자는 봉산, 강령, 기린(麒麟) 같은 황해도 땅에서 추어지는 해서(海西) 탈춤말고도 경상도의 수영(水營) 들놀음, 통영(統營) 오광대에도 등장하고 있었다. 이밖에 북청 사자놀이의 사자. 그러나 이놈에 대해서는 몇 마디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녀석의 연습실을 드나들면서 사자를 처음 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별다른 의식 없이 사자를 보았던 것은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것이 북청 사자였다.

아버지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이 바로 북청 땅이었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신북청면 초리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흥이 많은 편인 데다가 실향민으로서의 향수도 있어서 언젠가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북청 사자놀이가 연희되었을 때 만사 제쳐놓고 나를 데리고 구경을 갔었다. 신바람 나는 일이었다. 사자는 넙죽한 상판에 울긋불긋한 몸뚱이였다. 바지, 저고리에 빨갛고 파랗고 노란 띠를 맨 악사들이 고깔을 쓰고 릴릴리 퉁소를 불고 등등 북을 쳤다. 사자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탈 쓴 여러 사람이 나와 사자 주위를 맴돌았다. 그들이 양반. 상좌. 사당. 곱추, 무동 들이라는 걸 안 것은 녀석의 연습실에 드나들면서였다. 사자는 재간도 잘 부렸다. 발딱 일어서서 앞발로 발재간을 부렸다. 먹이를 잡아먹는 시늉도 했다. 이윽고 사자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여럿이 어울려 한바탕 춤을 두었다. 그러고는 끝났다. 그때 아버지가 넋 놓고 있던 나를 번쩍 들어올려 사자의 등허리에 올려 태웠다. 나는 기겁을 했다. 그 안에 든 것이 사람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발을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아즈바이, 오래오래 살라구 그러재이요. , , ."

높은 항렬자 덕분에 아즈바이가 된 어린 나는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는 내 명이 길어지라고 사자의 등허리에 나를 올려 태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던 아버지는 예순도 못 채우고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렸을 때 사자를 한번도 못 탔던 것일까.

사자가 없는 우리나라의 놀이에 왜 사자가 나오는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의문을 나는 비로소 녀석에게 털어놓았었다.

, , 그건 사자가 아냐."

녀석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사자가 아니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니 눈에는 사자루 보일지 몰라두 그건 사자가 아니라 인간이란 말야. 다만 그런 형상을 차용한 거지. 거기에 놀라운 상징이 있는 거지."

그 안에 사람이 들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사자가 아니라 인간이란 말은 틀림없는 말이었다. 때로 그렇게 일의적이고 평범한 눈이 모호한 현상에 높은 상징성을 부여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녀석에 따르면 북청 사자는 다른 탈춤이나 탈놀이에 나오는 사자와는 달리 주인공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자가 사자 아니라 인간이라는 녀석의 말은 녀석으로서는 우스개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진짜 사자가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출 까닭이 없으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충격이었다. 녀석이 유치원생 대하듯 그렇게 나오는 터라 나는 심심풀이 삼아 내 의문을 혼자서 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자놀이는 본디 서역 땅에서 전래된 것이었다. 삼국시대의 일로서 신라 사람들이 즐기던 오기(五伎) 곧 다섯 놀이 가운데 산예(狻猊)가 그것이다. 산예를 비롯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을 말한다. 불행하게도 이것들이 어떤 놀이인지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다만 금환은 쇠 공을 가지고 던지고 받는 놀이이며, 월전은 탈을 쓰고 우스갯짓을 흉내내는 놀이이며, 대면 역시 탈놀이이며, 속독은 서역의 타시켄트와 사마르칸드 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던 나라인 소그드에서 전래했다는 탈춤 놀이이다. 그러니까 쇠 공을 가지고 노는 금환말고는 모두가 탈놀이라고 하겠는데, 이것들이 뒷날 고려 때의 산대(山臺) 잡희(雜戱), 조선 때의 나례(儺禮) 잡희(雜戱)의 선행 예능이 된다. 말하자면 신라 오기가 나중에 나라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응축한 탈춤을 이루는 기본기가 된 것이다.

조선 시대를 거쳐 일제시대로 넘어 오면서의 탈춤 형성 과정에서 나는 금옥이라는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실존 인물이었다. 그녀는 황해도 지방의 탈춤, 흔히 해서(海西) 탈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가운데 하나인 강령 탈춤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몫을 감당했다. 금옥은 해서 감영의 기생으로 가무(歌舞)에 출중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한일 합방으로 해서 감영이 해체되자 강령 땅의 갈모도로 거주지를 옮겨 인근 패거리를 모아 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로써 강령 탈춤은 본바닥 탈춤의 면모를 얻게 된다. 금옥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던 나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거의 새벽녘까지 멍하니 앉아 그 이야기에 빠져 들어갔다.

 

그 사나이는 어디론가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나이가 사람을 죽인 동기는 그보다 먼저 사나이의 누이 동생이 비상을 먹고 죽은 데 있었다. 그 날 밤 따라 부엉이는 더 설게 뿌우부우 울었다. 누이동생은 숨이 넘어가면서도 한 녀석을 저주했다. 누이 동생을 강제로 욕보인 녀석이었다. 녀석에게 당한 봉욕(逢辱)이 제아무리 심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죽지만은 말아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지만, 허사였다. 누이동생은 부엉이 울음소리를 씻김굿처럼 뒤에 남기고 기어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녀석의 행패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벼르던 차였다. 세상이 바뀌고 일본인이 몰려들어오자 녀석은 어느 틈에 그 앞잡이가 되어 공공연히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거드름을 피우는가 하면 힘없는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데도 이골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누이동생을 집적거렸다.

그는 밤에 몰래 녀석을 기다렸다가 단숨에 찔러 숨을 끊어 버렸다. 녀석을 해치우고 나서도 그의 마음은 사람을 죽였다는 자책은커녕 할 일을 했다는 안도의 느낌마저 일었다.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은 그였으니 누이동생의 한을 풀어 주고 설사 죽게된들 어떠랴 하는 심정이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비추는 밤이었다. 달빛의 모서리로 몸을 숨기며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의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그 길로 집을 등졌던 것이다.

집을 나오면서 그는 얼핏 문틀 위의 벽에 붙여진 처용의 형상을 보았다. 아버지가 그려 붙인 것이었다. 누이동생은 남의 집 놉을 사는 아버지의 딸자식답지 않게 때깔이 곱다고도 했다. 애초에 그렇게 반반하게 생긴 게 잘못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명에 죽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그때 난데없이 마음 한구석을 울리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리 애기 착한 애기, 저 집 애기 못도 자고 우리 애긴 잘도 잔다,,,,,, 지나간 날들은 단지 그런 노랫소리로밖에는 전해질 수 없는 것인가. 눈을 감고 지난날을 헤아려 보고 있는 그에게는 시간조차도 참척을 당한 것처럼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아이가 어른보다 먼저 죽는 아픔. 오래 살아서 세상의 온갖 궂은 일을 볼 대로 다 보아버린 사람일수록 그러한 시간의 참척 때문에 상심하게 되고 그 상심이 거듭해서 마침내는 마음의 병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지는 것이리라.

"부우, 부우."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아득하게 들켜왔다. 그는 부엉이가 울 때면 금옥의 모습에 사로잡혀 쉽게 잠을 이를 수 없었던 여러 해들을 상기했다. 그녀가 차츰 명기로 이름을 퍼뜨리게 되자 부엉이 소리는 더 한층 그를 괴롭혔다. 해마다 부엉이소리는 단오가 가까웠음을 알려 주었다. 막상 보리가 패고 봄이 무르익도록 별 감회가 없다가도 어느 날 밤 부엉이가 문득 긴 울음을 지붕 위로 늘어뜨리면 그는 몸이 달기 시작했다. 마누라가 일젤 세상을 달리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금옥을 그린다는 일은 오랜 세월 동안 익혀 온 일이었다.

"부우우, 부우. "

부엉이소리가 쥐들이 갉는 소리에 뒤섞이지도 않고 캄캄한 밤의 어둠 속에 금옥의 모습을 새기면서 또다시 들려왔다. 그렇게 어둠 속에 새겨진 그녀의 모습은 돌에 새겨진 연꽃처럼 영원히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어느 해였던가, 그녀가 명기로서 이름이 나면서 처음으로 탈

춤패의 우두머리에게 하룻밤 안겨졌던 때를 그는 분명히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단오 날, 흥겹게 춤사위가 저마다의 기량을 뽐내고 탈판을 휘젓고 돌 때도 그 날의 으뜸 패에게 상으로 금옥이가 내려지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가 처용의 형상 아래서 훌쩍거리고 있는 어린아이로밖에 여겨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올 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 날 밤 금옥은 중년의 꼭두쇠에게 바쳐졌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간의 참척이었다. 그 날의 탈판은 유난히 신명이 났다.

대나무와 광목과 종이로 만든 사자가 나와서 타령과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깨끼 춤과 굿거리 춤을 한참 추다가 들어갔다. 뒤이어 붉은 색 바탕에 흰색과 금색 반점이 있는 탈에 붉은 색 원동, 남색 소매, 붉은 색 바지를 걸친 원숭이가 나와서 역시 타령과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깨끼 춤과 굿거리 춤을 한참 추다가 들어갔다.

붉은 색 바탕의 탈을 쓰고 붉은 색 원동, 흰 더거리와 바지, 노랑 띠를 한 말뚝이가 무대 오른쪽과 왼쪽에서 각각 나왔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대 복판으로 달려와 서로 마주친 그들은 서로 쳐다보고는 짐짓 놀란 체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장내를 휘 한 바퀴 돌고는 무대 복판에서 다시 만나 서로 쳐다보고 또 놀란 체 돌아서서 달아났다. 이렇게 서너 차례 되풀이하던 그들은 이윽고 서로 뒷걸음질하며 도도리 타령,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춤추다가 들어갔다. 이윽 고 고깔을 쓰고 질베 장삼을 입고 칡띠를 허리에 매고 마혜(麻鞋)를 신은 먹중이 달음질쳐 나와 섰다.

"헤까라, 헤까라 ! "

드디어 판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에 앞서서 시작된 길놀이는 마을을 한 바퀴 돈 다음 놀이판에 이르렀는데, 말뚝이를 앞세우고 그 뒤에는 사자, 사자 뒤에는 원숭이, 원숭이 뒤에는 먹중, 먹중 뒤에는 상좌, 상좌 뒤에는 노승, 노승 뒤에는 소무, 소무 뒤에는 취발이, 취발이 뒤에는 양반, 양반 뒤에는 영감, 영감 뒤에는 할미가 늘어섰다.

그 뒤를 잽이들이 악기를 들고 뒤따랐다. 탈판에 이른 그들은 먼저 탈고사를 지낸 다음 판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녁나절에 벌어진 탈판은 한밤도 겨운 새벽녘 가까워서야 모닥불이 사위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읍내는 언제 밤이 지새는지 모르게 흥청거렸다. 농악 장단의 화랭이 춤에 어름산이들의 줄타기, 버나꾼들의 쳇바퀴 돌리기와 살판의 땅재주가 흥을 돋구면서부터 아쉽게 지새는 밤들이었다. 그리하여 금옥이 그 해의 오월을 마무리 짓게 되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로부터 그에게는 갑자기 오월이 못 견딜 기휘(忌諱)의 달이 되고 말았다. 일년 열두 달 가운데 가장 살맛이 났던 달이 그만 체질에 맞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갈수록 그의 몸은 극약을 쓰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을 악질에 걸린 것처럼 시달림을 받아 가고 있었다. 그 처음 몇 해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어려서 헤어진 이래 곧잘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언뜻언뜻 머리를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토록 간절해지리라고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이 사람아, 어서 사돈을 맺세나."

그가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냥 즐거운 듯 메기처럼 입을 쩍쩍 벌렸었다.

"급하긴, 우물에 가서 숭늉 달래지."

"감꼭지 떨어지길 기다릴 텐가."

이렇게 오거니 가거니 하면서 둘은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연신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사실 그녀 아버지가 달고 있던 구레나룻은 기쁠 때면 그 기쁨을 돋보이게 했고 슬플 때면 그 슬픔을 돋보이게 하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숱이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던 그 구레나룻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나선 그녀를 보면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따라나선 산지기의 어린 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신광사 뒷산에 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서더라도 그런 광경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상수리나무가 구레나룻을 기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더군다나 메기의 웃음을 웃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었다.

아버지들이 사돈을 맺느니 안 맺느니 하는 말은 어린 그에게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는 어렴풋이나마 그 말뜻에 접근해 갈 수 있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나 그는 도롱뇽 알이 점점 또록또록해 지듯이 깨달아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결코 그의 아버지와 사돈을 맺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괴질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달려갔을 때 이미 그녀의 아버지는 핏기 없는 얼굴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산지기 딸을 거느린 상수리나무 같은 모습을 다시는 보여 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렇게 느닷없이 가 버렸다.

"우리 금옥일 좀 돌보아 주십사고---, 돌보아 주십사고--- 아이고, 이년의 팔자야."

그녀의 어머니가 나중에 그렇게 전한 것밖에는 무슨 말을 할 여지도 없었던가 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 눈이 겨우살이 열매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는데, 지나치게 울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또는 독기가 뻗쳐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그의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녀네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 문틀 위 벽에 이상한 머리장식을 한 사람의 형상을 그려 붙인 것뿐이었다.

"역귀가 다신 얼씬거리지도 않을 게요."

아버지는 벌써부터 냉기가 돌기 시작하는 그녀네 집을 휘둘러보며 그녀의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아버지가 그려 붙인 것은 처용의 형상이었다. 남은 모녀에게나마 다른 재앙이 밀어닥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었다. 처용의 형상 밑에 시무룩이 앉은 그녀의 어머니는 그 형상에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어린 금옥은 겁에 질려 오히려 퀭한 눈초리로 비실비실 퍼하려고만 들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는 동안 그는 그녀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공연히 울먹거렸다.

"우리 집에도 하나 붙여두어야겠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서로가 흔쾌히 맺으려고 하였던 사돈 관계는 맺을래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일이 안타깝고 궁금했지만 그가 캐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버림으로써 웃음을 머금고 무르익어 가던 약속은 마 치 꼬리를 잘라놓고 어디론가 도망간 도마뱀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웬일인지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아버지의 주의를 환기시킬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역귀로부터 금옥이네를 지켜 주려 한 노력도 모두가 허사였다. 사실 그가 그녀네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느꼈던 그것도 불길한 예감에 지나지 않았다. 들려 오는 소문은 나빴다. 그는 역귀가 날뛰면 날뛸수록 예전에 그가 기댔던 약속은 처용의 형상보다도 희미해지고 무력해질 뿐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놓은 것으로 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메꿩과 오소리와 청살치까지도 잡을 수 있는 올무들뿐이었다. 그러나 뒤에 남은 그녀의 어머니에게'나 그녀에게나 그것들은 아무 소용도 닿지 않았다. 올무의 명수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죽으면서 자기의 마누라를 그 올무로 옭아놓을 수 있었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올무는 오히려 아버지의 처용으로 하여금 아무 힘도 못 쓰게 옭아매 버렸다고 해도 좋았다. 그랬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탈상도 하기 전에 남사당패를 따라 가 버렸을 것이었다. 신이 지펴서 산 속으로 도를 닦으러 들어갔다는 등의 듣기 좋은 말도 뒤따랐으나 알 단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남사당패는 세상 어딜가도 구경할 수 없는 버나 재주로 쳇바퀴를 돌려서 그녀 어머니의 얼을 빼 버렸다는 것이었는데, 올무에 옭아 매인 탓인지 처용도 속수 무책이었다.

