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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30. 이게 낙 아인기요

by 자한형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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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낙 아인기요/ 김열규

조금은 이른 오후, 나는 뒷산을 향해서 오르고 있었다. 야트막한 비탈에 펼쳐진 밭 새로 난 오솔길은 눈부신 햇살과 어울려서는 바람이 상쾌했다.

하지만 글인가 뭔가를 쓰다가 지쳐 있는 머릿속은 계속 찌푸드드했다. 책상 앞에서 풀리지 않던 생각이 내처 꼬이고 들었다. 발걸음도 절룩대듯 가볍지 못했다.

글의 제목은 그런대로 잡혔지만, 내용을 두고는 갈팡질팡하고 있던 참이라, 머릿속에서 비틀대기만 하는 줄거리가 발걸음에 족쇄를 채우고 들었다. 말이 산책이지 고행이었다.

땅이 꺼지라고 한숨이 나도 모르게 토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발걸음을 돌리기도 뭣했다. 뒷산에 올라서 우거진 솔밭 새를 거니는 것은 온전히 습관이 되고 버릇이 되어 있었기에 그 타성에 밀려서라도 오던 길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거의 거의 억지 부리기로 걸음이 내디뎌졌다. 머릿속에는 쓰다만 글의 문제가 비트적댔다. 기왕 중도에 내던 것, 미련은 두어서 뭣하겠느냐고 머리를 문질러댔다.

그렇게 걷는 둥 마는 둥 얼마를 걸었을까? 기분 같아서는 몇 자국은커녕, 몇 뼘 될까 말까 간신간신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길옆 채마 밭 가운데 웬 할머니가 웅크리고 있었다. 거북이나 자라가 아닌가 싶도록 허리는 굽힐 대로 굽히고 머리는 땅에 박다시피 하고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잡초를 뽑는 호미질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등에 어린 햇살이 별나게 거칠었다.

그런 이웃집 할머니를 보자니 눈이 아팠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여의어 보내고, 혼자 살이를 하고 있는 독거노인에게 함께 일할 손길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러다 보니, 노상 외로움에 찌들려 있다. 폭삭, 허물어지다시피 한 초라한 집, 낡은 짚단이 무슨 쓰레기 더미처럼 이어져 있는 지붕이 반이나 내려앉은 그 초가집에는 언제나 인기척이 있을 턱이 없다.

그런 몰골로 겨우 겨우 목숨 부지하고 있는 할머니다. ‘죽기 못해 산다고 하는 그 혼잣말이 남달리 가슴 아리게 하는 할머니다.

어쩌다 골목 안이나마 바깥나들이를 할 때면, 카트라고 하는 작은 손수레에 의지해서는 간신히 발을 옮겨놓을 때면, 의지가지 없는 삶이란 저런 것인가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할머니가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한참을 지켜 본다. 내가 지척에 다가선 것도 모르는 채로 호미질을 계속하고 있다.

어쩌자는 걸까. 혼자 입에 뭘 어쩌자고, 적지도 않은 밭에 채소를 갈고 있는 걸까? 가뭄에 콩 나듯이 들렀다 가는 자식들 손에 들려서 보내자는 걸까? 그나마 어미 마음이 달래지곤 하는 때문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할머니의 일손이 더 한층 힘들어 보인다. 밭고랑에 묻히듯이 쪼그리고 앉은 것만으로도 괴로울 텐데, 흙을 찍는 호미질이 별나게 무거워 보인다.

나는 할머니가 겪고 있을 괴로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곁으로 다가서서는 헛기침으로 알은 체를 했다. 그리고는 말을 걸었다.

할머니 고생하십니다.”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란 탓일까.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제법 동그란 채로 할머니가 한숨 쉬듯이 던진 한 마디.

이게 다 낙 아인기요.”

서울말로는 이게 다 낙 아닙니까라고 하는 그 말 한 마디.

나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했다.

고생이 곧 낙이라니, 그것은 예사 모순어법이 아니다. 고생과 낙은 서로 등지고 따돌림하고 있는 것인데 그 둘이 한통속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배워서 된 게 아니다. 머리로만 짜낸 것도 아니다. 온 평생 몸소 익혀서 눈치챈 것이다. 온몸으로 온 인생으로 비로소 알아차린 인생철학이다. 땀과 고통이 빚어낸, 흙기운 저릴 대로 저린 인생철학이다.

그것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책 좀 읽고, 글 좀 쓴다고 쓰다가는 막힌 것을 괴로움이랍시고 피해서 도망 나온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문득 발길을 돌렸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자판 두들기는 것이 낙이 되기를 바라고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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