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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

32.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

by 자한형 2022.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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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과 성실   김 태 길 (金泰吉)

 

 

1

 

우리는 인간(人間)의 존엄성(尊嚴性)을 믿는다. 그 사람의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나 문화적(文化的) 업적(業績)에 관계 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존엄(尊嚴)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누구나 예외(例外) 없이 존엄하다고 단언(斷言)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의리(義理)나 염치(廉恥)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며,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인간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형태(形態)만 갖추었으면 누구나 무조건(無條件) 존엄하다고 주장(主張)하는 것은, 한갓 환상적(幻想的)인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견해(見解)가 아닐까? 우리가 추상적(抽象的)인 사고(思考)를 일삼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존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렴치(破廉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나 극악무도한 인간에게서 엄청난 피해(被害)를 입었을 때, 과연 그 나쁜 인간에게서 존엄하다는 것을 실감(實感)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극악무도한 사람을 상상(想像)하고 그 사람에게도 존엄한 일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몸소 겪은 극악무도한 인간에 대해서, 예컨대, 나에게 파렴치(破廉恥)하고 잔인(殘忍)한 행위(行爲)를 거듭하여 나를 크게 괴롭히고 있는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실감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실감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意味)를 가진다.

 

왜냐 하면, “인간은 존엄하다는 명제(命題)는 하나의 사실 판단(事實判斷)이 아니라 가치 판단(價値判斷)이며, 어떤 가치 판단이 타당성(妥當性)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감이 하나의 기본적(基本的)인 조건(條件)으로서 요청(要請)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인간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가정(假定)을 전제(前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肯定)하는 명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은 존엄하다.”는 뜻으로 해석(解釋)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높은 도덕성(道德性)을 발휘(發揮)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효(數爻)는 비교적(比較的) 적을 것이며, 따라서 존엄하다는 평가(評價)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도 크게 제한(制限)될 것이다.

 

실은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적(道德的)으로 높은 경지(境地)에 달()한 소수(少數)의 인격자(人格者)들은 존엄한 존재(存在)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대부분(大部分)의 사람들은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말의 뜻을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成長)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을 지녔다.”는 의미로 이해(理解)해야 할 것이다. ,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認定)을 받는 것이다.

 

만약,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한 사람들만이 존엄하다면, 그들은 인간인 까닭에 존엄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인간인 까닭에 존엄한 것이 되며, 사실상 존엄하다는 평가(評價)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極少數)의 인물(人物)들에게만 국한(局限)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할 때, 특수(特殊)한 소수의 사람들만이 존엄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님은 명백(明白)하다. 그러나, “사람의 탈만 썼으면 그가 아무리 교활(狡猾)하고 파렴치(破廉恥)하며 잔인(殘忍)하다 하더라도 존엄하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극히 위선적(僞善的)이거나 자기 도취적(自己陶醉的)인 발언(發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根據)를 인간이 간직한 어떤 가능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가능성 간직하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존엄하다는 결론(結論)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막연(漠然)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막연(漠然)한 표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좀더 분명한 설명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구절의 뜻을 보다 정확(正確)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도덕적이라는 말이 너무나 모호(模糊)하고 다의적(多義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란, 성현(聖賢) 또는 군자(君子)와 같은 뜻은 아니다. 세상 사람의 대부분(大部分)이 성현 또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우며, 또 그렇게 많은 성현과 군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도덕적 인간은 평화(平和)스러운 사회 생활(社會生活)을 위해서 요청되는 보통 수준(普通水準)의 덕성(德性)을 갖춘 사람을 가리킬 따름이다.

 

도덕적 인간이라는 말과 가장 뜻이 가까운 말은 성실(誠實)한 인간일 것이다. 절대적(絶對的)으로 성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인 또는 군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성실성(誠實性)을 가진다는 것은, 정상적(正常的) 환경(環境) 속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대개 누구에게나 가능(可能)한 일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는 평가(評價)를 받을 자격(資格)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성실성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조건(條件)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根本的) 특색(特色)의 하나는 그가 높은 차원(次元)의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事實)에서 발견되거니와, 높은 차원의 사회 생활이 가능한 것은 서로가 어느 정도 상대편을 신뢰(信賴)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서로 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성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대체 성실(誠實)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제기(提起)할 때, 우리들의 상식(常識)만으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남아 있음을 본다.

