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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57. 산촌여정

by 자한형 2021.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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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村餘情

· 成川 기행 중의 몇절 ·

이상(1935)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지도 20여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안오고 체신부()는 이따름 '하도롱'(연두)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오서 가제를 잡아먹는 ''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낌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漆夜)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 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 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주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夕刊)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煙草匣紙)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베짱이가 한 마리 등잔에 올라 앉아서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자를 쓰고 건너 긋듯이 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을 기초합니다.

그저께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구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 -- 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난계와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그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내료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버레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조로 광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소리가 이 방안을 방째 시계를 만들어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눈이 번갈아 간즐간즐 합니다. 코로 기계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금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도회에 남겨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린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버립니다.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헤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 천리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 그려!

등잔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철필로 군청빛 ''를 심어 갑니다. 불행한 인구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조밀한 인구가 --.

내일은 진종일 화초만 보고 놀리라, 탈지면에다 알콜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무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도 꿈자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 원색판 꿈 그림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러면 간단한 설명을 위하여 상쾌한 시를 지어서 7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철골전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시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이 깨입니다.하루라는 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끄지않고 잔 석유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낧은 조끼'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작야(昨夜)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입니다. 지난 밤의 체온을 방안에 내어 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 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습니다.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빛 유자가 열렸습니다. 당콩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 빛을 배경으로 하는 일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않아 있습니다. 농황색(濃黃色)에 반영되어 '세실 ·B· 데일'의 영화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치사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네쌍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갓 잎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객주집 아해에게 물어봅니다. '기상꽃', 기생화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 진홍비단꽃이 핀답니다.

선조가 지정하지 아니한 조셋트치마체 웨스트민스터 궐련(卷煙)을 감아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훈한 리그레추윙껌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기는 듯한 그 입맛 다시는 소리, 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혜원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우리가 소년시대에 보던 떨떨이 인력거에 홍일산(紅日傘) 받은 지금은 지난 날의 삽화인 기행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꼬자리에 무 시루떡, 그 훅훅 끼치는 구수한 김에 쫓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월 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 백년의 기반을 생각케 하는 넙적하고도 묵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네레이션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삐져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 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풍염(豊艶)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수척하여 가는 이 몸에 조금씩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머러스한 용적에 향기가 없습니다. 다만 세수비누에 한겹씩 한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육향이 방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팔봉산 올라가는 초경(草徑) 입구 모퉁이에 최××송덕비와 또 ××××아무개의 영세(永世) 불망비(不忘碑)가 항공 우편 포스터처럼 서 있습니다. 듣자니 그들은 다 아직도 생존하여 계시다 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교회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성역을 수만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까지도 사랑하는 신 앞에서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발길이 찬송가소리 나는 곳으로 갑니다. 포플라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를 매어 놓았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명한 동공을 들여다 봅니다. 셀룰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오브라드로 싼 것같이 맑고 총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도색(挑色)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삼정(三停)과 오악(五岳)이 고르지 못한 빈상(貧相)을 업신여기는 중입니다.

옥수수밭은 일대 관병식(觀兵式)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甲冑)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아마인빛 꼬꼬마(실 끝에 종이오리나 새털을 붙여 날리는 어린이 장난감의 한 가지)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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