세월이 심상치 않아 어느 누구의 집이고 몰락을 하자면 눈 깜짝 새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두고두고 입맛이 쓴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그녀가 기방에 넣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기생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떠나 버린 그녀네 집으로 가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 보았다. 어디선가 구레나룻이 사돈을 삼세 그려, 하고 성큼성큼 나타나 주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은 과거로 고스란히 돌아가 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것처럼 맹목적이고 부도덕한 것은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금옥의 모습은 그를 떠나지를 않았다. 그 괴로움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나무 옹이처럼 점점 더 부풀어만 갔다. 그것은 단순히 어른들의 섣부른 약속 때문이라기보다 더 원초적인 무엇이 있었다. 때때로 한 사람의 남자 혹은 한 사람의 여자가 남들이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상대방에게 흘려서 심신이 병들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바로 역신의 짓이리라. 더군다나 세월과 함께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라든가 빼어난 춤 솜씨 따위가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면 그 고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처럼 심장을 찌르는 것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가 명기로서 나라로부터 옥관자까지 받았을 때 그 고통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체념으로 다스려진 듯도 하였으나 역시 한때뿐이었다.

날이 희부염히 밝아 오고 있었다. 그는 빈 집에 숨어들어 밤새도록 착잡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달가닥거리던 쥐들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그는 갑자기 발가락이 따끔거린다고 느꼈다. 그는 그 따끔거리는 곳을 살펴보았다. 새벽의 희끄무레한 날빛 속에서 그곳은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쥐가 물었음에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처용의 모습이 번갈아 가며 나타난 꿈결의 뒤쪽에서는 쥐들이 찍찍거렸었다. 놈들은 그러는 사이에 어느 틈에 그의 발가락에까지도 이빨을 들이대고 갉았 던 것 같았다. 처음 따끔하다고 느꼈을 때는 설마 쥐가 사람을 물기까지 했으랴 하고 넘겨 버렸던 것이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의 그 상처는 피가 맺혀 있었고 부어오르기까지 해 있었다. 쥐가 물어뜯은 게 틀림없었다. 그는 밤새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통 시끄럽게 굴던 쥐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 물린 것인지는 기억해탤 수가 없었다. 언젠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고 만 것이리라. 기분이 언짢을 뿐 상처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새벽 공기 속에서 비로소 외양간 냄새가 코로 밀려들었다. 그 외양간은 꽤 오래 전부터 사용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짚은 횐 곰팡이가 낀 채 썩어 있었고 바람벽은 군데군데 흙이 떨어져 그 속으로 얼룩진 수숫대가 개 갈비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는 마침내 금옥을 찾아가리라고 결심했다. 그것은 쥐한테 물린 상처를 보면서 일어난 감정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그녀를 그리고 있었지만 감영(監營)이 해산되고 그 소속의 관기들도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그녀가 강령 땅으로 갔다는 소식을 풍문에 들었을 뿐 막상 찾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쥐한테 물린 상처는 이상하게도 짙은 슬픔을 갖게 하였고, 그 슬픔이 문득 금옥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그를 알아보리라고 선뜻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또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의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더더구나 바랄 수 없었다. 단지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붙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망상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단절이 작은 상처가 준 슬픔 때문에 그렇게 순식간에 메꾸어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한번 그렇게 마음먹자 그는 잠시도 머물러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산길을 택해 부지런히 걸었다. 해가 버꾸같이 떠오르자 그는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그는 쫓기는 몸이라고는 여겨지지가 않았다. 그는 오랜 고향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산길을 타고 지름길로 그녀를 찾아가고 있는데도 지나치게 우회해 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장기도 시장기였지만 갈 길은 급하기만 했다.

아마 누이동생과 그 녀석의 주검이 발견되어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으리라.

그는 금옥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그리고 그 다음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모든 것을 미룬다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갈 때까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때까지는 오직 유예된 시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산이스랏나무를 타고 칡덩굴의 새 순이 길게 뻗고 있었다. 잔솔 아래는 산새들이 푸득거리며 살고 있었다. 그는 줄기차게 빠르게 걸으면서 자신이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 동안 그렇게 걸어왔던 것처럼 느껴졌다. 졸참나무나 굴참나무는 봄이 이슥하도록 지난해의 갈색 잎사귀들을 스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간밤에 울던 부엉이소리가 생각났다. 낮이 지나고 다시 밤이 되어 부엉이가 울 때까지는 그녀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부엉이가 울 때까지는.

한나절이 겨웁도록 걸어가자 거기서부터는 들길이 계속되었다. 보리는 벌써 팰 대로 패어 있었고 곳곳의 무논에서는 써레질이 한창이었다. 이제는 그를 알아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그래도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 그 쪽은 어디루 가시는 길이우?"

도중에서 같이 가게 된 농사꾼 차림의 두 중늙은이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는 강령 탈춤은 요즘 좀 시들한 감이 있다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강령으로 가시는 게로구려?"

"그리 한번 들러 보려구요."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행색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만큼은 동행 길이 라는 듯 말동무나 하자는 투였다.

"그렇담 봉산이나 기린 쪽으루 갈 일이지. 강령 탈춤이야 본시 점잖은 춤 아닌가."

"아암, 중인들 춤이니까. "

중늙은이들은 서로 쳐다보며 바로 그렇다는 듯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그들은 벌써부터 낮술을 걸쳤는지 얼굴들이 말뚝이탈처럼 불콰했다

"봉산,,,,,,기린-,다 좋지요. 한데 거기는 진작 다 다녀온 데니까요, 무어."

그는 여전히 그들이 특별한 관심을 쏟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는 못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입에서 은연중에 금옥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 몸두 한때는 곡두쇠까지는 못 되었지먼서두 그 밑에 곰뱅이쇠루 있으면서 팔도를 누볐시다---"

새끼줄을 감은 낫을 한 손에 든 중늙은이가 지난날을 회상하듯 먼 데로 눈길을 돌리고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얼럴럴럴, 얼쑤."

상대 중늙은이가 덧뵈기 가락으로 받았는데, 거기에는 또 그 이야기냐고 놀리는 투가 담겨 있었다.

"좋았겠습니다."

그는 낫을 든 중늙은이의 비위를 맞춰 줄 겸 말을 거들었다.

", 좋았다마다. 한데 함경도 사자춤이나 전라도 매구춤, 서울 깨끼춤, 경상도 덧배기춤 다 봤지만 역시 우리 황해도 사위춤만 못하더라 이 말이지. 못하구 말구."

말을 끝내자 그 자리에 멈춰선 중늙은이는 문득 오른발을 드는가 했더니 오른손을 위로 뻗어 왼손과 대각선을 이루었다가 풀어내면서 어느 결에 허리와 무릎을 굽혀 뛰어오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건듯 뛰며 얼굴을 흔들더니 반 바퀴쯤 옆으로 돌았다. 다시 발을 바

꾸어 올리고 반대쪽으로 뿌리며 내렸다.

"이게 우리 사위춤 아닌가."

"봉산에 가깝구먼. "

그들은 흥에 겨운 듯하였다.

"그야 봉산이 활달한 맛은 있는 게지. 하지단 사위춤이야 한 사위에서 두 사위루, 두 사위에서 겹사위루 놀아야 제맛일세 그려."

춤을 춘 중늙은이가 다시 길을 재촉하며 아쉬운 듯 말했다. 그는 워낙 허기가 진 데다 먼 길을 걸어서 삭신이 쑤시고 게다가 가끔 생각난 듯 콕콕 쏘아대는 발가락의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내색 않고 그들과 어울려 내처 걸었다. 그렇게 가는 편이 혼자 외토리로 가는 편보다 더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한동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가로질러 있는 산에서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령춤도 이제 볼 만허게 될 걸세. 광천리 패거리도 밤마다 금옥이헌테 뫼들어 춤들을 배운다니까. "

"금옥이라니? "

"옥관자를 하사 받은 금옥이 말일세. "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춤을 춘 중늙은이가 역시 그녀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올 데까지 온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금옥이란 여자가 춤을 가르칩니까?"

그녀가 강령으로 갔다는 소식밖에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그였다,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춤만이 아니지. 워낙 가무에 출중하니까 말일세. "

춤을 춘 중늙은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흡족하다는 듯 으쓱대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

"강령에 가거들랑 갈모로에 가 금옥이 얼굴이나 보구 가야 할 걸세."

"갈모로요 ? "

"아암, 강령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갈모로지."

갈모로라는 말은 그의 마음속에 그 어떤 말보다 깊숙이 들어와 박혔다. 부엉이가 울기 전에 갈모로로 가서 금옥의 모습을 보리라. 그러자 그는 예전에 그의 아버지가 그려 붙인 두 장의 처용 형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될 인연이 그토록 우회하는 길이었다면 처용의 형상은 그 먼 길을 지켜 주기 위해 그 날까지 어떤 영험을 가지고 그들을 따라다녔음에 틀림이 없었다. 해주 감영이 해체된 뒤에 금옥은 강령 땅의 갈모로에 자리잡고 재인 광대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갈모로로 간 것은 그 날 밤 부엉이가 울 무렵이었다.

-다시 부엉이 우는 계절이 되었다. 탈판에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먹중탈에 고깔을 쓰고 칡베 장삼을 입고 칡띠를 허리에 띠고 마혜를 신은 어느 먹중이 달음질쳐 나와 외치기 시작했다.

"헤까라, 헤까라!"

모닥불이 그의 탈을 비추었으나 탈은 다른 먹중탈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실존 인물인 금옥에 집착하여 탈춤의 형성 과정에 얽힌 애환이랄까 뭐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에 몰두했던 나는 아내가 옆에 있는 것도 잊고 마치 내가 기구한 운명으로 먹중이 된 사나이이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헤까라, 헤까라'를 외쳤었다.

"아니, 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내는 잠에서 깨서 요즘 말로 내가 헤까닥하지나 않았나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야기로써 내가 속한 한국이라는 땅의 전통 문화 속에 눈길을 돌려보았다는 자만으로 눈을 반짝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기야 심각하게 말을 꺼내 보았댔자 아내의 졸린 눈초리가 헤까라든 헤까닥이든 구별하려고 할지는 의문이기도 했다.

내가 어줍잖게 사자의 발자취를 좇던 무렵, 서역의 고대 유적 도시 누란에서 여자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그 신문 기사를 본 녀석은 또 어김없이

"목내이, 기막힌 얘기야."

하고 흥분했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다짜고짜 면박을 주었다. 중국의 미이라가 우리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 면박의 주안점이었다.

"넌 미이라라문 환장하는구나. 그저 목내이, 목내이. 목을 내기는 왜 내?"

나는 쏘아 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좇던 사자가 신라의 사자로 거슬러올라가고 다시 서역의 사자로 거슬러올라간다는 관점에서 나대로 범상치 않은 어떤 인과(因果)의 실마리를 언뜻 본 느낌이었다. 녀석과 어울리는 동안에 내가 그런 느낌을 녀석에게 털어놓지 못한 것은 일찌기 '목내이 깨어나다'를 계획했던 가락도 있어서 녀석이 철딱서니 없이 '극화(劇化)에의 길'을 찾아 나설까봐서였다. 내가 느꼈던 영감(靈感)은 사막을 가는 신라의 사자가 서역에서 천 년을 누워 잠자는 사람을 만난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이 단순한 영감 때문에 나는 미이라에 관한 기사를 연일 샅샅이 읽었다. 누란은 신강성 타림 분지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폐허였다. 타림강이 '방황하는 호수'로 알려진 로프노르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주에 해당한다.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강물의 물줄기가 곧잘 바뀌고 그때마다 '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는 위치를 옮긴다. 위나라 때의 서역의 여러 도시국가 중 하나인 누란이 폐허로 변한 것도 이런 자연 환경의 영향이 크다. 누란이 번성했던 때는 늦어도 서기 330년 무렵이며, 이곳의 집, , 무덤 들을 발굴했을 때 간다라 영향을 받은 많은 유품들과 로만풍의 철직, 중국 한나라풍의 구리거울, 구리살촉, 질그릇, 무늬 비단 따위가 나왔다. 그런데 이 사막의 폐허에 다시 '보존 상태가 극히 양호한' 미이라가 발견되었으며 '누란의 소녀'라고 이름 붙여진 이 미이라는 입고있는 옷도 거의 말짱해서 당시의 복식(服飾) 제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신문 기사는 밝히고 있었다. '누란의 소녀'는 인공적으로 말린 이집트의 미이라와 달리 사막의 건조한 기후, 풍토의 영향으로 자연적으로 미이라가 되었다고 했다. 어쨌든 애초에 내가 쐐기를 박아서 녀석은 '누란의 소녀'를 두고 '목내이' 소리를 제대로 못했다.

 

아내와의 약속 시간에 맞추려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야 녀석은 '아이들'을 보냈다. 나는 줄곧 먹중과 함께 오락가락하던 슬픈 사자와 돈황 벽화의 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누란의 소녀'가 발굴되어 느닷없이 서역의 사자를 떠올렸던 때나 돈황 벽화의 사자를 보았을 때도 전혀 아무렇지 않다가 막상 비디오를 보고 난 뒤 비로소 돈황 벽화와 연결된 것은 무슨 조화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과 단 둘이서만 남게 되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 껄 하겠다는 애들이 우리 소리, 우리 살을 몰라서야,”

녀석이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제법 의젓하게 흔잣말을 했다.

"살이라니?"

"몸 말이야. 몸의 움직임, ."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녀석이

"어젠 왜 마셨지?"

하고 체머리를 흔들었다.

"다아 니 향가 덕분이지."

간밤에 부린 추태가 못내 씁쓸해서 내가 혼자 픽 웃자 녀석도 뭣 모른 채 따라 웃었다,

"건 그렇고, 마누라 도망쳤다는 건 뭐냐? 하기야 실업자 생활 일 년 반이니 알쪼긴 하다만."

녀석은 설마 하는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여자가 가출한다는 건 때로 아름다운 모습이잖아."

나는 딴청을 부리다가

"돈황인지 색골인지 니 혼자 해. 난 도저히 엄두도 못 내"

하고 아예 발뺌을 했다.