 

 

2

 

성실이란, 쉽게 말하자면 정성(精誠)스럽고 참되어 거짓이 없음을 말한다. ‘(), ()’ 두 글자 가운데서 보다 큰 비중(比重)을 차지하는 것은 ()’이며, ‘이 유교(儒敎)의 도덕 사상(道德思想) 가운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槪念)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의 개념을 깊이 다룬 유교의 고전(古典)으로서 중용(中庸)’이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중용에서는 을 단순한 윤리적(倫理的) 개념으로 이해함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개념으로 정립(定立)함으로써, 윤리(倫理)의 절대적인 바탕으로 삼을 것을 꾀하고 있다.

 

중용(中庸)’,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의 본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해석(解釋)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 첫째는, 성실을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이라고 이해한 주자학(朱子學)의 전통(傳統)을 따라서, “성실은 천지 자연(天地自然)의 이법(理法)으로서, 만물(萬物)의 실재(實在)와 생성(生成)을 좌우하는 기본 원리(基本原理)이며, 이 성실의 원리를 본받아서 진실(眞實)하고 거짓이 없어 조금도 망령(妄靈)됨이 없도록 살기에 힘쓰는 일은 인간의 도리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둘째는, 정현(鄭玄)의 해석(解釋)을 따르는 것으로서, “본래(本來)부터 성실의 경지(境地)에 도달해 있는 것은 하늘이 낳은 성인(聖人)의 도(), 수양(修養)과 노력(努力)으로써 성실의 덕()을 닦고자 힘쓰는 것은 범용(凡庸)한 일반인(一般人)의 도().”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위에 인용한 중용의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둘째 번 해석이 보다 합리적(合理的)인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중용의 다른 여러 구절들을 종합(綜合)해 볼 때, 역시 첫째 번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無難)할 것으로 보인다.

 

() 또는 성실을 천지 자연의 근본 원리(根本原理)로 보든 혹은 인간적 행위의 세계에 국한(局限)된 원리(原理)로 보든,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라고 믿는 것이 유교 사상(儒敎思想)의 전통이라는 점에는 의심(疑心)의 여지가 없다. 공자(孔子)는 지··(智仁勇)을 덕의 가장 주요(主要)한 것으로 가르쳐 왔거니와, 그 지··용의 공통(共通)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인 것이다. 유교(儒敎)에 있어서 성은 실로 인격(人格)을 완성(完成)하고 통일(統一)하는 기본 원리다.

 

()을 천지의 도()니 자연의 이법이니 하여,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관념(觀念)을 끌어들인다면, 이야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문제를 떠나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행위의 원리로서 볼 때, 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상식(常識)으로도 그 윤곽(輪廓)은 알 수 있음직하다. 쉽게 말해서,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거짓이 없음을 가리키는 개념(槪念)이다. 다만, 여기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다 함은 단순히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할 때나 자기 자신(自己自身)에 대해서나 정성을 다한다는 뜻도 포함(包含)되어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깔려 있으며, 처지(處地)를 바꾸어 남의 사정(事情)을 깊이 고려(考慮)하는 너그러움이 있다.

 

