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37. 그 둠벙의 아홉째 날

by 자한형 2022. 1. 23.
728x90

그 둠벙의 아홉째 날/ 배정인

비가 그쳤다. 활짝 갠 여름 아침의 파란 하늘은 황진이의 볼처럼 싱그럽다. 묵은 더께가 말끔히 씻겨진 사바 세계를 내려다보는 해님도 말갰다.

모심기 때는 물 부족으로 이웃간에도 얼마나 아웅댔던가. 아랫배미의 둠벙엔 물이 그득히 배를 내밀고 있다. 둠벙 두렁을 누군가가 한 뼘쯤 터놨다. 그리로 물이 태평하게 흘러 나간다. 얼굴이 뿌연 햇물이다. 두렁 가 쑥개쑥돌피바랭이풀잔디개열퀴, 그들도 쫑긋쫑긋 귀를 세우며 반신욕을 즐긴다.

개구리들이 놀이를 나왔다. 어디서 언제 모여 들었는지 큰놈 작은놈, 올챙이 꼬리를 갓 뗀 듯한 어린 것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햇물에 몸을 담그고 노동에 찌들은 피로를 해갈하면서 흥감에 빠져 있었다. 네 다리를 헤벌레 풀어놓고 침을 흘리며 건너 편 여인을 바라보는 놈도 있고 풀섶에 몸을 살짝 비끄러매고는 턱밑을 볼록거리며 머언 상상에 빠져 있는 녀석도 있었다. 하나같이 퉁방울 같은 눈에 휴식을 심어놓고 물 위에 한가히 떠서 삶을 표류시키고 있었다.

엊그제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한 왕초는 기분이 썩 좋았다. 논둑에 엉덩이를 붙인 채 시름을 다 잊어버린 황홀한 무아경을 즐기는 꼴새가 마냥 한가한 바다의 부표 같았다. 그 태평한 세상이 왕초에게는 제법 심심하였다. 그들의 그런 휴식을 보면서 지도자답게, 저들의 저 평화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하여 잠시 고민하였다. 덕택의 원천은 당연히 지도자일 것이었다. 그런 만큼 한걸음에 달려와서 머리를 조아리거나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고 업어주려 해도 시원찮을 일인데, 저들은 하나같이 못 본 척 꼴로 있으니. 아무래도 섭섭하였다.

왕초는 그 평화로운 시간이 불안하였다. 조용함에는 잠시를 못 견뎌 사달을 내고 화를 지르는 게 민초들의 속성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뻗었다. 심심한 대중은 언제 터질지 모른다. 그들의 한가는 무언가 엉뚱한 생각을 하게 할 것이다. 무슨 꿍꿍이를 꾸밀지도 모른다. 날마다 살이에 바빠야 할 것들이, 먹고 사느라 정신 없어야 할 것들이, 그래야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테다.

정치하는 놈현들이 괜히 축제니, 각종 운동경기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 민초들의 호주머니를 긁어내는 줄 아나? 저것들이 얼을 차리면 혁명이 일어난단 말이야. 알갔어?”

정상배 교수박사께서 그러지 않았던가.

왕초는 둠벙에 뛰어내렸다. 텀벙, 물이 소리를 쳤는데도 부러 그러는지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꼬꾸랑못이 울대에 걸렸다. 아닌 척 두렁에로 올라섰다. 알 밴 바랭이 한 줄기를 뽑아 들었다. 부드럽고도 배가 제법 불룩하고 튼튼한 바랭이었다.

장난처럼, 숨을 죽이고는 바랭이 끝으로 휴식중인 개구리의 코를 간질었다. 녀석들은 왕초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풀잎이 코 끝에 닿으면 슬그머니 자맥질을 해 버리는 것이었다. 어떤 녀석은 왕초가 다가가면 일찌감치 자리를 떠나버린다. 귀찮다는 듯이 물밑을 건너 저편 둑 가로 피해갔다.

첨엔 그도 슬쩍 피하긴 했다. 다만 녀석들처럼 겁먹는 기색이 없었다. 자맥질로 달아나지도 않고 그저 얼굴을 돌릴 뿐이었다. 왕초는 그게 재밌었다. 무료한 시간을 메꾸어 줄 장난상대를 찾은 것이다. 실삼스럽게 그를 따라다니며 깐죽거렸다. 웬일인지 그가 움직이지 않았다. 대가리를 빳빳이 들고 망부석이 된 듯이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코를 간질어도 재채기 한 번을 하지 않았다. 마치 내기를 하듯이.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다. 바랭이 끝이 코끝을 지나 코 안으로 글어가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이것 봐라. 재채기도 안 해?’

왕초는 열심히 그의 코에다 바래기를 비볐다. 나중에는 팔이 다 아팠다. 어디든지 한 군데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신체의 어느 부위가 피로해지는 줄을 모르기가 일쑤다. 우선 팔을 흔들어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어쩐지 짜증이 밸을 뒤틀면서 목구멍으로 퍼어런 쓸개물을 퍼 올렸다.

손길이 거칠어졌다. 콧등만이 아니었다. 콧구멍이고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쑤시고 휘저었다. 그래도 그는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만 껌벅거렸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탄타무리 했다.

왕초는 자신이 한심하도록 초라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듬직한 두꺼비 앞에서 앵앵거리는 파리처럼 비감해지는 것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그 초라함이 자존심의 유리바닥에 자금자금 검은 거미줄을 그었다. 그 벌어진 낌새로 터져 나온 용암처럼 폐부에 개펄이 버그럭거렸다.