"? 마누라 땜에 ?"

"임마, 마누라 도망쳤느냐구 한 건 너였어. 그리고 또 너는 실업자 아니냐? 동업자끼리 헐뜯는 이놈의 세태라니."

녀석이 동업자라는 말에 끼룩 웃음을 흘렸다.

"그럼 동업자끼리 잘해 보자구. 회살, 아니 극단을 차리는 거야. 젠장 사무실까지 있겠다, 못 차릴 게 뭐야. 극단 '이각수니뿔하구 내 뿔하구 뿔이 두 개란 말야. 그러나 몸은 하나다, 어때?"

"임마 징그런 소리 하지 마, 나하구 너하구 몸이 하나라니? 돌았니?"

"어쨌든 그런 문제는 뒤로 돌리고, 이각수 어때?"

"이각순 임마 보통 짐승이야. 뿔난 것치구 둘 아닌 게 있어?"

"코뿔소."

"코뿔소? 코뿔소는 살갖이 각화(角化)된 뿔이 앞뒤로 둘이다. 앞뒤로 둘."

"그럼, 외뿔 짐승 유니콘이란 단어는 괜히 있나."

"어디서 듣긴 들었구나. "

녀석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연신 끼룩거리기만 했다. 한참 동안 혼자 좋아하던 녀석이 드디어 담배를 꺼내 물며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각수의 공동 대표로 말하겠는데, 좀 아까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단 말야. 놀라운 얘기야."

그러나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 돈황 유물 말야. 그 중에 일본 사람 오다니가 나중에 가져갔다는 거 있지?"

말을 하다 말고 녀석이 그 부분을 내가 알고 있는가 어떤가 살피는 눈치여서 나는 일본놈도 한 몫 꼈더라고 아는 체를 해 주었다.

"그래, 그새 공부깨나 했구나, 아주 좋았어. 그런데 그 유물이 우리 나라에 있다 이거야."

녀석이 말의 억양을 낮추었다.

"돈황 벽화가?"

뜻밖의 말인 것은 사실이었다.

"어디에 있단 말야?"

"국립박물관 지하에. "

녀석은 우쭐하는 기세가 역력했다.

"그게 왜 거기 있냐?"

"낸들 알어 ? 일제 때부터 있었던 거라는데."

녀석은 몇몇 '알 만한' 데다 수소문을 했더란 얘기도 곁들였다. 나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이 허황된 얘기는 많이 긁어 모아도 그런 종류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뢰하는 판이어서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탐험대들이 왕도사를 매수하여 유물을 실어 내온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그 일로 왕도사가 처형을 받은 것도 그럴 만했다. 그러면 일본 탐험대가 가져 온 유물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역사는 때로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에 앞서 거기에는 어떤 간교한 이면사(裏面史)가 깃들어 있을 것 같았다. 짜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 땅에 있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은 소아병적인 사고 방식이다, 그와 함께 돈황은 우리 땅에 유린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 놈이 저지른 일을 우리가 뒤처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대영) 박물관의 자랑은 약탈의 자랑이라지 않는가 하는 논조로 대국적인 생각과, 또 그것이 어떤 경로로 우리 존에 들어온 것은 경하할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 자국(自國)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한 원류를 보여 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이런 혼란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동안 그저 막연한 인물, 실체를 알 수 없는 인물로만 여겨지던 혜초가 문득 몹시 가까운 사람처럼 다가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의 약속 시간에 쫓겨서 녀석과 헤어지면서 '돈황의 사랑'에 대해 이것저것 연구를 해 보겠다고 물러선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극화시킬 자신이 없더라도 이 기회에 나 나름대로 더듬어 볼 필요가 있겠다고 나는 느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미 녀석이 구상하는 대로의 '돈황의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나는 사자춤을 추는 혜초를 생각했고,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가 너훌너훌 춤을 추면서도 그 가죽 속에 고독한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는 모습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고독한 얼굴의 넋이 벽화 속에 옮겨져서 천 몇 백 년이 지난 뒤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신라의 산예가 서역 땅에서 온 것이라고 밝혀져 있는 만큼 혜초가 서역 땅을 헤매며 사자춤을 접했으리라는 추리는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되자 나는 녀석이 돈황이니 막고굴이니 혜초니를 주워 섬기지 않았던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석굴을, 그 벽화를 보고 싶어서 안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서역, 그곳이라면 나는 나름대로 또 하나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서역하고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어차피 서역이라는 이상한 세계에 대한 내 체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주간지에 근무할 때였다. 그때를 상기하면 지금도 내 귀에는 소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결코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다. 소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는데, 아직 앳된, 트이지 않은 생목소리였다. 노래를 많이 부르지 않았던 것이 확연한 그 목소리에 오히려 애잔함이 깃들어 있다고나 할까, 왜나 처연했다. 그러나 잘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던 만큼 공연히 가슴을 죄게 하는 구석도 있었다. 틀리게 부르면 안 된다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음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줍잖게 서양 음악식으로 으뜸화음이니 버금화음-딸림화음 따위를 따져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노래에 맞게 부르고 틀리게 부르고가 있을 리 없었다. 아무도 그 노래의 본디 모습을 알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악보는 전해지지 않고 가사만 남아 있는 노래, 그 노래는 말하자면 죽은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녀의 음정이 한 율()도 틀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 하기야 이렇게 말하는 것도 전혀 씨가 안 먹힐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노래는 우리 음악의 율려(律呂)가 가다듬어지기 훨씬 전의 옛노래가 아닌가. 어쩌면 단지 몇 사람의 입에서 맴돌다가 잃어졌을지도 모를 곡조의 옛노래가 아닌가. 그러니 율려고 궁, , , , 우고 뭐고 따질 형편이 못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가사만 남아 있는 노래란 혼령이 빠져나간 몸뚱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 살이 다 썩어서 물러앉은 옛 사람의 녹슨 뼈, 촉루라고나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그 노랫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 같다.

소녀는 단정히 앞으로 손을 모으고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신 취 입을 벌렸다. 무슨 노래일까,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노래라고 했으므로 그 할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도의 민요쯤이 아니겠는가 하고 나는 나름대로 예상하고 있었다, (신고산 타령)일까 아니면 (함경도 애원성)일까.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소녀는 남 앞에서 노래한다는 사실에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나 그리 어색한 태도는 아니었다. 볼에 발그랗게 홍조를 띠고 있었는데, 첫소리가 나올 때, 그 긴장과 흥분을 말해 주듯 목청이 바르르 떨렸다. 마치 서투른 갈대피리를 분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 서투른 갈대피리 소리는 잠깐 동안이었다. 소녀는 곧 음정의 평형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역시 가냘프게 떨렸다.

소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소녀 쪽에서는 그렇지도 않은데 내 쪽에서 오히려 뭔가 쑥스럽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아니면 소녀가 노래를 마악 부르려고 이른바 ''을 잡는 모습이 턱없이 본격적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에 나는 내가 만약 실소(失笑)를 한다면 소녀가 노래를 못 부르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웃음을 감추었다. 하기야 소녀의 노래를 굳이 들어야 할 까닭은 아무 데도 없었다. 시간 여유가 좀 있다는 것으로 소녀의 노래를 듣고자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나는 본래 말할 때도 상대방의 얼굴을 잘 쳐다보지 않는 버릇이 있는데, 노래 부르는 상대방을 쳐다보는 것에는 더욱 익숙치 못해서 진땀까지 흘려야 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앳된 소녀라서인지 나는 왜 여러 번 마음 놓고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은 손수건을 머리 뒤로 동여맨 동그란 얼굴은 연두빛 블라우스 위에 마치 얹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은 자귀나무 꽃빛의 담홍색 홍조가 두 뺨을 물들이고 있었고, 코에는 땀방울이 송송 배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입을 벌릴 때마다 가지런한 잇바디 사이로 나타나는 빨간 혀끝.

나는 그때 옆에 있던 조기자에게 흘낏 눈길을 주었었다, 그는 다소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는 빨리 회사로 돌아가든가 어디 가서 목이나 좀 축였으면 하는 눈치였다. 사진 기자인 그는 나와 함께 오랫동안 같이 취재를 다녀 서도가 엔간히 죽이 맞았다. 그렇지만 소녀의 노래를 듣고자 한 것은 나였다. 조 기자는 아무 흥미도 없는 듯했다.

사실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그 무렵 몸담고 있던 주간지는 흔히 말해지는 대로 별 볼일 없는 주간지였다. 성격부터가 애매 모호했다. 교양과 오락을 함께 다룬다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박사학위 논문과 연예인의 수입을 함께 다룬대서야 곤란한 일이었다. 별 볼일 없다고 해도 바쁜 것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직장이었다. 뭔가 대단한가 싶어 달려든 경영자 쪽의 재정 형편이 실은 말이 아니어서 쓸 사람 제대로 안 쓰고 간신히 구멍만 메꾸며 꾸려 나가는 판이라 별 볼일 있는 주간지보다 오히려 더 바빴다고 해야 할 것이었다.

게다가 일간지 기자와는 달리 주간지 기자는 써야 할 기사량이 많기 때문에 각 분야에 전문 지식의 필요성이 특별히 요청되고 있었다. 이른바 전문기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문학이면 문학, 출판이면 출판, 연극이면 연극 따위로 전문 지식을 갖추어야만 한다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원칙이 그래야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인력이 딸렸다. 12역이 아니라 13, 4역까지도 떠맡아야 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무슨 회의 때마다 전문기자, 전문기자 하는 말이 오르내렸지만 도대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원칙을 세워서 분야별로 전문을 정하지 않은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한두 주일만 지나면 흐지부지되게 마련이었다. 다루어야 할 분야가 다양하다는 점도 있었다. 그러니까 한 주일 한 주일 능력에 아랑곳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뛸 뿐이었다. 한 달에 한번씩 월간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언제 세월이 가는 줄 모른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는데, 주간지야말로 그랬다. 기획 -청탁-취재-기사 작성에다가 제작하는 날에는 교정까지 보아야 했다. 이러한 과정이 한 주일마다 닥치므로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쉴새없이 하루하루가 맞물려 나갔다. 인원이 부족한 데다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전문이고 뭐고 그 주일에 맡으면 전문기자가 되어야 했다.

그 무렵에 내가 맡고 있었던 기획물이 '단절(斷絶)의 현장(現場)‘이란 것이었다. 주간지 기획이란 실은 오래 전부터 지겹게 울궈 먹은 것을 형식만 슬쩍슬쩍 바꿔서 다시 울궈 먹는 경우가 많았다. 인력에 기동성이 없으니 더했다. 안이한 제작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지면에 글자를 메꿔넣기에만 급급했다. '단절의 현장'도 따져 보면 언젠가 어디선가 비슷한 기획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주간지로서는 그런 종류의 기획이 처음이라고 자위하면서 연재를 시작하기로 했었다. '단절'이라는 낱말에서도 얼핏 알 수 있듯이 그 기획은 우리 세대에 와서 사라져 없어지는 옛것에 대해 한 가지 한 가지씩 집중적으로 취재해서 쓰는 기획물이었다. 시대가 급변하므로 우리 생활에서 멀어져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단절'이니 뭐니 한다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이를테면 우리들의 할머니들이라면 하루도 빠짐없이 사용하던 참빗이라든가 비녀, 할아버지들이 사용하던 갓 같은 것들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생활에 쓰이는 일용품뿐 만이 아니었다. 옛 왕조시대에 특이한 직책을 가졌던 사람들로서 다시는 빛을 못 볼 내시니 상궁도 대상이 되었고, 사라진 옛 풍습도 대상이 되었다. 옛 풍습이라면 아이들의 연날리기에서부터 시골 노인들의 시회(詩會)까지 다양했다, 사라져 가는 산골마을 화전민들의 너와집은 좋루 '꺼리'였다. 참나무를 갈라 널쪽을 만들어 기와처럼 덮은 집이 너와집이었다. 강원도에 갔을 때, 조 기자는 너와집 안에서 텔리비전을 보는 산골 사람들을 신바람이 나서 카메라에 담았었다,

'단절의 현장' 기획물도 여느 기획물과 같이 열댓 번을 넘기자 점점 맥이 빠져 가기 시작했다. 때마침 여러 방면에서 불어닥친 한국학의 여파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상당히 열의를 가지고 시작했던 연재였다, 시작하기 전에 여기저기 자료도 조사를 싸고 수소문은 해 두었으나, 한 주일에 한 가지씩 꼬박 취재하여 기사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절의 현장'이니만큼 그 자체가 찾아보기 힘든 것인 데서 오는 어려움도 컸다. 쥐꼬리만한 취재비도 자꾸만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타성이 문제였다. 조 기자 역시 그런 모양으로 아침에 취재를 나갈 때 가서야' 이번 준 뭔 데?' 하고 건성으로 묻게끔 되고 맡았다.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 신바람이 났다면 강원도의 그 너와집뿐이었다. 우리는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마시며 깊은 산골짜기에 찾아와 낮선 밤을 보내는 데 대해 제법 가슴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얄팍한 멋도 그때뿐이었다. 아무래도 몇 회 더 끌어 20회를 채우고 집어치워야 될 것 같았다.

별 볼일 없는 주간지라고 하더라도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많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물고 왔다. 기사로 해 주었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는데, 대부분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의 무슨 사상에 대해 소개를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느니, 어떤 상이 잘못 주어졌다느니, 새로운 무엇이 발견되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행사 안내장이나 보도 자료 따위도 하루만 거들떠보지 않으면 휴지가 돼 버릴 정도로 쌓였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세상 돌아가는 허허실실 나름대로 속속들이 접하게 되는 재미도 있었다.

 

5월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단절의 현장'은 이럭저럭 두세 번만 더하면 끝낼 단계에 와 있었다. 새해에 들어서면서 '신년 기획'으로 꾸민 것이기 때문에 한 달에 4회씩 5월말이면 20회가 차는 것이었다.

그런 어느날 나는 친구로부터 '단절의 현장'에 한 회 나갈 만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역시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으로 약수터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늬 동네는 약수 대신 막걸리가 솟냐?"

나는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두세 번의 기사는 메꿀 만한 것이 대충 머릿속에 떠올라 있기도 한 때문이었다.

"약수터 옆에 그런 데가 있어. , 약수터 술맛 끝내 준다."

그가 사는 동네 뒤쪽에 약수터가 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그 노인은 지난 이른 봄부터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첫눈에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 보이더라고 했다. 시간만 나면 약수터에 들르는 그는 그로부터 자주 노인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는 막걸리도 한 잔 나누게 되었다고 했다. 건너편 동네에 새로 이사를 온 노인이었다. 그 동네는 대부분이 판자 집으로 이룩된 동네였다. 나중의 이야기로 종합하여 먼 친척집에 얹혀 살고 있는 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노인과 이상스레 친해져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물론 내가 직장에서 그 무렵 '단절의 현장'인지 뭔지를 쫓아다니고 있으며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설프게나마 알고 있었다. 하기야 어설픈 구석으로 말하자면 그나 나나 오십보 백보였다.