성실의 도는 결코 멀리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연의 정()’을 따라서 삼가 생각하고 삼가 행동하는 가운데에 바로 성실이 있다. 그러기에 중용에도, “도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도덕(道德)의 근본 원리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실의 길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헛되이 먼 곳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앞에 닥친 일에 관하여, 비록 그것이 사소(些少)한 일같이 보이더라도,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참되게 함으로써, 말과 행동 사이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는 것이 곧 성실을 실천(實踐)하는 길이다. ‘중용, “일상(日常) ()해야 할 중용(中庸)의 덕()을 실천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말을 삼감으로써, 행동에 부족함이 있으면 힘을 다하여 애쓰고, 말에 지나침이 없도록 힘써 조심(操心)한다. 말은 행동을 돌이켜보고 행동은 말을 돌이켜본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조심을 하고, 행동 하나 할 때마다 앞뒤를 생각하라.”는 유교(儒敎)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는 지나치게 근엄(謹嚴)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성실의 근본 정신(根本精神)이 지나치게 근엄하고 쉴 사이 없는 긴장(緊張) 속에 조심만을 거듭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感覺)으로 말한다면, ‘성실이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忠實)한 동시에 남에게도 충실한 마음의 자세(姿勢)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교적(儒敎的) 해석(解釋)을 따른다 하더라도, ‘성실의 근본(根本)진실되고 거짓이 없음에 있는 것이요, 도학자적(道學者的)인 근엄성(謹嚴性)이나 실수(失手)할 것을 두려워하는 위축(萎縮)된 소심성(小心性)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아닌 성실의 덕이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실은 참된 용기(勇氣)를 포함(包含)하는 것이며, 적극적(積極的)인 행위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유교의 지도적(指導的) 사상가(思想家)들은 성()을 지()와 인()과 용()이 그 가운데 포함되는 큰 원리로 보고, 인격의 완성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덕목(德目)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3

 

성실이란, 첫째로 참됨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셋째로는 참됨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實踐)에 옮기는 강한 용기라고도 해석(解釋)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성실을 인생의 길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라고 숭상(崇尙)해 온 것은 비단(非但) 유교 내지 우리 동양(東洋)만의 전통(傳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서 고금의 여러 나라와 여러 시대는, 각기 고유(固有)하고 특색 있는 윤리(倫理) 내지 가치(價値)의 체계(體系)를 발전시켜 왔으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체계에 있어서나 성실은 도덕적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요청으로서 숭상되어 왔던 것이다.

 

 

서양(西洋)의 윤리 사상(倫理思想)에 있어서도 성실은 올바른 인간 생활의 기본 원리로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숭상되어 왔다. 소크라테스를 위시(爲始)한 그리이스의 철학자(哲學者)들은 ()는 곧 덕()’이라 하여 참된 인식(認識)을 매우 중요시(重要視)했거니와, 그들이 말하는 ’, 즉 참된 인식은, 단순한 사실(事實)에 대한 지식(知識)을 일컫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을 위한 실천(實踐)의 지침(指針)으로서의 지혜(智慧)를 포함(包含)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도 근본에 있어서 상통(相通)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세기(中世紀)에 들어와서 서양의 사상계(思想界)를 장악(掌握)한 것은 기독교(基督敎)였으며,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덕으로서 숭상을 받은 것이 사랑믿음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사랑믿음이 성실한 마음을 떠나서 진실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그러므로, 서양의 중세 사상(中世四象)과 사회 사상(社會思想)에 있어서 놀랄 만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不拘)하고, ‘성실의 덕을 숭상하는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 내려왔다. ‘르네상스라는 정신 혁명(精神革命)을 일으킨 사상의 큰 흐름을 휴머니즘이라고 부르거니와, 그 휴머니즘의 핵심(核心)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굳센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制度)나 권위(權威) 또는 화석화(化石化)한 고정 관념(固定觀念)의 굴레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이 진실로 믿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기를 결심한 용기가, 르네상스라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 자신의 신념(信念)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곧 성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배반(背叛)하는 것보다 더 크게 성실의 정신에 어긋나는 태도(態度)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한 르네상스 이래의 시대 정신(時代精神)은 여러 가지 방면에 여러 가지 형태(形態)로 나타난다. 문학(文學)과 미술(美術)에 있어서는, 종교(宗敎)에 예속(隸屬)되어 있던 종전의 지위(地位)를 탈피(脫皮)하여, 예술을 위해서 예술에 몰두(沒頭)하는 자주적(自主的) 예술가(藝術家)들의 탄생(誕生)을 보았으며, 작가의 눈에 비친 인간과 자연을 있는 모습 그대로 표현하는 세속주의적(世俗主義的)이며 인간주의적(人間主義的)인 새로운 기풍(氣風)의 대두(擡頭)를 보았다.

