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農民)의 길 / Y고문님 일가상 수상 강연 초록(1999.9.4.(토) 오후 2시 농협중앙회 대강당)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하고 안국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 후에 이곳 낯설고 물선 농촌에 들어온 지도 어언 37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뒤돌아보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매일매일의 생활에 충실하려는 일념으로 살아온 본인이 일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는 놀랍고 한편 부끄러움에 당황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여생을 진실된 농민으로 농촌, 농민들에게 폐스런 존재가 되지 않게 살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가혹한 자평(自評)을 함과 동시에 여러 어른들과 500만 농민 동포(同胞)들의 기탄없는 충고를 받고자 합니다.
예부터 농업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두 번째 서열에 두었으나 사람 대접은 선비와는 하늘과 땅 차이와 같이 형편없고 소득에서는 상인들에게 약탈당하는 것 같은 처지였고, 생활상은 공인들보다 형편없이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대학 4년 간 (1953~ 1957), 전국 농촌을 근로봉사(勤勞奉仕)와 성인교육을 위해 학생들과 돌아다녀보고 이런 현상이 더욱더 심각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자연과 가까이서 생활해 보니 하늘과 땅과 사람 셋의 공동작품인 농업은 첫째로 거짓말이 통하지 않고, 둘째로 그 누구에게도 머리 숙일 필요가 없고, 셋째로 나와 가족 더 나아가 민족과 인류의 식량을 생업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의 심정은 최소한 농촌에 폐스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고, 우선은 농촌에서 무해무덕(無害無德)한 사람으로 출발하여 가능한 한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동작품(共同作品)인 농업(農業)은 첫째 거짓말이 통하지 않고 둘째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고 셋째 나와 가족 더 나아가 민족과 인류의 식량을 생산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울 토박이, 서울 농대 출신으로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겠다는 신념 하나로 귀농하여 많은 영농인들의 귀감이 된 귀농 제1호1 윤여창 씨 그는 화려하고 편한 도시생활을 접어두고 농민이라는 자부심과 개척정신으로 37년 간 외곬 인생을 산 우리 농민의 대표주자이다.
그는 1962년 경기도 시흥군 (현 의왕시) 황무지 산을 손수 개간하여 목장을 만들고 착유기 설치, 우유냉장 저장시설 등 ‘선진 과학영농’을 실천 보급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지역개발에 앞장섰고 1977년부터 아시아 낙농교류회 및 일본 북해도와 영농기술 교류를 해오고 있다. 또한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국립한국농업전문학교(현 한국 농수산대학)의 학생들에게 매년 해외연수를 주선하고 있다.
항상 목표는 최선(最善)에 두고 결과는 차선(次善)에 만족하겠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나날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정신병자로 오인(誤認) 받기도(誤認) 하였고, 사상을 의심받다가 투서(投書)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서울과 시골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만 받고, 이해와 격려는 없던 날들이 계속되면서 농민으로 농촌에 뿌리내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이목(耳目)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님을 알고 떠난 시골행이었기에 꾹 참고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이제는 귀농 제1호(歸農 弟1號)라는 애칭도 듣습니다.
장사꾼과 가격흥정이 필요 없는 농사로 낙농업(젖소)을 택했던 것이 힘들었고, 휴일도 없이 고달팠던 30여 년을 외곬로 보낸 세월이었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놓치지 않고 해외로 연수단(硏修團)을 이끌고 다닌 결과 많은 농민들이 넓은 세상을 보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 북해도(北海道)에는 20여년 간에 걸쳐 젖소농민과 연수생(농민후계자) 들을 위해 ‘길 안내역(案內役)’을 자처했던 것이 이제는 농업 전 작목(作目)에 걸쳐, 일본과 미국에까지 ‘길 안내자(案內者)’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천 유달영(星泉 柳達永) 선생님께서 1981년 5.16 민족상(民族賞) 수상에 즈음하여 내려 주신 선생님 고유의 해학적인 휘호인 학농정려 보세위민(學農精勵 補世爲民)을 분에 넘치게 받고 농사나 잘하라는 나무라심으로 알고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학농(學農) ! : 열심히 노력은 했으나 미진하기 그지없고
정려(精勵) ! : 스스로 열심히 했지만 객관적으로 별로 신통치 못하였으며
보세(補世) ! :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저 폐스런 존재나 아니 되려 애썼을 뿐,
위민(爲民) ! : 농민들에게서 일원(一員)으로나마 인정받는 것으로 대만족이랍니다.