"너 공후라는 거 알지?"

그는 노인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은 뒤에 느닷없이 물었다.

"쿵후? 중국 무술?"

나는 간혹 길거리의 3층 건물 유리창에 나붙은 '쿵후'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그 중국 무술을 영어로 표기할 때는 KUNGmT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F자 표기를 ㅍ으로 하는 법칙에 따라 정착하게 우리 글 표기는 쿵푸가 되지 않을까, 나는 쓰잘데 없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렇게 따지는 것은 누구 말대로 활자를 먹고 사는 사람의 비애일지도 몰랐다.

"그딴 게 아냐. 공후, 공후."

"공후?"

귀족의 지위 공(), (), (), (), ()이 얼핏 떠올랐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것이 고대의 악기 바로 그 공후(箜篌)를 말하는 게 아닐까 어림짐작을 했다.

"악기 말야, 공후."

막상 그의 입에서 악기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어리벙벙한 느낌이었다. 그와 나는 악기 같은 것에 대해서는 한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악기도 흔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악기가 아니라 고대의 정체 모를 악기였다. 그가 악기 공후라고 말했을 때 나는 왜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공후에 대해서 그것이 현악기라는 것밖에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은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의 어느 구절엔가 공후를 뜯으며 불렀다는 -공후인(箜篌引)-이라는 노래가 실려 있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공후인)-황조가(黃鳥歌)-와 더불어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시가(詩歌)가 되던가,

어쨌든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입에서 고전적인 악기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써 일종의 호기심을 느낀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 이야기를 듣고 난 나는 어쩌면 그럴듯한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딘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낀 그 코인은 예전에 만주로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본래 악기를 좋아해서 공후까지 켰다는 것이었다. 노인과 공후가 그렇게 연결이 되었다. 그는 무심코 그 말을 들었지만 집에 와서 있는 책 없는 책 다 뒤져보고 나서 공후라는 걸 켤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이제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놀랄 일 아냐? 그렇다면 그 노인이야말로 숨어 있는 마지막 사람이 아니겠냐 말야. 이렇게까지 취재해 왔음 뭐가 있어야 할 거 아냐."

그는 호들갑을 떨었다.

"뭐가 있긴 뭐가 있어, 임마. 그게 사실일지라두 공훈 너무 대중성이 없어. 쿵후라면 모르겠지만 그건 뙤놈 거니까 또,,,,,,"

나는 공후에 대해서 워낙 자신이 언어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닌게아니라 '단절의 현장' 맨 마지막 회쯤에 다루어 봄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후가 도무지 생소한 악기이긴 해도 다룰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말대로 오늘에 와서 공후를 켤 수 있는 사람이 노인뿐이라면20회를 계속한 기획물의 마무리로서 엉뚱한 만큼 안성마춤인지도 몰랐다.

물론 친구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비록 그가 내게 관심을 가져 주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내 일에는 바깥사람이었다. 그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매사에 지나치게 진지해서 오히려 부담이 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달라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주간지이긴 해도 기사는 기사로서의 당위성, 타당성이 있어야 했다.

나는 친구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볼 겸해서 우선 공후라는 악기가 도대체 어떤 악기인가를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겉핥기로나마 드디어 전문기자, 공후의 전문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료실에서 아쉬운 대로 몇 권의 책을 뒤지고 국립국악원에 전화도 걸어 보았다. 공후란 어떤 악기이며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런데 막상 살펴보니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 종류부터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세워 놓는 수공후, 눕혀 놓는 와공후, 다리가 달리고 봉의 대가리로 장식된 봉수공후에 대공후, 소공후 까지 여러 종류였다. 그것도 책마다 종류가 달랐다. 말이 같은 공후지, 내 얄팍한 지식으로는 이들 여러 가지 공후는 제각기 거문고와 가야금의 차이보다도 더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일찌기 서역 지방에서 전해져 온 악기라는 공통점은 있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때 사용되었다고 밝혀져 있었다, 서양의 하프도 같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악기였다. 그런데 현악기로서 그 줄의 수효가 문제였다. 거문고는 여섯 줄, 가야금은 열 두 줄이었다. 하지만 이들 공후 무리에 있어서는 책마다 줄의 수효가 제 각각으로 적혀 있었다.

수공후는 21현이나 23현이었고, 와공후는 4현에서부터 21, 봉수공후는 아예 20여 현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악기였다. 웬만큼 소리라도 낼 수 있는 악기라곤 하모니카밖에 없는 나로서는 그놈의 전문기자는커녕 전문(前文)기자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렇게 되어서는 취재를 하더라도 기사를 만들기에 애를 먹을 것이 뻔했다. 서역에서 왔다는 것뿐, 언제 어떻게 전해진 악기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옛날 문헌을 뒤져 보아도 언급되어 있는 곳이 거의 없는 악기라고 했다. 다만 수서라는 중국 역사책에 고구려와 백제 땅에서 연주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득한 느낌이었다. 도무지 악기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었다. 주법(奏法)도 전해지지 않아 이제는 아무도 제 소리를 낼 사람이 언다는 악기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그 악기에 관심이 쏠렸다. 나는, 친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단순히 '꺼리'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으나, 점점 정체 모를 그 악기의 현묘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톱니바퀴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간을 쪼개서 며칠 동안 나는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다. 별다른 내용이 발견될 리 없었다, 다만 우리나라에 현재 보관되고 있는 공후는 1937년에 그 무렵 아악(雅樂) 사장으로 있던 함 화진이라는 이가 중국의 북경(北京)에서 사들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 와 함께 회사의 취재비처럼 쥐꼬리만한 내 탐구욕도 자연히 움츠러들고 말았다

'단절의 현장' 마지막 회로는 상여를 다룰 예정이었다, 2,30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상여였다. 울긋불긋한 꽃상여를 메고 가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앞에서 요령을 흔들며 앞소리를 매기면 상여꾼들이 뒷소리를 받았다. 나는 지방에 아직 남아 있다는 곳집을 취재하 여 상여나 그에 딸린 물건들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는가를 취재하고, 기사의 첫머리는 상여소리를 끌어오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한번 가면 그만일세. 북망산천 멀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그때 친구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의 전화를 받은 것은 내일은 취재를 가야지 하던 날 오후였다.

"어때, 공후. 왜 소식이 없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에서 퍼뜩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섬광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이상하게 공후를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에 지배되고 말았다.

고조선(古朝鮮)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배를 타러 강변으로 갔을 때, 어디선가 머리를 풀어 헤친 백수(白首) 노인이 와서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아내가 뒤따라와 공후를 켜며 슬프게 노래부르다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곽리자고는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여옥은 매우 슬퍼하며 죽은 여자를 대신하여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것이 바로 -공후인(箜篌引)-이었다. 나는 (공후인)에서부터 자세하게 취재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상

여 대신에 공후를 다루어야겠다는 충동을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충동은 곧 신념처럼 변하여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친구에게 노인이 사는 집가지 알아두었다. 약수터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기 때문에 찾기도 쉬우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후 내내 공후란 어떤 악기일까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시, 폭 다루어야겠다는 신념과

는 달리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원사 동종(銅鐘)의 사진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이어서 여러 범종(梵鐘)의 무늬가 나타났다. 비천상(飛天像)이었다. 천녀(天女)가 옷깃을 나부끼며 비스듬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가슴에 안고 있는 악기 그것이 바로 공후였다.

동종의 무늬에서 천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아 이것이로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도무지 막연하던, 뿌연 시야가 환히 밝아 왔다. 가슴에 공후를 안고 있는 비천상이 구체적으로 어떻다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몇 번인가 예사로 보았던 비천상이었다, 솔직히 말해 그전에는 가슴에 안고 있는 그것이 공후인지를 몰랐었다. 하를을 비껴 날고 있는, 종에 새긴 무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가슴에 안고 있는 악기가 공후인 것을 알아보자, 문득 천녀는 신묘한 공후 소리와 함께 날아 내려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종의 무늬가 아니었다. 나는 하늘이 둥근 공명통처럼 울려 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선녀였다. 살아서 숨쉬는 아름다운 선녀였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나는 여자와 밀회하는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인을 찾아 나선 것은 이튿날 점심 뒤였다. 아침부터 서두를 작정이었으나 사진부의 조 기자가 다른 사진으로 오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미뤄진 것이었다. 전화가 없는 집이어서 될수록 빨리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공후라는 악기를 했다는 노인인데 악기는 없을 테니까 그냥 인물 사진만 찍으라구."

"거 재미없는데, 빌려서 어떻게 안 될까?"

사진 기자로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국립 국악원에 보관된 게 있다니까 그럼 조형이 빌려갖구 오라구."

악기는 고사하고 나는 노인이 집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앞섰다. 기사가 늦어져 쩔쩔매는 기자에게 흔히

"못 쓰면 지형 뜰 때 들어가 앉으라."

고 하던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노인을 만나지 못하고도 지형 기계 속에 들어가 납작하게 되지 않으려면 하루 말미로 다른 대상을 취재하여 원고까지 써야 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여옥의 노래 (공후인), 비천상의 공후를 어떻게든 관련지어야만 기사가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럼으로써 마치 살아 있는 천녀가 켜는 공후소리의 생동감을 조금이라도 표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었다.

조 기자와 나는 판자 집 동네의 비탈을 올라갔다. 친구는 이미 꽤 오래 전에 노인을 만나 내가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두었다고 했다. 노인이, 공후라는 말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눈빛을 빛내며 열의를 보이더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얼마쯤의 석연치 않은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후가 아무래도 남성용 악기보다 여성용 악기가 아니겠느냐 하는 점이었다. 여옥도 여성이었고, 몸에 화만(華鬘)을 걸친 천녀도 여성이었다. 공후를 남성이 켰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었다. 공후와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하프도 옛 그리스 그림에서부터 여성이 켜고 있었다. 물론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남성이 켜지 못하는 악기라는 반증은 되지 않았지만. 노인의 집이 가까워진다고 여겨지자 왠지 허황된 느낌이 들었다. 공후를 켜는 법은 이미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공후를 말하고 있는 노인이 나타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문제가 아닌 듯도 싶었다. 어쩌면 특종의 발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회에 갑작스레 공후를 택하게 된 것은 어떤 계시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조 기자 몰래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기도 했다.

친구의 말과는 달리 노인의 집을 찾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구가 사는 동네와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네 집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만나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아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야 이놈 동네 한번 요란한데."

사진 기자 특유의 활동성으로 집 찾는 데는 도사로 정평이 나 있는 조 기자도 다닥다닥 붙은 판자 집 동네에서는 수완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가만 있어 봐. 이따 끝나구 막걸리 한 잔 하자구. 약수터에 좋은 데가 있다니까. 맛이 기맥히데."

"벌써 목이 탄다, ."

5월의 날씨가 무더웠다. 언덕받이를 오르내리는 동안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흘렀다. 조 기자는 아무리 '단절의 현장'이기로서니 이런 판자집 동네까지 찾아올 건 뭐란 말인가 하고 내심 투덜거리고 있는 듯 했다. 평소에는 터놓고 친하다가도 막상 일을 시작하면 기세가 등등하니 알다가도 모를 게 사질기자였다.

노인의 집을 찾은 것은 네 시가 넘어서였다. 그것도 반대쪽, 그러니까 친구네 동네로부터 거꾸로 찾아온 수확이었다. 약수터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라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길과 다른 방향으로 또 작은 길이 나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친구가 말한 대로 지붕이 검은 루핑인 집이었다.

"맞지?"

조 기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짐하듯 물었다.

"틀림없어. 앞집이 빈 병 모으는 집, 보라구."

나는 앞집의 좁은 마당에 쌓여 있는 술병들을 가리키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대문이고 담장이고가 없었으므로 집안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다.

"계십니까?"

방문은 닫혀 있었고 인기척마저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친구의 믿을 수 없는 정보에 너무 매달리지나 않았나 우려되는 바도 없지 않았다.

"여보세요. 안에 누구 안 계십니까?"

나는 거듭 소리쳤다. 아무도 없는 집이라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노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선다면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방안에서 옷차림을 매만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내가 조 기자에게 이제 나을 모양이라는 눈짓을 슬쩍 보내는 사이에 방문이 바깥으로 배시시 열렸다.

"누구세요?"

나는 눈을 의심했다. 조 기자 역시 뜻밖이라는 듯 내게로 눈길을 던졌다. 안에서 얼굴을 내민 사람은 노인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 열 예닐곱 살쯤 되었을가, 앳된 소녀였다. 소녀는 문 밖으로 나왔으나 본능적인 경계심으로 우리를 잔뜩 경계하고 있는 눈치였다.

"노인께서는 안 계시는 모양이지요?"

걱정부터 앞섰다. 그 순간 소녀의 얼굴에 엷은 그림자가 스쳐 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었다. 나는 공후를 하신 노인이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소녀가 공후를 알 까닭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소녀가 머뭇거리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우리는 신문사에서 왔으며 노인으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노인과는 어떻게 되느냐고 웃음을 띄고 물었다.

"할아버지요. 할아버진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돌아가시다니?"

"갑자기 아프시다고 누워서 못 일어나셨어요."

나는 내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노인들의 건강은 알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럴 수가 있을까 싶었다. 노인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무엇보다도 일이 문제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 내 꼴이 스스로 심상치가 않았었다. 친구가

생전에 안 하던 짓거리를 한 것부터도 그랬다. 공후고 나발이고 공연히 한눈을 판 것이 잘못이었다. 일은 버그러진 것이었다. 노인이 살아만 있어서 얼굴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다면 그럭저럭 억지 기사를 꾸며 넣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온몸에서 맥이 쪽 빠졌다. 이제 내일은 밤을 꼬박 새워야만 지형 기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면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도 선뜻 발길이 돌려지지가 않았다. 일이 이미 그렇게 된데서 오는 반작용인지도 몰랐다. 밑도 끝도 없는 오기와 함께 불현듯 무엇인가 실마리를 얻어 가고 싶다는 욕심이 솟았다. 노인이 없는 마당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오직 지나간 일의 객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지금까지의 과정을 무()로 돌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인다는 격으로 켜는 법을 잃어버린 공후를 켰다는 노인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 아쉬움이 너무도 컸다.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즉시 행동에 옳기지 못한 것이 후회가 막급했다. 노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신비한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단절의 현장'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지금 시대, 지금 사회에서는 많은 소중한 옛것들이 멸종하는 짐승들처럼 간단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노인도 그런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통탄할 일이었다. 나는 알 수 언이. 비분강개해서 그동안 미적미적했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

"이거 날샌 거 아냐."

조 기자가 내게 중얼거렸다. 어서 가자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아쉬움이 더욱 짙어졌다. 여옥의 모습과 비천상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다, 범종에 새겨진 천녀는 내게로 날아오다 말고 쇠로 굳어진 것이었다.