 

새로운 시대 정신이 종교와 교회(敎會) 내부에서 발휘(發揮)되었을 때 이른바 종교 개혁(宗敎改革)’이라는 큰 운동이 전개되었거니와,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역설(力說)한 것은, 외면적 형식의 종교를 물리치고 내면적 양심의 종교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공통적(共通的)으로 강조한 것은, 물질(物質)로써 행하는 선업(善業)보다도 정신으로써 행하는 신앙(信仰)이 본질적(本質的)으로 소중하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새로운 움직임의 원동력(原動力)이 된 것은 역시 인간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요구(要求)에 충실하고자 하는 마음, 성실의 정신이었음이 분명하다.

 

17세기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활발(活潑)하게 전개된 대륙(大陸) 및 영국(英國)의 철학 사상(哲學思想)에서도, 우리는 역시 성실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疑心)스러운 것은 모두 배제(排除)하고, 오직 확실(確實)하고 명백한 것만을 근거(根據)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데카르트의 방법론(方法論)’에서, 그리고 생명(生命)을 위태(危殆)롭게 하는 박해(迫害)의 위협(威脅)과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를 약속(約束)하는 크나큰 유혹(誘惑)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오로지 자기의 신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서 살다가 죽은 스피노자의 생애(生涯)에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극치(極致)를 발견한다.

 

버어클리, 로크, 흄 등이 대표하는 경험론(經驗論)’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의 합리론(合理論)’과는 근본적으로 맞서는 철학(哲學)의 체계(體系)로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충실하고자 하는 정신이 유감(遺憾)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대륙의 합리론자(合理論者)들이 그랬듯이, 영국의 경험론자(經驗論者)들도 역시 확실하고 명백한 것만을 철학적(哲學的) 탐구(探究)의 발판으로 삼을 것을 꾀하였다. 다만, “확실하고 명백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관해서 합리론자들과 경험론자들이 스스로에게 준 대답이 서로 달랐던 까닭에, 결과에 있어서 그들은 크게 대립(對立)되는 두 가지의 철학 진영(哲學陣營)으로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 선천적(先天的)으로 이성(理性)에 주어져 있는 관념(觀念)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대륙의 학자들은 합리론에 이끌려 갔고, 감관(感官)에 비친 경험적(經驗的) 심상(心像)이 가장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은 영국의 학자들은 경험론(經驗論)으로 이끌려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인간 자신의 능력(能力)을 믿었고, 자신이 믿는 능력을 따라서 충실하게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려고 애쓴 점에 있어서, 모두 성실한 마음의 주인공(主人公)들이었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한층 높은 단계(段階)에서 종합(綜合)하여 근세 철학(近世哲學)을 크게 체계화(體系化)한 칸트에게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가장 뚜렷한 구현(具現)을 본다. 칸트의 철학에는 그 모든 방면에 성실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특히 그의 윤리 사상(倫理思想)에서, 그리고 그의 실천 생활(實踐生活)에서, 우리는 성실한마음의 모범적(模範的)인 구현을 보고도 남는다.

 

칸트가 실천 이성(實踐理性)의 근본 법칙(根本法則)으로서 정립(定立)네 의지(意志)의 준칙(準則)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普遍的) 입법(立法)의 원리로서 타당(妥當)하도록 행위하라.”는 가르침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과 같은 정신의 표현이요, “너 자신을 포함(包含)한 모든 인격(人格)에 있어서의 인간성(人間性)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待遇)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手段)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한 칸트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 근대 인권 사상(近代人權思想)의 근본 정신을 철학적(哲學的) 언어(言語)로써 집약(集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저 공자의 가르침이나 인권 사상은 모두 성실한 인간정신(人間精神)의 산물(産物)이며, 성실한 마음 없이 그 참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이다.