앞으로의 삶의 길에는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고 절제 있는 생활에 충실하렵니다.
‘ 고 싶은 말이 있어도 다하려 말고 더 참고,
하던 일 끝까지 마무리 하려 연연하지 말고,
지위와 힘에 끝까지 의지하려 하지 말고,
복도 전부 다 누리려 하지 말자’ 고 한 번 더 다짐하면서
끝까지 힘들고, 어려웠던 날들을 감내해 주고 나를 지켜봐 주고, 함께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힘이 되어준 아내 김정자(金貞子)에게 ‘고맙고 사랑한다’ 는 말로 대신합니다.
농민의 넋두리를 경청해 주신 여러분께 거듭,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윤여창(尹汝昌)
생년월일 : 1934.10월 30일
본적 :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128번지
주소 : 경기도 의왕시 내손 1동 산 90번지 창령원 목장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1121 샘마을 한양아파트 120동 402호
학력
1947 ~ 1953 : 서울 보성중 · 고등학교 졸업
1953 ~1957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생물학과 졸업
경력
1957 : 고등학교 2급 교사자격증 취득
1958 ~ 1961 육군 복무(병장제대)
1962 ~ 1973 시흥군 연합회 회장 및 경기도 연합회 감사
1969 ~ 1973 4-H 회원 기술연수 농장 개설, 운영
1969 ~ 1984 사단법인 한국 종축개량협회 대의원
1971 ~ 1973 서울우유협동조합 제 1대 총대
1971 ~ 1973 경기도 새마을 지도자(시흥시 의왕면 내손 2리)
1972 ~ 1985 국제라이온스협회 안양클럽회원 회장
1975 ~ 1976 서울우유협동조합 제 3대 총대
1977 ~ 1989 새농민 학교 개설(의왕농협 내) 운영
- 일본 북해도 낙농학원 대학 내 아시아 낙농교류회 협조
1978 ~ 1983 안양지구 축산업협동조합 이사
1981 ~ 1983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심의회 위원
1981 ~ 1983 축협중앙회 자문위원
1985 ~ 1987 농림수산부 정책자문위원
1990 경제기획원 경제난국극복위원회 위원
1986 새농민 20년사 편찬 주관
1986 ~ 1995 한국낙농경영협의회 부회장
한국종축개량협회 젖소 산유 능력 검정 농가회
1968 ~ 청렴원목장 개설
1973 ~ 의왕시(전 시흥군) 선거관리위원회 부위원장
1977 ~ 일본 북해도 아시아 낙농교류회 이사. 고문
1979 ~ 서울우유협동조합 장학위원회 위원
1981 ~ 사단법인 한국종축개량협회 이사, 부회장, 고문
1984 ~ 농협중앙회 운영자문위원
1997 ~ 국립한국농업전문학교(현 한국농수산대학) 운영위원회 위원, 위원장 1983 ~ 농협중앙회 새농민상 수상자회 회장, 고문
수상경력
1969. 농촌지원지도자 업적상(경기도 지사)
1971 농촌지원지도자 영농기술보급상(농촌진흥원)
1972 우수새마을 지도자상(국무총리)
1977 새농민상/ 과학상 (농협중앙회)
1981 5.16민족상/ 산업부문(재단법인 5.16민족상)
※기타 표창 공로패
한국종축개량협회 3회, 국제라이온스협회 7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회, 축산업협동조합 2회
아시아낙농교류회 1회 서울우유협동조합 1회
'명사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로는 장난치지 말라 (1) | 2024.07.10 |
---|---|
About sadness (1) | 2023.12.11 |
Über Traurigkeit(슬픔에 관하여) (0) | 2023.12.11 |
鲜花出席簿2 (1) | 2023.12.07 |
花出席部2 (1) | 2023.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