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 철학(命名哲學) 김진섭(金晋燮)
“죽은 아이 나이 세기”란 말이 있다. 이미 가 버린 아이의 나이를 이제 새삼스레 헤아려 보면 무얼 하느냐, 지난 것에 대한 헛된 탄식을 버리라는 것의 좋은 율계(律戒)로서 보통 이 말은 사용되는 듯하다.
그것이 물론 철없는 탄식임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기회에 부닥쳐 문득 죽은 아이의 나이를 헤어 봄도 또한 사람의 부모 된 자의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애정에서 유래하는 눈물겨운 감상에 속한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올해 스물, ――아, 우리 철현이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달픈 원한이, 그러나 이제는 없는 아이의 이름을 속삭일 수 있을 때 부모의 자식에 대한 추억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만일에 우리의 자질(子姪)들에게 한 개의 명명(命名)조차 실행치 못하고 그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을 때, 우리는 그 때 과연 무엇을 매체로 삼고 그들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법률의 명명하는 바에 의하면 출생계는 이 주 이내에 출생아의 성명을 기입하여 당해 관서에 제출해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어떠한 것이 여기 조그만 공간이라도 점령했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고고의 성을 발하며 비장히도 출현하는 이러한 조그만한 존재물에 대하여 대체 우리는 이것을 무어라고 명명해야 될까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지 않는 부모는 아마도 없을 터이지만, 그가 그의 존재를 작은 형식으로서라도 주장한 이상엔 그 날로 그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기 위해서는 한 개의 명목을 갖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두말 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듯이 아이들도 또한 한 개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만일에 그가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전연히 아무것도 아닌 생물임을 면할 수 없겠기 때문이니, 한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성장치 못한 아이의 불행한 죽음이, 한 개의 명명을 이미 받고 그 이름을 자기의 명의로서 알아들을 만큼 성장한, 말하자면 수일지장(數日之長)이 있는 그러한 아이의 죽음에 비하여 오랫동안 추억될 수 없는 사실――이 속에 이름의 신비로운 영적 위력은 누워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장차 나올 터인 자녀를 위하여 그 이름을 미리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찍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 인(人)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일군대를 적지에 파견함에 제하여 그의 병사들에게 말하되 “나는 너희에게 내 사자(獅子)를 동반시키노라!”고 하였다. 이에 그들은 수중지대왕(獸中之大王)이 반드시 적지 않은 조력을 할 것임을 확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자가 적군을 향하여 돌진하였을 때 마르코만 인들은 물었다. “저것이 무슨 짐승인가?” 하고. 적장이 그 질문에 대하여 왈 “그것은 개다. 로마의 개다!” 하였다. 여기서 마르코만 인들은 미친 개를 두드려 잡듯이 사자를 쳐서 드디어 싸움에 이겼다.
마르코만 인의 장군은 확실히 현명하였다. 그가 사자를 개라 하고 속였기 때문에 그의 졸병들은 위축됨이 없이 용감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그 실체를 알기 전에 그 이름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의 내용은 물론 그 이름을 통하여 비로소 이해될 수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이름이 그 이름으로서만 그치고 만다는 것은 너무나 애달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그 이름조차 알 바가 없다면 그것은 더욱 애달픈 일이다.
가령 사람이 병상에 엎드려 알 수 없는 열 속에 신음할 때 그의 최대의 불안은 그 병이 과연 무슨 병이냐 하는 것에 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여 그 병명이 지적될 때에 그 병의 반은 치료된 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파리라는 도회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파리라는 이름을 기억함으로 의하여 파리를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요, 사옹(沙翁)이라는 인물을 그 내용에 있어서 전연히 이해치 못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불후의 기호를 통하여 어느 정도까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예술을 알고 있다고 오신(誤信)하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많이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그 이름을 내가 잊을 때, 나는 무엇에 의하여 이 많은 것을 기억해야 될까? 모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태반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름이란 지극히도 신성한 기호다.
▶ 어휘 풀이
자질(子姪) : 아들과 조카. 자여질(子與姪)
명명(命名) : (어떤 대상을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수일지장(數日之長) :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성장한 것을 이름
장차(將次) : 앞으로. 미래의 어느 때에
적지(敵地) : 적의 세력 아래에 있는 땅
수중지대왕(獸中之大王) : 동물의 왕인 사자를 한자로 표현한 말
조력(助力) : 힘을 도와 줌. 도와 주는 힘
현명(賢明) :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
위축(萎縮)된 : 두려워서 움추림
사옹(沙翁) : 영국의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한자식 표기법
전연(全然)히 : 전혀
불후(不朽) : 훌륭하여 그 가치가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음
오신(誤信) : 잘못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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