 

현대(現代)는 물량 문명(物量文明)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실(喪失)할 정도로 어지럽기 짝이 없는 시대다. 인간이 그 본연(本然)의 모습을 상실한다 함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즉 성실성을 잃는다는 뜻도 포함(包含)한다. 금전(金錢)과 권력(權力) 또는 헛된 이름의 노예(奴隸)가 되는 가운데, 인간 본연(人間本然)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대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식자(識者)들은 말한다. 그러나, 성실한 마음을 찾아보기 어려움을 걱정하는 바로 그 심정(心情) 가운데 역시 성실을 희구(希求)하고 성실을 열망(熱望)하는 마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비틀거리면서도, 현대인(現代人) 역시 마음의 깊은 곳에서는 성실을 갈망(渴望)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철학자들이 각각 자기들 나름의 관점(觀點)에서 성실의 회복(回復)을 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성실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直接的)으로, 그리고 심각(深刻)한 각도(角度)에서 다룬 사람들은 실존주의(實存主義) 사상가(思想家)들이라 하겠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한 성실(Redichkeit fidélité)’의 개념은 서양 윤리학(西洋倫理學)에서 보통 말하는 성실(veracity)’과 같은 것이 아니며, 더욱이 유교에서 가르친 ()’과는 거리가 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되고 속임이 없이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를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성실과 연결(連結)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 사상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모든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이 같은 뜻의 성실을 문제삼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강조한 역점(力點)에도 개인에 따르는 차이(差異)는 있었다. 니이체와 같이, 저속(低俗)한 물질 문명(物質文明) 속에서 대중화(大衆化)하고 평균화(平均化)하여 옹졸하게 된 인간의 현재를 초월(超越)하고, 인간 자체의 본성(本性)을 성실하게 추구(追求)하면서 병들고 오염(汚染)된 인생을 안이(安易)와 자기 기만(自己欺瞞)으로 받아들여 어물어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솔직(率直)하고 용감(勇敢)하게 극도(極度)의 회의(懷疑)와 허무(虛無)를 직시(直視)함으로써, 다시 절망(絶望)을 극복(克服)하고 참된 창조적(創造的) 인생을 되찾으라고 가르친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하이데거와 같이, 퇴폐적(頹廢的)인 일상 생활(日常生活) 속에서 평범(平凡)한 세상 사람으로 타락(墮落)해 있는 현재의 나를 단호(斷乎)한 결단(決斷)으로써 박차고 나와, 죽음을 앞에 둔 유한자(有限者) 인간으로서 무()를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본래적(本來的)인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상식(常識)과 호기심(好奇心), 그리고 모호(模糊)한 생각 등으로 인하여 가려진 비진리(非眞理)의 상태(狀態)로부터 나 자신을 탈환(奪還)함으로써 인간 내지 실존(實存)의 참모습을 그 본래성(本來性)과 전체성(全體性)에 있어서 드러내도록 하라고 역설한 철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같이, “인간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는 전제(前提) 위에서, 창조자(創造者)로서의 자유로운 판단(判斷)으로 가치(價値)의 척도(尺度)를 설정(設定)하고, 이 척도를 따라서, 추악(醜惡)하고 타락(墮落)해 있는 현실을 적극적(積極的)참여(參與)’로써 성실하게 개조(改造)하라고 호소(呼訴)한 사상가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셀과 같이, 나와 나 자신, 나와 너, 나와 신()이 서로 교제(交際)하는 공동적(共同的) 참여 속에서 내가 바치는 성실(fidélité)’의 정도를 따라서 존재(être)’의 정도가 좌우된다고 전제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기울여 헌신(獻身)해야 할 절대자(絶對者)인 신에게 성심(誠心)과 성의(誠意)를 다하여 대할 때 신이 내 앞에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宣言)하여, 성실한 신앙으로써 참되고 영원(永遠)한 희망(希望)을 찾으라고 설교(說敎)한 스승도 있었다.

 

이와 같이, ‘성실성을 힘주어 주장한 실존주의자들이 마음 속에 형성했던 성실의 개념(槪念), 그들의 철학(哲學) 내지 인생의 문제를 바라본 각도의 차이(差異)에 따라서 개인적인 차이를 가졌으나, 그들의 사상의 바탕에는 뚜렷이 일치(一致)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었다. 돈과 기계(機械)와 헛된 이름으로 병든 물량 문명(物量文明) 속에서 타락하고 속물화(俗物化)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우리 인간이, 솔직(率直)한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반성(反省)하고 용감한 결심으로 바른 길을 선택(選擇)하여, 인간다운 인간 본연(人間本然)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성실하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역설한 점에 있어서는, 그들의 가르침은 하나의 공통된 흐름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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