"아가씬 흑시 공후라는 거 얘기 못 들었나?"

나는 마지못해 발길을 돌리면서 소녀에게 물었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왔다.

"알아요. 할아버지가 얘기해 주셨어요."

나는 소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노인은 공후와 어떤 인연이길래 어린 소녀에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단 말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비록 회사 일은 이미 글렀지만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겨졌다.

"그래 어떤 얘기지? 우린 사실 그 얘길 좀 들을라구 왔던 거야."

나는 소녀가 위축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문했다. 무슨 실마리가 풀리는가 싶기도 했다. 소녀는 처음에 방문을 열고 나을 때처럼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 다음에는 수월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소녀에게로 귀를 기울였다. 열 예닐곱 살 먹은 소녀가 내게 공후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 자체가 현실의 일이 아닌 듯했다.

옛날에 강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다,,,,,,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그러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 소녀의 이야기는 옛날 고조선 시대의 그 (공후인) 노래, 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 이야기 하기 좋아하는 노인이 그런 투로 들려 준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내 취재 노트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그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었다. 어쨌든 그 노인은 이상한 노인이었다. 고령으로 세상을 마칠 만한 나이의 노인이 (공후인)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녀가 공후를 안다는 것은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소녀는 오로지 옛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달랐다. 나는 노인에 대해 새삼스럽게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소녀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노인의 고향은 함경도 어느 산골이며 거의 평생을 떠돌이 생활로 마쳤다. 그리고 심심할 때면 옛날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했다. 이런 이야기 끝에 소녀는 자기도 옛날 노래를 좋아하게 되어서 국악학교 같은 데 들어가 노래를 배우는 게 소원이라고 스스럼없이 밝히기도 했다. 처음의 인상과는 달리 왜 숙성한 소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밖에도 나는 소녀에게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들었다. 자기네는 갑자기 사업이 망해서 그곳으로 옮겨왔다는 것,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일을 나간다는 것,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못했다는 것 등등이었다. 소녀로부터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역시 그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헤어질 때쯤 되어서야 나는 왠지 소녀가 노래를 하고 싶어한다고 여겨져서 할아버지한테 배운 노래가 있으면 한 곡 불러 보라고 넌지시 청했다.

이미 모든 일은 어차피 다음 날로 미뤄져 있었다. 소녀는 우리 노래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 소녀답게 소녀는 선뜻 할아버지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자기가 좀 바꾸어 본 것이라고 설명을 달고 그럴싸하게 ''가지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귀나무 꽃빛의 홍조가 두

볼을 물들이고 떨리는 그 노랫소리가 새어 나왔다.

 

건너지 말라고 하였더니

님은 물을 건너 가셨네.

물에 빠져 죽으니

앞날을 어찌하리오.

 

무심코 듣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소녀의 갈대처럼 떨리는 목청에만 귀를 기울인 탓이었을까. 아니면 우리 가락 가운데서도 도무지 들어 보지 못한 가락인 탓이었을까. 나는 님은 물을 건너 가셨네'라고 하는 중간 부분에서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가사만 남아 전하는 (공후인) 노래였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노래를 마친 소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홀린 게 아니라면 누군가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소녀는 생글생글 웃음마저 머금고 있었다. 정신이 어지러웠다. 모든 것이 가짜고 사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터무니없이 -공후인-을 부르는 지경이니 가짜나 사기를 떠나서 아예 미친 것이었다. 노인에 대한 존경심은 순식간에 분노로 뒤바뀌었다. 하기야 소녀는 분명히 노인이 흥얼거리는 것을 자기가 좀 바꾸었다고 설명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굴욕과 배반감으로 나도 모르게 얼굴에 경련까지 일었다. 노인은 그 방면에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집광이었으리라고 판단되었다. 별볼일 없는 주간지라도 일을 하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게 마련이었다. 언젠가는 자기가 하는 대로 벼농사를 지으면 쌀을 두 배나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중년 사내도 있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서 소녀를 뒤에 두고 말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노인의 죽음으로 취재를 못하게 된 상황이 오히려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 날의 헛걸음 덕분에 이튿날 나는 꼬박 밤을 새워야 했다. 그래서 다행히 지형 기계 속에 들어가 오징어포처럼 납작 눌리는 신세는 면했다. 나중에 친구에게서 그 판자집 동네가 모두 헐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들은 체도 안하고 말았다. 그리고 톱니바퀴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나날의 시간 속에서 그 일도 가뭇없이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어느 날 저녁이었다. 일을 끝내고 동료들과 이른바 '간단히 한 잔'을 기울이던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피곤해서 일찌감치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가 술자리를 먼저 빠져나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걸어갔다. 시간은 아직 왜 이른 편이었고 가로등 위에 달빛이 흐릿하게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그 무렵은 정국이 어수선한 데다가 회사도 날로 더 별볼일 없는 길로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나는 막연한 내 앞날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으나 뾰족한 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사람은 보통 일생에 세 번의 기회를 맞는다는데 한 번의 기회도 맞지 못했으니 어찌된 노릇이람. 한심할 뿐이었다. 버스 정거장 앞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한참 동안 왔다갔다했지만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몇 시쯤 되었을까. 나는 시각을 알아보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의 전자시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세종문화회관의 벽면에 돋을 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는 비천상이 보였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몰라도 범종의 그것을 응용한 것이었다. 세종문화회

관이 완공되었을 때, 그 벽면의 조각을 비천상으로 했다는 보도를 분명히 본 것도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날아 내려오는 비천상의 천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것도 같았고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도 같았다. 살아 있는 천녀였다. 천녀가 옷깃을 바람에 날리며 가슴에 안은 공후를 맑게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피리소리와 생황소리도 났다. 나는 그 자리에 말없이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자 멀고먼 하늘로부터 천녀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인간의 목청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목청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목청은 가냘프게 떨렸는데 그때 나는 그것이 어디선가 들은 노랫소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공후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노랫소리도 높아졌다. 무슨 노래일까, 나는 귀를 기울였다..

(공후인)의 슬픈 노래였다. 한자로 남아 있는 고시 공무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장내공하의 풀이가 귓가에 맴돌았다. 건너가시지 말라고 하였어도 그대는 물을 건너 가셨네. 빠져서 목숨을 잃으니 앞일을 어찌 하오. 순간적인 일이었다. 노래는 끝나고 공후 소리도 멎었다. 가볍게 튕겨지던 천녀의 손끝은 달빛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런데도 그 노랫소리는 여전히 내 귓속을 맴돌았다. 그 노랫소리는 분명히 그 소녀의 노랫소리였다. 이 세상에서 내게 공후인의 노랫소리를 들려 준 것은 소녀밖에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나는 귓속에 맴도는 그 노래를 입 밖에 내어 보려고 입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귓속에 생생하게 맴돌고 있는 그 노랫소리를 나는 도저히 입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대로 잡힐 듯한 음률을 내 입으로 옮겨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벙어리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붕어처럼 몇 번 입을 버끔거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 노래는 가장 쉽고도 또렷한 노래였다.

그런데도 왜 옮겨 부를 수 없는 것일까. 아무리 안간힘을 써서 입술을 달싹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 귓속을 낭랑하게 맴돌고 있는 그 노래는 현실의 노래가 아니라 심금(心琴)의 어떤 노래였다. 한 소녀의 노랫소리로 맴돌고 있을지언정 결코 한 소녀의 노랫소리가 아닌 노랫소리. 그것은 소녀의 노랫소리의 혼()을 차용한 옛 사람들의 노랫소리였다. 곽리자고의 아내인 여옥의 공후인. 범종의 여운 속에 깊이 그리고 멀리 깃들어 있는 비천(飛天)의 공후인. 모든 옛 사람들의 이별의 애끓는 노랫소리. 그렇다면 나는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내 심금의 공후를 스스로 켜면서 그 모든 공후인보다도 깊이 그리고 멀리 노래부르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일이 있기는 했어도, 내 서역 체험은 공후가 서역에서 온 악기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나는 서역 땅에 남다른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다친 무릎'에 먼저 가서 앉아 있던 나는 아내가 오자마자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아침하고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다. 종일 굶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불편한 구두 때문인지 눈에 띌 정도로 걸음걸이가 어기적거렸다. 몸이 많이 불편한지 어떤지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아내는

"." 하고 한동안 사이를 두다가

"괜찮아요."

했다. 히끗 웃어 보일 때 나는 시들어 가는 꽃 빛을 보았다.

"배고픈 건?"

"것두 인젠 모르겠는걸요."

우리는 예전 언젠가처럼 신호등을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넜다.

"집에서 나오는 길이에요7"

아내가 물었다.

 

거리는 어느새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맞이한 이틀 동안의 이른바 황금 연휴를 앞두고 보다 많은 즐거움을 꿈꾸며 술렁이고 있었다. 나는 걸어가면서 남들에게는 눈에 잘 띄지 않을지 몰라도 내 눈에는 거슬릴 정도로 지나치게 어기적거리는 아내의 거동에 신경이 날카롭게 도드라졌다. 나로서는 이틀 동안의 '황금' 연휴가 아무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 이틀 동안의 '황금' 연휴를 믿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아내와 살고 있는 것이었다.

"별일은 없었겠지?"

자궁 근종(根腫)을 앓았던 아내가 결코 온전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나는 어쩌면 그로 인해 아내가 시름 시름 앓으며 회사를 못 나가게 되는 사태를 연상하고 은연중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별일이라뇨?"

시든 나팔꽃 같은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뭐 그냥 무슨 일이 없었느냐구. 병원에서.

나는 그 얼굴을 외면하며 중얼거렸다.

"없었어요. "

굶고 시달려서 몸만 축 처져 있다 뿐이지 아내는 명랑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같은 여자들이 많더라고 아내는 덧붙이기도 했다.

"보호잘 데려오라잖어요."

그것이 별일이라는 듯 아내는 새삼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나는 물었다

"출장갔다구 그랬어요. 그냥 형식 절차니깐."

날빛이 안개처럼 어둠에 밀려가고 있었다. 길목을 꺾어들었다.

그리군 아무 일두 언었어요. 난 누워 있기만 했어요."

아내의 말이 안개처럼 어둠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다행이야. 다시는."

내 목소리는 안개처럼 사라지는 아내의 목소리를 뒤쫓아가려고 하다가 행방을 잃고 말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내는 하루종일 몸을 혹사하고도, 반짝 불이 들어오는 전등알처럼 작은 환희에 차 있었다. 그것은 안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어느 음식점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집 괜찮지?"

아내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내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했다가 부드럽게 내게로 돌아왔다.

"이 집 여전하군요."

". "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외식(外食)을 하자는 발상에 아내는 물먹은 화초처럼 생기를 내었었다. 내 용돈이나 마찬가지로 그 비용도 아침마다 종종걸음을 해야 하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즐거워했다

육류(肉類)라면 꽤나 즐기는 편인 아내의 식성에 맞추어 결혼 전에도 몇 번인가 드나들었던 음식점이었다. 간판이나 입구의 장식이나 모두 예전과 그대로였다.

"이층으로 올라가실까요?"

입구 쪽에 서 있던 남자 종업원이 손으로 계단을 가리키자 대기하고 서 있던 여자 종업원이 앞장을 섰다. 아내와 나는 어떤 사건의 전말을 들으러 가는 것처럼 묵묵히 뒤를 따랐다.

"들어 가세요."

작은 식탁이 놓여 있는 아담한 방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여종업원이 물 컵과 물수건을 가져다 식탁 위에 놓았다. 아내가 물수건을 펼쳐서 손을 닦았다.

"무얼 하시겠어요 ?"

여종업원이 물었다.

"무얼 할까?"

나는 아내에게 눈길을 주다가

"고길 좀 하고 그리구 소주 한 병."

하고 주문했다. 이미 그 집에 들어온 이상 아내에게 무얼 시킬지는 묻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나는 돌아서 나가는 여종업원의 등 뒤로

"콜라도 한 병."

하고 곁들였다. 아내는 그제서야 피로와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나른한 눈매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신문사가 문을 닫고 난 뒤로 시내에서 마주 앉기는 처음이었다.

결혼 전의 일들이 생각났다. 양쪽 집에서 모두 반대한 결혼이었다.

그녀와의 관계는 늘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었었다. 결혼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그랬었다. 나는 아무런 결정도 못 내리고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그녀로부터 마지막까지 도망치려 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럴 듯하게 표현하자면 운명이라는 것이 나를 그러지 못하게 했다. 결혼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일주일 동안 그녀에게서 잠적했었다. 그러나 나는 별수 없이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그때 나는 느닷없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 제안을 했고, 시종일관 그녀의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무표정했다. 놀잇배의 뱃전에 기대앉은 그녀는 불쑥 봉은사는 어디쯤일까 하고 질문을 던져 왔을 뿐이었다. 나는 강 건너편 숲이 우거진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아마 저기쯤이 아닐가 하면서도 대뜸 정확하게 손가락을 들어 가리킬 자신은 없었다. 강변에 늘어선 고층 아파트의 행렬이 영동대교로 끊어지고, 거기 숲이 우거져 있었다. 나는 봉은사의 연꽃이라든가 사천왕을 머리에 떠올리며, 우리의 지난 만남이 기묘한 순례(巡禮)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쪽 수풀 뒤 어딜 꺼야."

나는 건성으로 말했다. 그녀도 대체로 그러려니 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지난 주에 내가 일주일 동안이나 잠적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사귄 이래 그녀가 내 거처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한 반응을 보인 적은 없었다. 아마도 뾰루퉁해 있는 거겠지 하고 나는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 일에 대해 도통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웬일인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일주일만에 그녀의 직장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그녀는 어디 아프기라도 했느냐고 묻기는 했었다. 별 볼일 없는 내 직장은 직장대로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는 아프지는 않았었다고 대답했으나 막상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신문사도 빼먹고 혼자 절에 갔었다면 곧이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돌발적인 일은 나 스스로에게도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한 일이었다. , 그냥 무슨 일이 좀 있었어. 나는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나는 그녀에게 예정대로 이사는 차질 없이 했는지를 묻고 도와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녀를 오래 사귀어 왔고, 웬만한 친한 사람들에게는 결혼한 사이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던 만큼 마땅히 나는 그녀의 이사 짐을 옮겨 주었어야 했다. 그게 야속했는지 그 토요일 오후에 만나서도 그녀는 아직은 주인집 눈치를 봐야 된다면서 집 근처의 뚝섬 유원지로 나를 끌고 갔던 것이다. 우리는 커다랗게 벌이고 있는 괴물의 아가리를 향해 공을 던져 넣는 놀이를 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쫓아다니는 청년의 청에 못 이겨 생각지도 않게 놀잇배를 탔다. 한 시간에 사천 원이었다.

