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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3.백자이제

by 자한형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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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이제 김상옥

()이 받쳐 든 술잔

여기 술잔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술잔은 적어도 백유여 년(百有餘年)을 창공(蒼空)에 높이 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언제까지나 떠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정말 술잔이 창공에 떠서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떠 있는 바에야 어찌하랴. 일찌기 이 땅에 한 무명 도공(無名陶工)이 있어, 그 도공(陶工)의 슬기가 능히 이러한 이적(異蹟)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鮮然)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술잔은 정작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는 그 무명 도공이 나고 살고 또 죽고, 그리고 죽어서 묻혀 있을 그 어느 외딴 산골짜기의 흙임에 틀림없다. 종생(終生)토록 고된 노역(勞役)으로만 다루어진, 그 곰의 발같이 생긴 무디고 억센 손, 그 손으로 이 흙을 빚어 구워낸 것이 바로 이 백옥(白玉)보다 흰 술잔이다. 아니, 차라리 희다 못해 눈이 시리도록 연푸른 술잔이다.

이러한 도자(陶瓷)의 빛을 애도가(愛陶家)들은 영청(影靑)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그냥 희거나 그냥 푸른 빛이 아니라, 오직 푸르름의 잠영(潛影), 푸르름의 그리메가 다시 그늘져 비쳐 있는 빛이다!

이렇게 희고 푸른 영청(影靑) 빛을 살리자면 어떻게 하랴? 그것은 파란 하늘빛이 노상 서리고 배어 있을 저 동방의 서조(瑞鳥), ()의 날개를 새길 수밖엔 없다. 드디어 도공(陶工), 아니 그 이름 없는 명장(名匠)은 잔받침에 두 마리 학을 새겼다.

목과 부리는 입체적(立體的)인 도법(刀法), 날개는 음양각(陰陽刻)에 투각(透刻)까지 겸()했다. 그 솜씨도 자못 빼어나 학과 같이 청수(淸秀)하다. 암놈은 목을 휘어 수놈의 다리 위에 얹고, 수놈은 또 암놈의 뻗은 다리 위에 그렇게 서로 목을 휘었다.

아예 인위(人爲)란 모르고 오히려 한 자연(自然)으로 살아온 도공, 그는 그가 태어난 골짜기의 흙을 파서 그 골짜기의 물로 빚고, 그 골짜기의 나무를 찍어 구워 낸 것이기에, 정녕 미()도 미()한 줄 모를 만큼 그저 그대로 자연스럽다. 그가 언제 미를 배웠으며 또 미를 익혔으랴. 그러나, 어찌 미를 모르고서 이같이 지묘(至妙)한 의장(意匠)을 구상(構想)해 내었을까? 인색한 일인(日人)들은 이를 그냥 우연의 소산(所産)’이라 한다. 설령(設令) 우연이라면, 그 우연은 누가 닦고 누가 가꾼 우연이란 말인가?

받침으로 새겨진 학()은 또 그냥 있지 않다. 좌우(左右)에서 마주 보며 활짝 죽지를 펴고 있다. 그리고 또, 펴고만 있지 않고 저 끝없는 창공(蒼空)을 향하여 하냥 날고 있다.

이렇게 날고 있는 두 마리 학의 날개는 말할 것도 없이 오직 한 개의 술잔을 받쳐 들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이 술잔은, 가령 술상 위에 놓였거나, 또 누가 들어서 뉘게 권작(勸酌)하거나 해도, 이미 학을 받침하고 있는 바에는 분명히 어느 심령(心靈)의 하늘을 날고있다 하리라.

예로부터 학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 학이 하늘로부터 술을 실어 온다면, 아니, 어떠한 술이라도 이 잔()에 한 번 담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장수(長壽)를 축복(祝福)하는 불로(不老)의 선주(仙酒)! 또 하늘로부터 술을 긷는다면, 이 술잔은 그대로 끝없는 설화(說話)의 샘을 길어 올리는 선녀(仙女)들의 두레박! 이미 내게는 이 술잔으로 장수를 빌어 드릴 어버이도 없고, 나 또한 일적불음(一滴不飮)이라 대작(對酌)할 친구(親舊)도 없다. 그러면서 연전(年前)에 이것을 사서 내내 수장(收藏)하고 있다.

문갑(文匣) 위에 놓인 이 술잔은 이제 술을 마시는 그런 연모가 아니다. 갈수록 속진(俗塵)에 물들어 가는 마음, 이제 그런 마음을 세례(洗禮)하는 하나의 조촐한 정기(淨器)이다.

알같이 생긴 연적(硯滴)

조선 시대(朝鮮時代) 자기(瓷器) 중에 그 생김새의 종류가 많기로는 아마 연적(硯滴)을 두고 달리 당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각형(四角形), 육각형(六角形), 팔각형(八角形), 원형(圓形), 그 둥근 가운데도 떡 모양(模樣)이 있고, 또 중심(中心)이 뚫린 환형(環形), 곧 또아리 모양이 있다. 물형(物形)으론 복숭아 모양, 고기 모양, 새 모양, 두꺼비 모양, 그 밖에도 지붕 모양, 초롱 모양, 부채 모양, 무릎 모양 등, 별의별 것이 다 있다.

