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의 수용 박경리
창조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며, 그것은 풍요하게, 자유롭게 생각하는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창조란 어디서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암중모색에서, 보이지 않는 곳, 확실치 않은 것을 향한 추구와 탐험에서 새로움은 싹트는 것이며 이미 되어진 곳, 즉 틀 속에서는 복제품만이 가능해진다. 모르는 것, 보이지 않는 곳은 사사오입을 당해버린 부분이지만 측량할 수 없는, 그러니 실존하는 세계인데, 논리가 서지 않는다 하여 인정치 않으려는 이성이야말로 교만한 자가당착, 모순에 빠져 있다 할 것이다. 인위적 모순은 깨야 하고 미지로 향하는 것이 창조의 출발이다.
일상적인 비근한 것에서 떠난 뒤 모순을 생각해보면 논리의 왜소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선 공간의 확대, 그러니까 틀이 없다는 것에서 우주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고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다는 모순은 막다른 곳인 동시에 규명할 수 없고 하나가 아님에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는 모순이다. 규명할 수 없고 막다른 곳이며 선택할 수 없다. 막연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둘러싸고 보이지 않게 작용하며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끌어들일 수 있고 어떠한 것도 끌어낼 수 있다는 구심력과 원심력 역시 모순인데, 그러나 지구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주 공간에 떠 있을 수 있은 것이다. 생명 일체는 공동체인 동시에 개체라는 것도 그렇다. 그것은 생명의 갈등이며 역사의 갈등이다. 한 몸속에서 다른 것과 합치려는 안타까움이 있고 다른 것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몸부림이 있다. 다시 말해서 소속감은 사랑일 수도 권력 지향일 수도 있지만 외로움에서 탈출하려는 소망으로서 의무와 자기희생을 치러야만 한다. 반대로 자유에 대한 갈망을 해방에 대한 욕구다. 그러나 외톨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한데 왜 그것은 갈등일까. 생명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며 그 어느 것도 완전치 못하고 규명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에는 방종이 따르고 통제에는 억압이 따르고, 이 두 가지 원형질이 서로 교체되며 물결같이 곡선의 연속을 이루는 것이 역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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