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전체 박완서
며칠 전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여름나기를 힘들어하는 체질 때문에 감히 열대지방을 여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평소
흉허물없이 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일행이 된다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 못 가보지 싶어 따라 나서게 되었다. 늙어갈수록 여행에 대한 매혹도 현저하게 감퇴하는 걸 느낀다. 집 떠나자마자 그날 밤부터 기껏 집에 갈 날이 며칠 남았나, 그것부터 꼽고 있는 자신을 마치 남의 일처럼 한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호기심보다는 무사안일 쪽으로 기울게 되는, 스스로 동정받아 싼 나이다. 그런 주제에 힘들 것이 뻔한 여행을 할 용기를 낸 것은 앙코르와트와 킬링 필드에 대해 얻어들은 게 둘 다 인간이 한 일 같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강한 의문부호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열대지만 그곳도 계절적으로는 겨울이라는데 아침저녁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지만 오후 두세 시간은 호텔방에서 휴식을 취해야 할 만큼 습기 차고 더웠다. 운 좋게도 운명적으로 캄보디아 역사와 문화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일 정도로 해박하고 열렬한 가이드를 만나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도처에 열대식물이 우거지고 색깔 짙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도 유난히 부겐빌레아가 눈에 띄었다. 이름 모를 열대식물 가운데 그 꽃만은 이름을 알기 때문에 반가웠나 보다.
20여 년 전 잠시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 꽃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화분에서나 겨우 몇 송이 볼 수 있는 그 꽃이 그곳에서는 담장 전체를 진홍색으로 뒤덮을 정도로 극성맞고 무성한 게 신기해서 이름을 알아놓은 거였다. 캄보디아에선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고, 캄보디아의 모든 것을, 극도의 가난까지도 깊은 애정으로 감싸듯이 희망적으로 소개했던 가이드가 부겐빌레아에 대해서만은 꼴도 보기 싫은 지겨운 꽃이라고 인상까지 쓰는 것이었다. 가이드가 그 꽃을 혐오스러워하는 까닭은 전혀 향기가 없을뿐더러 사계절 피고 지는 걸 멈추지 않으니 언제 어디서나 줄창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는 일이 없어서 지겹다는 소리를 들으며 캄보디아 사람보다 더 캄보디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이드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하는 말 속엔 지는 꽃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며 있다. 안타깝지 않은 게 어찌 사랑이겠는가.
베트남까지 포함해도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짧은 여행이었는데 인천공항에 내리니까 한국은 겨울이라는 게 잘 믿기지가 았았다. 열대에서 입고 있던 옷 위에다 긴팔 윗도리 하나만 더 걸치고도 별로 추위를 못 느낄 정도로 날씨가 포근한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차가 긴 강변북로를 벗어나 구리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전지한 가로수가 나타났다. 평소 무자비할 정도로 뭉턱뭉턱 전지한 가로수를 꼴보기 싫어했는데 하나같이 박수근이 그린 겨울나무들이 거기 나와 서 있는 것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전지한 가로수들이 그렇게 잘생겼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우리 마당의 나무들은 하나도 전지를 안해주었다. 다들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작은 소나무 두 그루만 빼면 텅 빈 것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마당이다. 마당을 바라보는 맛에 실내를 꾸미는 일엔 전혀 신경을 안쓰고 사는지라 겨울에 손님이 오면 자랑할 게 없어서 곤란해지곤 한다. 그래서 일년 중
가장 볼 게 없을 때 오셔서 어쩌나, 괜한 군소리를 하면서 저 나무는 살구나무, 저 나무는 라일락, 저 나무는 자두나무, 저 나무는 앵두나무 하고 앙상한 나무들의 과거의 영화나 부풀려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볼품없다고 생각한 나목들이 안 본지 며칠이나 된다고 어찌나 의젓하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저거야말로 나무의 진면목이구나 싶은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잎과 꽃과 열매까지 포함해야 나무의 전체가 되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것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목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게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게 거침없이 당당하고 늠름해 보였다. 나무의 맨몸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꽃이나 잎은 한낱 가식이나 방편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부질없게 여겨졌다. 사람도 만일 일생 쓰고 살던 위선이나 허위를 떨어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을까. 남는 것이 있기나 할까.
며칠 전에는 밤에 눈이 조금 오고 나서 새벽에 기온이 급강하했다. 우리 마당의 나무들도 앞산의 나무들도 메마른 가장귀마다 눈꽃이 피어 황홀한 별천지를 연출했다. 기온이 뚝 떨이지면서 가지마다 수증기가 희게 얼어붙어 생긴 눈 꽃은 마치 나무가 스스로 피워낸 꽃처럼 섬세하고 순결하다.
그러나 환상적인 은빛세상은 한나절을 못 버티고 능선을 따라 봉우리 쪽으로 총총히 올라가버리고 마을과 숲의 나무들에는 흔적도 안 남겼다. 그러나. 그게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당분간은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간결한 나무의 진면목에만 매혹당하고 싶다.
오늘은 어제 일기에서 알려준 대로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다. 어디선지 검은 비닐봉지가 죽은 새의 깃떨처럼 날아왔다가 담 밑에서 시름없이 뒤채고 있고, 밤나무 숲에서도 작년에 미처 떨구지 못한 남은 잎들이 불안에 떨 듯 와삭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잎을 다 떨군 우리 마당의 살구나무는 하늘 향해 쭉쭉 뻗은 가장귀들이 미동도 안한다. 저 나무가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변화무쌍하던 그 나무일까. 만개했을 때는 온 동네를 바람나게 할 것처럼 향기롭고 화려하던 꽃, 누런 살구를 한 가마도 더 떨구던 그 다단성, 미풍에도 오묘하게 살랑이던 무성하고 예민한 잎새들, 느릿느릿 물들다가 우수수 서글픈 소리를 내며 서둘러 지던 낙엽, 그런 것들이 과연 저 나무가 한 짓이었을까. 믿기지 않으니 혹시 저나무가 꾼 꿈이 아니었을까. 살구나무 옆에 올망졸망한 작은 나무들도 흔들림이 없긴 마찬가지다. 한때는 제각기 영화로웠던 나무들이다. 한때의 영화는 속절없이 가버렸고, 속절없이 가버린 것은 나의 군더더기일 뿐 전체는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마지막 남은 전체는 한 점 흐트러짐도 흔들림도 없다. 나무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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