골동(骨董)을 수집(蒐集)함에 있어서도 벽()이 있어, 어느 분은 병()만을 모으고, 어느 분은 사발이나 대접 같은 주방(廚房) 그릇들을 모으고, 또 어느 분은 문방구(文房具), 그 문방구 중에도 필통(筆筒)이나 연적만을 따로 모으는 기호가(嗜好家)들이 더러 있다.

내게도 네모꼴에 청화(靑華)로 보상화문(寶相華文)을 그린 것이 하나 있고, 원형에 호접(胡蝶) 한 쌍을 역시 청화로 그린 것이 있다. 이들 둘이 다 연대(年代)도 얕고, 그나마 네모꼴은 입이 깨어져 도무지 실용(實用)으론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미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마침내 조그만, 신라(新羅)의 도금불(鍍金佛) 하나를 구해서 그 위에 올려 놓았더니, 아주 안성마춤 잘 어울린다.

이제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연적이 불상(佛像) 받침으로서 더욱 값진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쇠붙이와 조선 시대의 질그릇! 이것이 천여 년 을 격()한 오늘, 어느외로운 문인(文人)의 서실(書室)에 와서 그 연분(緣分)의 기나긴 실끝이 이토록 맺어질 줄이야! 이리하여, 이 신라불(新羅佛)은 조선조(朝鮮朝)의 꽃무늬를 깔고 나의 방 안을 항시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호접(胡蝶) 무늬 있는 것은 빛깔은 그리 좋지 않지만, 금 간데 하나 없이 완전하다. 이것은 몇 해 전 어느 골동(骨董) 가게에서 거저 얻은 것인데, 노상 책상에 놓였다가 벼루에 물방울을 떨구는 제 본래의 타고난 구실을 아직도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

요 며칠 전, 어느 고물(古物) 가게를 지나다가 나는 또 담청(淡靑)을 곁들인 무릎 모양의 백자 연적(白瓷硯滴)을 하나 샀다. 그러나, 이도 입이 깨어졌다. 이것을 때우려는 데 그 조그마한 입을 때우는 품삯이 이 몸뚱이 전체를 산 값보다 더하다.

얼른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사람도 만약 입이 없고 몸만 있다면 폐물(廢物)이 되고 말 것이니, 연적(硯滴) 또한 이와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때우는 데는 먼저 몸에 밴 때를 뽑아야 한다 하기에, 때를 뽑으려고 탈지면(脫脂綿)에 과산화수소(過酸化水素)를 묻혀 환부(患部)를 온통 싸 두었었다. 과산화수소는 환부를 소독(消毒)하는 약()이지만, 자기(瓷器)의 상처(傷處)에서 때를 뽑는 데도 그만이다. 나의 이러한 거동(擧動)을 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웃는다. 꼬마놈은 방 안에서 병원(病院)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지면(脫脂綿)을 들어 보고 마음을 죄어도 때는 좀처럼 빠지지 않더니, 하루는 거짓말같이 말갛게 때가 빠졌다. 이것을 맑은 물에 헹구어 내어 화대(花臺)로 쓰는 소반 위에 올려 놓았었다. 소반의 검은 칠() 빛과 이 담백(淡白)의 연적(硯滴) 빛이 서로 대조(對照)되어 더욱 희고 더욱 검게 보인다. 더구나 형광등(螢光燈) 불빛 아래 이 볼록한 무릎 모양의 연적을 보고 있노라면, 홀연(忽然)히 어느 끝없는 환각(幻覺)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윽고 곁에 앉았던 딸애가,

사람의 발자국이 아직 한 번도 닿지 아니한 어느 먼 심산 유곡(深山幽谷), 그 깊숙한 숲 속에 이름 모를 백조(白鳥)가 있어, 그가 품었다가 놓아두고 간 신비(神秘)한 알과 같다.”

고 하며, 제법 그럴싸한 환상(幻想)의 날개를 펼쳐, 그 비경(秘境)에 혼자 찾아든 양 조용한 경이(驚異)의 표정(表情)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내는 독백(獨白)으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뇌며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딸의 환상에 또한 딸애처럼 경이의 눈빛으로 못내 흐뭇해했다.

사실, 이 연적(硯滴)은 구만리 장천(九萬里長天)을 난다는 저 대붕(大鵬)의 알은 아니라 해도, 거위나 백조의 알보다는 조금 크고, 타조(駝鳥)의 알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다.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물을 머금고 배 앝는 두 개의 구멍이 있을 뿐, 이 수수께끼 같은 단순(單純)한 형태(形態),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닌 지난날의 어느 도공(陶工)이 그 천명(天命)에 순종(順從)하던 마음을 태반(胎盤)으로 하여 낳은 한 개 무념(無念)의 알, 백자 연적(白瓷硯滴)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