"전에 학교 때, 봉은사엘 가느라고 배를 타고 건너 모래사장을 한참이나 걸었었는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그동안의 변모가 도무지 생소하기만 해서 학교 때 이곳을 거쳐 봉은사로 갔었다는 기억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그런 태도와는 아랑곳없이 나는, 학교 때라면 그것은 남학생하고 동행이었다,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쳐 간다고 의식했다. 그러자 그녀가 나와 함께 정릉의 봉국사나 삼청동의 칠보사 같은 데로 돌아다니면서 옛날을 회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엉뚱한 의혹마저 뒤따랐다. 세검정의 소림사는 우리가 자주 다닌 절이었다. 그렇다고 소림사에 특별히 무슨 볼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법회(法會)에 참석한다거나 부처에 배례를 한다거나 하는 일도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 측면이라고 하면 소림사로 가는 세검정 큰길가에서 우리가 자주 나눈 대화는 오히려 예수 쪽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그녀가 신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큰 구실을 했다고 보여지는데, 내가 횡설수설 늘어놓으면 그녀는 듣는다는 식이었다.

나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라든가 불트만의 신학(神學)에서부터 우치무라 간조며 함 석헌의 무교회 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예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확고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산책을 하는 길이라고는 해도 그녀가 절에 대해서 혹시 가질지도 모를 거리감을 덜어 주려는 배려에서 택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기묘한 순례였다.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지기 전, 그 두 해 동안 나는 뻔질나게 세검정의 그녀 세방에 드나들었다. 소림사에 들렀다 오는 길에는 허름한 길가 술집에서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저녁때면 흔히 나는 오래 전에 그곳에 세방을 얻으려고 혼자 돌아다녔던 기억

이 새로워지곤 했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곳에 세방을 얻어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내가 일찌기 못 이루었던 꿈의 실현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꿈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꿈이란 단순히 집을 떠나 혼자 살려는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그 욕망이야말로 장래에 무엇이 되고 싶다든가 돈을 벌고 싶다든가 하는 모든 욕망에 앞서서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절박한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선 한 간의 방을 얻을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었다.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아예 없었던 출분 계획이었다. 내가 왜 세검정을 대상지로 택했는지는 지금도 정말 모를 일이다.

내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세검정을 찾았던 것은 1964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의 학생이었고 게다가 세검정은 초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서울에서는 왜 외딴 동네에 들었다.

그 날은 가랑비가 하루종일 안개처럼 흐르다 멈췄다 하는 날씨였는데, 그렇다고 음산하지는 않았다. 그곳 분지는 안개비에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배운 대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산수(山水) 운연(雲煙)의 경계를 몽롱하고 침중하게 나타낸다는 선염법(渲染法)에 의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였다. 집에서 나와 그곳에 틀어박힌다는 상상이 실제의 일처럼 내 앞에 다가와 나는 망연자실, 남모르는 환희에 몸이 떨렸던 것도 같다. 버스가 자하문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아마도 느티나무인가, 황록색에 붉은빛을

띤 가을 잎사귀들이 무리져 날리는, 어쩌면 비현실의 세계 같기도 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세검정이라는 동네가 두고두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식된 까닭이 바로 이때의 느낌 때문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마을의 깊고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불

구하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저 도끼로 찍어 놓은 준()처럼 주름져 보이는 것도 인상이 깊었다.

지금, 세검정 깊숙이 분지 아래로 내려가서 뒤돌아 인왕산의 옆모습을 바라보아도 겸재의 (인왕제색도)의 그 준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버스는 비교적 좁은 길을 한달음에 달려 내려가서는 개울을 건너기 전에 멈추어 섰다. 나뭇잎이 우수수 날리고 나무 밑으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갠지 비장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버스에서 내려 나무 아래 선 나는 나도 모르게 모자의 챙에 손을 가져갔다. 마음을 가다듬었을까. 나는 졸업반 학생으로서 마지막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한 달 남짓밖에 남겨놓고 있지 않았으나, 교복에 교모를 착용하고 있었다. 과연 이곳에 살 곳을 마련하려고 온 것이며, 그것은 가능할 것인가,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빗물에 씻겨내린 집들을 자하문 고개에서 내려다보았을 때보다 한결 맑아 보였다. 집들이 밝게 드러나자 그제서야 나는 막막한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일은 실현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사춘기에 집을 나오려고 몸부림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이야말로 큰 것이다. 그 일은 훨씬 뒤에야 다른 방법으로 실현되었지만, 그때는 불행하게도 자립할 능력이 갖추어졌던 때였다. 집을 떠나려던 시도는 귀찮게 도치는 병증처럼 몇 번 더 되풀이되긴 했다.

한번은 양봉(養蜂)을 한다는 청년을 술집에서 처음 만나 그를 따라 나서려고도 했었다. 청년은 술에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었다. 우리나라의 꽃은 제주도의 유채 꽃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사월이면 아카시아 꽃이, 오월이면 밤꽃이 북쪽으로 올라오면서 피어난다. 그러나 싸리 꽃만은 그와는 달라서 칠월 하순에 강원도에서 먼저 피어난다, 그는 그 꽃들을 따라다니며 사노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웬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따라가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약속한 날, 그는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제법 단단히 마음 먹고 배낭까지 꾸려 나섰던 나는 애꿎게 근교의 야산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집으로 터덜터덜 기어 들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미수에 그친 격렬비열도행. 풍랑으로 배를 못 타고 나는 이틀 동안 선창가를 헤매기만 하다가 돌아오고야 말았다.

격렬비열도() () 충청남도 서산군 서부에 있는 열도. 동쪽에는 석도와 접하며, 충남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 주민은 주로 어업에 종사함. 등대가 있음.

나는 이와 같은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풍랑 속에 나는 이틀째 한 여자를 만났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작정 가출이냐고 묻는 나에게

"뭐 가출이라고까지 말할 건 없어요. 일박 이일로 끝나곤 하는 가출이라고 하면 되겠군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었다. 멀리서부터 하역 작업을 하는 인부들의 외치는 소리, 한없이 뽑을 듯하다가 갑자기 뚝 그치는 무적(霧滴) 소리, 닻을 끌어올리는 소리 따위가 한데 어울려 몽롱한 아우성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아우성소리는 어두운 세상 저편에서만 맴도는 것처럼 느껴져, 아무런 현실감도 전해 주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큰 창고와 창고 사이로 망망한 바다로 열린 길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낡은 돛단배 하나가 동력선들 사이에 마닐라 삼나무 밧줄로 비끄러매어져 있었다. 아직 돛폭을 접지 않아서 몇 번이고 누덕누덕 기운 것이 바람을 받아 부풀었다 누그러졌다 하고 있었다. 만약 이 세상에서 그 돛폭보다 더 떨어지고 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내 마음이리라.

그녀는 생각보다 긴 혀를 가지고 있었다. 딱다구리의 혀. 나는 딱다구리라는 새가 부리로 나무의 벌레집을 쪼고 나서 기이하게 길고 끈적끈적한 혓바닥을 집어넣어 벌레를 핥아낸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녀는 딱다구리처럼 가늘고 긴 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 뱃고동소리가 길게 들려오는 것을 어렴풋이 들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휑하니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먼저 일어나 아마 아침 공기를 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머리맡의 담배를 손으로 더듬어 불을 붙여 물고 멍하니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천정을 향해 이리저리 흩어졌다. 바람이 많은 지방이로군. 그래서 방안까지 기어 들어온 바람이 담배 연기를 날리고 있군.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무슨 이유에선지 안절부절을 못하고 좁은 방안을 수인(囚人)처럼 왔다갔다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 갇혀 있었다. 누가 나를 가두어 놓고 가 버렸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싸늘한 느낌 때문에 몸서리치다가 바삐 웃도리를 걸치고 도망치듯 여관방을 빠져나왔다.

세검정을 다시 찾은 것은 고등학교를 마친 지 거의 십 년이 지나서였다. 그 동안에도 물론 자두밭이다, 배밭이다, 유원지다, 하고 몇 번인가 자하문 고개를 넘어 다녔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한나절씩 보내곤 했을 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소림사로 산책하면서 우리가 예수에 관한 이야기만 주로 나누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에 관한 내 밑천이 짧기도 했으려니와 그녀 관심의 대상이 예수보다는 예술임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 대해서는 다시 짧은 밑천을 동원해서 이것저것 주절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되곤 했으므로 무슨 소리든 그렇게 주절거려야만 했다. 그래서 니코드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같은 작품을 들먹거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학승으로부터 선()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을 얻어듣기도 했다. 그녀가

"선은 기도인가? "

하고 물었을 때, 학승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었다.

"기도하고는 다릅니다. 화두(話頭)와 싸워서 철저한 무념무상(無念無想)에 이르는 것이지요."

학승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했으나 그 뜻은 나로서는 아리송했다. 그보다 나는 중국 무술에 더 관심이 쏠렸다. 세검정의 소림사와 중국의 소림사가 전혀 무관한 절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소림사를 앞세운 별의별 무술 영화가 다 나와 관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냥 -소림사-는 물론 (소림사 본인방)이니 (소심사 목인방)이니 (소림사 18동인)이니 하다 못해 (소림사 주방장) 까지 나오는 판국이라 전혀 무관한 세검정의 소림사라고 꽤도 공연히 그에 대한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무술에 조예가 없는 데다가 영화관에도 거의 발길을 않는 나로서는 소림사 무술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다만 텔레비전에서 본 미국 드라마 (쿵후)에서 역시 소림사 권법(拳法) 곧 쿵후를 전수 받은 케인이라는 떠돌이 청년이 악당들을 물리치는 묘기 같은 것이려니 파악하는 정도였다. 세검정의 소림사 학승으로부터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본디 중국의 소림사는 달마가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참선한 곳으로서, 하남성 등봉현 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임제종의 절이다. 당나라, 송나라의 비석이나 동위(東魏)의 삼존불 같은 유물이 있으며 원나라의 초조암이라는 면모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소림사는 달마에 의해서 선종(禪宗)이 처음으로 중국 땅에 뿌리를 내린 절로서 뜻깊은 절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잠깐 설명을 멈춘 틈을 타서 그 절이 어째서 무술의 본산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 절을 중국의 소림사와 연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개도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닙니까?"

하고 나는 그를 안심시키듯 웃으면서 덧붙였다. 그와 함께 마라난타 니 순도니 아도니 하는 이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 말에 그는

"글쎄, 그건 그렇지요."

하고 자신이 없는지 한동안 망설이다가 자기로서는 아마도 달마 대사가 선을 수행하는 승려들의 체력을 향상하기 위해 마련한 단련 방법이 후세에 발전했으리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후세의 발전이란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 족속이라고 일컬어졌던 여진족의 청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를 회복하려는 우국지사들이 소림사를 본거지로 모여 은밀히 무술을 익혔음이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견해였다. 막상 설명은 그렇게 했지만 트는 그 따위 문제에 집착하는 내 수준이 한심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내게 선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달마 이래 선종은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지며 이 혜능의 뒤로 선종 오가가 비롯되오. 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법안종, 그는 열심히 말했다.

놀잇배는 영동대교의 교각이며 난간이 사각으로 올려다 보이는 곳에 닻을 내리고 있었다. 비철이라 물에 떠 있는 배는 몇 척 안 되었다. 나는 닻을 내린 때부터 저쪽 배에서 들려오는 방자한 웃음소리에 꽤나 신경이 거슬렸다. 중년 부인들이 흔히 음담패설을 서로 던지면 서 터뜨리는 웃음소리였다. 배를 저어 와서 닻을 던져 넣은 주인 사내는 놀잇배의 옆구리에 달고 왔던 작은 보트를 타고 어느 틈에 물가의 수상가옥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에게 무슨 말인가 건네고 있었다. 여자가 남비를 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시킨 매운탕을 딴 집에서 시켜 오려는 모양이었다. 매운탕은 잡 고기 매운탕이었다. 메기나 쏘가리 한 가지 고기로만 끓이는 매운탕보다 모래무지, 누치, 붕어 따위를 되는 대로 넣은 잡 고기 매운탕이 그녀의 입에 맞을 듯해서였다. 거기에다 내가 마실 소주 한 병과 그녀가 마실 맥주 한 병. 그녀는 내가 주문하는 대로 맡겨 놓았을 뿐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이사를 하고 나서 아무래도 어딘가 딴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생소한 곳으로 이사를 한 뒤의 긴장 탓일까. 주인 사내가 고물 쪽으로 탄을 던져 넣을 때도

"닻을 던지는군, ."

하고 말했지만 그녀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린애처럼 닻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짙었다. 닻은 보이지 않는 깊은 물 속에 근거를 마련해 둔다. 그런 닻이 내게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해 왔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그녀와의 결합이 그런 닻이 될 수만 있다면, 하는 희망에 사로잡혔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를테면 기묘한 순례와 함께 한없이 가까워졌었다. 결혼은 공공연히 약속되었다. 그런데 나는 막상 결혼이 남의 이야기처럼 막연하게만 받아들여졌다.

"햇볕이 너무 강한가?"

직사 광선에 눈이 부셨다. 나는 일어나 사방을 네모지게 통째로 막게 되어 있는 휘장의 한쪽을 잡아 내렸다. 얼굴에 비치는 햇볕만이라도 막기 위해서였다.

"저쪽은 아주 내렸는데요?"

멀찍이 흩어져 있는 서너 척의 배 가운데 하나는 정말 초록색 비닐 휘장을 아예 뱃전까지 내리덮고 있었다.

"아냐, 저건."

나는 새삼스럽게 당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배의 휘장이 내려지기 전에 나는 그 안에 타고 있는 두 남녀를 언뜻 보았다는 생각이 났다. 두 남녀는 지금 벌거벗고 있는 것일까. 가까운 배의 중년 여인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들의 키득거리는 소리 뒤로, 성수대교 너머 멀리 영동 지구의 아파트들이 신기루처럼 떠 있었다. 영동대교 위로 차량들이 밀리면서 멈춰선 버스에서 승객들의 얼굴이 강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어렸을 때 동생과 나는 냇가에 가서 멱을 감으며 팔매질을 하곤 했었다. 하나, , , . 돌은 수면 위를 날렵하게 튕기며 우리를 즐겁게 했다. 어느 날이던가. 그 날도 우리는 멱을 감고 나서 젖은 몸을 말리는 동안 팔매질을 하려고 했다. 그때 건너편 기슭으로 한 여자가 걸어 내려왔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는 울적한 듯 고개를 숙이고 한 손에 든 수숫대로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우리는 돌을 던지지 못한 채 벗은 옷을 바위틈에 숨겼다. 아직 젊다기보다 어린 여자였다. 그 여자는 냇물가에 다가오더니 순간 망설임 없이 치마를 걷고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그때 치마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고 또 알았다. 동생과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누굴까?"

하고 동생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가만 있어. 임마. 내가 알어, 새꺄?"