도망 안 가? 이거 맞짱 뜨자는 거야, 뭐야? 배 째라 이거지. 감히 황제에게 도전을 해?’

바랭이를 횃불인 양 쳐들었다. 왕초의 머리꼭대기 위로 솟아오른 바랭이에게 개구리들의 눈은 모두 꿰이고 말았다. 난생 처음 보는 황금지팡이었다. 그것이 지도자에게만 부여된 왕홀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겨레와 나라를 구할 때 사용하게 되어있다는 것 외는 그게 무엇을 하는 건지는 나무도 몰랐다. 역대의 어떤 지도자도 그걸 저렇게 높이 치켜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휘황하게 번쩍이는 지팡이를 보면서 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나? 왜 저러나?’ 다들 겁에 질렸다. 왕초의 눈에는 음산한 살기가 번개치고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을 흉내 내며 둠벙을 내려다 본 왕초는 입귀가 단박에 귓불에 달라붙었다. 세상 개구리들이 모두 겁을 먹고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얼마나 통쾌한 권력인가? 이성이 안개에 뭉개졌다. 지도자의 기본 요건이 이성에 의한 합리화 판단이라는 헌법을 망각하였다.

수험생은 답을 잊으면 빵점을 받고 바보취급을 당하지만 지도자가 아닌 왕초는 다르다. 필요에 따라서는 잊어버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착각을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위장하는 것을 두뇌로 삼는다. 그게 왕초가 귄위를 합리화 하는 방법이다.

왕초는 손에 힘을 주며 속으로 외쳤다. ‘황제가 그냥 있는 줄 아나. 나에게 맞서는 자는 가만 두지 않는다.’ 높이 든 바랭이로 그 오만한 놈의 숨골을 내리쳤다. 왕답게 있는 증오를 다하였다.

. 그가 죽었다. 건방진 녀석이 사지를 쭈욱 뻗으며 배를 뒤집어 보였다. 하늘이 그의 하얀 배를 내려다 보았다. 참 깨끗한 배였다.

그 하얀 배에 왕초는 지라가 찔렸다. 불킨 간이 어깨 숨을 쉬면서 겁결에 두덜거렸다. ‘, 이거 내숭 떠는 거 봐. 바랭이에 맞고 죽는 놈이 어딨어.’

개구리들은 그렇잖아도 큰 눈이 갑자기 그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하는 바람에 콧잔등이 뭉개져 물속에다 대가리를 곤두박아야 했다. ‘우째 이런 일이!’ 시절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명을 이렇게나 허망하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거짓말 같았다.

왕초의 머리는 고등고시 시험장에서도 발휘한 커닝실력을 발사했다. 순발력이야말로 불가사의한 결과를 낳지 않는가. 죽은 것은 죽은 것일 뿐, 까짓 개구리 한 미리 죽은 걸 문제 삼아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그건 황제의 고유한 권리야. 누가 그걸 논해!

뒷골목을 빠져 다니던 일개 미꾸라지가, 빌붙기 아니면 죽어버리는 상책으로 승냥이같이 뼈가 굵어온 왕초였다. 머리통에 먹물이 많이 든 것들은 더 걱정할 게 없었다. 고함 한번 지르고 눈 한번 부라리면 그만이다. 권력 앞에서 주눅들어버리는, 의리 없는 주둥이들의 속성을 익히 간파하고 있었다. ‘말짱은 아무나 하나. 그것 뒀다가 어디 쓰게배꼽이 뻐기는 통에 왕초는 똥배가 불끈하였다.

녀석 심장마비를 일으켰구먼.”

아무렇지도 않게 왕초는 혼자 중얼거렸다. 부검하신 고명한 의사님께서도 놈현스럽게 진단을 내렸다.

직접 사인은 심장마비다. 세상 일이란 매우 공교로운 것이다.”

갈비씨 방송인들이 소설을 쓰고, 그걸 극화까지 해서 나팔을 심장마비 나게 불며 전국공연을 행군하였다.

그는 내숭이란 말을 몰랐다. 순진한 자가 어찌 내숭을 떨겠는가. 순수한 자는 술수도 내숭도 어떻게 하는 건지 그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라야 잘 먹는다지 않는가. 그는 왕초가 휘두르는 그런 술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없는 죄로 죽었다.

하나 둘, 덩치 크다고 깨골대던 개구리들이 주검 곁으로 모여 들었다. 안됐다. 하는 눈빛을 잠깐씩 흘리고는 곧 흩어졌다. 자신이 그 철퇴를 얻어맞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바랭이 풀 한 줄기를 왕홀로 휘두르는 왕초의 만용을 외면하면서.

그날부터 그 둠벙엔 궁시렁 병이 돌았다. 바람이 쑥대머리외듯이 물 가 수초들이 어깨를 뒤틀며 개구리들의 귀가 미어지도록 입을 비죽비죽 궁시렁대는 것이었다.

심장마비는 고옹~교로운 거여.”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 > 현대수필3' 카테고리의 다른 글

39. 꽃 춤  (0) 2022.01.23
38. 깨어 있지 않으리  (0) 2022.01.23
36. 구름카페  (0) 2022.01.23
35. 골목길  (0) 2022.01.23
34. 검댕이  (0) 202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