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꽃 - 서정주
머리에 석남(石南)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나 죽는 바람에
네가 놀래 깨어나면
너 깨는 서슬에
나도 깨어나서
한 서른 해만 더 살아 볼꺼나
죽어서도 살아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서른 해만 더 한번 살아 볼꺼나
내 글 써놓은 공책을 뒤적거려 보니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라 제목한 이 시(詩)는 1969년 7월 15일 새벽 한 시에 쓴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관악산 밑으로 이사 오기 바로 한 해 전 일인데, 그 때의 공덕동 집에도 나무와 풀섶이 꽤나 짙어 모기가 많아서 그 때문에 짧은 여름밤을, 열어 놓은 창 사이로 날아드는 모기 떼와 싸움깨나 하고 앉았다가 쓴 것인 듯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은 내 육체의 꼴이지, 마음만은 그래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밤중 쯤은 할 수 없이 그 영생(永生)이라는 걸 또 생각해야 견딜 마련이어서 물론 이런 걸 끄적거리고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영생이란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마치 가을 으시시한 때에 흩옷만 겨우 한 벌 입은 푼수도 채 안 되는 내 영생의 자각과 감각 그것에 그래도 그 속팬츠 하나 몫은 너끈히 되게 나를 입힌 건 저 《대동운옥(大同韻玉)》이란 책 속의 것으로 전해져 오는 신라(新羅) 때의 석남꽃이라는 꽃 얘기다.
그래 으시시해 오는 싸늘한 이 가을날에 이런 흩옷, 이런 속팬츠도 혹 아직 못 입은 사람들도 있을까 하여 먼저 그 얘기를 옮기기로 하니 싫지 않거든 잘 목욕하고 이거라도 하나 받아 입으시고 오싹한 신선(神仙)이라도 하나 되기 바란다.
신라 사람 최항(崔伉)의 자(字)는 석남(石南)인데,
애인이 있었지만 그의 부모가 금해서 만나지 못하다가 몇 달 만에 그만 덜컥 죽어 버렸다.
그런데 죽은 지 여드레 만의 한밤중에 항은 문득 그의 애인 집에 나타나서,
그 여자는 그가 죽은 뒤인 줄도 모르고 좋아 어쩔 줄을 모르며 맞이해 들였다.
항은 그 머리에 석남꽃 가지를 꽂고 있었는데, 그걸 나누어서 그 여자한테 주며,
"내 아버지 어머니가 너하고 같이 살아도 좋다고 해서 왔다."고 했다.
그래 둘이는 항의 집까지 가서, 항은 잠긴 대문을 보고 혼자 먼저 담장을 넘어 들어갔는데 밤이 새어 아침이 되어도 웬일인지 영 다시 나오질 않았다.
아침에 항의 집 하인이 밖에 나왔다가 홀로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왜 오셨소?"하고 물어,
여자가 항과 같이 왔던 이야기를 하니, 하인은,
"그분 세상 떠난 건 벌써 여드레나 되었는데요. 오늘이 묻을 날입니다. 같이 오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했다.
여자는 항이 나누어 주어 자기 머리에도 꽂고 있었던 석남꽃 가지를 가리키며,
"그 분도 이걸 머리에 틀림없이 꽂고 있을 것이다."고 했다.
그래, 그런가 안 그런가 어디 보자고 항의 집 식구들이 두루 알고 따지게 되어,
죽은 항이 담긴 널을 열고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항의 시체의 머리에는 석남꽃 가지가 꽂혀 있었고,
옷도 금시 밤 풀섶을 거쳐 온 듯 촉촉히 젖은 그대로였고, 벗겼던 신발도 다시 차려 신고 있었다.
여자는 항이 죽었던 걸 알고 울다가 너무 기가 막혀 금시 숨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 기막혀 숨 넘어가려는 바람에 항은 깜짝 놀라 되살아났다.
그래 또 서른 핸가를 같이 살아 늙다가 갔다.
이것이 《대동운옥》에 담긴 그 이야기의 전부를 내가 재주를 몽땅 다해 번역해 옮기는 것이니, 이걸 저 아돌프 히틀러의 비단 팬츠보담야 한결 더 좋은 걸로 간주해서 입건 안 입건 그건 이걸 읽는 쪽의 자유겠지만, 하여간 별 가진 것이 변변치 못한 내게는 이걸 읽은 뒤부턴 이게 몸에 찰싹 달라붙은 대견한 것이 되어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래 나는 이것을 읽은 뒤 10여 년 동안 이야기 속의 그 석남꽃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올 봄에야 경상도 영주(榮州)에서도 여러 날 걸어 들어가야 하는 태백산맥의 어떤 골짜기에서 나온 쬐그만 묘목 한 그루를 내 뜰에 옮기어 심고, 이것이 자라 내 키만큼 될 날을 기다리며 신선반(神仙班)의 영생의 마음 속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대동운옥》이나 내 1969년 7월 어느 첫 새벽의 시에는 한 30년만 더 살기로 겸손하게 에누리해 놓았지만 사실은 아무래도 영원히 살아야만 원통치 않을 이 석남꽃 이야기의 싱그라운 사랑의 기운을…….
석남꽃은 석남화[石楠花]라고도 불리는 꽃인데,
원래 이름은 노란만병초이다.
신라 시대의 전설처럼 죽은 이도 살릴 수 있다는 꽃이다보니,
만병통치약 마냥 알려져 왔다.
노란만병초는 진달래과의 식물로,
백두산이나 북부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고 있는 우리 나라 야생화이다.
홍만병초는 울릉도에서 자라는 꽃들이다.
서정주 시인은 친일파 문인으로 해방 이후 고초를 겪은 이후에도,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권력자에 충성하는 시들을 헌사해 왔다.
아직까지도 그는 과거 역사의 청산과 심판,
시인으로서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화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느 시인은 미당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미당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로부터 모든 걸 물려받았지만,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불행한 아버지.."
서슬 퍼런 권력의 피바람 앞에서
나약한 시인은 평생을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아니 적극적으로 권력에 아부하면서 그 굴종의 단 열매를 먹으며
현실을 외면한 사랑과 전설의 이야기 세계로 도망쳐 갔지만,
그가 남긴 언어들의 아름다움까지 부정하기에는
우리 문학의 지평이 너무나도 척박할 따름이다.
서정주 시인은 부부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아내와 평생 동고동락하다가,
아내가 먼저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그 다음 해에 시인도 시름 시름 앓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만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그들은 다시 저승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을까..
석남꽃 머리에 꽂고 서른 해, 아니 영생을 같이 바라보며 다시 사랑하고 있을까..
'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 > 현대수필3'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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