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밤 같은 상큼함으로 『수필 쓰는 하루』 / 몽자
단단하게 익은 알밤은 제대로 삶아서 공을 들여 까먹어야 그 맛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매끈한 껍질을 벗기고 보늬까지 걷어내야 단맛이 난다. 한알 한알 먹는데 손이 많이 간다. 맛은 있되 껍질을 벗기기가 불편하다는 점, 그러고 보면 같은 밤이라도 풋밤과 단단하게 익은 밤은 맛의 차이와 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
잘 익어서 요리조리 찬찬히 뜯어보고 음미하며 뜻을 되새겨야 하는 수필이 알밤이라면 생의 깊은 연륜은 약하지만 상큼하고 톡톡 튀는 감성과 풋풋함을 지닌 수필을 풋밤이라 표현하고 싶다.
풋밤 같은 수필이 담긴 한 권의 책을 읽었다. 진중하거나 심오한, 혹은 묵직하거나 깊은 인생 철학이 담기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색을 지닌 상큼한 맛을 제대로 느꼈다고나 할까. 수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야 농익은 인생 철학이 나온다는 말을 흔히 한다. 글의 주제가 대부분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의 쓴맛, 짠맛, 매운맛, 떫은맛을 두루 겪어야 생에 대한 통찰이 생기고 그에 따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부분 수필집을 읽다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글 속에 화자의 인생관이 녹아 있어서이다. 본격 수필을 쓰는 나로서는 여태 진중한 수필을 많이 읽었다. 부러 그런 수필을 찾아 읽기도 했다. 생을 다소 무겁게 살아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때는 재미있고 유쾌한, 혹은 풋밤처럼 풋풋한 글을 읽곤 한다.
이번에 내가 만난 책도 ‘풋’이라는 접두사가 어울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벼운 글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무거운 주제를 깔끔한 감정선으로 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수필 쓰는 하루』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우선 책이 주는 이미지가 곧았다. 곧고 단정한 표지, 무겁거나 가볍지 않은, 손에 착 들어오는 알맞은 부피와 무게가 상큼했다.
『수필 쓰는 하루』는 올해 7월 14일 출간된 책으로 저자는 ‘몽자(김명미)’님이다. [지식과 감성]이라는 익숙한 출판사 이름을 봤을 때 더 반가웠던 건, 내 책 두 권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했기 때문이다.
몽자님과는 블로그 이웃으로 만났다. ‘날아라몽자’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몽자님은 마라토너이기도 하다. 내가 맨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달리기하는 이웃 블로거가 있다는 게 반가웠고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직접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나이도 모르지만, 아직 젊은 세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필을 쓰는 작가들의 평균 연령이 높다는 점에서 젊은 수필가에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다. 젊다는 건 얼마나 좋은가. 앞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많다는 이야기이고 일찍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만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몽자님도 앞으로 가능성이 많은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에는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들이 대부분 논리적이고 감성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여서 수필집에 실린 글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전이었다.
일상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놓으면서도 주저리주저리 하지 않는 깔끔함이 좋았다. 글의 분량이 길지 않아서 가독성도 높았다. 서사와 사유가 적당히 섞인 가운데 작가의 생각을 정리하는 마무리도 세련되었다. 어떤 작품은 사유가 풍부하고 어떤 작품은 서사가 흥미로웠다.
몽자님은 달리기에 진심인 사람이다. 두통을 자주 앓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걸 이겨내기 위해 마라톤을 하고 나태해지는 걸 극복하려 고군분투한다. 자신을 살게 하는 게 달리기이고 글쓰기라고 말하는 작가의 마음이 깊이 이해된다. 달리기를 해 본 덕분에 달린다는 게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어서다. 글도 그와 같이 쓴다면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고 가을 하면 밤의 계절이다. 가을이 무르익어 단단하게 여물기 전, 맛보는 풋밤의 매력 같은 한 권의 책, 『수필 쓰는 하루』가 폭염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책에서 받은 또 하나의 느낌은 작가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쓴 책, 『수필 쓰는 하루』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