하고 나는 동생의 입을 틀어막으며 눈을 부라렸지만 그녀가 동식이네 집에 있는 누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동식이네 집에는 그런 누나들이 득시글거렸다. 이윽고 여자는 수숫대로 자신의 두 다리 사이를 헤집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몹쓸 병이 옮은 것이었다. 땡볕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때 동생이

"퉤 퉤, 부스럼딱질 긁고 있잖아. 기계충이 옮았나봐"

하고 침을 뱉었다,

"가만있어, 이 새꺄. 기계충이 왜 거기 옮니? 니 대가리에나 옮지."

내가 윽박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돌을 집어들고 수면을 향해 튕겼다. 여자는 후다닥 일어나 치마를 내리고 이쪽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옷을 챙겨들고 수수밭 속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동생은 그때까지 퉤퉤 침을 뱉고 있었다. 동생이 있었더라면 휘장을 내리친 배를 향해서도 돌팔매질을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 안의 남녀는 어떻게 엉켜 있는 것일까. 개처럼 엉켜 있는 것일까, 개구리처럼 엉켜 있는 것일까, 달팽이처럼 엉켜 있는 것일까, 아니, 흙빛으로 엉켜 있는 것일까, 장미 빛으로 엉켜 있는 것일까. 그리고 여자들의 키들거림.

그 전 주에 문득 서울을 떠날 마음이 솟은 것은 예전의 병증이 다시 도진 때문인지도 몰랐다. 우연히 봉은사에 다녀와서 나는 아무도 몰래 그 일을 실행할 마음을 굳혔다. 그렇다고 해서 봉은사에서 어떤 계기를 얻었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나는 커다란 연잎이 솟아 있는 연못을 보았고, 눈을 부릅뜬 사천왕을 보았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을 리 없었다. 다시 서울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삶을 찾고 싶다는 소망이 강렬하게 나를 비끌어 매었다. 그것은 마치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에 집을 벗어나고 싶었던 욕망과도 같았다. 그 무렵 그녀는 세검정을 떠나 직장이 가까운 뚝섬 근처로 집을 옮긴다고 말해 주었었다. 내가 그녀에게서도 떠나야-다고 마음먹었다면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어렸을 적 방을 구해 살고 싶었던 그곳에 그녀가 방을 구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열중했던 것일까.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어렸을 적의 대수롭지 않은 기도의 좌절이 그렇게 보상을 받고자 했을까. 그리하여 그녀가 세검정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그보다 다른 어떤 좌절을 보상받기 위해 그녀에게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떠나고 싶었다. 그것만이 진정한 이유였다. 사실 나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매사에 질력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별 볼일 없는 직장에 장래는 지나치게 불투명했다. 처음에 나는 봉은사의 묘전이 보고 싶었었다. 어디선가, 조선 시대에 왕으로부터 고양이를 먹여 살리라는 밭으로 하사 받았다는 묘전이 봉은사에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세조(世祖) 임금이 강원도의 오대산으로 불공을 드리러갔다. 상원사의 법당을 들어서려는데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다. 이상하게 여겨져서 법당 안을 뒤져보니 자객'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를 공양하라고 밭을 하사했다.

절 앞까지 구멍가제가 문을 열고 있는 곳에서 옛 묘전을 찾기란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자 세검정 소림사의 학승이 들려 준 또 한 마리의 고양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연못에 떠 있는 연꽃 꽃잎을 바라보며 잠시 그 생각에 젖었다.

옛날 중국의 남천 선사는 고양이를 놓고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광경을 보고 그 고양이를 베어 죽였소. 밖에 나갔다 돌아온 조 주에게 스승 남천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소.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조 주는 아무 대꾸도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에 이고 걸어 나갔지요. 이것이 무슨 뜻이겠소. 소림사의 학승은 설명하기에 앞서서 물었다. 그렇소. 남천 스님은 출가자인 승려들이 고양이 한 마리에 얽매여 있는 것을 보고 모든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뜻으로 고양이를 죽였으며, 조 주 역시 속세의 가치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다투는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 한 행동이었소.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 때문에 속세니 집착이니 그것을 끊어야 한다느니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새로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도 없이 다만 따분하게 계속되는 생활에 환멸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유행가 같은 이유도 붙일 수 없었다. 나는 오직 떠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불가자의하고 부도덕한 일을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주인 사내가 다시 보트를 저어 와 매운탕과 소주와 맥주가 놓인 쟁반을 배에 올려놓고 돌아갔다. 나는 뱃전에 매달려 있는 병 따개로 병마개를 땄다. 그녀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비 속에는 강변에 끌어올려 뒤집어놓은 보트같이 민물고기 몇 마리가 배를 희뜩 뒤집고 떠 있었다. 나는 괴로워하고 있는가, 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었다.

"우리 말놀이나 할까? 우스개 얘기말야."

나는 술잔을 들면서 드디어 제안했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나는 그녀가 내가 결국 헤어지기를 선언하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글프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헤어짐을 선언한다고 했지만 나는 말로써 툭 까놓고 '이젠 헤어지자' 어쩌고 구차하게 결말을 짓고 싶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섣부르게 주워들은 대로 저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묘의(妙意)로써 헤어지고 싶었다. 가소로운 일이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까닭이 뭐지?"

"예수께서?"

"."

나는 왠지 비참해져서 말놀이 따위를 제안한 일이 후회되었지만 이미 내친 걸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웃음을 머금듯 하면서 내게로 돌아왔다.

"뜰 앞의 잣나무."

그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낭랑했다. 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뜰 앞의 잣나무. 그 말은 일찌기 달마가 서쪽에서 왜 왔느냐는 물음에 조 주 선사가 한 대답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왜 쐈느냐는 물음은 불교의 근본 원리가 무엇이냐, ()란 무엇이냐는 물음과도 통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물음을 말놀이로 던졌을 때 아무리 말놀이라도 그녀에게서 나옴 직한 대답을 예수의 가르침대로 '시험하지 말라'는 투가 아닐까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놀이치곤 너무 하잖어?"

나는 웃음을 펴고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항의했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한꺼번에 백 문제를 내면 바로 말할께요."

"아하. "

이렇게 되면 완전히 낭패였다. 그녀의 말은 역시 어떤 선사의 말을 차용한 것이었다. 이제 말놀이고 불립문자고 직지인심이고 모두가 쓰잘 데 없는 짓이었다. 우리는 세검정의 소림사를 드나들면서도 선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적키 없었다. 그녀가 언제 선사들의 어록을 읽었는지로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이렇게 말놀이를 하다가는 결코 헤어지자는 의미를 전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우리가 소림사에 드나들었던 일을 회상했다. 나는 늘 떠남을 염두에 두고 그녀를 만나 왔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늘 모든 것에서 떠남을 획책하면서도 늘 좌절해 왔었다. 나는 그녀에게서조차도 떠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떠남과 만남이 원심력과 구심력처럼 팽팽히 맞서고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당분간 떠남을 의식적으로 획책하지는 않으리라.

소림사가 떠올랐다. 다음 순간 소림사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소림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나라의 세검정에 있는가, 중국의 숭산 기슭에 있는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림사는 세검정에도 숭산에도 있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뿐인 것이다. 나는 맥이 빠져서 그녀와 더 이상 말놀이 따위를 할 엄두도 못 내고 매운탕 남비만 뒤적였다. 모래무지 한 마리를 건져 올린 나는 대가리 쪽으로부터 통째 입에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런 얼마 뒤 우리는 전격적으로 결혼했다. 친구들 몇 명을 불러놓고 '냉수 떠놓고' 올린 가난한 결혼식이었다.

 

그런 판국에 그놈의 알량한 신문사마저 문을 닫고 보니 속수무책이었다. 사회를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이 우선 무기력해져서 만사 휴의였다. 그나마 전세방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언제나 소음으로 다글다글 볶는 동네였다. 경적소리, 물소리, 싸움박질 소리, 개 짖는 소리, 여자들의 악다귀 소리, 찬송가 소리, 확성기 소리, 그런 동네에 있으면서도 그 뒷방만은 그런대로 격리된 듯 제법 조용했다. 산 동네의 집이어서 뒤쪽 창문으로 내다보면 훤한 저녁 노을도 볼 수 있었고 건너편 산 아래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값에 그런만큼 다른 결점이 컸다. 아내는 복덕방을 돌아다니면서 한 집 한 집 볼 때마다 점점 높아지는 해발 고도에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아궁이에 불길이 영 들이지 않는 방이었다. 추위가 닥치자 쇠 침대를 들여놓고 방안에 연탄 난로를 피울 때까지의 심란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가스 버너 위에 철판이 놓여 달구어지고 소주와 콜라의 병마개가 따졌다. 아내가 납작납작하게 썰어진 고기를 말없이 철판 위에 올려 놓는 동안 나는 또 말없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무슨 의식(儀式) 같았다.

"회복실에 누워 있는데 들어오는 사람만도 셋이나 되던걸요."

나는 아내의 컵에 콜라를 따랐다.

"끔찍해."

아내가 익어 가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눌렀다.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콜라가 따라진 컵의 안쪽 유리에 벌레 알처럼 투명하게 달라붙어 있던 기포가 뽀그르르 뽀그르르 위로 솟았다.

"의사 얼굴두 못 봤어요. 이제 의사가 오려나 기다리구 있는 참인데 벌써 끝난 거라잖어요."

고기가 몇 점 뒤집혔다. 아내가 콜라를 들이켜는 데 보조를 맞춰 나는 소주를 들이 켰다,

"다음 언제 연휴 때는 석굴암엘 가자구."

갑자기 석굴암은 왜 튀어나왔을까. 나는 말해 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석굴암을 경주의 석굴암이 아니라 음식점 이름쯤으로 들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마취가 너무 깊었나 봐요. 옆엣사람 얘길 들으니 깔쭉거리며 긁어내는 소리까지 다 들리드라는데."

아내가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들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쓰리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부지런히 들라구. 나야 뭐 술 먹으니까."

"안주랑 해서 마셔요."

"천천히 먹지."

나는 술잔에 찰찰 넘치게 술을 따랐다. 아내는 씹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고긴 야채랑 해서 같이 먹어야 소화가 잘 된다구 그래."

중학교 졸업을 앞둔 수학여행 때 석굴암의 해돋이를 보려고 토함산에 올랐었다. 그날 구름에 가려 해돋이를 못 보게 되자 잠까지 설치고 허위허위 올라온 일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돌부처의 흐린 얼굴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선녀의 옷자락 같다는 11면 관음보살의 옷자락도, 천을 짜듯 돌을 짜서 올렸다는 석굴의 홍예도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석굴암이 튀어나온 것은 돈황석굴의 연상 작용이었을까.

"찬 콜라를 이렇게 마셔서 어떨지 모르겠네. 한 병 더 시킬까봐요.

"어떨라구."

출입구 옆의 벽에 있는 벨을 누름과 거의 동시에 들어온 여종업원에게 아내는 콜라 한 병을 추가시켰다.

"낮엔 뭐 했어요?"

"잤어."

나는 마늘을 철판 위에 쏟아 부었다.

"내내?"

". 그놈의 쇠 침대 본전을 뽑구두 남았지."

"잠만 자믄 오히려 몸에 해롭다는데. 잠은 잘수록 는다는데."

"불을 줄일까? 벌써 타잖어 ?"

나는 허리를 굴혀 불꽃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불꽃을 줄였다. 술기운이 온몸에 퍼져 있음이 감지되었다. 천정의 환풍구로 연기가 몰려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들은 한동안 말없이 먹고 마셨다.

"뭐 더 주문하실 거 없으세요?"

콜라를 들고 온 여종업원이 물었다.

"아직 꽤 있는데, 먹어 보구요."

내가 말했다. 아내는 목이 마른지 단숨에 다시 콜라 한 컵을 비우고 있었다. 여종업원이 물러가고 난 다음에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먹고 마셨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 자리는 어디까지나 아내를 위한 자리였다.

"잠자면서 꿈을 꿨어."

나는 술잔을 다시 채웠다.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낮잠에 꾸는 꿈이 뭐. "

아내는 꿈을 많이 믿었다. 꿈에 돼지를 보면 돈, 죽은 사람을 보면 복(), 달이 뜨는 태몽을 꾸었다고도 했다.

"그놈의 쇠 침대에선 꿈을 잘 꿔."

그놈의 쇠 침대라는 말에 아내는 웃음을 지었다. 상치에 쌈을 싸던 손이 동작을 멈추었다,

"왜요? 그 쇠침대가 어때서요? 무슨 악몽에라두 시달렸어요?"

나는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현실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의 꿈이 사라지면 잠속에서의 꿈도 사라지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었다. 아내가 상치에 싼 쌈을 내게로 내밀었다.

"이렇게 해서 먹어 봐요. 상치는 잠 잘 오는 약도 된대요."

"아니, ."

"그럼 악몽두 안 꿀 거예요."

아내의 팔이 앞으로 툭 뻗쳐 왔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쑥스럽게 입을 벌리고 받아먹었다, 그러고 나서 아내는

"맛있죠?"

하고 동의를 구했다. 나는 짐짓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어떤 꿈을 꿨어요?"

"그놈의 쇠 침대에서는."

하고 나는 입을 열었으나, 입안의 쌈을 마저 삼킬 때까지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별놈의 꿈도 다 러."

"어머. 그래요? 무슨 꿈을 그렇게 꾸죠?"

아내든 돈, 건강, 행운에 대한 여러 가지 꿈을 상상하는 듯 눈을 깜박였다.

"낮엔, 춤추는 꿈이었어. "

나는 빙그레 웃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내가 종끗 귀를 세웠다.

"춤이 라고요 ? "

". "

아내는 재미있다는 듯 후후 하고 소리까지 냈다.

"자긴 춤이라곤,,,,,, 디스코두 못 추잖어요? 근데 춤을 춰요?"

"출 줄 알면 뭐하러 꿈을 꿔. 못 추니까 꿈에서나 춰야지."

"악몽이군요. "

아내는 고기를 셉느라고 우물거리면서도 시종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나중에 집에 가서 편안히 잠들 때까지 오늘만은 웃음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았다.

"디스코예요 ? "

아내의 물음에는 소녀 같은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아니."

"그럼?"

"그 비슷한 거지."

"말해 봐요. 비슷한 게 뭐예요?"

"사자춤이었어. 갈기를 날리면서 추는 사자춤. 그러니까 내가 춘 게 아니지. 사자가 춘 거야. 난 구경을 하구 있었지."

다른 재미있는 춤 이야기를 꾸며댈 것을, 하고 나는 얼핏 후회했다. 그러나 실은 아까부터 달리 꾸며댈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었다.

"사자란 놈이 글쎄 나만 보고 달려들잖어. 춤을 추는 놈이 말야."

"사잘 보은 무슨 꿈일까? 암튼 길한 꿈이에요, 쓰건."

아내는 그렇게 단정했다.

