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84. 환상의 새

by 자한형 2022. 1. 27.
728x90

환상의 새 박경리

작년 여름, 그 새를 본 것은 세 번이었다. 금년에는 아마 그 새를 보지 못할 것이다.

처음 이사를 했을 때 쓰레기장이 되어 있던 곳이 이 집에서는 제일 아늑한 장소임을 깨달은 나는 나지막한 축대를 쌓고 잔디를 심었다.

둥그스름한 비탈은 계단식으로 돌을 쌓아서 잔디밭은 마치 야외무대처럼 해서 장작불 피워 놓고 탈춤을 추었으면 좋겠다고들 하였다. 인가하고도 먼 곳이어서 나는 곧잘 코피 잔을 들고 나와 책을 읽기도 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는데 바로 옆에 흙과 자갈에 묻혀 있는 것이 거대한 바위인 것을 발견했다. 흙을 걷어내었다. 바위 밑동도 파 내려서 바위의 본 모습을 드러나게 했더니 비가 오면 물이 흘러내려 바위 밑동 웅덩이에 괴는 것이었다.

날이 쾌청해지면 흙탕물은 맑아져서 허리를 적시는 바위의 풍치도 볼만하거니와 개구리며 올챙이, 여러 가지 물에 사는 것들이 그곳에 거처를 정하여 손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웃에서 얻은 연꽃을 심었더니 여름 내내 꽃이 피었다.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는 해뜨기 전 사방이 옥색 빛깔로 열려가는 무렵이 아닌가 싶다. 시골 아침은 더욱 그렇고 나무가 많은 곳일수록 폐부에 스며드는 찬 공기는 생명수 같이 싱그럽다. 여름 한철 이슬을 밟고 아침이면 먼저 찾아 가는 곳은 물 괸 웅덩이였다. 오늘도 연꽃이 피었을까 하고. 그곳에서 나는 그 새를 세 번 보았다. 모양은 물오리 같았지만 훨씬 작았고 몸매도 가늘었다.

회색과 청색이던지, 적색이던지, 그런 빛깔이 깃털 속에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무심결에 다가갔다가 꿈결처럼 날아가는 새, 뇌리에 남은 형체나 빛깔은 사실 명료하지가 않다. 환상의 새....

날이 가물면 물이 빠져버리는 웅덩이에 연꽃이 피어 있다는 것은 늘 불안하였다. 물을 대주기는 하지만 겨울이면 얼어 죽을 것이란 근심에서 제대로 된 연못을 만들리라.

그러나 생각뿐 공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겨울이 왔고 연꽃도 단념을 해버렸다. 날이 풀리자 아이들의 물놀이터를 만든 뒤 바위 밑의 웅덩이를 파 보았다. 놀랍게도 연에는 빨간 속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살아 있었구나! 아무튼 금년에는 물이 빠지지 않는 연못을 만들어야겠다. 생각하고 연꽃을 파서 큰 돌절구에 옮겨 놓고 물을 주는데 연꽃이 다시 그 웅덩이로 돌아가지 않는 한 그 새는 볼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새는 연꽃을 찾아왔는지, 아니면 웅덩이 속의 물벌레를 먹으려고 왔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환상의 새, 또 하나의 환상의 새가 있다. 십여 년 전 정릉집 뒷산에서 데려왔었던 꾀꼬리의 새끼다.

그 신기한 체험을 <土地>에도 썼지만 태풍이 지나간 뒤의 일이었다. 나는 그 소리가 환청인 것만 같았다. 일정한 곳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소리는 마음을 찢는 것만 같았다. 비가 내리는데 우산을 받쳐 들고 딸애랑 함께 소리를 따라 뒷산으로 올라가 보았다. 나뭇가지에 흡사 넝마와도 같은 꾀꼬리의 새끼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우리가 가까이 갔을 때 그는 깃털을 세우며 사나운 몸짓을 했다.

그러나 아직 날지 못하고 기진한 새는 쉽게 잡혔다. 집으로 내려온 우리는 상자를 마련하여 횃대를 만들어 새를 올려 주었다. 처음에는 좁쌀도 깨도 입을 굳게 다문 채 거부했다. 그러나 어느 서슬엔가 먹이는 입 속으로 들어갔고 굶주렸던 새는 미친 듯 모이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비가 개고 해가 난 오후 기성을 지르며 어미 새가 뒷산에 나타났다.

꾀꼬리는 호호호 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며 울지만 때론 왜가리처럼,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는 듯 괴성을 지를 때도 있다. 우리는 새끼를 안고 나갔다. 본시 있던 나뭇가지에 새끼를 올려놓고 우리는 숨어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지렁이 한 마리를 물고 온 꾀꼬리는 주변을 선회할 뿐 결국 새끼를 둔 채 사라지고 말았다. 새끼는 마음을 찢는 듯한 그 울음을 계속하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가 다가갔을 때 새끼는 내 손등으로 옮겨 앉았으며 , 분명 그것은 환희라 할 밖에 없는 몸짓, 울음소리였다. 그 나뭇가지는 새끼 새에게 있어서 지옥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잔디밭에 앉아서 새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새는 나를 놓치기라도 할 것 같이 무릎에 올라앉는 것이었다. 내려주면 올라오고, 내려주면 올라오고.

우리는 지렁이를 잡아 먹이고 밤이면 촛불을 켜들고 풀숲을 헤쳐 여치도 잡아다 새에게 먹였다. 넝마 같기만 했던 새는 하루가 다르게 윤이 났고 깃털의 빛깔도 선명해졌다. 밖에 나갔다 오면 횃대 위에서 이리저리 뛰며 기뻐 어쩔 줄 모르던 새, 언어의 가소로움을 나는 그때 느꼈다. 전신으로 표현하는 기쁨, 그것은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밤에 원고를 쓸 때는 새가 있는 상자에 보자기를 덮어 주었다. 밤은 소리 없이 흘러가고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는 [나리야] 하고 불러본다. [삐욱!] 반드시 새는 대답을 하였다. [나리야] [삐욱!] 결국 나리는 다 크지 못하고 죽었다. 새는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먹는다는 말을 믿고 과식을 시켰던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던 새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횃대에서 떨어져 죽어 있었다. 가뿐하였던 몸무게, 노란빛이 아지랑이만 같았던 형체, 그 후 나는 오랫동안 방안에서 우는 구돌개미 소리에 놀라 일어나곤 했었다. 꿈결에 나리 목소리만 같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갔을 때다, 밭둑을 뛰어 가는 노루새끼를 보았다. 나는 회초리로 후려갈겨주고 싶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놈아! 빨리 달아나라! 노루새끼는 사라졌지만 그 철없던 생명은 오랫동안 내게 아픔을 주었다.

생명은 아픔이요, 생명은 사랑이다. 아픔과 사랑이 사라져가는 세상, 나는 인간에 대하여 혐오를 느낄 때가 많다. 아픔과 사랑이 없을 때 생명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생존(生存)도 확약(確約)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거대한 기계문명(機械文明), 그것으로 인한 발전과 더불어 보다 사악(邪惡)하고 전투적이며 미래를 망각한 오늘의 물질적 충족에 급급한 인간상(人間像) 을 본다는 것은 하루에도 수차례 절망에 사로잡힌다. 생명은 개성(個性)이다. 생명에 동일한 것은 없다. 다만 동일한 것이 있다면 생명은 생명을 기르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