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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

146. 흰나비

by 자한형 2022.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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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나비 / 김동리

어느 날 대낮에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뜰로 날아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얀 박꽃이 번져 나가듯 뜰 안을 펄펄펄 날아다녔다. 그 때 집 안은 절간 같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내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금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뜰에는 이미 녹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본래 수풀을 좋아하여 내가 집을 가진다면, 한 백 평 가량은 울창한 수풀이 우거지게 하려고 생각하여 왔다. 위는 나뭇잎이 어우러져 하늘을 가리고, 아래는 찔레와 칡덩굴이 엉켜서, 그 속이 천고의 비밀을 감춘 듯한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다 가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래부터 그렇게 유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뜰을 장만하고 집을 이룩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풀을 가진 집이라고는 여지껏 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돈이 있대도 그러한 수풀을 집 안에 가지기란 수십 년의 적공을 요할 터인데, 50이 가깝도록 이 모양인 나에게 그러한 꿈이 실현되기란, 참으로 너무나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건만, 나는 아직도 그러한 나의 꿈을 포기한 적은 없다(나에게는 이밖에도 이러한 꿈이 몇 가지 있다). 이것은 엉뚱하고 데퉁스럽게 낙천적인 나의 성격에 기인하는 바 크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이 상상할 수도 없는 희망과 자신과 자부가 넘치고 있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한 막연한 희망과 자신들이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 나는 우연히 그러한 나의 꿈의 한 조각이 이루어진 듯한 집을 하나 얻어들게 되었다. 앞뜰이 넓은데다 나무가 꽤 많다. 가위 거목이라고도 일컬을 만한 은행나무가 네 그루요, 거의 그만한 크기의 잣나무와 그보다는 좀 작으나 정원목으로서는 보기 드물 만큼 큰 편인 단풍나무가 네댓, 그리고 역시 그러한 라일락이 몇 그루, 이 밖에 소나무. 향나무. 밤나무. 매화나무, 등나무, 포도, 찔레, 개나리들도 의외로 어우러져 있었다.

이 나무들이 모두 그렇게 화려한 꽃을 달지는 못하지만, 잎들은 심히 무성하여 그 푸르름이 바야흐로 성하 염천을 물리치리만큼 뜰에 가득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오랫동안 수풀에 주려 온 나의 두 눈에 싱그러운 기쁨과 위안을 던져 주었다.

나는 온종일 대청에 나와 앉아 뜰을 내다보고 있다.

대낮은 고요하다. 복중이 돼서 그런지 숨이 막힐 듯한 고요다. 햇빛이 강렬할수록 나무 그늘은 더욱 짙다.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이 햇빛을 전부 강물로 만든다. 나는 끄덕끄덕 졸면서도 그냥 뜰에 가득 찬 푸르름을 안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어느 순간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흰나비 한 쌍이 난데없이 날아든 것은...

뜰에 가득 찬 녹음이요, 숨막힐 듯한 고요 속이었기 때문에 흰나비의 흰 빛깔은 더욱 눈에 띄었고, 그것은 마치 어떤 '의미'에 도전하는 상징과도 같은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흰 햇빛은독수리 날개를 꺾고

이것은 내가 20여 년 전에 쓴 "표박 행로음"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가장 순수한(혹은 내적인) 경험으로써, 내가 가장 희다고 느낀 것은, 이 시구의 그 '독수리 날개를 꺾은' 햇빛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한다. 나는 그 때부터 '도의 광휘'는 이렇게 눈이 부시도록 흰빛이거니 생각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은 태고로부터 흰 빛깔을 숭상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옷 빛깔을 보아도 곧 알 수 있는 일이다. 요즘의 양복은 외래복이니까 별도지만, 우리의 재래복은 신통하리만큼 일색으로 희다. 무색옷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린애들이나 그 밖에 특수한 경우에만 착용되는 것이고, 정상 상태는 언제나 흰 빛깔이다.

 

여기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최초에 흰 빛깔을 택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째서 흰 빛깔이 택해졌는가? 흰 빛깔엔 어떠한 뜻이 있는가?흰 빛깔이 우연히 택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설령, 우연히 택해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오랫동안 지지되고 계승된 데는 우연 이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최남선 씨의 "고사통" 첫머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아득한 옛날에 대륙의 극오부를 출발하여 동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일 집단이 있으니, 그의 향하는 바는 일출처의 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네는 스스로 '붉은'이라 하니 신명의 자손이란 의미요, 후에 한자로 ''''이라 쓰고 백을 다시 '', ''으로 고쳤다. 백민은 천을 신계로 하고, 태양을 천주로 숭배하고, 대산을 인간과 천상과의 교통로로 생각하고, 천주는 하계를 감시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그 아드님을 강림시키는 것을 믿는 백성이었다. 동으로 전진하는 동안에 여러 곳에 천산 또 신산을 정하고 한참씩 머무르다가 마지막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곳에 있는 거룩한 대산에 이르러 천주의 신도가 여기 있다 하고서 그 주변에 안주할 땅을 이룩하고, 여기저기''이란 것을 만들고 있었다. ''은 한편 '부유' '부여'라고도 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서 질서 있게 사는 바닥을 일컫는 말이었다. ''의 큰 것에는 '나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최초의 흰 빛깔을 택한 것은 어느 개인이기보다 '집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단은 '태양을 천주로 숭배했다'고 하니 광명을 신명시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 빛깔은 신명의 빛깔이요, 도의 빛깔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지하기 어려운 흰 빛깔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되며 계승되어 온 소이인 것이다.

 

흰 빛깔이 밝음을 뜻한다면 검정 빛깔은 어둠을 뜻한다. 어둠과 밝음이 상극적인 것처럼 흰빛과 검은빛도 빛깔의 양극이다. 흰 빛깔이 모든 빛깔의 바탕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말살을 뜻한다. 흰빛이 모든 빛깔의 모체라면 검정은 모든 빛깔의 죽음을 가리킨다. 흰 빛깔이 삶이라면 검정빛은 죽음이요, 흰 빛깔이 희망이라면 검정빛은 절망이요, 흰 빛깔이 순결이라면 검정빛은 오탁의 극이다.

 

우리 조상은 왜 '붉은'에서 신을 발견하고''를 느꼈을까? 이것은 그 성격이요 생리요 운명이었으리라.

 

'붉은'''의 이름이요, ''은 그 빛깔이다. 따라서 흰 빛깔을 숭상하는 한민족은, 그 성격과 그 생리와 그 운명에 있어, 광명의 민족이요, 순결의 민족이요, 희망의 민족이요, 명랑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위에서 '나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나는 막연한 희망과 자신에 차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이것은 내 핏줄 속에 조상의 '붉은'이 흐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저 뜰에 박꽃이 번져 나가듯 펄펄펄 날고 있는 흰나비야말로 내 젊은 날의 시구 '흰 햇빛은 독수리 날개를 꺾고''흰 햇빛'의 한 조각 또는 그 '독수리 날개'의 한 부스러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바도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이 처음으로 외치던 '붉은'의 한 조각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 뜰에는 강물을 퍼붓듯한 눈부신 햇빛과 푸른 나무 그늘이 대낮의 고요를 겨루고 있다.흰나비, 나의 손님이여! 너를 맞이하는 나의 미소 속에 너는 마음껏 나의 뜰에서 날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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