"사자는 영 춤을 멈추질 않았어. 대가릴 디립다 흔들면서 죽어라구 추는 거야. 내가 달려들어서 고삐를 낚아챘지만 허사였어. 그래도 길한 꿈일가?"

나는 고삐를 낚아채는 시능을 해 보였다

"그렇겠죠. 근데 사자의 고삐를요? 사자가 고삘 펜어요?"

"그럼 나쁜가?"

"몰라요. 그렇진 않을 테죠."

아내는 바싹 탄 고기들 귀퉁이로 옮겨놓으며 사자춤이 도대체 무슨 꿈일까 풀이에 잠기는 눈치였다.

"꽉 낚아채려고 해두 손아귀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질 않는 거야. 아무리 애써두 손이 곱아서."

나는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했다.

"그래서요 ? "

"요놈을 어떻게 멈추게 하나 걱정하다가 잠이 깼지."

아내는 꿈에서 사자를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한번이라도 꿈에 본 적이 있었다면 입을 다물고만 있을 성미가 아니었다.

"그건 개꿈이에요. "

아내는 피식 웃었다.

"사자꿈이래두."

"사자꿈의 개꿈."

아내가 나머지 고기를 쟁반째 철판 위에 붓고 가스 불꽃을 올렸다. 나는 까맣게 고무처럼 탄 마늘쪽을 집었다.

"꼭 지금까지두 춤추고 있을 것 같아. "

"추라죠, . "

방안이 고기 굴는 냄새와 철판의 열기로 가득 찼다.

"요즘은 꿈도 안 꾸고,,,,,, 언젠간 서로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 다른꿈을 꾼다는 게 괜히 이상하고 서먹서먹해지기도 하더라니까요."

나는 멍하니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기름 증기에 상기된 몽롱한 얼굴이었다.

"올 겨울에는 고 좁은 침대에서 셋이서 자야 했잖았어요?"

아내가 농병아리처럼 쿡쿡 소리내어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거기서 어떻게 셋이서 자? 그리구 올 겨울두 우린 둘인걸."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지겹게 더위의 사물(四物) 놀이를 하던 여름 해도 어느 사이엔가 기울고 이미 가을로 접어들어 있었다. 나는 아내가 웃음을 잃고 가을같이 스산한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아내가 철판 위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더 먹지 왜. 안 먹어?"

나는 강요하다시피 말했다.

"맛은 있는데 그전같이 안 먹혀요. 그래두 나만 먹었는데. 이거 싫음 밥이라도 좀 시킬까요?"

"아니, 난 술 먹으면 잘 안 먹으니까. 먹을 테면 시키라구."

"아뇨, 아뇨, 됐어요. "

아내는 도리질을 치며 물김치 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술을 더 마시고 싶었지만 술병은 동난 지 오래였다.

"언제 석굴암엘 한번 가자구. "

나는 기어코 다시 말했다.

"갑자기 석굴암엔 왜죠?"

아내의 눈빛이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왜긴, 경주 구경을 하자는 거지. 경주 못 가 봤지?"

"그래요. 못 가 봤어요."

"난 한번 가 봤지만 어렸을 때라 뭐가 뭔지 몰랐거든. 다음 연휴 때 같이 가자구."

문이 젖혀지며 여종업원이 들어왔다.

"불을 꺼드릴까요?"

그렇게 물은 그녀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가스를 막아 불을 껐다. 하기야 아내는 아까부터 나무젓가락만 들었다 놓았다 하는 터였다.

"이거 싸 가지구 가게 비닐 봉지 하나만 주세요. "

아내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계산서두 드릴까요?"

아내의 얼굴이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여종업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 하자 여종업원은 말없이 나갔다.

"아예 먹구 가잖구. "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컵 바닥에 남아 있는 콜라를 말끔히 마시고 휴지로 입술을 닦았다.

"어느 날보다도 포식한 거 같아요. 이렇게 굶었다 먹으면 배탈나는 데. 이젠 집에 가서 쉬어야지요. 빨리 쉬고 싶어요."

여종업원이 와서 비닐봉지와 계산서를 식탁 위에 밀어놓았다. 나는 계산서 쪽지를 집어 꼼꼼하게 들여다보고는 아내에게 건네 주었다.

아내는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

"이 집 싸군요."

하고 만족한 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늉만 했을 뿐이어서 액수가 얼마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내는 등심 몇 점을 비닐 봉지에 하나하나 집어 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온 나는 아내가 나올 때까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어귀에 서서 한동안 기다렸다.

"오늘은 참 기인 하루예요."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말했다. 정말 그랬다. 그러나 그 긴 하루가 어쩐지 현실 같지 않아서 나는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아내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동네의 언덕 아래서 택시를 내릴 때까지도 그런 비현실감은 가시지를 않았다. 아내는 택시 안에서 졸았다. 택시가 멎고 그 반동으로 아내가 몸을 앞쪽으로 휘뚝하면서

"벌써 다 왔어요?"

하고 두리번거렸을 때에야 겨우 긴 하루를 지냈다는 실감이 전해져 왔다. 확실히 그 곳은 낯익은 현실의 동네였던 것이다. 아내는 '다친 무릎'에서 나왔을 때처럼 여전히 어기적거렸다. 나는 아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가볍게 부축해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내는 상당히 의지가 되는 듯싶었다. 외등에 비친 그림자가 올라가기 싫다는 듯 길게 언덕 밑 뒤로 뻗쳤다. 나는 우리가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딜까? 역시 현실 바깥의 곳일까? 외등이 달린 전신주를 지나자 그림자가 선뜻 앞장을 섰다

"하루 하루가 이렇게 길면 지겨울까요?"

아내가 내게 몸무게를 주면어 말했다.

"사랑이 없는 사람한테는 그렇겠지."

"그럴까요,,,,,,"

아내의 말이 그림자가 하는 말처럼 아득하게 들려 왔다. 지친 말투였다.

열쇠를 넣어 방문을 열고 방에 들어오자 아내는 옷도 벗는 둥 마는 둥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루가 길기두 해요,"

나는 멎어 있는 사발시계를 들어 태엽을 감았다. 아내의 손목을 들어 손목시계의 시간을 보았다. 11시였다. 사발시계의 바늘을 맞추고 되돌아섰을 때 아내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사위가 고즈넉해졌다. 하늘을 떠가는 비행기소리일까, 우웅우웅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하면서 방안을 울렸다. 지구도 저렇게 외로운 기관소리를 내며 어둠 속을 떠가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긴 하루였다. 아내에게 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긴 하루였다. 아주 먼 길을 걸어왔다는 피로감이 화톳불처럼 잦아들었다. 알 수 없는 회한으로 나는 가슴이 설렜다. 먼 길을 걸어 왔으므로 이젠 쉬어야 한다. 먼 길, 긴 하루였다. 모든 일이 과거가 되었다. 잠들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아득한 길로 눈틀 들었다. 멀고 먼 서역 삼만 리. 그러자 사자춤이 떠올랐다. ? 사자춤 꿈을 꾸었다고? 나는 비긋이 웃었다. 이어서 입술 사이로 나도 모르게 킬킬킬킬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킬킬킬킬, 그 순간 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놀랐다. 소리를 목구멍 속으로 눌렀다. 컥컥거리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아내는 전등불빛을 온통 환히 받으며 마냥 잠에 빠져 있었다.

긴 하루였다. 장막(帳幕)의 무대였다. 나는 전등 스위치를 껐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그와 함께 창문으로 빛이 하얗게 쏟아져 들어왔다. 달빛이었다.

"웬 달빛이,,,,,,"

나는 소리내어 중얼거렸다. 달빛이 침대 모서리에 걸쳐서 꺾어지면서 아내의 아픈 발을 비추었다. 발바닥이 희끄무레 떠올랐다.

"수술할 때 양말만이라두 신을라구요."

아침에 흰 양말을 챙겨 넣으며 아내는 말했었다. 그 발을 달빛에 잠근 채 슈미즈 바람으로 잠들어 있다. 달빛 때문일까. 아내의 몸은 쇠 침대와 함께 마술에서처럼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느 순간 쇠 침대를 치워 버리면 홀로 공중에 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찰랑이는 달빛에 발목까지 잠기며 어디 혼자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길이 열 자, 너비 아홉 자의 방, 책꽂이 위의 유리컵에는 가느다란 스위트피 한 줄기가 시들어 가며 꽂혀 있었다. 쇠막대를 넣어 조립한, 작은 간이 탈의실 같은 비닐옷장. 그리고 방구석에 놓여 있는 찬장 속에 들어 있을 양파 몇 개, 창틀 가장자리로는 여름 내내 노래기가 기어다녔다. 놈들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무심코 문짝 밑 흠을 보면 도르르 말린 채 죽어 있곤 했다. 목이 말랐다. 나는 찬장 위의 물주전자를 집어들고 주둥이에 입을 대고 들이켰다. 갑자기 방안의 달빛이 설핏했다. 구름이 가린 모양이었다. 나는 창문 가까이 가서 바라보았다. 구름이 백통 쟁반 같은 달을 스쳐 가고 있었다. 쟁반에 모래 쓸리는 소리가 들렸는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석굴암에 가고 싶다는 바람은 짙은 열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듯했다. 설혹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하더라도 석굴암에는 전실(前室)을 만들어 그 안까지 들어갈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희부옇게 내리비춰 사막과 같았다. 긴 하루가 지나고 막이 내린 뒤에서 달이 사막을 가고 있었다. 멀고 먼 서역 삼만 리. 사막의 석굴들도 달빛에 젖고 있었다. 녀석에게서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혜초가 오도송(悟道頌)을 읊었으며 (왕오천축국전)을 쓴 곳이라 해도 내게는 무관한 것처럼 느끼기만 맸었다. 우리 예술과 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한 줄기 원류로서의 서역 문물을 이 땅에 실어다 준 창참 구실을 했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이취(異趣)의 대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것은 오후에 집을 나설 때까지도 여전했다. 아내에게 사자의 꿈을 둘러댔을 때까지만 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랬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비록 쇠 침대에 누워 사자 꿈을 꾸지는 않았다손치더라도 나는 오랜 세월 춤추는 사자에 대한 꿈을 꾸어 왔던 것이었다. 그랬다. 그것은 아마도 내 명을 길게 해 줄 그 북청 사자만이 아닐 것이었다. 그것은 신라 산예의 사자이기도 할 것이며 돈황 벽화의 사자이기도 할 것이었다.

사자가 햇덩이 같은 얼굴을 위아래로 흔들며 길군악소리에 맞춰 등싯등싯 나온다. 앞발을 쩍 벌리고 좌우로 얼굴을 갸웃거리다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판을 휩쓴다. , , , , , , 갈기가 흔들리며 몸이 떨린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지칠 때까지, 지칠 때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 , , , , .

다시 하늘이 눈 빛에 반사된 것처럼 밝아 왔다. 침대 위의 아내는 꼼짝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밀랍으로 빚어 만들어놓은 등신대의 인형처럼 희읍스름한 윤곽만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이제 달빛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아내는 달빛에 절어 영원히 미이라가 되리라. 그리고 말해지리라. '묻혀 있던 달빛 속에서 20세기 옷차림 그대로의 여인 미이라 발굴. 발굴에 참가한 고고학자들과 인체 과학자 및 빛에너지 과학자들은 달빛이 농축되어 부패 현상을 막은 결과 이처럼 완벽한 미이라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의 소녀'라고 이름 붙여진 이 미이라는,,,,,,

나는 침대 옆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소녀'가 아픈 발로 사막을 걷고 있었다. 한동안 내려다보던 나는 한쪽 무릎을 굽혀 방바닥에 대고 꿇어앉아 가만히 아내의 발에 입술을 댔다. 발가락이 움직였는가,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내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려 했을 때 아내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아내에게 내가 한 행동이 알려졌는지 조바심이 났다.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목이 마르군."

나는 목청을 돋구어 말하고 찬장께로 가서 주전자를 더듬어 들었나. 물은 3분의 1쯤 차 있었다.

"물도 한 방을 없어 젠장."

아내는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문 밖이 바로 차양을 잇달아 만든 부엌이었다. 말이 부엌이지 한데나 다름없었다. 시멘트 바닥을 맨발로 딛고 수도꼭지를 틀어 주전자에 소리내어 물을 채웠다. 그리고 나서 주둥이에 입을 대고 마시는 시늉을 했을 뿐, 물은 마시지 않았다. 나는 주전자를 개숫대 옆에 내려놓았다.

잤어. 내내? . 꿈을 띤지. 춤을 추는 꿈이었어.

달밤이다. 먼 달빛의 사막(沙漠)으로 사자 한 마리가 가고 있다. 무거운 몸뚱어리를 이끌고 사구(砂丘)를 소리 없이 오르내린다. 매우 느린 걸음이다. 쉬르르 쉬르르. 명사산의 모래가 미끄러지는 소리인가. 사자는 아랑곳없이 네 발만 차례차례 떼어놓는다. 발자국도 모래에 묻힌다. 달이 더 화안히 밝자, 달빛이 아교에 이긴 은니처럼 온몸이 끈끈하게 입혀진다. 막막한 지평선 끝까지 불빛 한 점 반짝이지 않는다. 사막의 한복판에 사자의 그림자만 느릿느릿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다. 세상은 정밀(靜謐)하게 정체되어 있다, 움직이는 그림자도 정체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사자는 쉬지 않고 걷고 있다. 달빛의 은니가 낡은 시계의 멕기처럼 벗겨지고 있었다. 아득한 시간이 사막처럼 드러나고 그 가운데서도 사자는 하염없이 걷고 있다. 시간의 사막 역시 끝간 데가 없다. 사자는 발 밑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옮겨 놓을 뿐이다.

누란을 지났는가.

돈황을 지났는가.

가도 가도 끝없는 허공을 사자는 묵묵히 걷고 있다. 발을 옮길 때마다 모래소리가 들린다. 달빛에 쏠리는 모래소리인가, 시간에 쓸리는 모래소리인가. 아니면 서역 삼만 리를 아득히 울어 온 공후소리인가.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아이야, 사내애였다면 혜초처럼 먼 곳으로 법()을 구하러 떠났다치렴. 계집애였다면 사막 속에 곱게 단장하고 있다고 치렴. 그렇다고 들 치렴.

사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일까. 그러자 사자가 난데없이 내게 물었다.

"봉산(鳳山)이 예서 머오? 강령이 예서 머오? 기린(麒麟)이 예서 머오?"

깜짝 놀란 나는 머리를 내젓기만 했다. 그와 함께 사자가 고개를 들고 화등잔 같은 눈을 크게 떴다.

"이기 뉘기요? 북청 아즈바이 앙이오?"

사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어느 결에 가죽을 훌훌 벗어 던졌다.

"참말 긴 하루였소. 이리 오래 춤추기두 아마 처음이지비?"

목구멍에 모래가 잔뜩 엉겨붙은 쉰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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