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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

7. 효조

by 자한형 202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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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조(曉鳥) / 계용묵

이런 이야기를 누가 한다.

 

명필 추사(秋史)의 조광진(曺匡振)이 하루는 새벽에 일어나니, 잠자리에서 갓깨어 일어난 참새들이 뜰 앞 나뭇가지에서 재재거리는 소리에 그만 필흥(筆興)이 일어나 저도 모르게 필묵을 베풀어 새벽 새라고 '曉鳥' 두 자를 제물에 써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흥에 겨워 쓰면 언제나 만족한 글씨를 얻게 되던 것이 흥에 겨워 쓰기는 썼는데도 '曉鳥'라는 자의 맨 밑 넉 점을 싸는 치킴이 제대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로 축 처져서 심히 마음에 거슬리었다. 그래 다시는 더 거들떠보기도 싫어 문갑(文匣) 밑에다가 되는대로 밀어 던지고 말았다.

 

그랬던 것을 하루는 어떤 손님이 찾아와서 글씨를 청하므로, 다시 필흥이 생기지 않아 그것을 그대로 내어주고 말았다.

 

그런지 10년 후, 조광진이 중국에 여행 갔다가 어떤 귀족의 사랑에서 뜻도 않은 그 '曉鳥'자 치킴이 처지어 내버리는 셈치고, 그 손님에게 내어 주었던 그 글씨가 중국에서도 유명한 귀족의 사랑에 족자로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조씨는 그 자의 치킴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거슬리어 주인이 잠깐 나간 짬을 타서, 필묵을 꺼내 자의 치킴에 가획(加劃)을 하여 처진 치킴을 바싹 올려붙여 놓았다.

 

그랬더니 주인이 들어와 이것을 보고 남의 귀한 글씨에다가 손질을 해서 버려 놓았다고 꾸짖으며 노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조씨의 말이 실인즉, 그것이 자기의 글씨인데 자의 치킴이 되지를 않아서 내어버렸던 것으로, 지금 보아도 그에 마음에 거슬리어 붓을 좀 넣어 본 것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주인은 언성을 높이어 하는 말이, 당신은 글씨를 쓸 줄만 알고 볼 줄은 모른다고 하면서, 효조(曉鳥)라면 새벽 새일 테니 잠자리에서 갓깨어나온 새가 무슨 흥이 있어서 꼬리가 올라가랴. 언제나 보아도 새벽 새는 꼬리를 처뜨리고 우는 법이라, 자기가 이 글씨에 고가(高價)를 주고 사다가 머리맡에 걸고 사랑하는 것도 그 '曉鳥'라는 데 있어 자의 치킴을 용하게 처뜨린 데 가치를 찾았던 것으로 인제 아까운 글씨를 버렸다고 하면서 떼어 던지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졸작 '병풍에 그린 닭이'를 생각했다. 해작(該作)은 작자인 나에게 있어서는 열작(劣作)의 부류에 미련 없이 처넣고, 다시 한 번 눈도 거들떠보고 싶지 않은 그러한 작품인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벗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좌석에서 문학 이야기가 났을 때 나는 시인 모씨로부터 네 작품 가운데는 '병풍에 그린 닭이' 하나밖에 없느니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이 시인이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태도를 엿보았으나, 결코 그러한 의미에서가 아님을 분명히 알았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놀라며 그러할 리가 없다고 부인을 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제 작품은 제가 모르는 법이라고 하면서 작가에게는 그 '병풍에 그린 닭이'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보여도, 그래도 그 작품 하나가 지금까지 써 온 중에서 후세에 남으리라고 극언까지 한다.

 

그래도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부인하였더니, 제 작품을 제가 모르는 예는 가까이 시인 김동명 씨에게도 있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해씨(該氏)가 시집 '나의 거문고'를 출판할 때, 그 어떤 시 한 편이 심히 마음에 거슬리어 그 시집에서 빼어내려 하는 것을, 그 중 백미편(白眉篇)이 그것인데, 그것을 빼어낸다고 친구들이 아까와 해서 마음에는 없는 것을 그대로 넣어 출판을 했던 것인데, 그 후 신간평을 보면 평자마다 작자로선 빼어내려던 그 한 편을 도리어 대표작으로 들어 내세우고 평을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대개는 작자가 자작의 가치판단에 눈이 어두운 것이라고 단안(斷案)을 내렸다.

 

그러나 내 귀에는 이 소리가 조금도 들어오지 아니하고, 그저 내 작품의 가치는 내가 가장 잘 알 것만 같게 여겨진다. 언제나 읽어 보아도 '병풍에 그린 닭이'는 문장이라든가 구성이라든가 그 어느 부분 한 곳에 마음 붙는 데가 없다. 다만 그저 '병풍에 그린 닭이'라는 그 제목만이 언제나 같이 마음에 들뿐이다.

 

여기에 한 가지 궁금한 문제가 남는다. 시인 모씨는 '병풍에 그린 닭이'를 그렇게 제일이라고 쳐도, 작자인 나는 그대로 덜되게만 보여지는 데, 김동명 씨는 아직도 그 시편이 나와 같이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지, 또는 그 '曉鳥'에 대한 조광진의 심경은? 글씨는 어디까지든지 글씨요, 그림이 아니니 효()자가 붙으면 조()의 꼬리가 쳐져야 하고, ()자가 붙으면 조()의 꼬리가 올라가야 하고, 이렇게 글씨에 임기응변(臨機應變)이 있어야 할 것임이 마땅할 것은 아니나, 그 중국인의 설명을 듣고, 글씨를 떼어버리는 것을 목도했을 그때의 조씨의 심경을 좀 엿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무척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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